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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7

       *

         

         

         석양이 지고 땅거미가 내려앉는 순간부터 늘어졌던 군영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휴식을 취하던 병사들과 기사들이 일제히 무장을 챙기고 모여 들었다. 이반과 일행 또한 질 베르의 뒤를 따라 걸었다.

         

         척, 척, 척. 삼삼오오 모여들던 병사들의 발걸음이 어느새 섞여 하나의 발소리가 되었다. 완벽한 군율과 훈련 상태였다.

         

         입회 기사들은 자연스럽게 흩어져 병력의 외부에서 말을 타고 거닐었다. 가벼운 마보, 병사들의 측면을 방어하는 기동이 물 흐르는 듯했다.

         

         이들의 드높은 사기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이들의 지휘관은 질 베르 드 에타크리히였으므로.

         

         이 땅에서 막시밀리앙을 제외한다면 가장 강한 남자이며 모든 기사들의 정점이다. 호국경이라는 이름의 무게가 그랬다.

         

         

         “나쁘지 않지?”

         

         

         질 베르는 이반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잘난 척하는 꼴이 제법 고까웠지만, 이번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굉장하다.

         

         고급 병력이란 것이 없던 시절의 전장을 떠올려보자면 더욱.

         

         병사들을 훈련하고 투입할 시간 따윈 없었던 멸망 직전의 전선을 상기해 본다면, 이건 어쩌면 평화가 가져온 변화라 보아도 무방하리라.

         

         전투 경험으로 숙련된 정예병이 아니라, 체계적인 훈련과 교범으로 육성된 정예병이라.

         

         

         “품이 많이 들었겠군.”

         “그래도 해야지.”

         

         

         질 베르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는 애정마저 느껴지는 시선으로 그를 따르는 병력을 한 차례 훑었다.

         

         

         “동부전선의 1군단은 진득하게 훈련시킬 시간이 없잖나. 국경을 비울 수 없는 노릇이니. 그리고 그 외의 다른 병력들은….”

         “그래, 각 귀족들의 사병들이지.”

         “맞아.”

         

         

         틸레스는 봉건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구시대적 국가였다. 왕의 군단에 못지 않은 수가 각 영지에서, 각 귀족들의 재량에 따라 육성되고 있다.

         

         왕의 소집령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국가의 장병이 될 이들이다. 그러나 이는 어쨌건, 편제도 병종도 제각기 다른 오합지졸들의 이합집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와중이라, 질 베르는 수도방위병력을 집중적으로 육성해야 했다. 마왕이 죽기 전부터 준비했던 이 군단은, 이제야 비로소 이 정도의 규모가 되었다.

         

         이들을 위한 자원을 마련하는 데에만 엄청난 노력이 들었다. 군대는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돈을 갈아 먹는 집단이니까.

         

         

         “크라실로프는 어떤가? 그래도 여기보단 사정이 낫지?”

         “정보부 요원에게 자국의 정보를 빼가려는 건가?”

         “으하하!! 죽었던 사이에 농담이 많이 늘었군!”

         

         

         질 베르는 호쾌하게 웃었다. 그의 곁으로 말을 몰아 다가온 이자벨이 작게 물었다.

         

         

         “저, 공작 전하….”

         “삼춘.”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사람이 너무….”

         “삼춘.”

         “질 베르 삼춘….”

         “뭐가 궁금하니 우리 벨라?”

         “돌겠네.”

         

         

         이자벨은 이마를 감싸쥐고 끙끙거리다가 간신히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정도 규모의 병사들을 이끌고 계신데, 어, 뭐. 출정 연설이라거나 그런 거 안 하세요?”

         “출정 연설?”

         

         

         질 베르는 으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곧, 그는 웃음기를 지우고 근엄하게 대답했다.

         

         

         “그건 출정할 때나 필요하지.”

         “네?”

         “지금은 사냥이잖니.”

         

         

         자신감 넘치는 얼굴이 너무 재수 없는 걸.

         

         이반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뒤를 돌았다.

         

         그들을 따르는 군대가 각자 들어 올린 횃불 아래에서 빛났다. 잘 관리된 갑주가 횃대 아래에서 붉게 빛나고 있었다. 척, 척, 척. 발 맞춰 걸으며, 정면을 바라보고는.

         

         어떤 걱정이나 의심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용의 입김 한 번이면 백 단위로 사라질 평범한 보병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용이 날뛸 때, 보병이 삼천에서 사천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반대로 말하자면 그렇다. 한 마리의 용은 그 정도의 병력을 지워버릴 수 있다는 뜻이다. 인간이 그 어떤 준비를 하든.

         

         그러나 이들의 눈엔 두려움 따윈 없었다. 안전하게 사슴이나 멧돼지를 사냥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질 베르가 걷는다.

         

         에타크리히 대공께서 앞장서신다.

         

         호국경께서 이 나라를 지키고 계시니, 그의 뒤를 따르는 모든 행보는 곧 이 나라의 수호를 위한 것이므로.

         

         이 군인들은 오직 당연한 일을 한다는 듯 앞으로 걸었다.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각잡힌 걸음으로.

         

         그래, 굉장하군. 이반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정도의 정예한 병력을 그 짧은 시간 안에 육성했다는 것만으로도 질 베르의 능력을 알 수 있었다.

         

         

         “아, 혹시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인가?”

         “다른 녀석들?”

         “왜, 있지 않나. 너희 나라가 찍어낸 그 암살자들 말야. 엔리케가 키운… 크, 그 시절에 우리나라 늙은이들이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알고 있나?”

         “허.”

         

         

         이반은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질 베르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탓에 그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럼 왜 아직도 결혼을 못 한 거지? 그, 누구였더라. 이름이 예쁜 아가씨였는데…. 라…. 라헬?”

         “라엘라.”

         “아, 맞아! 자네가 좋아하던 그 아가씨 말야.”

         

         

         그의 말에 일행 전원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저씨가, 누굴, 좋아했다고?

         

         이반은 메마른 얼굴로 질 베르를 돌아보았다. 질 베르가 그제야 사태를 눈치채고 움찔 떨었다.

         

         

         “죽었다.”

         “미안… 하네. 나는… 너희들이 다 생사를 숨기고 활동하고 있었다고….”

         “죽었다, 질 베르. 모두, 전부.”

         “…내 사과하겠네. 이반. 경솔했어.”

         

         

         이반의 말에 일행이 고요해졌다. 다각, 다각. 말이 대지를 박차는 소리만 이어졌다.

         

         마침내 찾아온 침묵 속에서, 이반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상처는 결국 시일이 지나 흉터가 된다. 죽지 않을 정도의 상처라면, 언젠간 반드시 낫는 법이다.

         

         흉터는, 그러나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김선우는 그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저 자신을 다스리지 못했다. 이반은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다.

         

         라엘라 체레노비카는, 장미를 사랑하던 그 여자는 김선우의 첫사랑이었으니까.

         

         이젠 아니다. 그녀는 죽었고, 돌아올 수 없으며, 그는 더 이상 김선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괜찮다. 흉터란 그의 몸에 이미 충분할 정도로 많다. 이 정도의 상흔은 대수로울 것도 없다. 낡은 흉터가 가져오는 기억이란, 무감각한 과거의 기록에 불과하므로.

         

         그러니까….

         

         이반은 문득 말의 고삐를 움켜쥔 손이 새하얗게 물들어 떨리는 것을 발견하고는 조용히 힘을 풀었다. 으드득, 하며 뼈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렸다.

         

         뻐근해진 손을 풀고, 다시 고삐를 쥐었다. 이제 손 떨림 따윈 없었다.

         

         군단은 베르니니 산맥에 접어들었다.

         

         

        *

         

         

         한두 번 해본 일이 아니라는 듯이, 병사들은 베르니나 산맥의 산자락에서 자연스럽게 흩어졌다. 각각 백 명 남짓으로 이루어진 한 개 제대가 각자 산의 다른 사면을 향해 떠났다.

         

         

         “우리는 따로 이동하지.”

         “아, 그러겠나? 으음… 그럼 이걸 받아가.”

         

         

         질 베르가 턱짓하자 부관이 다가와 원통형 막대를 건넸다. 신호탄이라.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는군. 이반은 아무 말 없이 품에 넣었다.

         

         

         “쓰는 법은 알겠지? 용을 발견하면 하늘에 대고 쏘면 그만이다. 30분 안에 모든 병력이 모여들 거야.”

         “알겠다.”

         “그리고 아까 그….”

         “그만.”

         

         

         이반은 고개를 저었다. 무의미한 일이다. 의도하고 한 말이 아니었고, 전투를 앞두고 마음에 담아둘 앙금도 아니었다.

         

         그는 대신 가만히 팔을 뻗었다. 그 모습에 질 베르는 시원하게 웃으며 마주 팔을 뻗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팔뚝을 꾹 움켜쥐고 떨어졌다.

         

         

         “무운을.”

         

         

         이반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행을 향해 턱짓했다. 제각기 낯빛이 딱딱히 굳은 일행은 말없이 이반을 따라 산등성이에 올랐다.

         

         

        *

         

         

         이 말 많은 꼬마들이 침묵을 유지해준 덕에, 이반은 수월하게 탐색을 시작할 수 있었다.

         

         용의 위치에 대한 탐색은 아니었다. 용은 기본적으로 거대한 생물이었으므로, 드넓은 포위망을 갖추고 조여드는 다수의 탐색에선 어차피 발견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는 그저 질 베르의 의욕이 없던 탓이었겠으나, 오늘은 이제 다르다. 빠르게 사냥을 마쳐야 하는 이유가 있는 이상, 질 베르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을 것이다.

         

         30분 안에 전 병력이 집결하리란 것은 의미 없는 말이다. 신호탄을 발사한 순간 10분 안에 질 베르가 달려올 것이고, 그가 검을 한 번 휘두르면 그걸로 끝이니까.

         

         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줍는 것과 같다. 수도방위군과 동방기사단이 함께하는 이상, 질 베르는 무적이라 보아도 무방했다.

         

         그러니.

         

         

         ‘백작의 첩자를 찾는다.’

         

         

         용을 이 산맥에 몰아 넣은 것이 대백작들의 계략이라면, 질 베르를 향한 감시가 전혀 없을 수가 없다.

         

         그리고 질 베르가 살아서 이 산맥을 벗어나는 순간 백작들의 계획이 모두 무너지는 상황에서, 그 감시역은 모종의 ‘암살 수단’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하겠다.

         

         이반은 일종의, 만족스러운 기대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대체 무슨 수로, 어떤 상상도 못 할 방식으로 질 베르를 처리할 생각이었을까.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고 누가 입안한 계획일까. 어쩌면, 그리고 높은 확률로 알렉산드르의 뒷공작이었을 수도 있다.

         

         마족들과 연합하고 귀족들을 충동질해 봉기를 유도하는 것은 딱, 놈의 취향이었으니까.

         

         어쩌면 이 끈을 타고 알렉산드르를 쫓을 수 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아주 무의미한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복수라는, 무의미한 짓을. 죽은 이들의 무덤가에 바치는 한 송이 꽃보다 무가치하고 가볍기 이를 데 없는 짓을.

         

         이반은 만족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산기슭을 올랐다.

         

         

        *

         

         

         아저씨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이자벨은 말 위에서 시름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다각거리는 말발굽 소리에 맞춰 몸을 천천히 흔들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곁에 있는 엘피헤라와 에시디스 또한 크게 다를 바 없는 몰골이었다. 세 사람은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멍하니 이반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죽음으로 인한 이별은, 반칙이잖아.

         

         그것은 영원히 잊을 수도, 지울 수도 없는. 희미해지지 않는 존재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설령 저 남자의 곁을 차지할 수 있더라도. 평생 이길 수 없는 연적이다.

         

         그래서였을까? 어떤 노력을 다해도 한 번도 바라봐주지 않은 이유가.

         

         세 사람이 침울하게 기가 죽어 있을 때, 오스칼은 조용히 눈을 빛내고 있었다.

         

         

         ‘기사도의 모범이로군.’

         

         

         사별한 연인을 향한 정절이라. 저 정도의 능력을 갖추고, 이렇게 많은 여자들이 자기도 알아볼 수 있을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는 데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더니만.

         

         순명, 정결, 청빈의 복음삼덕은 비단 사제만의 것이 아니다. 편력 수행을 하는 기사들이란 일종의 구도자들, 신부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이들이었으므로.

         

         옛 방식의 기사도를 추구하는 동방 기사단이라면 더욱이 그렇다. 충성과 의무, 정결과 청빈의 서약을 한 뒤에야 입단이 허가되는 구조였다.

         

         동방 기사단의 서훈 기사로서, 오스칼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이반을 바라보았다.

         

         

         ‘얘들아 지금 그걸 고민할 때가 아니야.’

         

         

         유진은 그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봐도 딱 20살 언저리 애들 같아서 보기 좋긴 한데, 저래서야 가능성이 없다. 형님의 곁을 원한다면, 놀랍게도 ‘유용성’을 증명해야 했으니까.

         

         대체 어떤 인간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유용해져야지.’

         

         

         유진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상태창을 켰다. 주위에 다가오는 모든 인물들의 프로필이 언제든 팝업될 수 있도록 조작하며. 이 꼬마들한텐 나중에 좀 팁을 주든가 하고, 일단은 일을 먼저 해야 했다.

         

         형님의 말대로 첩자나 감시자가 접근한다면, 사람의 눈으로 찾는 것보다 더 빠르게 상태창이 찾아내어 줄 것이다.

         

         언젠가 회고했듯이, 유진의 상태창은 최고의 조기경보기나 다를 바 없었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거의 다 왔다.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텨라.
    -가서 사샤한테 한 대 맞죠 뭐. 그래도 외롭진 않을 거예요. 우린, 천국이나 지옥이나 인맥 관리 잘 해놨잖아요?
    -제발, 조용. 피가 더 빨리 식는다. 체레노비카, 제발.
    -중령님은 오래 사세요. 최대한 늦게 오세요. 빨리 오면 하극상 할 거야.

    EP 6. 입학 첫날에 상태창이 열렸다. (3)

    *

    ‘이 시대에 가장 훌륭한 이들 대신 살아남았지요.’
    ‘우리 모두 그렇지.’

    EP 6. 입학 첫날에 상태창이 열렸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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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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