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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6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자색의 불꽃이 침범하지 못하는 장소가 보였다.

       

        흙으로 보이는 것들이 둥글게 한 장소를 뒤덮고 있었고, 나의 멸천의 독은 그 흙더미를 불태운다.

        보통이었다면 내 멸천의 독이 저 흙들을 전부 불태우고, 이내 안쪽으로 쏟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선가 흙이 계속해서 솟아오르고 있었고, 그랬기에 저 흙으로 만들어 낸 보호막은 계속해서 존재할 수 있었다.

       

        게다가 내 멸천의 독을 막고 있는 것이 ‘흙’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 멸천의 독은 ‘하늘’에 속한 것들에 극한의 상성을 가지는 힘.

        당연히 ‘대지’에 속하는 흙에게는 조금 효과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간문제다.’

       

        불꽃은 타오를수록 더욱 거세진다.

        연료가 계속해서 공급되는 이상 나의 멸천의 독염은 더더욱 거세질 것이고, 결국 아슬아슬하게 버티는 저 균형도 무너지겠지.

        그저 그뿐인 이야기였으나…….

       

        = 제발…… 멈춰주세요!

       

        = …….

       

        흙으로 이루어진 보호막 결계 안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얼굴을 굳혔다.

        나의 눈에는 흙으로 뒤덮인 보호막의 내부가 보였다.

        어째서 그것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가능했다.

       

        그리고 그런 나의 시야에는 초록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인간형의 여신이 땀을 뻘뻘 흘리며 양손을 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양손에서 계속해서 흙이 솟아오르고 있었고, 그 흙들은 계속해서 보호막에 공급되며 나의 독을 막아 내고 있었다.

       

        만약 그것이 전부였다면 나는 그녀의 말을 무시했을 것이다.

        그녀 역시 내가 증오하는 ‘신’ 중 하나였고, 천천히 절망에 빠뜨려 죽였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그녀를 무시할 수 없었다.

       

        = 으아아아앙!!

       

        = 흐윽! 흐윽!

       

        = 무서워!!

       

        그녀의 주위에는 수많은 어린아이들이 모여 앉은 채 덜덜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 역시 ‘신’이었으나, 아이들은 아직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했다는 듯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두려움에 떨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을 지키고 있는 것이 바로 눈앞의 여신.

       

        = …….

       

        나는 천천히 흙의 결계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 결계를 유지 중인 여신에게 물었다.

       

        = 너냐? 나에게 말을 건 게.

       

        = 그, 그렇습니다.

       

        힘에 겨운 듯 부들부들 떨리는 그녀의 팔.

        이윽고 결계가 한 번 흔들리고, 아이들의 비명이 울려 퍼진다.

        그 비명 사이로 여신의 말이 이어졌다.

       

        = 부디…… 분노를 거두어 주세요.

       

        = 어째서?

       

        = 흣!

       

        = 어째서 내가 그래야 하지?

       

        나의 의문에 여신이 고개를 푹 숙인다.

        방금의 내 말은 저 여신을 조롱하기 위함이 아니라, 진짜로 궁금했기에 한 질문이었다.

        내가 어째서 분노를 거두어야 하지?

       

        = 나의 남편을 먼저 건드린 것도 너희들이고…….

       

        콰드득!

       

        = 내 남편의 죽음을 모독한 것도 너희들이다.

       

        콰지지직!

       

        = 그런데 왜 나의 정당한 분노를 거두어야 하지?

       

        쿠드드득!

       

        나의 의지에 따라 멸천의 독염이 흙의 결계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자색의 불꽃이 거대한 발톱의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 자. 나를 납득시켜 봐라.

       

        콰드득! 콰득!

       

        불꽃으로 이루어진 발톱이 흙의 경계를 부드럽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이것은 단순히 불꽃의 형상을 한 다른 멸천독과는 달리, 나의 의지에 따라 단단하게 압축된 것이다.

        밀도가 다르다.

       

        = 당신들께 저지른 죄는 분명 저희들의 죄입니다.

       

        콰지직!

       

        = 그 죄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사죄할 수 없겠지요.

       

        콰드드득!

       

        조금씩 결계를 파고드는 불꽃의 발톱을 바라보며 여신이 얼굴을 찌푸린다.

        조금이라도 결계에 구멍이 뚫리는 순간, 그 틈을 통해 멸천의 독이 침범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 제 목숨을 원하신다면 드리겠습니다. 제 영혼을 가지고 놀기를 원하신다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들만은…….

       

        여신이 다급하면서도 간절하게 소리쳤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을 들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때라면 아마 안타까운 감정이 먼저 들었을 것이다.

        나 역시 세 아이들의 어머니이고, 이제는 곧 네 번째 아이가 태어날 테니까.

       

        하지만 지금의 내 마음속을 채운 감정은 오로지 분노뿐.

        이 신계라는 세상을 태우는 멸천의 독염처럼, 나의 마음속에서는 분노라는 감정만이 타오르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말했다.

       

        = 필요 없다.

       

        = ?!

       

        = 네 녀석의 목숨? 네 녀석의 영혼?

       

        콰드득!

       

        결계를 향해 파고들던 불꽃의 발톱이 멈췄다.

        그러고는 이번엔 거칠게 휘둘러지며 결계에 깊은 상처를 냈다.

       

        = 큭!

       

        지지지지직…….

       

        단숨에 상처가 난 흙의 결계가 불안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여신은 서둘러 상처를 보강하려 했지만, 한 번 생겨 버린 상처로 파고든 자색의 불꽃은 단숨에 결계를 태우며 재생을 막았다.

       

        나는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어떤 미소도, 찡그림도 없이 그냥 보았다.

        그리고 조금의 고저도 없는 목소리…… 아니, 조금의 감정도 담지 않은 사념으로 말했다.

       

        = 나에겐 네 녀석들의 목숨도, 영혼도 필요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이미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원했던 것은 이미 사라졌는데, 나에게 필요도 없는 것을 가져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그리고 나에게서 원하던 것을 빼앗아 간 것은…….

       

        = 너희들이다.

       

        = !!

       

        = 너희들이 내가 원했던 것을 빼앗아 갔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행복.

        이미 행복을 잃어버린 내가…… 원하는 것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쨍그랑!

       

        = 꺅!

       

        결국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흙의 결계에 구멍이 뚫렸다.

        내가 만들어 낸 상처 한가운데가 깨지고, 그 구멍을 통해 멸천의 독이 흘러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색의 불꽃이 저 남아 있는 것들마저 태우…….

       

        = 안 돼!!!

       

        화르르르륵!!

       

        = ?!

       

        ……태우지 않았다.

        나는 자기 몸으로 결계를 막아 낸 여신을 바라보았다.

       

        = 끄으으으윽!!

       

        자기 육체를 태우고, 힘을 태우고, 격을 태우고, 존재마저 태우는 불꽃에 여신이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결코 구멍에서 비켜서지 않았다.

        그녀가 비키는 순간 멸천의 독염이 저 아이들을 덮칠 것이기 때문이다.

       

        = …….

       

        나는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젠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신’이라는 존재는 기본적으로 ‘하늘’의 존재. 비록 ‘땅’의 힘을 가진 ‘여신’이라고 하더라도 내 독을 피할 수는 없다.

        결국에는 시간문제일 뿐. 저 여신마저 쓰러지고, 아이들마저 죽을 것이다.

       

        = 제발…….

       

        = …….

       

        = 제발 자비를…….

       

        = …….

       

        어째서 자신을 희생하냐는 둥, 부질없는 짓을 왜 하냐는 등의 말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어떠한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나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을 것이고,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태울 것이기 때문이다.

       

        털썩!

       

        결국 한계에 다다른 듯, 결계를 유지하던 여신의 힘이 끊어졌다.

        동시에 자색의 불꽃이 맹렬한 기세로 결계를 태워 버리기 시작한다.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더더욱 커지고, 힘없이 주저앉은 여신은 여전히 구멍을 막은 채 물었다.

       

        = 신계를 무너뜨리고…… 무엇하실 건가요?

       

        = 내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 초월자가 필멸자의 세상에 다다르게 되면…… 세상이 무너질 거예요.

       

        = 상관없다.

       

        이곳에서의 복수는 끝마쳤다.

        이제는 내 남편의 죽음에 직접 관여한 이들을 처리할 차례.

       

        = 모든 인간들을 말살할 것이다.

       

        그들의 세상과 함께 말이다.

       

        = …….

       

        나의 말에 여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물을 흘리며 자기 몸으로 구멍을 틀어막을 뿐이었다.

       

        지글지글…….

       

        이미 구멍을 틀어막고 있던 그녀의 몸은 흉하게 타버렸고, 그녀의 힘과 격은 처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아졌다.

        결계 역시 상당히 얇아졌기에…… 이제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른다면 저 결계는 무너져 내리겠지.

       

        = 왔어?

       

        꾸물꾸물…….

       

        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곳에는 내 자색의 불꽃에 뒤덮이고서도 멀쩡한 남편의 머리가 액체화된 황금에 의해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남편의 죽음과 영혼을 붙잡아 두고 있었던 신들의 힘은 이미 전부 타버렸기에, 내 발치에 놓여지는 남편의 머리에서는 남편의 기척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남아 있는 것은 남편의 머리와 생전 남편의 몸을 뒤덮었던 황금뿐.

        편안하게 눈을 감은 남편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나는 돌아오지 않을 물음을 던졌다.

       

        = 왜 나였어?

       

        어째서 이렇게 성격 나쁘고, 볼품없는 드래곤에게 구애했을까?

       

        = 왜 나여야만 했어?

       

        어째서 생의 마지막까지 나와 함께 있었던 것일까?

       

        = 왜 나를…….

       

        어째서…….

       

        = ……사랑했어?

       

        뚝! 뚝!

       

        그제야 말라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분노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나의 마음속에서 슬픔이 솟아났고, 그것은 이내 눈물이 되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 대답해…… 이 멍청아…….

       

        나는 편안하게 눈을 감은 야속한 남편의 머리를 바라보며 울었다.

        하지만 내 울음소리에 답해주던 남편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다신 들려오지 않겠지.

       

        촤아악!

       

        그 순간 남편의 황금이 넓게 퍼져나가며 세상을 덮기 시작했다.

        모든 세상을 불태우던 나의 불꽃은 황금으로 이루어진 물에 닿는 순간 꺼졌고, 멸천의 속성으로 변질되었던 세상 역시 원래의 속성으로 되돌아왔다.

       

        그렇게 자색의 불꽃을 모두 꺼트린 남편의 황금이 마지막으로 다다른 것은 바로 나.

        내 앞에 놓여져 있던 남편의 머리를 황금이 감싸고, 이내 남편의 머리는 순식간에 녹아들며 황금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그 황금이 내 몸을 빈틈없이 휘감기 시작했다.

       

        쉬이이익!!

       

        치이익!

       

        마치 숨 쉬듯 내 몸에서 흘러나오던 멸천의 독염이 황금에 막힌다.

        은색으로 바랬던 나의 비늘이 황금빛으로 코팅되고, 마침내 나의 전신을 포근히 감싸준다.

       

        = 이게 네 선택이야?

       

        나는 내 몸을 휘감은 황금을 소중히 끌어안았다.

        기분 탓일까? 어쩐지 남편이 나를 끌어안아 주는 기분이다.

       

        = 커억!

       

        털썩!

       

        그 순간 뒤에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뒤로 고개를 돌리자, ‘하늘의 고대신’이었던 존재가 ‘사랑의 여신’이었던 잿더미 옆에서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썩어도 신들의 왕이었던 존재인 것인가? 질기군.

       

        = 베르보스는 저희가 책임지고 처벌하겠습니다.

       

        = …….

       

        앞에서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다시 돌렸다.

        그러자 격이 한참 떨어진 여신이 아이들의 부축을 받으며 비틀비틀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 멸망의 존재시여. 당신의 자비로움에 감사를…….

       

        = 너희를 용서한 것은 내가 아니야.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인사를 하려는 여신을 제지한다.

        그리고 덤덤히 사실을 말한다.

       

        = 너희를 용서한 것은 내 남편이지.

       

        = …….

       

        = 저놈은 알아서 처리해라. 더는 관심 없다.

       

        나는 ‘하늘의 고대신 베르보스’였던 존재를 한 번 바라본 후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 멈칫하곤, 다시 여신에게 고개를 돌렸다.

       

        = 이름.

       

        = 네?

       

        = 네 이름이 뭐지?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들을 달래주던 여신이 중상을 입은 몸으로 고개를 숙였다.

       

        = 저는 ‘대지 모신’이었던 존재. 지금은 그저 ‘대지의 여신인 모네비아’입니다.

       

        = 그래. 기억해 두지.

       

        그녀의 대답을 끝으로,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멸천의 힘을 끌어내 발톱에 집중했다.

        이윽고 휘둘러진 내 발톱이 공간을 불태우고, 갈라진 공간 사이로 나와 남편의 둥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 ……돌아가자 남편.

       

        나는 발걸음을 뗐다.

       

        = 우리 집으로.

       

        공간을 넘어, 나와 남편의 둥지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둥지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알을 바라보며, 나는 말했다.

       

        = 이거 보여?

       

        나는 몸을 굽혀 알을 품었다.

        기분 탓일까? 내 몸을 뒤덮은 남편의 황금이 알을 매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네가 지켜 준, 우리의 마지막 아이야.

       

        쩌적!

       

        곧 부화하려는 듯 금이 가는 알을 바라보며, 나는 마지막 눈물을 흘렸다.

       

        = 어서 오렴. 우리의 마지막 아이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걸로 이야기는 대충 끝입니다.

    이번 스토리를 진행하면서 각혈을 좀 많이 하긴 했는데, 뭐, 괜찮습니다.

    이제 다음화에서 마무리 짓고, 다음 스토리를 나갈겁니다.

    다음에는 뭘 할까나~

    다음화 보기


           


Dragon’s Internet Broadc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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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님의 인터넷 방송
Status: Ongoing Author:
Fantasy, martial arts, sci-fi... Those things are usually products of imagination, or even if they do exist, no one can confirm their reality. But what if they were true? The broadcast of Dragon, who has crossed numerous dimensions, is open again today. To tell us his old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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