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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7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문이 덜컥 열려버렸다.

       

        어두웠던 방안에 한 줄기 빛이 드리운다. 바이올린에 턱을 괴고 있던 로즈마리는 그 자리에서 담이라도 온 것처럼 목을 찡그린 채 굳어버리고 말았다.

       

        두 쌍의 금빛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 본다. 로즈마리의 표정이 멍청하게 변했다.

       

        “너 여기서 뭐 해?”

       

        앞에 나타난 게 그 엘프였다면 정말로 좋았을 텐데. 그러면 분풀이를 할 수 있었을 텐데.

       

        “여기서 뭐 하냐니까?”

       

        큰 언니였다.

       

        “어, 언니가 왜 여기서 나오세요?”

        “너야말로 이 시간대에 여기서 뭐 해.”

        “그, 그야 산책이요?”

        “산책이라면서 왜 말끝이 올라가냐?”

        “그럴 수도 있죠.”

       

        로즈마리는 코를 훌쩍거리며 최대한 태연한 척을 했다. 공간이 확 트이자 거칠었던 숨도 진정되었다. 흥분으로 인해 금색으로 돌아왔었던 눈동자도 다시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스태프는 왜 들고 있어? 너 마법 쓰려고 했지.”

        “아닌데요? 그냥 연주가 하고 싶어서 꺼낸 건데요?”

        “여기가 방음부스인 줄 알아?”

        “그런 줄 알았죠.” 

       

        에테르의 추궁에 로즈마리는 서둘러 스태프를 집어넣었다. 

       

        “자꾸 물어보지만 말고 제 질문에도 답해 주세요. 언니는 왜 이런 늦은 시간대에 여기 오셨어요?”

        “…글쎄다.” 

       

        질문을 들은 에테르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당황한 기색이 조금 묻어있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 신경을 쓰기에는 로즈마리에게 남아 있는 여유가 티끌만큼도 없었다. 하마터면 이곳에 갇혀서 영영 못 나올 뻔했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뒤숭숭해진 까닭이다.

       

        어차피 큰 언니는 이제 아군 내지 중립이다. 자신이 삽질만 안 하면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서둘러 밖으로 뛰쳐나온 로즈마리가 에테르 뒤에 숨으며 물었다.

       

        “이 방은 또 뭐 하는 곳이에요?”

        “내 실험실인데.”

        “실험실이요?”

       

        의외의 대답에 로즈마리의 고개가 갸웃 돌아갔다.

       

       

        **

       

       

        뜻밖의 인물을 만난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로테, 프레이와 동아리 활동을 끝마친 뒤 버멜을 보러 다급히 교양관으로 돌아왔다. 그랬더니 교양관 지하로 내려오자마자 누굴 죽여버리겠다는 곡소리가 복도 너머로 들려오는 것 아니겠는가? 

       

        가만히 들어보니 목소리의 주인을 알 것 같았다. 뭔가 잘못됐음을 감지한 나는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재빨리 은신처 문을 열었다. 주위를 살피니 웬 유통기간 지난 블루베리 하나가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다.

       

        바이올린? 내 눈이 지금 잘못된 건가?

       

        일주 운행을 하는 천구의 별처럼 여러 의문이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았다.

       

        우선 로즈마리가 왜 여기 있을까.

       

        설마 버멜 모가지를 따려는 건가? 싶어서 방 안쪽을 둘러보니 버멜의 흔적은 어디에도 안 보였다.

       

        이 새끼는 또 어디로 간 걸까.

       

        아니, 아니지. 이런 식으로 속단하면 안 된다.

       

        블루베리가 여기 있으니까 기척을 느끼고 먼저 튄 것일지도 모른다. 그 점을 참작하고는 로즈마리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로즈마리는 서둘러 바이올린을 집어넣고 쪼르르 달려와 내 뒤로 숨었다.

       

        “이 방은 또 뭐 하는 곳이에요?”

       

        물기 묻은 눈을 옷소매로 찍어내며 나를 올려다보는 로즈마리.

       

        …맞다. 얘 폐소공포증 있었지.

       

        나는 나를 뚱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로즈마리를 향해 거짓말을 급조해냈다. 이 또한 연기의 일환이었다.

       

        “여긴 내가 학교에 부탁해서 특별 실험을 하고 있는 방이다. 그런데 저번에 보니까 누가 문을 부숴 놓았더라고. 그래서 강화마법도 달아놓을 겸 모르는 사람이 들어오면 자동으로 닫히도록 장치해 놓았지.”

        “그, 그런 건가요…?”

        “그래. 범인이 누군지 알아보려고 했는데….”

       

        여기서 조금 밀어붙여 볼까.

       

        “너야?”

        “아뇨?”

        “이 철문 부술 만한 녀석이면 여기서 너 말고 없는데?”

        “저 여기 처음 와요. 다른 사람이 모르고 부순 거 아닐까요?”

        “정말로?”

        “정말로.”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거짓말인 거 알지.”

       

        블루베리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린다. 

       

        “제, 제가 했어요.”

       

        로즈마리는 마지못해 쭈뼛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래.”

       

        나는 로즈마리를 살짝 밀쳐서 떼어놓았다.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알았다니까.” 

       

        의외로 순순히 인정하는 모습이다. 나는 지하실 문을 닫으며 오달진 미소를 지었다.

       

        버멜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모양이다. 이사장과 대화를 나눌 때 빼고는 더는 올 일이 없겠지. 그런 판단에서, 나는 로즈마리를 데리고 분수대가 있는 중앙광장까지 걸어 나왔다.

       

        어스름한 달빛에 분수대 물이 반짝인다. 날씨는 제법 추웠다. 엘랑카야 산맥에서 넘어오는 북풍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거 잘못하면 감기 걸리겠는데.

       

        “…저, 언니. 제가 왜 거기 있었는지 안 물어보세요?”

        “뭔가 하고 있었겠지. 내가 알아서 뭐 해.”

        “용서해 주시는 건가요?”

        “잘못을 빌었으면 용서해 줘야지.”

       

        사람이건 뭐건 모든 존재는 실수를 한다. 자신을 방어하느라 뜻하지 않게 변명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제때 인정하고 진심 어린 사과를 한다면 용서해 주는 것이 맞다.

       

        그리고 이런 일로 신경질 부리기에는 너무 애새끼 같지 않은가. 문 부숴 먹었다고 핵이라니….

       

        물론 버멜에게 위협을 끼쳤다는 것만큼은 문제가 된다. 그러나 이 점을 질책하면 오히려 의심을 살 수 있다. 여기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태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상책이란 소리다.

       

        그래, 이렇게 된 이상 내가 로즈마리를 반대로 마킹하는 편이 낫겠다.

       

        이게 발상의 전환이지. 감시당하는 쪽에서 감시하는 쪽으로 바꾸는 것이다. 나를 위해서라도, 버멜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어쩌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됐네.”

        “그러게요. 많이 어두워요.”

        “뭣하면 오늘 기숙사에서 묵고 갈래?”

        “…예?” 

       

        예상치 못한 제안이었는지 로즈마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 소리가 갑자기 왜 여기서 나오냐고 묻는 듯한 반응이었다.

       

        “여기서 황궁까지 걸어서 20분 넘게 걸리잖아. 알고 있겠지만 제국 치안이 생각보다 안 좋아. 괜히 밤길 가다가 위험한 일이나 안 생겼으면 해서.”

       

        로즈마리는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언니, 치한이 뭔 상관이에요?”

        “너 말고 그 치한이 걱정돼서 그런다.” 

        “와, 너무해요.”

        “공녀가 누구 하나 질산에 담가버렸다는 소문이 제국에 돌면 누가 제일 손해일까?”

        “그래도 너무하다고요.”

       

        누가 의자매 아니랄까 봐 이러네. 놀리자마자 같은 레퍼토리로 반격하는 거 봐라.

       

        “그래도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네가 제국 싫어하는 건 알지만, 그래도 누구 함부로 죽이고 그러면 안 돼. 여긴 전쟁터가 아니야.”

        “제게는 전쟁터나 마찬가지예요.” 

       

        한층 두꺼워진 목소리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블루베리가 인간이었을 시절, 그녀의 나라는 다름 아닌 제국에게 멸망했다. 그때 이 아이는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며 모든 금안족이 겪을 수 있는 ‘타락’의 과정을 거쳤다.

       

        “언니.”

       

        로즈마리는 내 어깨에 주먹을 올려놓았다.

       

        인간과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감촉이었다. 살이 아니라 철덩어리를 얹어 놓은 것처럼 무거웠다.

       

        “내가 엘프국에 있는 동족 애들처럼 비교적 편하게 살았다면 이 짓거리도 안 했어요.” 

        “…….”

        “그런데 저는, 나는 여기 새끼들 때문에 모두를….”

        “알지.”

        “다른 건 몰라도 제국인은 절대로 믿을 것들이 못 돼요. 그러니까 언니는 여기 오래 있으면 안 돼요. 그 친구들한테도 언젠가는 배신을 당할 수도 있어요.”

       

        마지막 말에 내 눈썹이 반사적으로 꿈틀거렸다.

       

        웃기는 일이다. 나와 친구들 사이의 거리를 벌려 놓으려고 수작질하려는 건가?

       

        아니면 별 탈 없이 나를 마왕성으로 데려가려는 계획일까? 그래, 아마 이쪽이 맞겠지.

       

        “만약 여기서 언니가 믿었던 사람이 언니 상대로 이상한 짓을 벌여봐요. 그땐 어떻게 할 거예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본관은 자신의 눈동자처럼 샛노란 달을 올려다보며 입을 뗐다.

       

        “……그땐 다 죽여버려야지.”

       

        나는 황급히 손을 올려 입을 틀어막았다. 방금 내가 뭐라고 한 거지?

       

        원래는 다른 대답을 하려고 했다. 일단 오해를 푼다거나, 저번처럼 술 한잔 하면서 진담을 늘어놓는다거나.

       

        버멜처럼 자신의 의중과는 무관하게 약속을 어겨야 할 상황이더라도 이래저래 참작할 수 있다. 나는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한다. 만약 로테나 프레이가 나를 실망하게 하는 짓을 벌여도 그건 고의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방금 뇌까린 말은 그런 사고의 과정을 전부 생각하지 않고 한 발언이었다.

       

        “오…. 방금 언니, 예전으로 돌아온 것 같았어요.”

        “아니, 지금 건 헛소리야. 그런 일 있어도 웬만해선 마왕성으로는 안 돌아가.” 

       

        에테르는 어디까지나 중립이다. 인간의 편도, 마왕의 편도 아니다.

       

        또한 나는 이 세상 편이 아니다.

       

        예전에 세운 계획에는 변동이 없다. 나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캔맥주나 까면서 논문 쓸 것이다.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서 다녀왔다고 말할 것이다. 휴가 내고 오랜만에 밀린 영화도 볼 것이다.

       

        상상만 해도 기분 좋다. 야호.

       

        로즈마리는 울상이 되었다. 왜 안 돌아오냐고 묻는 표정이다.

       

        뭐 어떡하나. 마왕군이 내 양장본 목록 채우기에 방해가 되면 무너뜨려야지.

       

        나 또한 떫은 미소를 지으며 물어보았다.

       

        “그래서, 기숙사 올 거야 말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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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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