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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78

    ***

    내가 이렇게 아리와 단둘이 얘기하는 게 얼마 만일까.

    ‘나도 잘 모르겠네.’

    그동안 가족처럼 생각했다.

    비록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해도, 아리가 내 곁에 있는 게 너무 당연하다고 느껴질 만큼. 아리는 이제 일상의 일부처럼 다가왔으니까.

    심지어 아리의 성격이 서윤이나 나는 물론이고 그 외의 사람을 만나더라도 자그마한 문제조차 생기지 않았다.

    만난 사람들과도 잘 어울렸기 때문에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생각하면 그런 게 모두 대단한 일인데 말이지.’

    새삼 아리를 다시 바라보게 됐다.

    “……천류화랑 무슨 일이 있었구나.”

    그리고 유화가 아닌, 천류화라는 이름을 입에 담자 나는 그게 굉장히 새삼스러웠다.

    “그렇지. 일이 좀 있었어.”

    “별로 좋지 않은 일이었어?”

    “좋지 않다기보단…… 좀 당황스러웠다고 말해야 할 것 같아.”

    지금도 떠올리면 정신이 멍했다.

    유화가 내게 다가온 것.

    그리고 불현듯 마음을 밝히며 내 입술을 강탈하듯 취했다.

    ‘하아.’

    그게 너무 묘했다.

    사람이 정말 당황하면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게 무엇인지, 난 오늘로 체감한 느낌이었다.

    그런 낌새도 느끼지 못했고, 나도 생각지도 못했다.

    ‘애초에 천류화는…… 내게 천마 천류화였으니까.’

    그녀는 단 하나의 천마였고, 내가 의지하고 기댈 수 있던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리고 이 현대 세상에선 가장 친한 친구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마음을 통할 수 있는 특별한 의미의 친구가 되리라고.

    “…….”

    말없이 빤히 날 바라보는 아리의 눈에 불현듯 생각이 끊겼다.

    마치 내 마음을 꿰뚫어 보듯. 그 상황에 직접 있지 않았음에도 상황을 다 아는 것처럼 그저 날 바라본다.

    “세린아.”

    “어…….”

    그래서 나도 모르게 긴장했다.

    믿을 수 있는 아리인데, 뭔가 오늘따라 달라 보여서.

    “나는 유화가 너에게 어떻게 행동하는 게 딱히 중요하다고는 생각지 않아.”

    “뭐?”

    그리고 내가 생각한 말을 모두 뛰어넘어 아리는 전혀 다른 말을 해왔다.

    “나는 언제나 네 마음, 그리고 네 생각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날 우선시해주는 건 언제나 고맙게 생각해.”

    “널 우선시해서 그런 게 아니라, 유화와 네 관계는 너한테 주도권이 있다고 말하는 거야.”

    흠칫.

    과정을 생략한 말.

    내가 아직 유화가 내게 한 행동을 밝히지 않음에도 아리는 핵심을 짚어왔다.

    “아리야. 너…… 혹시 아는 거야?”

    “유화가 너 좋아하는 거라면 알지.”

    “어떻게……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분명 오늘 처음 재회했을 것이다.

    유화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처음 보게 된 만큼, 어쩌면 아리가 나보다 더 혼란스러웠을 텐데. 정작 아리는 너무 태연해 보였다.

    “그냥 알았어, 유화와 몇 마디 말을 나누자마자 천류화가 있다면 이런 느낌이겠구나 싶었고, 실제로 유화는 자기 정체를 숨기지도 않았지. 이름부터 밝혔잖아. 천류화라고.”

    “……그렇지만.”

    “유화가 너한테 뭘 했는지 난 몰라. 그런데도 하나는 알아.”

    나와 달리 아리가 거침없이 말을 잇는데, 순간 나는 그저 바라보게 됐다.

    꿀꺽.

    침을 삼켜가면서도 잠자코 아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유화가 무슨 마음으로 이 세상에 온 건지, 그리고 나처럼 이 현실에 존재하며 널 마주하고 있는 건지.”

    “…….”

    “그러니까. 네가 지금처럼 유화의 행동에 당황스럽고 휘둘린다고 해도, 나는 쉽게 생각하면 될 거라고 봐.”

    “쉽게 생각하라고……?”

    유화가 내게 갑자기 마음을 표현한 그 상황을 어떻게 쉽게 받아들일까.

    내가 좀처럼 아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그때.

    아리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스륵.

    그리고 내 손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는데, 나는 순순히 그걸 받아들이며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되게 느낌이 달랐다.

    평소 아리는 해맑고 쾌활한 면모를 보인다. 때때로 차분한 모습도 보여주기는 하지만, 대체로 밝은 모습이라 근심 걱정 없이 아리를 편하게 대할 수 있었다.

    아리가 같이 살게 된 초반에 서윤이와 친해진 것도 다 그런 아리의 친화력이 있었기에 그랬다.

    그런데.

    “…….”

    지금은 그 누구보다 진지한 눈빛으로 날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리를 전적으로 믿음에도 나도 섣불리 행동하기가 그랬다.

    별다른 말을 꺼내기도, 그렇다고 다른 행동을 하기에도 모두.

    “혹시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있어?”

    “……어떤 걸?”

    “내가 왜 지난 시련의 끝에서 소원을 이 세상에 오는 것으로 빌었는지.”

    “그거야…… 나는 네가 날 좋아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날 따라오려고 했다고.”

    멍하니 말하면서 작은 주저도 없었다.

    실제로 아리가 내게 평소 보이는 행동에서 여러 애정이 느껴졌다. 얼마나 날 생각하는지도 쉽게 느낄 수 있을 만큼 아리는 평소 나를 입에 담곤 하니까.

    “맞아. 네 생각대로 나는 그래서 이 세상으로 오길 선택했어. 아리케로서 내가 어떤 힘을 갖고 있든, 아니면 그 세상에서 다른 인간과 친해지는 것보다도 세린이 너랑 같이 있는 게 더 행복할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아리야.”

    멍하니 감사를 전하면서도 마음이 묘했다.

    아리가 살며시 고개를 젓는데, 그에 흔들리는 보랏빛 머리칼이 그 어느 때보다 신비로웠다.

    “아니, 고마워하지 마. 오히려 내가 너한테 고마워 해야 할 입장이니까. 그만큼 너는 내게 있어 최우선적인 순위에 있었어. 그리고 지금도 난 그 선택을 후회하지도 않아. 충분히 행복하니까.”

    “…응.”

    조심스레 답한 순간, 손에서 힘이 느껴졌다. 아리가 내 손을 강하게 움켜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세상을 넘어 이 현실에 존재하기에 알듯이, 천류화가 왜 이 세상에 있는지도 알 것 같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라면 이해할 수 있어.”

    “유화를 이해할 수 있다고.”

    “그야 나와 비슷한 마음이니까.”

    툭 내뱉은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마음에 충격이 왔다.

    그 순간 느껴졌다.

    아니, 여태 내가 너무 무감각했던 걸지도 몰랐다.

    아리가 어떤 마음으로 이 세상에 있는지, 그리고 내 곁에 있는지, 그리고 지금도 같이 살아가는지.

    그저 행복하기에 괜찮다고.

    그걸로 충분하다고 여겼지만…….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리는 그럼…….’

    여태 내 곁에 있던 게 전혀 다른 마음이었단 소리니까.

    내 생각보다 더 크고,

    내 생각보다 더 깊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내 곁에 있었다고.

    생각하던 순간 아리가 잔잔히 미소 지었다.

    “세린아, 있지. 나는 말이야 지금까지의 생활이 너무 좋아.”

    그리고 아리가 다시금 내게 먼저 의견을 전해왔다.

    마음을 밝혔지만.

    그 이상을 바라지 않는 것처럼.

    “…….”

    순간 아무런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천류화가 내게 오늘 밝힌 마음.

    그리고 아리가 그런 천류화와 자기가 같다고 마음을 내게 밝히고 있다.

    그게…… 조금도 가볍게 생각할 수 없었다.

    나만 몰랐던 것 같으니까.

    아니, 다른 사람도 설령 몰랐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해했어야 했다.

    나는 반드시 알았어야 했던 아리의 마음을, 나는 그저 속 편하게 생각하고 나만을 생각했으니까.

    “진짜 괜찮다니까?”

    스륵!

    다시금 내 손을 강하게 움켜쥐며 말하는데, 나는 입술을 머뭇거리다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응.”

    그리고 지금의 내 대답은 그것이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대답.

    아리의 마음을 이제 와서 알게 되었다고 해도,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나는 잘 알 수 없었다.

    애초에…….

    가족이라 여겼으니까.

    정말 친한 친구, 특별한 비밀을 공유할 수 있다고 여기며 지난 몇 달 매일같이 함께 식사하고 편하게 시간을 같이 보냈다.

    그런데 그걸.

    “세린아.”

    “아, 으응…….”

    “나 너 정말 좋아해.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고 싶지 않아. 그래서 더 확실하게 말할게.”

    차분히 마음을 표현하는 아리가 보였다.

    “……괜찮아?”

    그런데 나는 그저 묻게 됐다.

    그걸로 괜찮겠냐고. 정말 더 나아가고 싶지 않은 거냐고.

    “괜찮아. 나도 나름대로 고민 많이 했어.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려고 하기도 했고 실제로 그렇게 됐지. 서윤이랑 잘 지내면서 마음이 되게 편안했거든.”

    “그, 그랬구나.”

    유화에 관한 생각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던 게.

    이젠 아리에 대한 생각으로 내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미칠 것 같았다.

    하루 만에 너무 갑작스러운 일들이 연달아 터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너한테 부담을 주고 막 선택하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

    “…….”

    “내가 너 좋아한다고 해서, 선을 넘으려고 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아?”

    “아니, 없었지.”

    “그치? 내가 마음만 먹으면 한밤중에 너 덮칠 수도 있고, 막말로 솔직히 언제든 기회 노리면 솔직히 수백 번도 넘을 만큼 많은 기회가 있다고 생각해. 네가 날 제대로 의식하게 할 수 있는 방법조차 말이야.”

    “……맞아. 그래.”

    멍하니 대답하며, 들려온 아리의 말은 하나같이 진심으로 느껴졌다.

    지금 날 진지하게 대하는 아리가 그렇듯.

    평소 밝고 태평한 모습을 보이지만 차분할 땐 수아의 본성이 보일 만큼, 차가운 면모도 존재했다.

    작정하고 내게 다가오려 했으면, 아마 나는 아리에게 홀렸을 것이다.

    그게 육체적으로든, 아니면 마음으로든 서서히 거리를 좁힌 아리에게 분명 내 마음을 허용했을 거라고, 나는 아주 쉽게 예상이 됐다.

    그만큼 기회가 많았을 테니까.

    “그런데 나는 실제로 그렇게 행동한 적이 없지. 세린아, 넌 왜 그럴 거라 생각해?”

    “……그건 지금만으로도 좋아서?”

    “정답이야.”

    싱긋 웃으며 답하는 아리를 보며 나로선 잘 이해하기 힘들었다.

    ‘정말 날 좋아한다면…….’

    내가 아리의 입장이라면 과연 참을 수 있었을까.

    그 마음을 억누르고, 항상 좋아하는 날 바라보며, 내 곁에서 그저 함께하기만을 원했을까.

    아니었다.

    나는 분명 마음을 표현하고, 더 거리를 좁히려 했을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난 지금이 너무 좋아. 이렇게 너와 대화하는 시간도, 함께 아침, 점심, 그리고 저녁도 같이 먹으며 말을 나누는 시간도. 그리고 서윤이도 그만큼 좋아하게 됐어.”

    흠칫.

    “그래서 만족하게 됐어. 이 생활이 너무 좋으니까…… 굳이 내 마음을 더 표현하고 싶은 욕망이 없었어.”

    “……그래도 되는 거야?”

    나도 모르게 다시 묻고 있었다.

    그걸로 진정으로 만족하는지.

    “응. 나는 만족해. 그런데 그건 나만의 사랑 방식이라고 생각해. 내가 본래 인간이 아니었던 것처럼…… 어쩌면 다른 사람과도 가치관이 좀 다르겠지.”

    스스럼없는 아리의 말에, 나는 조심스레 마음을 내려놓았다.

    고개를 끄덕이고 멍하니 손을 뻗었다.

    와락!

    그대로 아리를 내 품에 강하게 안았다.

    그대로 내 몸에 와닿는 아리의 온기가 느껴졌다.

    “아리야.”

    멍하니 입을 열면서도 지금 이런 내 행동이 옳은 건지 아닌지, 나조차 몰랐다.

    그런데…….

    뭔가 이렇게 끝내버리기엔 내가 너무 비겁하게 느껴졌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밝혀지는 아리의 진심인 겁니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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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eamer Crazy About Slaughter

Streamer Crazy About Slaughter

살육에 미친 스트리머
Score 3.9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After being trapped in the game world for several years, I was transported back to real world. However, my appearance was exactly like that of the character in the 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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