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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7

        

         

       그리고는 청이 씩 웃으며 한 마디 덧붙였다.

         

       “덕현친왕이란 분도 포함해서 말이네요.”

         

       그러자 자유의 표정이 애매하게 일그러졌다.

       말문이 막힌 듯이 입만 뻐끔거리다가, 결국엔 자조적인 냉소를 머금는 것이었다.

         

       “내 말하지 않았느냐. 그자는 그저 제 보신 하나만을 신경 썼을 뿐이라고. 딱히 백성에게 애정이 있어서 돌보지 않았거늘 어찌.”

         

       “알게 뭐람. 친왕 죽었다니까 아주 길거리에 나자빠져 울고불고 난리던데. 얼굴도 모르는 사람 떠났다고 통곡을 할 정도면 아주 훌륭한 분이 아닌가요?”

         

       “하지만 그게 선량하다고는.”

         

       “됐거든요.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저 길바닥에 울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럼 사나이답게 내가 저만큼 먹여 살렸다면서 당당하게 가슴 펴고 꺼드럭댈 줄 알아야지.”

         

       “허어.”

         

       자유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래도 생각이 많은 모양이었다.

         

       에라이, 사내놈이 부끄럼이나 타고.

         

       물론, 누가 울거나 칭찬하지 않더라도 청은 딱 보면 안다.

         

       자유는 청이 만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좋은 사람이 아니었던가.

       물론 선인 중에는 압도적인 청이 있어서 둘이 비교하자면 태양과 달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해도, 나머지 착한 놈들이 반딧불쟁이 수준에 있으니 달만 해도 대단한 위업이다.

         

       청도 이제는 눈에 보이는 선악의 업이 어떤 기준으로 매겨지는지 대충 이해하고 있었다.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면 악업이 쌓여 세상에 해로운 악인이 된다.

       사람에게만.

         

       악업으로 돌아서 악인이 되어버리면 사람이 아니라 해충 취급이었다.

       해로운 벌레라서 죽이거나 정신을 꺾어버리면 오히려 세상에 이로운 일이라 선업을 획득하는 구조였다.

         

       다만, 이 업이란 녀석은 개인의 사정과 의도, 본성 따위를 고려하지 않았다.

       선량한 의도라도 결과적으로 수많은 삶들을 고통으로 밀어넣었다면 천하의 악인이요, 세상 사악한 의도를 갖췄더라도 선량한 이가 살아 웃게 만들면 참 잘했어요 도장을 콱 찍어 주었다.

         

       그저 결과로만 평가하는 비정한 낙인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청까지 비정하지는 않았다.

         

       그냥 나 좋다고 하면 할아범이나 사저 호소인처럼 봐줄 수도 있고, 아니면 여느 악인들처럼 즐거운 해부 실습을 통해 개인적인 즐거움을 추구할 수도 있었다.

         

       누구 마음대로냐 하면 뭐.

         

       쓰레기야 누가 치워도 선행이 아닌가.

       굳이 길에 널린 것을 치우지 않았다고 나쁜 일인가?

       폐지는 주우면서 비닐은 안 줍냐 나쁜 새끼야 하면, 너나 주우세요 하고 비웃고 말 일이다.

         

       제일 악질인 새끼가 어설프게 줍느니 안 줍는 게 낫지 않냐 이 지랄 하는 새끼고.

         

       청이 악인 구제사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니다.

       팍팍하게 악인은 전부 베어야 한다하는 의무도 없지 않은가.

         

       심지어 지긋지긋한 임무창조차 이러한 임무가 있고 어느 편을 들 거냐 물어보는 수준이다.

       나쁜 놈 없애라고 강요하지는 않는 판에서야.

         

       그때 잘 나가던 청의 생각이 삐딱선을 탔다.

         

       음. 차라리 강요라도 하면 좀 편할 텐데.

       내가 왜 이 세상에 떨어졌는지도 알 거 아냐.

       의도를 모르니 불안해 죽을 것 같아.

         

       청이 가진 근본적인 공포였다.

         

       청은 아직도 음식 앞에서 참을 줄을 모른다.

       식탐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참을 수가 없어서 그렇다.

         

       막 무림에 떨어졌을 때를 아직도 기억한다.

       굶주림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도 기억한다.

       사람이 너무나 배가 고프면 벌레와 썩은 음식 찌꺼기라도 결국 삼키게 된다는 사실을 안다.

         

       현대인의 감성으로는 손으로 만지기도 역겨운 오물들을 입안에 쑤셔 넣어 치미는 구역질과 함께 억지로 삼키던 그때를, 흐느끼며 처먹던 때가 지울 수 없는 낙인으로 선명하게 남았다.

         

       그러니 무조건 속은 든든해야 한다.

       또 한없이 배가 고파 버리면, 배가 고프다 못해 찢어질 듯한 고통에 가까워질수록 선명하게 다가오는 기억이 너무 두려워서.

         

       나름 만족하며 안온했던 삶이, 이유도 없이 순식간에 나락에 떨어져 시궁창을 기어다니는 벌레만도 못한 처지로 변해버린 극적인 체험이었다.

         

       한 번 일어난 일이 또다시 두 번째 일어난다 해도 이상하지 않아서.

       보장되지 않는 실존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이러다 너 왜 시키는 대로 안 해 하고 갑자기 벼락이 치고 DLC 영원한 지옥 체험 이런 걸로 장르가 바뀌고 그러면.

         

       그때 문득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 올라왔다.

         

       “친구? 왜 이러느냐? 친구!”

         

       거기에 더해 부르는 소리에 청이 금방 정신을 차렸다.

         

       “아. 아? 아. 허업.”

         

       청이 그제서야 제가 숨을 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채는 허파에 겨우 바람을 불어주고 나서도 떨림을 주체할 수가 없었으니 곧장 다리에 힘이 풀리고 무릎 뒤편이 시큰하니 후들거린다.

         

       청이 찌푸리며 억지로 더러운 기분을 털었다.

         

       뭐야, 대정선공은 왜 일을 안 하는데?

       이런 거 막아주는 거 아니었나?

         

       왜 이딴 걸 물어봐서 사람 기분 더럽게스리.

         

       마음에 상하고 나니 입으로 나오는 말 역시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황제고 뭐고 알 게 뭐야. 어차피 내가 봐선 아주 개쌍놈이야. 황제면 황제답게 잘 다스릴 생각을 해야지 무림이 어쩌고 하늘이 어쩌고. 어차피 다 자기 뱃속 채우려는 거 아냐.”

         

       “……그렇게까지 불경한 소리를 해 달라는 건 아니었느니라.”

         

       “뭐 천자는 개뿔, 하늘이 내려보냈으면 착한 일 하라고 보냈겠지 높은 데 앉아서 천상천하 유아독존 내가 제일 잘났지 뽐내라고 보냈나? 나중에 죽어서 지옥 불에 떨어지라 해. 착한 사람은 복 받고 나쁜 놈만 벌을 받아야 해.”

         

       실상 저 자신에게 하는 소리였다.

       착한 사람은 복을 받아야지.

       나쁜 놈‘만’ 벌을 받아야 한다고.

         

       자유가 보기에는 난데없이 폭발한 화탄 같은 기세였다.

       저쪽 세상 고도로 발달한 심리 사회학적 전문 용어로는 급발진이라고도 했다.

         

       자유가 표정을 굳혔다.

         

       청의 속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들리는 것이다.

         

       황제에게 무언가 수작질을 당해 단단히 원한을 품고 있다고.

       분명 부모가 없다고 하였던가.

       그리도 당차던 소녀가 삽시간에 공포에 질려 낯빛이 창백하고 덜덜 떨며 숨조차 쉬지 못할 정도라면 필히 그에 관련된 일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손. 손. 손.

         

       “그, 괜찮으냐?”

         

       “괜찮. 아니다. 안 괜찮아요. 토할 것 같아.”

         

       “그러느냐. 그럼 진정이 될 때까지 좀 더 붙잡고 있어도 되느니라.”

         

       “앗.”

         

       어느새인가 청이 저도 모르게 자유의 손을 꼭 붙들고 있던 것이다.

       청이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

         

       자유가 어딘가 아쉬운 표정으로 빈 손아귀를 거둬 다른 손으로 급히 주물럭거렸다.

       안 주물럭거리면 금방 멍이 들것 같아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청의 손아귀 힘이 보통이 아니었던 탓이다.

         

       청 역시 불편해진 분위기 속에서 괜히 남 탓을 했다.

         

       이게 다 사저 호소인 때문이었다.

         

       그때 발작했을 때 안아준 품 안이 너무 따뜻하고 편안해서.

       이후로도 조금만 불안해 보이면 금방 눈치채고 꼭 안아주고 그러니까 조금만 상태가 나빠지면 사람의 온기를 찾게 되잖아.

       나쁜 버릇만 들어가지곤.

       전에는 혼자서 주접이나 떨고 말았는데.

         

       그래도 불안할 때는 누구 한 사람 옆에 있어주는 게 제일이긴 하더라.

         

       소수마공의 부작용 중 하나는 손이 항상 차고 냉기가 흐른다는 것이다.

       장점 중 하나는 손이 항상 차갑기에 타인과 닿아 항상 온기가 느껴진다는 것이고.

         

       청이 남은 손의 온기가 떠나가는 것을 아쉬워하다, 생각해보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도 가족 비슷한 거 있지 않나? 하고.

         

       “더 할 말 없으시면 이만 물러가도 될까요?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래. 고 역시 바빠질 것 같으니.”

         

       자유가 어쩐지 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

         

         

       “얘. 음……. 청아, 야.”

         

       “어? 왜?”

         

       “아니. 왜 그러고 있나 해서.”

         

       멀쩡한 다리 놔두고 왜 남의 품에 덥석 안겨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이게 원래 할아범이 하던 일이야. 다리가 아프면 서 있지 않으면 되더라구.”

         

       배고프면 밥을 먹으면 된다는 식이었다.

         

       당난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배고프다고 밥을 먹여주진 않지 않나?

         

       그러나 최리옹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기에 저쪽은 그냥 저렇게 자랐나 할 뿐.

         

       “잠을 못 잤더니 졸리네. 할아범, 무슨 일 생기면 깨워 줘요.”

         

       “오냐. 밤엔 자야지. 어서 잠들려무나.”

         

       그러고는 용케 기대어 자세를 잡더니 머리를 척 대고 눈을 감는 것이었다.

         

       무슨 일곱 살 어린애도 아니고.

       다 큰 애가 저게 맞나?

         

       당난아가 황당함에 갸웃거리던 고개만 좌로 우로 연신 기울여댔다.

         

       그 모습을 태상가주가 부러움 반, 그리고서 생각하니 남은 반절도 그냥 부럽다는 것을 인정하고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혹시, 하며 당난아에게 슬쩍 다가가 묻는 것이었다.

         

       “아아도 졸리니? 이 할애비가 안아줄까?”

         

       “흥, 누가 애인 줄 알아요?”

         

       “애라니, 네 친구도 보렴. 미인은 잠꾸러기라 하지 않으니.”

         

       “……그래도 창피해.”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청처럼 얼굴이 어지간히 두껍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기예인 것이다.

         

       그에 최리옹이 어쩐지 기세등등 의기양양한 표정이 되어 으쓱거렸다.

         

         

       

       —-

        

        

       “이보게, 당가주.”

        

       “예, 왕야. 말씀하시옵소서.”

        

       “고가 생각을 좀 해보았느니라. 혹시 친왕을 뒷배로 둘 생각이 있거든, 의서를 풀게나.”

        

       의서를 풀어라.

       당가가 연구한 의술을 강호에 풀란 소리였다.

        

       “전하, 하오나 그건.”

        

       의술 역시 전략적 자원이었다.

       같은 중상자라도 뛰어난 의술이라면 되살려 전력으로 보태는 것이니 어찌 자원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고의 이름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이니 너희 가문을 칭송하여 이르는 말이 세상에 드높을 것이거늘. 어찌 저어한단 말이냐.”

        

       “하오나, 왕야.”

        

       “초석 광산에 화약 밀조. 뿐만 아니라 벽력탄도 따로 연구를 한 모양이 아니더냐? 앞으론 대놓고 해도 좋다. 어떠냐.”

        

       앞으로는 몰래 하지 말고 친왕 이름 대고 당당하게 만들라는 소리였다.

       면죄를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실상 대놓고 만들면 그 소유도 친왕에게 간다.

       의술 내놓고 화탄도 내놓으라는 협박이었다.

        

       하지만 꼬우면 역모가 될 일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풀겠습니다.”

        

       “너무 나쁘게 생각하진 말거라. 고가 의술은 잘 모른다만, 혹여 또 모르는 일 아니겠느냐. 당가가 천하제일의가로 불리게 될지도.”

        

       그에 당투죽의 표정도 조금은 나아졌다.

       독 파먹는 독한 놈들에서 천하제일의 의술을 가진 활의들의 가문이라 불리게 되면 또 완전히 기분이 나쁜 것만도 아니라서.

        

       게다가 인제 와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이유야 가주쯤 되는 사람이 모를 수가 있을까.

       이참에 오대세가 중, 아니 구파일방도 찍어누르고 아주 정파 무림의 수장을 먹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고.

        

       “군사를 동원하시려 하십니까.”

        

       “간밤에 흉사로 다들 피곤해 보였으니라. 해가 뜨기 전에 정리가 되어 있을 것이니 그저 해어진 가산을 일으킬 궁리나 해 두거라.”

        

       그러고는 급조한 어좌에 탁 기대어 앉으니 이만 물러가나는 뜻이었다.

        

       당투죽이 떠나고 나선, 지하 한구석 그림자가 비죽이 솟아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왕야. 이건 어떻습니까? 차후에 관부와 무림의 화해 방안으로 역시 혼례만 한 것이.”

        

       “시끄럽다. 구자야. 산중 구석에 처박힌 친왕 하나가 어찌 거창하게 관부를 입에 담겠느냐.”

        

       사천 땅이 천혜의 산봉우리로 둘러싸였으니 산중 구석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다만, 그 구석에서 나는 것이 중원의 반절은 능히 먹여 살리고도 남을 풍부한 물산과 자원을 가졌지만.

        

       청년, 양상구자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죠. 마련하지도 않은 예물부터 입에 담아서야, 아니, 왜 때리십니까. 심지어 아프지도 않단 말입니다.”

        

       “아주 입이 방정이구나. 되었으니 이제 가서 때가 되었다 전하거라. 형님의 자비에 목숨을 기대어 살 수는 없었던 모양이니.”

       

       “견 노가 아주 열심이겠군요. 소원 이루려면 부지런해야 할 테니. 아니, 때리셔봐야 소용 없다 말씀 드렸잖습니까. 걷어차셔도 마찬가집니다, 왕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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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This Murim’s Crazy B*tch

I Am This Murim’s Crazy B*tch

이 무림의 미친년은 나야
Score 4.3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 became a female character in a martial arts game I’ve played for the first time. I know absolutely nothing about Murim, thou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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