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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6

        교양관 지하실에서 숨어 지낸 지 거의 한 달.

       

        로즈마리에게 죽을 뻔한 이후로 버멜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자리하게 되었다.

       

        ‘이 세상은 더는 게임이 아니며, 게임의 지식으로만은 날로 먹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사실 예전부터 알고는 있었다. 머리로는 뭘 모를까. 그저 그동안 외면해왔을 뿐이다.

       

        이 세상이 게임이 아닌 현실이라는 사실은 버멜에게 있어 지독한 악몽이었다. 

       

        지구에서의 삶이 지긋지긋했다. 그곳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보상도 확실하지 않은데다가 세상은 험난하기만 하다. 전쟁의 위협은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그 대신 사회 전반에 내려앉은 무력감이 존재했다.

       

        생기를 잃은 잿빛의 세상. 버멜은 그런 불확실한 세상이 싫었다. 그래서 게임으로 도망쳤는지도 모른다.

       

        <다키스트 아카데미아>가 좋았다. 공략대로만 하면 어느 정도는 풀렸으니까. 설령 답이 안 보이더라도 수십 수백 번 리셋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이걸 하고 있으면, 이 게임보다 더 어두운 현실에서 눈을 돌릴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이 세상에 처음 떨어졌을 때 버멜은 뛸 듯이 기뻤다.

       

        드디어 자신이 아는 지식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오판이었지.’

       

        나태함에 찌든 자신을 여신이 비웃기라도 한 걸까?

       

        여신은 자기 말고도 빙의자를 한 명 더 보냈다. 그 빙의자는 여신이 올린 논문을 읽다가 이 세계로 끌려왔다고 한다. 정말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로.

       

        에테르는 살아생전 게임을 해본 적 없다고 말했다. 그녀는 <다키스트 아카데미아>가 뭔지도 몰랐다. 난이도 이슈는 있었어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게임이었는데.

       

        당연히 에테르에게는 게임 지식이 없었다. 따라서 지식 치트도 없었다. 대신 에테르는 또 다른 지식이 있었다. 그 지식은 분명 지구에서도 도움이 되는 지식이었다.

       

        그랬기에 에테르는… 그는 지구로 돌아가길 바랐다. 에테르는 여기 온 이후로 잃어버린 것이 많았다. 지구에 두고 온 것도 많았다. 그로서는 이곳에 남는 것보다 저쪽 세상으로 돌아가는 편이 이득이었다. 

       

        그런 에테르가 자신에게 해줬던 말을, 버멜은 곱씹었다.

       

        -여길 게임처럼 여기면 안 돼. 어쨌거나 현실이니까, 로즈마리가 어떻게 움직일지는 아무도 몰라.

       

        “그래, 그랬지.”

       

        이곳은 현실이다.

       

        여태 익혔던 게임 시나리오의 규칙을 깨부수고 움직여야 한다. 한층 복잡한 사고와 예측이 요구되는 시점이었다.

       

        버멜은 미래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에테르가 아니다. 학식도 없고, 이렇다 할 특수능력도 없다. 오로지 미래 지식 하나만으로 멸망을 막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생각하자.

       

        어떻게 하면 이 답답한 지하실 생활을 끝낼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주도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열세인 상황에서도 당당하게 다닐 수 있을지.

       

        “…쓰읍.”

       

        쉽게 생각이 안 난다.

          

        그래도 분명 묘책이 있을 것이다. 자신만이 떠올릴 수 있는 좋은 계획이…….

       

        “아, 맞다….”

       

        어제 이사장 일행이 이곳에 와서 늘어놓았던 푸념이 있었다.

       

        -플레어 스크롤 사용이 막혔더군요. 블랜튼이 눈치를 챈 모양입니다.

        -이래서야 소형화도 못 하고, 폐하를 구해낼 수도 없습니다.

        -이제 어찌하면 좋겠소?

       

        버멜은 펜과 노트를 꺼냈다. 플레어 스크롤이 금지되었다는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아는 바를 전부 노트에 적어내렸다. 

       

        [에테르가 이사장 일행과 연합하여 소형 플레어 제작 계획을 발표]

        [이곳에 참석한 뫼스바이어는 로즈마리가 고용한 하수인]

        [→ 따라서 로즈마리가 플레어 스크롤을 금지하는 건 예정된 수순]

        [→ 내가 여기 있다는 걸 로즈마리도 앎]

       

        [로즈마리가 플레어 스크롤을 금지함]

        [→ 에테르가 어떻게든 반응을 보일 것]

        [→ 황제 머리만 안 깼으면]

       

        “좋아. 이 정도면 되겠지.”

       

        차례대로 정리하니까 머리가 트인다. 더불어 무엇을 해야할지에 대해서도 감을 잡았다.

         

        “해 보자.”

       

        버멜을 몇 시간에 걸쳐 새로운 공략법을 생각해냈다.

       

        로즈마리의 스코프를 피해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는 계획이었다.

       

       

        **

       

       

        로즈마리는 스코프를 잠시 꺼둔 채 티타임을 가졌다. 그녀의 얼굴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정무를 보고 온 블랜튼 공작이 방문을 닫으며 들어왔다. 블랜튼은 아버지라는 형식상의 역할에 맞추어 로즈마리를 보자마자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딸, 뭐 하고 있었니?”

       

        꿀을 바른 듯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로즈마리의 안색은 티끌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상관의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다. 무안해진 블랜튼은 말투를 원래대로 돌렸다.

       

        “…어제 2석과 진중한 대화를 나누셨다면서요. 한데 4석께선 왜 그리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까?” 

        “엘프놈이 안 보인단 말이지. 그것도 한 달 내내.”

        “버멜 호르데 말씀이시군요. 자퇴한 엘프는 왜 찾으십니까?” 

       

        로즈마리는 홍차 티백을 위아래로 흔들며 질문에 답했다. 찻잔 위로 잔물결이 일어난다. 

       

        “큰 언니는 내가 플레어 스크롤을 금지했다는 걸 알 거야. 그런데도 항의를 안 했지. 이게 무얼 의미하는지 알아?”

        “기술고문께서는 저흴 적대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로군요.”

        “그래. 언니 건으로는 한시름 놓은 셈이지. 이젠 그 엘프놈을 집중 마킹해야 해.”

       

        그 엘프는 로즈마리와 블랜튼이 마수라는 걸 알고 있다. 

       

        심지어 적극적으로 행동해서 차후 계획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후환은 되도록이면 지금 없애두는 것이 좋다는 로즈마리의 판단이다.

       

        “하이고야, 진짜 어딜 간 거려나.”

        “제 생각엔 이미 아카데미를 떠난 것 같습니다. 저번에 있을 만한 곳은 다 찾아보셨잖아요?”

        “그래, 보통이라면 여기서 단념했겠지.”   

       

        로즈마리는 바싹 마른 입을 홍차로 축였다.

       

        “단맛이 부족해.”

       

        향신료 통에서 베릴륨 결정을 꺼내 각설탕 대신 담근다. 홍차에 베릴륨을 넣고 티스푼으로 휘휘 저어내자 그나마 단내가 올라왔다.

       

        “잘 들어봐. 마왕군의 승리가 이 홍차처럼 달콤해지려면 우리를 씁쓸하게 만드는 요소를 제거해 버려야 해.”

        “그건 다들 아는 사실입니다.”

        “그래서야. 심어놓은 스파이한테서 때마침 연락이 왔거든?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그 엘프가 교양관 지하실에 있었던 모양이야.”

        “일주일 전이라…. 꽤 시간이 흘렀군요. 지금쯤 떠났을 가능성도 있겠습니다.”

       

        블랜튼의 말도 일리는 있다. 어디까지나 최악을 상정하고 한 발언일 뿐이다.

       

        “그 엘프가 내 계획을 계속 망치고 있어. 살려두면 나중에 더 큰 방해가 될 거야.”

        “그나저나 이상한 일입니다. 어떻게 우리 정체를 알고 있는 걸까요?”

        “나도 그걸 모르겠단 말이야.”

       

        로즈마리는 남은 홍차를 입안에 다 쏟아부었다. 이젠 외출할 시간이었다.

       

        “오늘 한 번 더 조사하고 올게. 이번에는 지하실을 완전히 엎어놓을 거야.”

       

        외투를 두르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블랜튼이 그녀를 배웅한다. 로즈마리는 인사를 한 귀로 흘려듣고는 교양관까지 단번에 주파했다.

       

        그녀의 스코프가 미치지 못하는 곳은 극히 드물다. 교양관 지하실 아니면 동아리 부실 정도가 전부였다. 그래서 그런 곳을 조사하려면 가녀린 몸을 직접 이끌고 가야 했다.

       

        “후흐, 버멜인지 캐러멜인지 당장 나오는 게 좋을 거야.” 

       

        달이 햇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인다. 로즈마리는 베테랑 도둑처럼 은밀한 손놀림으로 지하실 문을 열어젖혔다.

       

        -끼익

       

        “뭐야, 열려있잖아?”

       

        조금이라도 저항이 있을 줄 알았더니 예상보다 가볍게 열렸다.

       

        로즈마리는 김빠진 소리를 내며 안으로 진입했다. 이상하리만치 내부는 고요했다.

       

        “뭐야. 왜 아무도 없어?”

       

        분명 급습이었는데. 

       

        찾는 엘프의 모습은 물론이요, 인기척 하나 없이 휑하다. 어둑어둑한 공간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로즈마리는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주위 탐색을 계속 진행했다.

       

        “괜찮아. 어차피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고 갔으니까……. 어…?”

       

        산산조각 난 여섯 대의 감시 카메라를 본 로즈마리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렌즈고 필름이고 죄다 훼손해 놓은 상태였다. 이정도 손상이면 복원도 못 한다.

       

        “이, 이 새끼가….”

       

        틀림없이 그 엘프가 한 짓이다. 로즈마리는 이를 갈며 카메라 파편을 주웠다.

       

        그때였다.

       

        -콰앙!

       

        요란한 소리에 로즈마리는 순간 뒤를 돌아보았다. 들어왔던 문이 어느새 닫혀있었다.

       

        “뭐, 뭐야.”

       

        줍고 있던 렌즈 파편을 도로 내팽개치고는 서둘러 문으로 달려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을 당기자 철컥거리는 소리가 났다. 바깥에서 잠긴 것이다.

       

        “에, 엘프 녀석…. 장난을 쳐도 꼭 조잡스러운 걸로…. 이딴 건 뜯어버리면 그만이야…!”

       

        손에 힘을 줘서 철문을 당긴다. 그러나 문은 꿈쩍도 하질 않았다.

       

        “어라…?”

       

        이상한 일이었다. 내 완력으로 이걸 못 뜯어낸다고…?

       

        “어라…. 어라…. 어라아아…?” 

       

        로즈마리의 입술이 가늘게 떨린다.

       

        숨을 몰아쉬며 옷소매로 이마를 연신 찍어냈다. 그럼에도 흐르기 시작한 식은땀을 전부 닦아내지는 못했다.

       

        “이, 이럴 리가 없는데.”

       

        좁은 공간에 갇혀버렸다.

       

        정신력이 점점 깎여나가는 듯했다. 안절부절해진 로즈마리는 문을 계속해서 잡아당겼다. 저번과는 달리 열릴 기미조차 안 보였다. 

       

        안 되겠다 싶어서 서둘러 마력초를 물었다. 로즈마리는 스태프를 꺼내 참격을 날렸다.

       

        -터엉! 텅!

       

        소용없다. 금강석처럼 단단해서 현을 사용한 공격도 안 먹힌다.

       

        “마법으로 강화해 놓은 건가…? 내가 열지 못할 정도로…?”

       

        인간 시절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자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산소가 거의 필요 없는 그녀였지만, 한때 인간이었던 몸이 그녀에게 신선한 공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럴 순 없다. 이래선 안 된다.

       

        로즈마리는 혼신의 힘을 다해 철문을 난타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대각선에서 대각선으로. 무수히 많은 베기와 찌르기를 사용했지만, 문은 조금씩 휘어지기만 할 뿐, 여전히 견고했다.

       

        “이, 이, 이…….”

         

        급기야 로즈마리는 색소로 바꿔놓은 푸른 눈조차 유지하지 못한 채 그대로 고함을 내질렀다.

       

        “이 개새끼가아아아아아─!!! 내가 밀실 싫어하는 건 어떻게 쳐 알고 있는 거야아아!!!”

       

        로즈마리는 현을 고쳐잡고 전신을 뒤틀었다. 회전력을 이용하여 문을 최대한의 세기로 두들겼다.

       

        -쾅쾅쾅!

       

        한층 강력해진 공격에 강철판으로 된 문이 점차 일그러진다. 그래도 어지간히 마법을 떡칠한 모양인지 열릴 듯하면서도 열리질 않았다. 로즈마리는 목이 바싹 타들어 가는 것을 느꼈다.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야!!!” 

       

        음색을 높이자 기계음 섞인 폭음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온다. 장전이 덜 된 물총을 쏘는 것처럼 울컥거리는 억양이었다.

       

        빌어먹을 폐소공포증 때문에 사고가 제대로 안 이루어지고 있다. 로즈마리는 마력초를 하나 더 태워 전격마법을 사용했다.

       

        전기도 소용없었다. 방 전체가 도체라서 마법을 그대로 흡수해버린다.

       

        “짐승만도 못한 엘프 주제에!! 내 눈에 띄기만 해 봐!! 사지를 토막 내서 시멘트에 담가버릴 줄 알아아아!!!” 

       

        문을 정신없이 후려치다 보니 팔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간다.

       

        지난날의 선택이 후회되기 시작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연회장에서 확실히 죽여버리는 거였는데.

       

        “그래, 위령…! 위령을 사용하면 나갈 수 있을 거야….”

       

        남은 마력초는 하나뿐이었다. 로즈마리는 마력이 다 떨어지기 전에 바이올린을 소환했다.

       

        떨리는 손으로 연주를 진행한다. 자꾸만 음정이 삑사리나서 마도를 완성하기 어려웠다. 현을 잡은 손이 다한증이라도 걸린 것처럼 축축해져서 자꾸만 미끄러졌다.

       

        “제발, 제발….”

       

        눈물이 찔끔 나오려고 한다.

       

        이 모습을 다른 구천지대계가 보면 뭐라고 할까. 틀림없이 술안주가 되고 말 것이다.

       

        절대로 그래선 안 된다. 로즈마리는 부끄러움을 자양분 삼아 최대한 정신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생각처럼 쉽게 극복할 수 있었다면 트라우마라고 불릴 일도 없었겠지.

       

        한계에 몰리기 직전이었다. 로즈마리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덜컥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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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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