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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7

       눈을 떠보니 리디아의 등 위였다.

       

       “응애.”

       

       “……갑자기 뭐야?”

       

       “리디아 님은 모르겠지만, 저 정말 많은 일이 있었어요. 너무 힘들어요.”

       

       “잘 모르겠지만, 평소의 요나네. 몸은 언제 회복될 것 같아?”

       

       “일단 지상으로 빠져나가기 전까지는 모르겠는데요? 아, 그리고 방금 권능을 얻은 것 같아서 그게 뭔지 알아보느라 잠깐 집중해야 할 것 같아요. 잠깐 괜찮을까요?”

       

       “응. 잊지 않고, 로즈마리도 데리고 올라가면 되는 거지?”

       

       “넹.”

       

       그리 말하고는 리디아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잠시 집중했다.

       

       내면으로 침잠하는 의식. 주변의 소란스러움이 점점 희미해지고, 평소에는 느껴지지 않던 것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심장. 정확히는 그보다도 더 안쪽의 무언가에 단단히 뿌리내린 씨앗.

       

       이를 자각하는 순간 본능적으로 한때 아스테리오스가 받았던 산맥의 씨앗이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권능은 몸이 아닌 영혼에 새겨지는 것이기에 그 효과나 사용법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산맥의 씨앗은 이를 한눈에 알기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떠오르는 정보가 너무 많기 때문.

       

       사랑의 화신 때만큼은 아니지만, 바실리우스랑 비슷한 느낌이려나.

       

       사랑의 화신이 5성이었으니 가챠로 치면 바실리우스나 산맥의 씨앗은 4성쯤 되는 권능이겠지.

       

       난잡하게 새겨진 정보를 주섬주섬 끌어모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 신체에 관한 효과가 대부분이었고.

       

       우선 힘.

       

       근력 강화야 신체 강화의 기본이니 별거 아니긴 한데, 문제는 그 상승 폭이다. 이게 정말 어마어마하더라.

       

       미궁의 성장 시스템은 모든 능력이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쌓은 업적에 따라 대응하는 능력이 성장하는 방식이다.

       

       덕분에 자연스레 자신만의 특화 분야가 생기기 마련인데……지금이라면 동급의 근력 위주 전위와 맞먹는 힘이 아닐까?

       

       이만한 권능을 받아먹고도 동급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시점에서 기존의 내가 얼마나 연약했는지 재차 깨닫게 되어 눈물이 나지만.

       

       그리고 다음은 체력.

       

       땅에 발을 딛고 있는 동안은 자동으로 활력을 보충받아 쉽게 지치지 않는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재생력이랑은 조금 다르다는 점.

       

       재생력은 체력 회복은 물론이고 상처 회복 속도까지 늘려주지만, 활력은 좀 더 체력 회복에 집중된 느낌이려나.

       

       상처 회복 속도도 빠르게 해주긴 하는데, 그 효과가 너무 미미하다.

       

       대신 재생력과 달리 별다른 자원이 필요하지 않다.

       

       재생력은 자신의 상처 부위에 새살을 돋게 하고, 부러진 뼈가 다시 붙도록 도와주지만……이를 위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밥을 많이 먹어 칼로리를 보충하건, 신성력 같은 이능이 됐건 아무튼 모종의 에너지를 신체 수복으로 변환시키는 원리니 당연한 일.

       

       재생력이란 결국 그 변환 효율을 말하는 것이리라.

       

       반면 산맥의 씨앗을 통한 활력 보충은 땅에 스며든 기운을 흡수해 그대로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

       

       변환 효율이 얼마나 좋은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저장 탱크가 어마어마하다는 건 확실하다.

       

       어디에나 널린 것이 바로 땅이고, 드넓은 대지에 저장된 힘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자세한 건 시험해 봐야겠지만, 아마 한동안 육체의 피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

       

       여기까지는 직접적인 신체 능력 향상 효과였다면 마지막 하나는 그 성질이 조금 다르다.

       

       대지의 신이 아스테리오스에게 다른 권능이 아닌 산맥의 씨앗을 준 이유.

       

       성장 한계 돌파.

       

       신체적으로건 이능적으로건 필멸자에게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

       

       그렇기에 모종의 깨달음을 얻어 그릇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고, 미궁이 성장의 기회라 불리는 이유 또한 조금씩이나마 강제로 격을 늘려주기 때문.

       

       산맥의 씨앗은 그러한 미궁의 효과를 상시 적용시키는 것에 가깝다.

       

       그 효율은 썩 좋지 못하지만……다음 층을 돌파하지 않아도, 대단한 위업을 쌓지 않더라도, 희미한 깨달음을 완전히 제 것으로 삼지 못하더라도 작은 구멍이나마 다음으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열려있다는 뜻.

       

       물론 그 과정은 고행에 가까운 길이다. 하지만.

       

       돌을 쌓고, 모래를 쌓고, 흙을 쌓다 보면 결국 산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쌓은 양만큼 고도는 정직하게 상승하리라.

       

       미궁이 있는데 이게 그리 중요한가 싶긴 하겠지. 그러니 알기 쉽게 예를 들자면…….

       

       지금 모험가들이 7층에 막혀있는 이유는 지금껏 미궁을 돌파하며 쌓은 격과 힘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같은 초인들만 모여있는 전쟁의 신도들을 상대로 좀 더 강할 뿐인 몇 명이 완전한 승리를 점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니까.

       

       그러니 모험가들의 전체적인 수준이 오르고, 7층에 도달한 고위 모험가들이 더 많아지기를 기다리는 것.

       

       아마 내가 도착해도 7층의 고착화를 어찌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성장 한계 돌파 효과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시간이 좀 걸릴지라도 7층에서 계속 힘을 쌓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홀로 전황을 바꾸는 경지에 이르기도 하겠지.

       

       …솔직히 5성 스킬이나 권능을 서너 개 더 뽑으면 어떻게든 될 것 같긴 한데 그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니잖은가.

       

       아무튼 당장은 몰라도 나중이 될수록 빛을 발하는 권능이지만……문제는 성장 한계를 돌파하는 과정에서 덩치도 계속해서 커진다는 부작용이 있다.

       

       사실 이걸 부작용이라고 하기도 뭐한 것이, 거대한 몸집은 그 자체로 힘이 되기도 하는 법 아닌가.

       

       지금은 멸종한 거인족이 한때 두려움을 샀던 이유도 그래서고.

       

       뭐어. 원하지 않아도 커진다는 점에서 부작용이라는 식으로 정의한 것 같지만.

       

       아마 대지의 신은 오히려 이를 노리고 아스테리오스에게 권능을 심었겠지. 문제는 내겐 정말 쓸데없는 부작용이라는 것.

       

       평소에도 건장하던 타입이 한층 더 건장해지는 거라면 모를까, 나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미묘해질 가능성이 크니까.

       

       다만, 여기서 예상치 못한 충돌이 발생했다.

       

       사랑의 화신에 있는 외모 고정 효과와 산맥의 씨앗의 한계 돌파 효과가 서로 충돌한 것이다.

       

       두 권능이 잠시 엎치락뒤치락하더니, 권능에 담긴 힘과 격이 한층 더 높은 사랑의 화신 쪽이 우세를 점했다.

       

       즉, 내 외견은 여전히 고정된 채 성장 한계 돌파의 효과를 온전히 누릴 수 있다는 소리다.

       

       “개꿀.”

       

       “깼어?”

       

       눈을 뜨자 이미 안전지대였고, 지상으로 향하는 작은 묘비가 코앞이었다.

       

       등에 나를 업고, 한쪽 옆구리에 미노타우로스의 머리를 끼고 있는 리디아는 반대쪽 옆구리에 로즈마리를 끼고 있었는데.

       

       리디아의 키가 로즈마리보다 작다 보니 그녀의 다리가 바닥에 질질 끌리는 중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축 늘어진 모습이 묘한 가학심을 불러일으킨다.

       

       좋은 집안 아가씨…죽은 눈…저항 없이 늘어진 몸뚱이….

       

       아마 이 남녀역전 세계에서 그 꼴림을 아는 것은 나뿐이 아닐까?

       

       리디아의 허리를 감고 있던 다리 중 하나를 풀어 로즈마리의 엉덩이를 툭툭 건드렸다.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요?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요?”

       

       “있었지. 내가 사람을 잘못 건드린 탓에 동족을 파멸로 이끌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에 몸을 가누기도 힘들더군.”

       

       “이런. 로즈마리는 정말 사람 보는 눈이 없네요.”

       

       “맞다. 이 모든 것이 내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 그러니 화풀이는 나 하나로 끝내주지 않겠나?”

       

       아무래도 내가 조금 전에 미노타우로스를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며 기가 꺾인 모양.

       

       하기야. 여자 믿고 까부는 방울뱀인 줄 알았더니, 혼자 계층 수호자를 쓰러뜨리질 않나.

       

       리디아가 단순히 내게 푹 빠져있는 건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무슨 기사처럼 군말 없이 따르질 않나(이건 역할극의 일종이지만).

       

       무엇보다 엘프 어르신들에게 자신만만하게 계층 수호자를 쓰러뜨리고 오겠다고 했는데, 나한테 스틸 당하기까지.

       

       계획했던 모든 것에 실패하고 역으로 털리기 직전인데 제정신일 수가 없지.

       

       다만, 이건 정말 착각이다. 나는 엘프라는 종족 전체에 별다른 유감이 없기 때문.

       

       애초에 어찌 됐든 이브가 이끌어야 하는 종족 아닌가.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이유로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걱정 마세요. 이브 씨의 얼굴을 보고 나면 그렇게 심한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요.”

       

       “대체 그분께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아아, 세계수시여. 부디 저희를 굽어살피소서….”

       

       울적한 목소리로 짧게 기도하는 녀석. 아직도 엘프 사이에서 세계수는 일종의 심볼이고, 세계수가 들어간 말은 관용구처럼 작동한다는 건 잘 알고 있다.

       

       헌데 로즈마리의 한탄은 그 느낌이 조금 달랐다.

       

       내가 세계수의 권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단심문관도 깜짝 놀랄 만큼 정순한 신성력을 품고 있기 때문일까.

       

       조금 전의 로즈마리에게서는 희미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신앙이 느껴졌다.

       

       “로즈마리는 혹시 세계수 님을 여전히 믿으시나요?”

       

       “당연한 소릴. 엘프 중에 세계수 님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없다.”

       

       “하지만 진심으로 신앙을 바치는 이는 거의 없죠. 하물며 그게 요즘 시대의 엘프라면 더더욱 그렇고요.”

       

       “……맞는 말이군. 나도 내가 특이한 편이라는 건 잘 안다. 하지만 이미 영면에 드셨다 하여 그 위대함이 빛바래는 것은 아니잖은가. 보답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경의를 표하는 것뿐.”

       

       “오.”

       

       어쩐지 이브를 그렇게 신성시하더니, 이젠 얼마 남지 않은 찐 세계수 신도였구만.

       

       발바닥으로 로즈마리의 등을 토닥여 주며 말했다.

       

       “그럼 기대해도 좋을 거예요. 연회 때 제가 좋은 걸 보여드릴 테니까요. 로즈마리라면 분명 마음에 들 걸요?”

       

       “큭…!”

       

       엄청난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이를 가는 로즈마리. 무슨 나라를 빼앗긴 사람처럼 비통해 보인다.

       

       …등에 묻은 신발 자국 때문인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배고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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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7

EP.137





       눈을 떠보니 리디아의 등 위였다.


       


       “응애.”


       


       “……갑자기 뭐야?”


       


       “리디아 님은 모르겠지만, 저 정말 많은 일이 있었어요. 너무 힘들어요.”


       


       “잘 모르겠지만, 평소의 요나네. 몸은 언제 회복될 것 같아?”


       


       “일단 지상으로 빠져나가기 전까지는 모르겠는데요? 아, 그리고 방금 권능을 얻은 것 같아서 그게 뭔지 알아보느라 잠깐 집중해야 할 것 같아요. 잠깐 괜찮을까요?”


       


       “응. 잊지 않고, 로즈마리도 데리고 올라가면 되는 거지?”


       


       “넹.”


       


       그리 말하고는 리디아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잠시 집중했다.


       


       내면으로 침잠하는 의식. 주변의 소란스러움이 점점 희미해지고, 평소에는 느껴지지 않던 것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심장. 정확히는 그보다도 더 안쪽의 무언가에 단단히 뿌리내린 씨앗.


       


       이를 자각하는 순간 본능적으로 한때 아스테리오스가 받았던 산맥의 씨앗이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권능은 몸이 아닌 영혼에 새겨지는 것이기에 그 효과나 사용법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산맥의 씨앗은 이를 한눈에 알기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떠오르는 정보가 너무 많기 때문.


       


       사랑의 화신 때만큼은 아니지만, 바실리우스랑 비슷한 느낌이려나.


       


       사랑의 화신이 5성이었으니 가챠로 치면 바실리우스나 산맥의 씨앗은 4성쯤 되는 권능이겠지.


       


       난잡하게 새겨진 정보를 주섬주섬 끌어모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 신체에 관한 효과가 대부분이었고.


       


       우선 힘.


       


       근력 강화야 신체 강화의 기본이니 별거 아니긴 한데, 문제는 그 상승 폭이다. 이게 정말 어마어마하더라.


       


       미궁의 성장 시스템은 모든 능력이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쌓은 업적에 따라 대응하는 능력이 성장하는 방식이다.


       


       덕분에 자연스레 자신만의 특화 분야가 생기기 마련인데……지금이라면 동급의 근력 위주 전위와 맞먹는 힘이 아닐까?


       


       이만한 권능을 받아먹고도 동급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시점에서 기존의 내가 얼마나 연약했는지 재차 깨닫게 되어 눈물이 나지만.


       


       그리고 다음은 체력.


       


       땅에 발을 딛고 있는 동안은 자동으로 활력을 보충받아 쉽게 지치지 않는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재생력이랑은 조금 다르다는 점.


       


       재생력은 체력 회복은 물론이고 상처 회복 속도까지 늘려주지만, 활력은 좀 더 체력 회복에 집중된 느낌이려나.


       


       상처 회복 속도도 빠르게 해주긴 하는데, 그 효과가 너무 미미하다.


       


       대신 재생력과 달리 별다른 자원이 필요하지 않다.


       


       재생력은 자신의 상처 부위에 새살을 돋게 하고, 부러진 뼈가 다시 붙도록 도와주지만……이를 위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밥을 많이 먹어 칼로리를 보충하건, 신성력 같은 이능이 됐건 아무튼 모종의 에너지를 신체 수복으로 변환시키는 원리니 당연한 일.


       


       재생력이란 결국 그 변환 효율을 말하는 것이리라.


       


       반면 산맥의 씨앗을 통한 활력 보충은 땅에 스며든 기운을 흡수해 그대로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


       


       변환 효율이 얼마나 좋은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저장 탱크가 어마어마하다는 건 확실하다.


       


       어디에나 널린 것이 바로 땅이고, 드넓은 대지에 저장된 힘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자세한 건 시험해 봐야겠지만, 아마 한동안 육체의 피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


       


       여기까지는 직접적인 신체 능력 향상 효과였다면 마지막 하나는 그 성질이 조금 다르다.


       


       대지의 신이 아스테리오스에게 다른 권능이 아닌 산맥의 씨앗을 준 이유.


       


       성장 한계 돌파.


       


       신체적으로건 이능적으로건 필멸자에게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


       


       그렇기에 모종의 깨달음을 얻어 그릇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고, 미궁이 성장의 기회라 불리는 이유 또한 조금씩이나마 강제로 격을 늘려주기 때문.


       


       산맥의 씨앗은 그러한 미궁의 효과를 상시 적용시키는 것에 가깝다.


       


       그 효율은 썩 좋지 못하지만……다음 층을 돌파하지 않아도, 대단한 위업을 쌓지 않더라도, 희미한 깨달음을 완전히 제 것으로 삼지 못하더라도 작은 구멍이나마 다음으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열려있다는 뜻.


       


       물론 그 과정은 고행에 가까운 길이다. 하지만.


       


       돌을 쌓고, 모래를 쌓고, 흙을 쌓다 보면 결국 산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쌓은 양만큼 고도는 정직하게 상승하리라.


       


       미궁이 있는데 이게 그리 중요한가 싶긴 하겠지. 그러니 알기 쉽게 예를 들자면…….


       


       지금 모험가들이 7층에 막혀있는 이유는 지금껏 미궁을 돌파하며 쌓은 격과 힘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같은 초인들만 모여있는 전쟁의 신도들을 상대로 좀 더 강할 뿐인 몇 명이 완전한 승리를 점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니까.


       


       그러니 모험가들의 전체적인 수준이 오르고, 7층에 도달한 고위 모험가들이 더 많아지기를 기다리는 것.


       


       아마 내가 도착해도 7층의 고착화를 어찌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성장 한계 돌파 효과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시간이 좀 걸릴지라도 7층에서 계속 힘을 쌓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홀로 전황을 바꾸는 경지에 이르기도 하겠지.


       


       …솔직히 5성 스킬이나 권능을 서너 개 더 뽑으면 어떻게든 될 것 같긴 한데 그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니잖은가.


       


       아무튼 당장은 몰라도 나중이 될수록 빛을 발하는 권능이지만……문제는 성장 한계를 돌파하는 과정에서 덩치도 계속해서 커진다는 부작용이 있다.


       


       사실 이걸 부작용이라고 하기도 뭐한 것이, 거대한 몸집은 그 자체로 힘이 되기도 하는 법 아닌가.


       


       지금은 멸종한 거인족이 한때 두려움을 샀던 이유도 그래서고.


       


       뭐어. 원하지 않아도 커진다는 점에서 부작용이라는 식으로 정의한 것 같지만.


       


       아마 대지의 신은 오히려 이를 노리고 아스테리오스에게 권능을 심었겠지. 문제는 내겐 정말 쓸데없는 부작용이라는 것.


       


       평소에도 건장하던 타입이 한층 더 건장해지는 거라면 모를까, 나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미묘해질 가능성이 크니까.


       


       다만, 여기서 예상치 못한 충돌이 발생했다.


       


       사랑의 화신에 있는 외모 고정 효과와 산맥의 씨앗의 한계 돌파 효과가 서로 충돌한 것이다.


       


       두 권능이 잠시 엎치락뒤치락하더니, 권능에 담긴 힘과 격이 한층 더 높은 사랑의 화신 쪽이 우세를 점했다.


       


       즉, 내 외견은 여전히 고정된 채 성장 한계 돌파의 효과를 온전히 누릴 수 있다는 소리다.


       


       “개꿀.”


       


       “깼어?”


       


       눈을 뜨자 이미 안전지대였고, 지상으로 향하는 작은 묘비가 코앞이었다.


       


       등에 나를 업고, 한쪽 옆구리에 미노타우로스의 머리를 끼고 있는 리디아는 반대쪽 옆구리에 로즈마리를 끼고 있었는데.


       


       리디아의 키가 로즈마리보다 작다 보니 그녀의 다리가 바닥에 질질 끌리는 중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축 늘어진 모습이 묘한 가학심을 불러일으킨다.


       


       좋은 집안 아가씨…죽은 눈…저항 없이 늘어진 몸뚱이….


       


       아마 이 남녀역전 세계에서 그 꼴림을 아는 것은 나뿐이 아닐까?


       


       리디아의 허리를 감고 있던 다리 중 하나를 풀어 로즈마리의 엉덩이를 툭툭 건드렸다.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요?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요?”


       


       “있었지. 내가 사람을 잘못 건드린 탓에 동족을 파멸로 이끌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에 몸을 가누기도 힘들더군.”


       


       “이런. 로즈마리는 정말 사람 보는 눈이 없네요.”


       


       “맞다. 이 모든 것이 내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 그러니 화풀이는 나 하나로 끝내주지 않겠나?”


       


       아무래도 내가 조금 전에 미노타우로스를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며 기가 꺾인 모양.


       


       하기야. 여자 믿고 까부는 방울뱀인 줄 알았더니, 혼자 계층 수호자를 쓰러뜨리질 않나.


       


       리디아가 단순히 내게 푹 빠져있는 건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무슨 기사처럼 군말 없이 따르질 않나(이건 역할극의 일종이지만).


       


       무엇보다 엘프 어르신들에게 자신만만하게 계층 수호자를 쓰러뜨리고 오겠다고 했는데, 나한테 스틸 당하기까지.


       


       계획했던 모든 것에 실패하고 역으로 털리기 직전인데 제정신일 수가 없지.


       


       다만, 이건 정말 착각이다. 나는 엘프라는 종족 전체에 별다른 유감이 없기 때문.


       


       애초에 어찌 됐든 이브가 이끌어야 하는 종족 아닌가.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이유로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걱정 마세요. 이브 씨의 얼굴을 보고 나면 그렇게 심한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요.”


       


       “대체 그분께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아아, 세계수시여. 부디 저희를 굽어살피소서….”


       


       울적한 목소리로 짧게 기도하는 녀석. 아직도 엘프 사이에서 세계수는 일종의 심볼이고, 세계수가 들어간 말은 관용구처럼 작동한다는 건 잘 알고 있다.


       


       헌데 로즈마리의 한탄은 그 느낌이 조금 달랐다.


       


       내가 세계수의 권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단심문관도 깜짝 놀랄 만큼 정순한 신성력을 품고 있기 때문일까.


       


       조금 전의 로즈마리에게서는 희미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신앙이 느껴졌다.


       


       “로즈마리는 혹시 세계수 님을 여전히 믿으시나요?”


       


       “당연한 소릴. 엘프 중에 세계수 님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없다.”


       


       “하지만 진심으로 신앙을 바치는 이는 거의 없죠. 하물며 그게 요즘 시대의 엘프라면 더더욱 그렇고요.”


       


       “……맞는 말이군. 나도 내가 특이한 편이라는 건 잘 안다. 하지만 이미 영면에 드셨다 하여 그 위대함이 빛바래는 것은 아니잖은가. 보답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경의를 표하는 것뿐.”


       


       “오.”


       


       어쩐지 이브를 그렇게 신성시하더니, 이젠 얼마 남지 않은 찐 세계수 신도였구만.


       


       발바닥으로 로즈마리의 등을 토닥여 주며 말했다.


       


       “그럼 기대해도 좋을 거예요. 연회 때 제가 좋은 걸 보여드릴 테니까요. 로즈마리라면 분명 마음에 들 걸요?”


       


       “큭…!”


       


       엄청난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이를 가는 로즈마리. 무슨 나라를 빼앗긴 사람처럼 비통해 보인다.


       


       …등에 묻은 신발 자국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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