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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6

       화륵.

       

       몸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오르는 작은 열기. 이젠 익숙해진 권능이 새겨지는 감각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지만.

       

       돌연 검게 물든 시야. 분명 리디아의 등에 업혀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땅에 발을 딛고 있었다.

       

       아니, 이걸 땅을 디뎠다고 해야 하나. 분명 나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발을 딛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이를 땅이라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고.

       

       단순히 바닥이라는 의미에서의 땅이 아니다. 단단한 바위와 부드러운 흙. 작은 자갈이 굴러다니며, 그 사이로는 식물이 자라나거나 벌레가 기어다니는 그 땅 말이다.

       

       무언가 보이는 것도, 만져지는 것도 아니건만 그저 땅이라고 인식하게 되는 기이한 감각.

       

       이를 자각하는 순간 감각이 확장되면 자그마한 깨달음이 들어찬다.

       

       주변을 둘러싼 모든 어둠 또한 ‘땅’ 이라는 것을.

       

       “새, 생매장이야!!”

       

       괜시리 호들갑을 떨어보았으나, 그럼에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여전히 이곳은 어둡고, 포근했으니까.

       

       …포근?

       

       갑자기 추가된 감각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돌연 검게 물든 시야에 불이 들어온다.

       

       머리에 뿔이 달린 근육질의 미소년. 그리고 이를 인자하게 바라보는 산맥처럼 거대한 여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것은 아스테리오스와 대지의 여신이라고.

       

       아스테리오스는 자신의 여정을 떠나고, 대지의 여신은 이를 조용히 지켜본다. 그리고 나는 그 둘을 위에서 내려다본다.

       

       액자식 구성의 액자식 구성 같은 조금 어지러운 시야. 다만, 그것이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눈앞에 비친 소년 아스테리오스의 이야기는 빠르게 흘러갔다.

       

       소년은 어려서부터 비범했고, 나이를 먹고 청년이 되자 주변 일대에 그를 감당할 존재가 없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평범한 필멸자들 사이에서의 이야기.

       

       그의 힘은 신과 그들의 군대를 막아 세울 정도는 아니었다.

       

       결국 아스테리오스와 그의 씨족은 끝없는 전쟁을 피해 대륙을 횡단하기 시작한다.

       

       동쪽으로. 동쪽으로. 계속해서 동쪽으로.

       

       판 대륙에서 가장 높게 솟은 산맥과, 가장 넓은 평야가 존재하는 대지의 신의 권역을 향해서.

       

       그 뒤에는 역사에 남은 대로 익히 아는 내용들이었다.

       

       소 수인들은 간신히 대지의 신이 기거하는 권역에 도착했다. 영광스러운 시절의 산맥을 잃었으나, 너른 평야와 그 밑의 땅굴만큼은 온전했으니.

       

       대지의 신과, 그녀의 신도들은 기꺼이 전쟁을 거부하는 소 수인들을 받아주었다.

       

       하지만 멸신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아스테리오스는 자처해서 땅굴의 수호자가 되었으니.

       

       이전부터 그의 고행을 조용히 지켜보던 대지의 여신은 기꺼이 자신의 힘을 나눠 주었다.

       

       지금은 무너졌으나, 언제든 다시 세울 수 있도록 빼둔 산맥의 씨앗을 아스테리오스에게 심은 것이다.

       

       덕분에 그는 작은 태산이나 다름없는 힘을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발 구름 한 번에 땅이 갈라지고, 산의 무게마저도 받쳐 드는 근력은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부쉈으며, 그 몸뚱이는 바위와도 같아 부서지지도 지치지도 않았다.

       

       “진짜 괴물인데…….”

       

       내가 상대한 미노타우로스 따위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압도적인 존재.

       

       하지만 그는 영원한 존재가 아니었다.

       

       필멸의 육신은 점차 노쇠해져갔고, 이제는 죽음이 머지않은 수준에 다다른다.

       

       대지의 여신은 여전히 아스테리오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아스테리오스로부터 시선을 돌리지 않는 그녀였으나, 가끔 어쩔 수 없이 다른 것에 집중해야 하는 때가 있었으니.

       

       바로 다른 신들과의 전투였다.

       

       불타는 광륜을 짊어진 자. 태양의 신으로 보이는 이가 불의 신을 삼키고, 물의 신을 증발시킨 것을 넘어 이제는 대지의 신마저 노린다.

       

       “이러니까 세상이 망했지.”

       

       어이가 없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전투였다.

       

       눈앞에서 핵폭발이 초 단위로 일어나고, 원근감이 이상해질 정도로 거대한 거인은 이를 묵묵히 받아내며 반격까지 시도한다.

       

       머리로만 알고 있던 것을 이렇게 눈으로 보게 되니 오히려 의문이 들 정도였다.

       

       “이만한 전투에서 어떻게 필멸자들이 살아남은 거지?”

       

       판 대륙이 원형이라도 남은 게 신기할 정도인데, 그 안에서 기어다니는 사람들이 아직도 살아있다고?

       

       그런 의문이 들 정도로 강력한 힘과 힘의 충돌.

       

       이러한 의문에 대한 대답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지형이 바뀔 정도로 격렬한 전투. 그 와중에도 대지의 신과 태양의 신은 각자의 신도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렇다. 오로지 자신이 모시는 신의 헌신. 그것만이 필멸자들이 살아남을 길이다.

       

       만약 자신의 신이 조금 더 이기적이라면, 상대의 신이 조금 더 무자비했다면. 혹은…결국 어느 한쪽이 패배해 신도들이 무방비해진다면.

       

       그때는 그들의 9할 이상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그만큼 어마어마한, 말 그대로 신화의 전투였으나 모든 것을 신에게만 맡겨둘 수는 없는 법 아닌가.

       

       신의 힘은 타고나는 것도 있지만, 신앙을 통해 쌓는 것도 있다. 즉, 상대의 신도를 전부 처죽이면 신의 힘도 그만큼 약해진다.

       

       이 간단한 논리를 위해 필멸자들끼리도 전투가 발생한다.

       

       태양의 신을 따라 하듯, 종족을 불문하고 머리 뒤에 금으로 된 륜을 달고 다니는 이들이 무기나 신체 일부에서 화염을 뿜어내며 달려든다.

       

       그리고 이에 맞서는 것은 에너지만 충분하다면 죽어도 금방 되살아나는 대지 정령의 군단.

       

       내가 상대한 타락한 노움 따위는 이 군단의 심부름꾼조차 되지 못했을 것이다.

       

       영상으로 보는 것이기에 정확한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대장급으로 보이는 정령은 일격 일격이 베니나 모르가나가 선보인 고위 마법과 맞먹는 위력이었다.

       

       그만한 위력을 평타로 날려대는 정신 나간 파워 인플레의 현장.

       

       다만, 전체적으로 대지의 정령 쪽의 열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모든 전투 인원을 꼴아박았는데, 이쪽에는 죽어도 부활할 수 있는 대지의 정령만 몰려온 셈 아닌가.

       

       결국 정령들이 죽고 부활하는 사이에 제법 많은 태양의 군세가 땅굴로 기어들어 갔다.

       

       물론 그들이 얼마나 많고, 얼마나 강하건 전부 함정에 당하거나 아스테리오스의 손에 분쇄 당했지만. 땅굴에서의 그는 아무리 늙었어도 무적이니까.

       

       지구에서 본 어떤 영화보다도 웅장한 전쟁 장면을 숨죽이며 지켜보던 순간. 돌연 보랏빛으로도 핏빛으로도 보이는 흉흉한 색의 파장이 전장을 덮친다.

       

       이에 직격당한 필멸자들은 약한 순서대로 점차 미쳐가며 변이하기 시작한다.

       

       “…광기인가.”

       

       일정 이상의 가호를 받았거나, 정신력이 뛰어난 몇몇을 제외한 전장의 모든 존재가 몬스터로 변이한다.

       

       정령은 타락하고, 사람은 보랏빛 피부와 일그러진 신체 말단을 가진 마족으로 화한다.

       

       이에 당황한 태양의 신이 자신의 군세를 수습하여 물러났고, 대지의 여신 또한 당황하면서도 타락한 정령을 다시 흙으로 되돌렸다.

       

       그렇게 어찌어찌 전투를 마무리 짓고 다시 땅굴로 시선을 돌리는 대지의 신. 그녀가 평소처럼 자신의 챔피언을 치하하고 오늘도 살아남았음을 축하하려는 순간.

       

       대지의 신은 보았다. 자신의 챔피언이 끔찍한 괴물이 되어 그와 그녀가 지키려던 모든 것을 파괴하는 모습을.

       

       우선 당시의 아스테리오스는 내가 아는 미노타우로스의 모습이 아니었다.

       

       대지의 신의 가장 강력한 가호를 고스란히 받으며 광기에 물들지 않았나.

       

       악마처럼 휘어진 뿔. 삭은 흙먼지가 섞인 숨결. 그 발걸음 한 번에 건물이 하나씩 무너지고, 사람은 얼마나 죽었는지 그 핏물이 발목까지 찰랑인다.

       

       기겁한 대지의 신이 황급히 아스테리오스의 몸에서 산맥의 씨앗을 뽑아내고, 생존자는 지상으로 퍼 올렸다.

       

       그렇게 통로인 미로만 남긴 채, 지하 도시에 봉인된 아스테리오스. 아니 미노타우로스.

       

       이렇게 자세히 보여줄 줄은 몰랐지만, 여기까지는 다 아는 이야기다. 대체 왜 이런 걸 또 보여주는…….

       

       “아.”

       

       세상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드높은 시야. 덕분에 그 어떤 역사서에도 적히지 않은 대지의 여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자신의 심장이 뜯겨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여인처럼.

       

       그제야 모든 것을 깨달았다. 내게 이 광경을 보여주는 것은 이미 죽은 대지의 신이 아니었다.

       

       그녀의 권능을 매개체 삼아, 멸신전쟁의 모든 것을 지켜보기만 했던 사랑의 여신이 내게 내리는 메시지였다.

       

       “…내게 뭘 원하는 거지?”

       

       명확히 사랑의 여신을 의식하며 내뱉은 한마디. 동시에 천 년 전의 과거는 사라지고, 어둠이라는 이름의 커튼 또한 걷히며 엔딩 크레딧 이후의 풍경이 펼쳐진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초라한 침대. 그 안에는 두 남녀가 잠이라도 자는 것처럼 평온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미노타우로스가 아닌 소년 시절 아스테리오스의 모습으로 돌아온 남자와, 그 품에 꼭 안겨 있는 작은 여인.

       

       누워있으면 산맥, 일어서면 구름 너머로 고개를 내밀 정도로 거대한 몸뚱이는 어디로 갔는지 평범한 여인보다도 왜소한 체형을 가지게 된 대지의 여신이었다.

       

       아스테리오스가 받은 종합 가호의 이름이 산맥의 씨앗이라고 했던가.

       

       어쩌면. 어쩌면 말이다. 대지의 여신은 아스테리오스가 산맥처럼 커다랗게 자라기를 바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과 대등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그리하여 신과 신도가 아닌 남자와 여자로서. 영원을 함께하는 반려가 될 수 있도록 말이다.

       

       기대와는 달리 아스테리오스는 조금 큰 필멸자가 되는 것에서 끝났고, 종국에는 미쳐버린 괴물이 되었지만.

       

       그래도 지금. 이렇게 둘은 딱 맞는 침대에 나란히 누워있다.

       

       대지의 여신이 죽음을 맞이하여 모든 힘을 잃고 쪼그라들었기에 가능한 일.

       

       허나 어찌 됐든, 마침내 둘의 눈높이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제는 대지의 여신은 아스테리오스가 다른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할 필요가 없다.

       

       아스테리오스 또한 대지의 여신을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렇게 주장하듯 둘은 마지막의 마지막에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연인 같은 둘의 모습을 눈에 담는 순간 그냥 알 수 있었다.

       

       미궁의 모든 것이 신들의 유해에 시공간이라는 불꽃을 비춰 만들어 낸 그림자에 불과하다면.

       

       눈앞의 둘은 그러한 불꽃 너머. 2층의 원전이 되는 ‘진짜’이리라.

       

       미궁의 시공간을 조정하는 사랑의 여신이 나를 무대장치의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왜?”

       

       처음에 품었던 의문을 다시 한번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돌연 연분홍색 빛이 내려와 대지의 여신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베일을 두른 새신부 같은 모습.

       

       “이게 못내 마음에 걸렸던 거냐.”

       

       사랑의 여신으로서 저 둘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리라.

       

       그렇다고 직접 움직이기엔 여력이 없으니 내게 부탁하는 건가.

       

       나는 사제도, 주례를 맡을 만큼 대단한 사람도 아니지만, 한 번 정도는 괜찮겠지.

       

       얼마 남지 않은 신성력을 손가락에 집중시키며 성호를 그었다.

       

       “우뚝 솟은 산맥처럼 변치 않는 사랑에 축복이 있기를.”

       

       파아앗-!

       

       이게 정답이었던 걸까. 이 공간에 끌려왔을 때와는 반대로 주변이 하얗게 물들며 전신의 감각이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 그 너머에서 회갈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대지의 신과 아스테리오스가 맞닿은 부분에서 발하는 빛. 이는 이내 작은 씨앗이 되어 내게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

       .

       .

       .

       .

       .

       “헉!”

       

       리디아의 등 위에서 눈을 떴다.

       

       내 영혼에 단단히 뿌리내린 산맥의 씨앗과 함께.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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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6

EP.136





       화륵.


       


       몸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오르는 작은 열기. 이젠 익숙해진 권능이 새겨지는 감각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지만.


       


       돌연 검게 물든 시야. 분명 리디아의 등에 업혀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땅에 발을 딛고 있었다.


       


       아니, 이걸 땅을 디뎠다고 해야 하나. 분명 나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발을 딛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이를 땅이라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고.


       


       단순히 바닥이라는 의미에서의 땅이 아니다. 단단한 바위와 부드러운 흙. 작은 자갈이 굴러다니며, 그 사이로는 식물이 자라나거나 벌레가 기어다니는 그 땅 말이다.


       


       무언가 보이는 것도, 만져지는 것도 아니건만 그저 땅이라고 인식하게 되는 기이한 감각.


       


       이를 자각하는 순간 감각이 확장되면 자그마한 깨달음이 들어찬다.


       


       주변을 둘러싼 모든 어둠 또한 ‘땅’ 이라는 것을.


       


       “새, 생매장이야!!”


       


       괜시리 호들갑을 떨어보았으나, 그럼에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여전히 이곳은 어둡고, 포근했으니까.


       


       …포근?


       


       갑자기 추가된 감각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돌연 검게 물든 시야에 불이 들어온다.


       


       머리에 뿔이 달린 근육질의 미소년. 그리고 이를 인자하게 바라보는 산맥처럼 거대한 여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것은 아스테리오스와 대지의 여신이라고.


       


       아스테리오스는 자신의 여정을 떠나고, 대지의 여신은 이를 조용히 지켜본다. 그리고 나는 그 둘을 위에서 내려다본다.


       


       액자식 구성의 액자식 구성 같은 조금 어지러운 시야. 다만, 그것이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눈앞에 비친 소년 아스테리오스의 이야기는 빠르게 흘러갔다.


       


       소년은 어려서부터 비범했고, 나이를 먹고 청년이 되자 주변 일대에 그를 감당할 존재가 없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평범한 필멸자들 사이에서의 이야기.


       


       그의 힘은 신과 그들의 군대를 막아 세울 정도는 아니었다.


       


       결국 아스테리오스와 그의 씨족은 끝없는 전쟁을 피해 대륙을 횡단하기 시작한다.


       


       동쪽으로. 동쪽으로. 계속해서 동쪽으로.


       


       판 대륙에서 가장 높게 솟은 산맥과, 가장 넓은 평야가 존재하는 대지의 신의 권역을 향해서.


       


       그 뒤에는 역사에 남은 대로 익히 아는 내용들이었다.


       


       소 수인들은 간신히 대지의 신이 기거하는 권역에 도착했다. 영광스러운 시절의 산맥을 잃었으나, 너른 평야와 그 밑의 땅굴만큼은 온전했으니.


       


       대지의 신과, 그녀의 신도들은 기꺼이 전쟁을 거부하는 소 수인들을 받아주었다.


       


       하지만 멸신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아스테리오스는 자처해서 땅굴의 수호자가 되었으니.


       


       이전부터 그의 고행을 조용히 지켜보던 대지의 여신은 기꺼이 자신의 힘을 나눠 주었다.


       


       지금은 무너졌으나, 언제든 다시 세울 수 있도록 빼둔 산맥의 씨앗을 아스테리오스에게 심은 것이다.


       


       덕분에 그는 작은 태산이나 다름없는 힘을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발 구름 한 번에 땅이 갈라지고, 산의 무게마저도 받쳐 드는 근력은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부쉈으며, 그 몸뚱이는 바위와도 같아 부서지지도 지치지도 않았다.


       


       “진짜 괴물인데…….”


       


       내가 상대한 미노타우로스 따위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압도적인 존재.


       


       하지만 그는 영원한 존재가 아니었다.


       


       필멸의 육신은 점차 노쇠해져갔고, 이제는 죽음이 머지않은 수준에 다다른다.


       


       대지의 여신은 여전히 아스테리오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아스테리오스로부터 시선을 돌리지 않는 그녀였으나, 가끔 어쩔 수 없이 다른 것에 집중해야 하는 때가 있었으니.


       


       바로 다른 신들과의 전투였다.


       


       불타는 광륜을 짊어진 자. 태양의 신으로 보이는 이가 불의 신을 삼키고, 물의 신을 증발시킨 것을 넘어 이제는 대지의 신마저 노린다.


       


       “이러니까 세상이 망했지.”


       


       어이가 없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전투였다.


       


       눈앞에서 핵폭발이 초 단위로 일어나고, 원근감이 이상해질 정도로 거대한 거인은 이를 묵묵히 받아내며 반격까지 시도한다.


       


       머리로만 알고 있던 것을 이렇게 눈으로 보게 되니 오히려 의문이 들 정도였다.


       


       “이만한 전투에서 어떻게 필멸자들이 살아남은 거지?”


       


       판 대륙이 원형이라도 남은 게 신기할 정도인데, 그 안에서 기어다니는 사람들이 아직도 살아있다고?


       


       그런 의문이 들 정도로 강력한 힘과 힘의 충돌.


       


       이러한 의문에 대한 대답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지형이 바뀔 정도로 격렬한 전투. 그 와중에도 대지의 신과 태양의 신은 각자의 신도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렇다. 오로지 자신이 모시는 신의 헌신. 그것만이 필멸자들이 살아남을 길이다.


       


       만약 자신의 신이 조금 더 이기적이라면, 상대의 신이 조금 더 무자비했다면. 혹은…결국 어느 한쪽이 패배해 신도들이 무방비해진다면.


       


       그때는 그들의 9할 이상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그만큼 어마어마한, 말 그대로 신화의 전투였으나 모든 것을 신에게만 맡겨둘 수는 없는 법 아닌가.


       


       신의 힘은 타고나는 것도 있지만, 신앙을 통해 쌓는 것도 있다. 즉, 상대의 신도를 전부 처죽이면 신의 힘도 그만큼 약해진다.


       


       이 간단한 논리를 위해 필멸자들끼리도 전투가 발생한다.


       


       태양의 신을 따라 하듯, 종족을 불문하고 머리 뒤에 금으로 된 륜을 달고 다니는 이들이 무기나 신체 일부에서 화염을 뿜어내며 달려든다.


       


       그리고 이에 맞서는 것은 에너지만 충분하다면 죽어도 금방 되살아나는 대지 정령의 군단.


       


       내가 상대한 타락한 노움 따위는 이 군단의 심부름꾼조차 되지 못했을 것이다.


       


       영상으로 보는 것이기에 정확한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대장급으로 보이는 정령은 일격 일격이 베니나 모르가나가 선보인 고위 마법과 맞먹는 위력이었다.


       


       그만한 위력을 평타로 날려대는 정신 나간 파워 인플레의 현장.


       


       다만, 전체적으로 대지의 정령 쪽의 열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모든 전투 인원을 꼴아박았는데, 이쪽에는 죽어도 부활할 수 있는 대지의 정령만 몰려온 셈 아닌가.


       


       결국 정령들이 죽고 부활하는 사이에 제법 많은 태양의 군세가 땅굴로 기어들어 갔다.


       


       물론 그들이 얼마나 많고, 얼마나 강하건 전부 함정에 당하거나 아스테리오스의 손에 분쇄 당했지만. 땅굴에서의 그는 아무리 늙었어도 무적이니까.


       


       지구에서 본 어떤 영화보다도 웅장한 전쟁 장면을 숨죽이며 지켜보던 순간. 돌연 보랏빛으로도 핏빛으로도 보이는 흉흉한 색의 파장이 전장을 덮친다.


       


       이에 직격당한 필멸자들은 약한 순서대로 점차 미쳐가며 변이하기 시작한다.


       


       “…광기인가.”


       


       일정 이상의 가호를 받았거나, 정신력이 뛰어난 몇몇을 제외한 전장의 모든 존재가 몬스터로 변이한다.


       


       정령은 타락하고, 사람은 보랏빛 피부와 일그러진 신체 말단을 가진 마족으로 화한다.


       


       이에 당황한 태양의 신이 자신의 군세를 수습하여 물러났고, 대지의 여신 또한 당황하면서도 타락한 정령을 다시 흙으로 되돌렸다.


       


       그렇게 어찌어찌 전투를 마무리 짓고 다시 땅굴로 시선을 돌리는 대지의 신. 그녀가 평소처럼 자신의 챔피언을 치하하고 오늘도 살아남았음을 축하하려는 순간.


       


       대지의 신은 보았다. 자신의 챔피언이 끔찍한 괴물이 되어 그와 그녀가 지키려던 모든 것을 파괴하는 모습을.


       


       우선 당시의 아스테리오스는 내가 아는 미노타우로스의 모습이 아니었다.


       


       대지의 신의 가장 강력한 가호를 고스란히 받으며 광기에 물들지 않았나.


       


       악마처럼 휘어진 뿔. 삭은 흙먼지가 섞인 숨결. 그 발걸음 한 번에 건물이 하나씩 무너지고, 사람은 얼마나 죽었는지 그 핏물이 발목까지 찰랑인다.


       


       기겁한 대지의 신이 황급히 아스테리오스의 몸에서 산맥의 씨앗을 뽑아내고, 생존자는 지상으로 퍼 올렸다.


       


       그렇게 통로인 미로만 남긴 채, 지하 도시에 봉인된 아스테리오스. 아니 미노타우로스.


       


       이렇게 자세히 보여줄 줄은 몰랐지만, 여기까지는 다 아는 이야기다. 대체 왜 이런 걸 또 보여주는…….


       


       “아.”


       


       세상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드높은 시야. 덕분에 그 어떤 역사서에도 적히지 않은 대지의 여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자신의 심장이 뜯겨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여인처럼.


       


       그제야 모든 것을 깨달았다. 내게 이 광경을 보여주는 것은 이미 죽은 대지의 신이 아니었다.


       


       그녀의 권능을 매개체 삼아, 멸신전쟁의 모든 것을 지켜보기만 했던 사랑의 여신이 내게 내리는 메시지였다.


       


       “…내게 뭘 원하는 거지?”


       


       명확히 사랑의 여신을 의식하며 내뱉은 한마디. 동시에 천 년 전의 과거는 사라지고, 어둠이라는 이름의 커튼 또한 걷히며 엔딩 크레딧 이후의 풍경이 펼쳐진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초라한 침대. 그 안에는 두 남녀가 잠이라도 자는 것처럼 평온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미노타우로스가 아닌 소년 시절 아스테리오스의 모습으로 돌아온 남자와, 그 품에 꼭 안겨 있는 작은 여인.


       


       누워있으면 산맥, 일어서면 구름 너머로 고개를 내밀 정도로 거대한 몸뚱이는 어디로 갔는지 평범한 여인보다도 왜소한 체형을 가지게 된 대지의 여신이었다.


       


       아스테리오스가 받은 종합 가호의 이름이 산맥의 씨앗이라고 했던가.


       


       어쩌면. 어쩌면 말이다. 대지의 여신은 아스테리오스가 산맥처럼 커다랗게 자라기를 바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과 대등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그리하여 신과 신도가 아닌 남자와 여자로서. 영원을 함께하는 반려가 될 수 있도록 말이다.


       


       기대와는 달리 아스테리오스는 조금 큰 필멸자가 되는 것에서 끝났고, 종국에는 미쳐버린 괴물이 되었지만.


       


       그래도 지금. 이렇게 둘은 딱 맞는 침대에 나란히 누워있다.


       


       대지의 여신이 죽음을 맞이하여 모든 힘을 잃고 쪼그라들었기에 가능한 일.


       


       허나 어찌 됐든, 마침내 둘의 눈높이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제는 대지의 여신은 아스테리오스가 다른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할 필요가 없다.


       


       아스테리오스 또한 대지의 여신을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렇게 주장하듯 둘은 마지막의 마지막에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연인 같은 둘의 모습을 눈에 담는 순간 그냥 알 수 있었다.


       


       미궁의 모든 것이 신들의 유해에 시공간이라는 불꽃을 비춰 만들어 낸 그림자에 불과하다면.


       


       눈앞의 둘은 그러한 불꽃 너머. 2층의 원전이 되는 ‘진짜’이리라.


       


       미궁의 시공간을 조정하는 사랑의 여신이 나를 무대장치의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왜?”


       


       처음에 품었던 의문을 다시 한번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돌연 연분홍색 빛이 내려와 대지의 여신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베일을 두른 새신부 같은 모습.


       


       “이게 못내 마음에 걸렸던 거냐.”


       


       사랑의 여신으로서 저 둘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리라.


       


       그렇다고 직접 움직이기엔 여력이 없으니 내게 부탁하는 건가.


       


       나는 사제도, 주례를 맡을 만큼 대단한 사람도 아니지만, 한 번 정도는 괜찮겠지.


       


       얼마 남지 않은 신성력을 손가락에 집중시키며 성호를 그었다.


       


       “우뚝 솟은 산맥처럼 변치 않는 사랑에 축복이 있기를.”


       


       파아앗-!


       


       이게 정답이었던 걸까. 이 공간에 끌려왔을 때와는 반대로 주변이 하얗게 물들며 전신의 감각이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 그 너머에서 회갈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대지의 신과 아스테리오스가 맞닿은 부분에서 발하는 빛. 이는 이내 작은 씨앗이 되어 내게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


       .


       .


       .


       .


       .


       “헉!”


       


       리디아의 등 위에서 눈을 떴다.


       


       내 영혼에 단단히 뿌리내린 산맥의 씨앗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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