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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 그건…”
“아니라고 말할 생각은 아니겠지.”
“…”
피아의 단호한 목소리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피아를 편리한 도구 취급을 했다는 피아의 말에 과연 나는 떳떳하게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제서야 나는 나와 피아의 관계를 돌이켜보았다.
나는 피아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내 양심에 비추어 피아를 소중하지 않게 생각했느냐고 물어보아도, 한 점의 부끄러움 없이 그렇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을 만큼.
나는 분명히 피아를 소중하게 생각했다.
녹색의 여인에게 구출되었던 그날부터 약 한 달쯤 이어지던 혼자만의 시간.
이 숲에 들어온 이후로, 아니 아마 지금껏 보내온 수많은 나날 중 처음으로 겪었던 혼자라는 고독에 지독하게도 시달리던 그 끔찍한 시간은 피아가 없었다면 견딜 수 없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땐 대화도 나눌 수 없는 여우의 형상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내가 알아차리기 전부터 늘 언제나 내 곁에 있어 준 피아를 나는 분명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다.
“…”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언제부터 착각하고 있던 걸까.
“애쉬는 늘 나한테, 부탁만 해.”
“…”
“궁금한게 있을 때. 필요한 게 있을 때가 아니면, 내게 말도 걸지 않잖아.”
피아는 울먹이며 말했다.
나는 그녀의 질책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피아는 한번 입이 열리자 마치 댐이 무너지듯 그동안 느끼고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야속함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애쉬는 나랑 시간을 보내지도 않아. 맨날 실비아랑 시시덕거리고, 나에 대해선 까맣게 잊고 있다가 필요할 때만 불러.”
“…”
“나도 애쉬랑 얘기하고 싶은데, 같이 산책도 하고 싶고, 같이 놀기도 하고, 같이 낮잠도 자고 싶은데, 애쉬는 이유가 없으면 나를 부르지 않아.”
“…”
“오늘도, 정령을 다루는 법을 익히려고 나를 부른 거였잖아.”
피아의 물기 어린 목소리를 타고 짙은 한탄과 질책이 흘러나와 내 가슴을 마구 두들겼다.
피아는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아주 오래전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리라.
단지 성장을 마친 지금에서야 자신의 슬픈 감정을 온전히 설명할 말주변을 얻었을 뿐이겠지.
나는 죄책감에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대체 언제부터, 피아를 편리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을까.
내가 정령 술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자기 몸에 불을 붙여가며 내 곁을 따듯하게 지켜주었을 때부터?
피아가 내 마법을 증폭시켜준다는 걸 알게 된 후부터?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내가 큰 오해를 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정령 술은 정령을 다루는 게 아니었다.
‘정령 술사가 타고 나야 하는 건 따로 있어.’
‘우리를 마음껏 부릴 능력이 있어도, 우리를 이용할 수 있어도, 동정해줄 수 있는 사람이 정령 술사가 되는 거야.’
‘그런 사람이기에, 우리는 술사를 기꺼이 주인으로 섬기고, 사랑하는 거란다.’
녹색의 여인이 내게 해주었던 말들이 하나씩 하나씩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정령술사는 정령을 다루는 게 아니라, 정령에게 사랑받는 사람이었다.
정령은 단순한 마력이나 무기 같은 것이 아니었다.
정령들은 내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피아는 나를,
필요한 게 있을 때만 자신을 찾는 나를, 사랑해주고 있었다.
“미안해.”
“…크응,”
내 공허한 사과를 들은 피아는 얼굴을 찡그리며 여우의 헛짖음 같은 캥 소리를 내었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와 눈두덩이가 떨리고, 콧잔등이 찡긋거리는 걸 보아,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는 모습이었다.
나는 피아를 천천히 끌어안았다.
말뿐인 사과보다는 내 감정을 더 잘 전해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피아는 양팔을 들어, 내 어깨를 밀어내듯 짚었지만, 그 손엔 아무런 힘도 들어있지 않았다.
축 내려앉은 피아의 귀가 내 목덜미를 간지럽혔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피아를 품에 꼭 끌어안고, 연신 속삭였다.
“미안해, 정말. 정말로 미안해.”
“… 흥,”
“마왕을 잡으러 가야 한다는 생각에 급급해서… 실비아나 앨리스 누나보다는 훨씬 약한 내가 그 두사람을 도우려면 피아의 도움이 필요했으니까… 아니, 아니야. 이건 핑계일 뿐이겠지.”
나는 가증스럽게 튀어나오는 변명을 입술로 찍어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물론 마왕의 부활이 코앞에 다가온 것도 사실이었다.
인류의 희망이 내 손에 달려있다는 것도 과장이 조금 섞여 있긴 해도 완전히 틀린 말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피아를 소홀히 여기거나 함부로 대할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오히려, 세상을 위한다면 조금이라도 더 피아에게, 내 유일한 정령에게 온 정성을 다하는 게 옳은 판단일 것이었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피아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은 적은 없었어… 다만, 내가 너무 취했었나 봐.”
“…”
“한번도 대단한 사람이었던 적 없는 내가 정령을 다루는 힘이 있다는 사실에 너무 취해서… 피아를 함부로 대했어.”
바보 같은 착각이었다.
나는 아무런 힘도 없다.
내게 숨겨진 재능 따위는 없었다.
나는 그저 사랑받았을 뿐이었다.
분에 넘칠 만큼,
“미워.”
“… 응.”
“앞으로는 그러지 마.”
“안 그럴게.”
“약속해.”
“약속할게.”
피아의 귀가 천천히 솟아올랐다.
살짝 눈을 뜨자 피아의 꼬리가 천천히 좌우로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피아에게 말했다.
“피아, 뭐하고 싶은 거 있어?”
“…으응?”
피아의 목소리는 조금 전과 확연히 다르게 느껴질 정도로 밝아져 있었다.
“피아가 하고 싶은 거 다 하자.”
“하고 싶은 거? 뭐든지?”
“응.”
“정말로 뭐든지 다 해줄 거야?”
“아예 불가능한 요구는 들어줄 수 없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해보려고 노력할게.”
피아의 꼬리가 더욱더 세차게 살랑거렸다.
피아는 내 등허리를 꼭 끌어안은 채 잠시 가만히 고민했다.
대체 무슨 부탁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긴장된 마음으로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자, 피아는 이내 곧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건 없어. 그냥 이렇게 안아주고, 말도 자주 걸어주고… 머리 쓰다듬어주고 그러면 돼.”
“…피아.”
“나는 애쉬랑 있는 게 제일 좋으니까.”
“…”
어린아이의 순수한 호의처럼 맑게만 느껴지는 피아의 사랑이 탁한 내 마음에 톡 굴러떨어지는 것 같았다.
진흙에 물 한 방울 떨어져 봐야, 여전히 진흙밭이지만, 피아의 맑고 깨끗한 한 방울의 애정은 진흙투성이인 내 마음속도 조금씩 맑게 중화시켜주는 것 같았다.
나는 벅찬 마음을 애써 숨기며 말했다.
“정말, 그거면 괜찮아?”
“응. 괜찮아.”
“하지만…”
“대신 부탁이 있어.”
“…응?”
피아는 천천히 내 품에서 떨어지며 나를 바라보았다.
피아의 앳된 얼굴에선 보는 이의 심장을 쿵 떨어트릴 만한 귀여운 애교가 흘러넘쳤으나, 그 표정만큼은 사뭇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이렇게 귀여운 소녀를 나만이 볼 수 있다니 조금 아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 귀여운 얼굴에 그림처럼 떠 있는 진중한 표정은 이내 나를 똑바로 향한 채 천천히 그 조그마한 입술을 달싹거리며 열기 시작했다.
“애쉬가 해줬으면 하는 건 없지만, 하지 말아줬으면 하는 게 있어.”
“하지 말아줬으면?”
“응. 불만이 있어.”
불만이 있다는 말에 가슴이 또다시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하긴 없는 것이 이상했다.
아무리 피아가 나를 사랑하는 정령이라 해도, 내 모든 행동이 그녀에게 곱게 보일 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약속했다.
“그 불만이라는 걸 해결해주면, 내가 피아에게 그동안 야속하게 군거 용서해줄래?”
“야속…?”
“…아, 그러니까 내가 섭섭하게 했던 거 말이야.”
“아, 응, 용서할 게 애쉬가 내 부탁만 들어주면.”
“알았어.”
“약속하는 거야?”
“응, 꼭 들어줄게.”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굳게 약속했다.
물론 어느 정도 계산은 되어있었다.
몸에 밴 습관 같은 건 고치기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무언가 해달라는 게 아닌, 무언가를 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니만큼, 노력하면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동안 내가 피아에게 소홀했다는 죄책감을 해소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주지 못할 리 없었다.
나는 굳게 다짐하며 물어보았다.
“그래서, 그 불만이 뭐야?”
“… 어, 막상 말하려니 조금… 그렇네.”
“괜찮아. 내가 그런 거로 피아에게 섭섭해하거나 그럴 일은 없으니까.”
“… 응, 알았어… 그럼 말할게.”
“응, 말만 해줘. 뭐든지 다…”
피아는 내 말허리를 딱 끊으며 대답했다.
“실비아랑 섹스 좀 그만해.”
“… 어?”
“둘이 사랑하는 사이인건 알지만, 그래도 너무 많이 하잖아.”
“… 엇”
“밤마다 그걸 봐야 하는 내 생각도 좀 해줘.”
“…”
아무래도 나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큰 잘못을 피아에게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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