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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8

       *

        “피아. 그건…”

        ​

        “아니라고 말할 생각은 아니겠지.”

        ​

        “…”

        ​

        ​

        ​

        피아의 단호한 목소리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

        내가 피아를 편리한 도구 취급을 했다는 피아의 말에 과연 나는 떳떳하게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

        그제서야 나는 나와 피아의 관계를 돌이켜보았다.

        ​

        ​

        나는 피아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

        내 양심에 비추어 피아를 소중하지 않게 생각했느냐고 물어보아도, 한 점의 부끄러움 없이 그렇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을 만큼.

        ​

        나는 분명히 피아를 소중하게 생각했다.

        ​

        녹색의 여인에게 구출되었던 그날부터 약 한 달쯤 이어지던 혼자만의 시간.

        ​

        이 숲에 들어온 이후로, 아니 아마 지금껏 보내온 수많은 나날 중 처음으로 겪었던 혼자라는 고독에 지독하게도 시달리던 그 끔찍한 시간은 피아가 없었다면 견딜 수 없었을 것이 분명했다.

        ​

        그땐 대화도 나눌 수 없는 여우의 형상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

        내가 알아차리기 전부터 늘 언제나 내 곁에 있어 준 피아를 나는 분명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다.

        ​

        ​

        ​

        “…”

        ​

        ​

        ​

        언제부터였을까.

        ​

        나는 언제부터 착각하고 있던 걸까.

        ​

        ​

        ​

        “애쉬는 늘 나한테, 부탁만 해.”

        ​

        “…”

        ​

        “궁금한게 있을 때. 필요한 게 있을 때가 아니면, 내게 말도 걸지 않잖아.”

        ​

        ​

        ​

        피아는 울먹이며 말했다.

        ​

        나는 그녀의 질책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그러나 피아는 한번 입이 열리자 마치 댐이 무너지듯 그동안 느끼고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야속함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

        ​

        ​

        “애쉬는 나랑 시간을 보내지도 않아. 맨날 실비아랑 시시덕거리고, 나에 대해선 까맣게 잊고 있다가 필요할 때만 불러.”

        ​

        “…”

        ​

        “나도 애쉬랑 얘기하고 싶은데, 같이 산책도 하고 싶고, 같이 놀기도 하고, 같이 낮잠도 자고 싶은데, 애쉬는 이유가 없으면 나를 부르지 않아.”

        ​

        “…”

        ​

        “오늘도, 정령을 다루는 법을 익히려고 나를 부른 거였잖아.”

        ​

        ​

        ​

        피아의 물기 어린 목소리를 타고 짙은 한탄과 질책이 흘러나와 내 가슴을 마구 두들겼다.

        ​

        피아는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

        모르긴 몰라도 아주 오래전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리라.

        ​

        단지 성장을 마친 지금에서야 자신의 슬픈 감정을 온전히 설명할 말주변을 얻었을 뿐이겠지.

        ​

        나는 죄책감에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질끈 감았다.

        ​

        나는 대체 언제부터, 피아를 편리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을까.

        ​

        내가 정령 술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

        자기 몸에 불을 붙여가며 내 곁을 따듯하게 지켜주었을 때부터?

        ​

        피아가 내 마법을 증폭시켜준다는 걸 알게 된 후부터?

        ​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내가 큰 오해를 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

        정령 술은 정령을 다루는 게 아니었다.

        ​

        ​

        ​

        ‘정령 술사가 타고 나야 하는 건 따로 있어.’​

       ​

        ‘우리를 마음껏 부릴 능력이 있어도, 우리를 이용할 수 있어도, 동정해줄 수 있는 사람이 정령 술사가 되는 거야.’

       ​​

       ‘그런 사람이기에, 우리는 술사를 기꺼이 주인으로 섬기고, 사랑하는 거란다.’

        ​

        ​

        ​

        녹색의 여인이 내게 해주었던 말들이 하나씩 하나씩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

        정령술사는 정령을 다루는 게 아니라, 정령에게 사랑받는 사람이었다.

        ​

        정령은 단순한 마력이나 무기 같은 것이 아니었다.

        ​

        정령들은 내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

        피아는 나를,

        ​

        필요한 게 있을 때만 자신을 찾는 나를, 사랑해주고 있었다. 

        ​

        ​

        ​

        “미안해.”

        ​

        “…크응,”

        ​

        ​

        ​

        내 공허한 사과를 들은 피아는 얼굴을 찡그리며 여우의 헛짖음 같은 캥 소리를 내었다.

        ​

        붉게 충혈된 눈동자와 눈두덩이가 떨리고, 콧잔등이 찡긋거리는 걸 보아,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는 모습이었다.

        ​

        나는 피아를 천천히 끌어안았다.

        ​

        말뿐인 사과보다는 내 감정을 더 잘 전해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

        피아는 양팔을 들어, 내 어깨를 밀어내듯 짚었지만, 그 손엔 아무런 힘도 들어있지 않았다.

        ​

        축 내려앉은 피아의 귀가 내 목덜미를 간지럽혔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피아를 품에 꼭 끌어안고, 연신 속삭였다.

        ​

        ​

        ​

        “미안해, 정말. 정말로 미안해.”

        ​

        “… 흥,”

        ​

        “마왕을 잡으러 가야 한다는 생각에 급급해서… 실비아나 앨리스 누나보다는 훨씬 약한 내가 그 두사람을 도우려면 피아의 도움이 필요했으니까… 아니, 아니야. 이건 핑계일 뿐이겠지.”

        ​

        ​

        ​

        나는 가증스럽게 튀어나오는 변명을 입술로 찍어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

        물론 마왕의 부활이 코앞에 다가온 것도 사실이었다.

        ​

        인류의 희망이 내 손에 달려있다는 것도 과장이 조금 섞여 있긴 해도 완전히 틀린 말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

        하지만 그것이 피아를 소홀히 여기거나 함부로 대할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

        오히려, 세상을 위한다면 조금이라도 더 피아에게, 내 유일한 정령에게 온 정성을 다하는 게 옳은 판단일 것이었다.

        ​

        ​

        ​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피아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은 적은 없었어… 다만, 내가 너무 취했었나 봐.”

       

       “…”

        ​

        “한번도 대단한 사람이었던 적 없는 내가 정령을 다루는 힘이 있다는 사실에 너무 취해서… 피아를 함부로 대했어.”

        ​

        ​

        ​

        바보 같은 착각이었다.

        ​

        나는 아무런 힘도 없다.

        ​

        내게 숨겨진 재능 따위는 없었다.

        ​

        나는 그저 사랑받았을 뿐이었다.

        ​

        분에 넘칠 만큼, 

        ​

        ​

        ​

        “미워.”

        ​

        “… 응.”

        ​

        “앞으로는 그러지 마.”

        ​

        “안 그럴게.”

        ​

        “약속해.”

        ​

        “약속할게.”

        ​

        ​

        ​

        피아의 귀가 천천히 솟아올랐다.

        ​

        살짝 눈을 뜨자 피아의 꼬리가 천천히 좌우로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나는 피아에게 말했다.

        ​

        ​

        ​

        “피아, 뭐하고 싶은 거 있어?”

        ​

        “…으응?”

        ​

        ​

        ​

        피아의 목소리는 조금 전과 확연히 다르게 느껴질 정도로 밝아져 있었다.

        ​

        ​

        ​

        “피아가 하고 싶은 거 다 하자.”

        ​

        “하고 싶은 거? 뭐든지?”

        ​

        “응.”

        ​

        “정말로 뭐든지 다 해줄 거야?”

        ​

        “아예 불가능한 요구는 들어줄 수 없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해보려고 노력할게.”

        ​

        ​

        ​

        피아의 꼬리가 더욱더 세차게 살랑거렸다.

        ​

        피아는 내 등허리를 꼭 끌어안은 채 잠시 가만히 고민했다.

        ​

        대체 무슨 부탁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

        긴장된 마음으로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자, 피아는 이내 곧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

        ​

        ​

        “하고 싶은 건 없어. 그냥 이렇게 안아주고, 말도 자주 걸어주고… 머리 쓰다듬어주고 그러면 돼.”

        ​

        “…피아.”

        ​

        “나는 애쉬랑 있는 게 제일 좋으니까.”

        ​

        “…”

        ​

        ​

        ​

        어린아이의 순수한 호의처럼 맑게만 느껴지는 피아의 사랑이 탁한 내 마음에 톡 굴러떨어지는 것 같았다.

        ​

        진흙에 물 한 방울 떨어져 봐야, 여전히 진흙밭이지만, 피아의 맑고 깨끗한 한 방울의 애정은 진흙투성이인 내 마음속도 조금씩 맑게 중화시켜주는 것 같았다.

        ​

        나는 벅찬 마음을 애써 숨기며 말했다.

        ​

        ​

        ​

        “정말, 그거면 괜찮아?”

        ​

        “응. 괜찮아.”

        ​

        “하지만…”

        ​

        “대신 부탁이 있어.”

        ​

        “…응?”

        ​

        ​

        ​

        피아는 천천히 내 품에서 떨어지며 나를 바라보았다.

        ​

        피아의 앳된 얼굴에선 보는 이의 심장을 쿵 떨어트릴 만한 귀여운 애교가 흘러넘쳤으나, 그 표정만큼은 사뭇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

        이렇게 귀여운 소녀를 나만이 볼 수 있다니 조금 아쉽게 느껴질 정도였다.

        ​

        그러나 그 귀여운 얼굴에 그림처럼 떠 있는 진중한 표정은 이내 나를 똑바로 향한 채 천천히 그 조그마한 입술을 달싹거리며 열기 시작했다.

        ​

        ​

        ​

        “애쉬가 해줬으면 하는 건 없지만, 하지 말아줬으면 하는 게 있어.”

        ​

        “하지 말아줬으면?”

        ​

        “응. 불만이 있어.”

        ​

        ​

        ​

        불만이 있다는 말에 가슴이 또다시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

        하긴 없는 것이 이상했다.

        ​

        아무리 피아가 나를 사랑하는 정령이라 해도, 내 모든 행동이 그녀에게 곱게 보일 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약속했다.

        ​

        ​

        ​

        “그 불만이라는 걸 해결해주면, 내가 피아에게 그동안 야속하게 군거 용서해줄래?”

        ​

        “야속…?”

        ​

        “…아, 그러니까 내가 섭섭하게 했던 거 말이야.”

        ​

        “아, 응, 용서할 게 애쉬가 내 부탁만 들어주면.”

        ​

        “알았어.”

        ​

        “약속하는 거야?”

        ​

        “응, 꼭 들어줄게.”

        ​

        ​

        ​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굳게 약속했다.

        ​

        물론 어느 정도 계산은 되어있었다.

        ​

        몸에 밴 습관 같은 건 고치기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무언가 해달라는 게 아닌, 무언가를 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니만큼, 노력하면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

        아니, 오히려 그동안 내가 피아에게 소홀했다는 죄책감을 해소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주지 못할 리 없었다.

        ​

        나는 굳게 다짐하며 물어보았다.

        ​

        ​

        ​

        “그래서, 그 불만이 뭐야?”

        ​

        “… 어, 막상 말하려니 조금… 그렇네.”

        ​

        “괜찮아. 내가 그런 거로 피아에게 섭섭해하거나 그럴 일은 없으니까.”

        ​

        “… 응, 알았어… 그럼 말할게.”

        ​

        “응, 말만 해줘. 뭐든지 다…”

        ​

        ​

        ​

        피아는 내 말허리를 딱 끊으며 대답했다.

        ​

        ​

        ​

        “실비아랑 섹스 좀 그만해.”

        ​

        “… 어?”

       

       “둘이 사랑하는 사이인건 알지만, 그래도 너무 많이 하잖아.”

       

       “… 엇”

        ​

        “밤마다 그걸 봐야 하는 내 생각도 좀 해줘.”

        ​

        “…”

        ​

        ​

        ​

        아무래도 나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큰 잘못을 피아에게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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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Can’t Run Away from the Woman Who Saved Me.

I Can’t Run Away from the Woman Who Saved Me.

나를 살려준 그녀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
Score 4.2
Status: Completed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Having lost all my family, I fled. As I was running away, she saved me when I was on the brink of death due to an accident. The moment our eyes met, I knew I couldn’t leave 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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