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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8

       139. 후회성녀는 시간을 달린다(2)

       

       

       분명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성숙해졌지만. 그럼에도 상당히 남아있는 옛 얼굴.

       

       이것이 단순한 착각이나 우연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건 다름아닌 율리 본인이였다.

       

       그렇다면 그녀는 대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으며, 기억을 잃고 어떤 삶을 살고 있었는가.

       

       그건 물을 필요도 없이 알 수 있었다.

       

       지하에 위치한 시설.

       그곳의 조명을 반사하면서 찬란하게 반짝이는 금빛의 머리칼. 짙은 푸른색 눈동자까지.

       

       저런 특징을 가지고, 덤으로 이런 시설에 혼자서 멋대로 들락날락거릴 권력이 있는 존재가 대체 얼마나 있겠는가.

       

       황녀다.

       기억을 잃은 율리는 제국의 황녀로서 자라왔음이 틀림없었다.

       

       ‘…3황녀인가.’

       

       1황녀와 2황녀. 그 둘은 제각각 6년 전과 3년 전에 세상을 떠났으니까.

       

       사인도 불명확한 데다가 어째서인지 황족이 죽었는데도 진상규명에 힘쓰긴커녕 사건을 은폐. 

       

       거기에 절묘하게도 두 소녀가 죽음을 맞이한 날짜가 똑같기까지 하니 무언가의 음모가 개입되어있을 확률이 높다. 

       

       자료조사를 부탁했을 때 루비아 씨가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대체 누가 어째서 그런 일을 벌였는지. 똑같은 일이 몇 달 뒤 찾아올 그날에 반복되지는 않을지. 그건 확실히 의문이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였다.

       그야, 지금 나의 눈앞에는 율리가 있었으니까.

       

       제국이 수상하다는 건 명백하기 그지없는 사실.

       

       황제와 교황이 대체 어떤 암계를 꾸미고 있는지는 몰라도, 일단 그녀를 여기 두어서 좋을 게 없다는 것만큼은 명백했다.

       

       ‘여기서 빼내와야지.’

       

       상황을 설명하고 그녀를 납득시킨 뒤 협력을 얻는다. 확실히 그리 간단해 보이는 일은 아니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야 저 아이는 율리니까.

       본 앤 블러드. 그 피폐하고 암울하기 그지없던 세계관에서 유일한 활력소가 되어준 귀엽고 의젓한 딸.

       

       상냥한 데다가 이해심까지 넘치는 게 그녀다.

       분명 친분을 쌓고 신뢰를 얻는 데에도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겠지. 

       

       나는 그런 기대를 품고 율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제대로 안 보고 다녀?! 눈깔은 장식이야?”

       

       인상을 잔뜩 찌푸린 소녀가 나를 향해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는 광경이였다.

       

       순간, 황실에서 생활하면서 들었던 소문에 대한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3황녀의 성격에 관한 이야기들.

       

       어째 불길한 예감이 들긴 하지만….

       아직이다. 아직 속단하기에는 일렀다. 

       

       전방 부주의.

       일단 지금 부딪힌 건 내 잘못이였으니까 말이다. 저렇게 화를 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라는 이야기.

       

       그렇기에 나는 사과와 함께 손을 내밀어 그녀를 일으켜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먼저 그녀가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알만 하네. 네가 시온이지? 잘난 척은 그렇게 하면서 훈수만 두더니 제 아랫도리 간수는 못한 오빠 아들.”

       

       그 말과 함께 아주 천박한 비판이 이어진다. 

       

       싸지르다, 발정, 아무데나 박고 다닌다 같은. 도저히 그 순수했던 아이의 입에서 나온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할 것 같은 말.

       

       내가 그것에 충격을 받고 있는 사이, 저 멀리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황녀쯤 되는 직위. 

       그런데도 곁에 호위 하나 없이 돌아다니는 게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호위가 있기는 한 모양.

       

       다급한 표정.

       황족의 몸에 무슨 이상이라도 생기면 바로 목이 달아날 게 분명한 기사는 창백해진 얼굴로 율리에게로 달려왔다.

       

       넘어진 그녀의 모습을 보았으니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겠지. 어쩌면 주마등을 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화, 황녀님!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십니까!”

       

       충성심보다는 잘못됐다간 내 목이 달아난다는 다급함의 비중이 더 크겠지만. 어찌 되었든 걱정하는 마음이 가득 담긴 목소리.

       

       그것을 들은 율리는….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

       

       인상을 찌푸리며 그리 소리쳤다.

       걱정해주고 있는데 돌아오는 날 선 반응. 당연히 기사는 벙찔 수밖에 없었지만. 율리는 멈추지 않았다.

       

       “귀 먹었어? 귀찮게 하지 말고 꺼지라고!”

       

       더 신경질적으로 그리 소리친 것이다.

       

       변덕.

       아니, 변덕을 넘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날이 서 있는 반응.

       

       그것만을 남기고 소녀는 나와 저 기사를 번갈아서 째려보다가. 뭐가 그리 기분나쁜지 인상을 찌푸리며 떠나갔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귀엽고 의젓했던 딸은 이 10년 사이 아주 제대로 흑화해버린 모양이였다.

       

       *****

       

       또 저질러버렸다.

       아까 소리를 질렀을 때, 저 기사가 그녀를 바라보던 표정은 너무나도 익숙한 부류의 것이였다.

       

       역시나, 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

       아마 망나니 3황녀의 소문에는 오늘부로 이야기가 한 가지 더해지겠지.

       

       그 빌어먹을 오빠.

       승리의 여신에게 축복받기라도 한 듯이 그야말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2황자. 그 탓에 계속해 좁아지고 있던 입지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입에서 제멋대로 신음소리가 흘러나온다.

       다리는 후들후들 떨려서 멋대로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시끄럽게 계속 맴돌아서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리고 그 빌어먹을 머리카락.

       황족의 상징이라는 금빛 머리칼이 빛을 잃고 검게 물들어버린다.

       

       ‘대체 왜…….’

       

       나만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가.

       이런 타이밍에 발작이 일어나는 것인가.

       

       왜 악마가 이런 저주를 하필이면 자신에게 걸어버린 것인가. 

       

       그런 억울함에 자연스레 눈물이 흘러나온다.

       

       여기서 이러면 안 된다. 

       발작의 증세를 느끼자마자, 신경질을 부려 주변 사람들을 모두 뿌리치고 이곳으로 달려오긴 했지만. 그래도 만약의 일이라는 게 있으니까.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안 되었다. 들킬 수도 있으니까.

       

       결국 그녀는 입을 틀어막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 눈물이 흘러나올 뿐이였다.

       

       이런 나날들이 앞으로도 평생토록 이어질 것이라는 걸. 앞으로도 평생 이런 괴로움을 혼자 안고 가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체감하게 되니까.

       

       누구라도 좋으니까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소문은 전부 오해라고. 나라고 좋아서 사람들을 내쫓고 나를 멀리하도록 만드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그럴 순 없다.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으니까.

       

       아직도 기억한다.

       아직 어렸을 때, 그녀의 비밀을 털어놓았던 시종에게 생겼던 일을.

       

       파란 머리의 소녀.

       슬픈 결말로 끝나는 동화책을 읽을 때는, 마지막 페이지를 펼치는 대신 자신이 만들어낸 행복한 결말을 이야기해주던 순수한 아이.

       

       그녀가 처음, 모든 걸 신뢰하고 털어놓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한 상대. 처음 사귄 친구.

       

       그녀는 죽었다.

       아버지의 손에 짓눌려서 죽었다.

       

       찌그러져서, 한 줌 핏물이 되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말했지 않느냐. 저주에 관한 건 숨겨야 한다고.]

       

       그 비밀이 밝혀질 뻔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말하시길, 시종은 그녀의 비밀을 외부에 팔아넘기려고 했다는 모양이다.

       

       그걸 잡아내지 못했더라면 그녀는 저주받은 마녀로서 몰렸을 거고. 사람들의 손에 매달려 죽음을 맞이했을 거라고.

       

       믿을 수 없었다.

       그 착하고 순수하던 아이가 그녀를 배신하려고 했다는 것을.

       

       심지어 마지막 순간. 죽기 직전까지도 나는 그런 건 모른다, 어디에도 말할 생각 없었다며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머리가 혼란스럽다.

       

       정말 그 아이가 나를 배신한 건지.

       아니면 무언가 오해가 있었던 건지. 

       

       이제는 답을 알 수 없게 된 질문에 대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괴로워지기만 했으니까.

       

       허나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기억해라. 저 아이는, 네가 죽인 거다.]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찌그러지던, 한낮 고깃덩어리로 변해버린 소녀.

       

       그 책임이 그녀에게 있다는 것이다.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숨겼어야만 했다.

       

       힘들어도, 누구에게 기대겠다고 생각하면 안 되었던 거다. 그런 추악한 욕심이 친구라고 생각했던 소녀를 죽여버렸다.

       

       그렇기에 소녀는 눈물을 닦아 냈다.

       

       외로운 것도 괜찮다.

       미움받는 것도 상관없다.

       

       잃는 것보단 나으니까. 두번 다시 그런 식으로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으니까. 

       

       아무도 믿지 않으면 배신당하지 않는다.

       소중한 사람이 없으면 소중한 사람을 잃을 일도 없다.

       

       외롭긴 하지만.

       조금 슬프긴 하지만.

       

       그 정도야 받아들이겠다고 예전에 정했으니까.

       

       그러니 괜찮다.

       …괜찮아야 했다. 

       

       그렇기에 소녀는 눈물을 완전히 닦아 내고, 치마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면서 다시금 험난하고 두려운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다시 평소와 같은 하루가 시작된다.

       

       분명 그럴 터였는데…….

       무언가가. 무언가가 아주 잘못되었다.

       

       3황녀는 자기도 모르게 얼빠진 신음소리를 내며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눈을 비볐다. 

       

       허나 그런다고 무언가가 달라질 리 없었다.

       그녀의 눈앞에 비치는 비정상적인 광경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태양빛을 반사하며 반짝거리는 하얀색 머리칼.

       사생아라도 일단 황족이라는 건지, 바다처럼 짙은 푸른색의 눈동자까지.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시온이 그녀의 눈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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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ccidentally Created a Villainous Organization

I Accidentally Created a Villainous Organization

How did you create a dark organization? 어쩌다 흑막 조직 만들어버림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game spoilers turned out to be fake. The characters I gathered thinking they were heroes are actually all villains. In other words, I accidentally created a villainous orga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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