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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8

       원인이 뭐 따로 있기라도 하겠어?

        

       하늘이의 표정을 보고, 사실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분명히 어머님과 관련된 일이겠지.

        

       ……나를 그렇게 방치해 둔 어머님이었지만, 이상하게 나에 대한 집착은 또 엄청 강한 사람이었다. 지난번에 나를 따로 찾아왔던 점, 그리고 방 밖으로 나가며 친구들에게 두고 보자고 했던 점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어머님은 나를 ‘사랑’하긴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여전히 가슴 한구석에서는 불길이 일었다. 비록 내가 바라는 사랑이 아니고 다른 형태의 사랑이라고 하더라도, 그 일말의 사랑이라도 바라고 있던 것이 나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나를 지탱해줄 사람들이 있었다.

        

       나와 계속 함께해 줄 사람도 있었다.

        

       갈망이라는 것은 바라보는 방향과 숫자가 바뀔수록 그 강도도 놀라울 정도로 옅어지는 것인지, 내가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로 어머님에 대한 감정은 옅어져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저 방향이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나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체질인 모양이지.

        

       어쨌건, 하늘이는 나에게 그 이야기를 죽어도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일단은 나도 모른 척 넘어가기로 했다.

        

       본인이 말하기 싫다는데 뭐 어쩌겠어.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는 없다.

        

       그 사람은, 지금의 내 상황이 깨지지 않도록 큰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이미 돈이 남아돌면서도 그 돈을 더 키우고, 나아가 회사 내에서의 내 입지를 다져주기 위해 이미 다른 사람에게 주식을 만져달라는 부탁까지 해 둔 뒤였으니까.

        

       그 희희낙락하는 표정이 영 아니꼽긴 했지만…… 그 사람이 믿는 사람이니 믿기로 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노력했으니, 나는 나대로 그 사람이 만들어둔 이 생활을 지켜나가도록 노력해야지.

        

       내가 그 사람보다 우위에 있는 점이 하나 있다면, 바로 ‘기억’일 것이다.

        

       그 사람도 나의 무의식 안에서 기억을 읽고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수년의 기억을 다 보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겠지. 적어도 지금 당장 내 몸으로 튀어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닐 거고.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나는 나의 의식 속에 있는 기억을 모두 제대로 떠올릴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나의 기억’이었으니까.

        

       그 아무것도 없는 기억 속에서, 끄집어낼 만한 추억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한 사람을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

        

       “선배.”

        

       “엉?”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뒤.

        

       4월도 이제 슬슬 그 끄트머리에 다가가고 있었다. 벚꽃은 이제 새잎에 등 떠밀려 거의 다 진 뒤였고, 이따금 봄비가 내려 건조한 날씨를 촉촉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뛰면서 흘리는 땀도 많아졌다. 평소에 운동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그렇게 흘리는 땀이 좀 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리 나쁜 일은 아니었다. 나의 체력은 착실하게 좋아지고 있었고, 처음에는 거의 뛰지 못하던 운동장도 이제는 한 바퀴 정도는 확실하게 돌 수 있었다.

        

       목으로 넘어가는 음식의 종류와 양도 많아졌다.

        

       혼자 먹을 때보다 남들과 함께 먹을 때 더 많이 먹게 된다는 사실도 배웠고, 그 먹은 음식들을 소화하는 데 몸을 움직이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도 배웠다.

        

       물론 몸을 움직이는 것은 여전히 별로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리고, 그렇게 나를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데 큰 공을 세운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내가 방금 부른 남다운이었다.

        

       딱히 체계적인 훈련이었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처음부터 나를 무시하지 않고’ 나를 도와준 사람이기도 했다.

        

       “……잠시, 저랑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언제나처럼 바닥에 뻗어있던 내가 몸을 일으키며 그렇게 말하자, 남다운은 의외로,

        

       “어, 뭐.”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바로 그렇게 대답해주었다.

        

       “아, 잠깐만. 개인적으로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나와 남다운을 따라 일어나려는 세 사람에게, 나는 곧장 그렇게 말했다.

        

       “…….”

        

       세 사람은 내 말을 듣고 잠시 굳어있다가, 이내 이해한다는 듯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마 내가 ‘이 사람에게’ 연애 감정을 품을 일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세 사람이 각각 무슨 생각을 하고 있건 간에, 아마 그렇게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저쪽으로 가서 잠깐 얘기 좀 나눌래요?”

        

       내가 운동장 구석을 가리키며 말하자, 뒤쪽에서 뜬금없이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부장이 우리를 향해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이야, 남다운! 잘해 봐라!”

        

       ……내 친구들도 하지 않을 오해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오해하고 있는 사람 중에는 부장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뒤쪽의 남자부원들이 남다운을 부럽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고, 여자애들은 당장에 이라도 갈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저 사람들이 보기에는 우리가 참 그렇고 그런 관계로 보였던 모양이다.

        

       “…….”

        

       하지만 그런 소란도, 내가 그 사람들을 노려보자 금방 사그라들었다.

        

       부장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바로 딴청을 피우면서 바로 조금 전까지 불던 휘파람보다는 훨씬 소심한 휘파람을 불었고, 다른 부원들은 얼른 공을 하나씩 주워 들고 열심히 훈련하는 척을 했다.

        

       ……내 체력이 어떤지, 다들 알면서도 저런다.

        

       그런 걸 보면 돈이 참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저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던 것도 모두 ‘돈’ 때문이었고, 지금 이렇게 친근하게 굴 수 있는 것도 ‘돈’으로 해결한 거니까.

        

       참 아이러니하다.

        

       “가요.”

        

       그런 사람들을 나와 비슷하게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던 남다운에게 그렇게 말했다.

        

       “어어. 그래.”

        

       남다운은 순순히 내 말에 따라주었다.

        

       *

        

       “선배.”

        

       “어?”

        

       “선배, 저 알죠?”

        

       “…….”

        

       내 물음에, 남다운은 대답 없이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았다. 덜컹, 하면서 음료수 캔이 차례대로 하나씩, 총 두 개 떨어졌다.

        

       그는 그 캔 중 하나를 나에게 건네며 물었다.

        

       “지금도 좋아하냐?”

        

       사과 맛 탄산음료였다.

        

       “글쎄요. 안 먹어본 지 한참 되어서.”

        

       내 몸이 날이 갈수록 약해졌던 것과는 별개로, 나는 저택에서 이런 ‘몸에 나쁠 것 같은’ 음료수와는 가까이 지내본 적이 없었다. 아니, 음료수뿐만이 아니었다. 과자나 인스턴트 식품 같은 ‘몸에 나쁜’ 음식들은 아홉 살 이후로는 먹어본 적이 없었다. 올해 들어 세 친구를 따라다니며 겨우 먹어봤을 뿐.

        

       ……그렇게 나를 아꼈으면, 다른 방식으로 사랑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

        

       “……너는 진짜 너구나.”

        

       남다운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나는 순간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뭘 그렇게 놀라고 있어? 다 알고서 날 찾아왔던 거 아니야?”

        

       “네?”

        

       그가 하는 말은, 내가 이해하기에는 조금 이상한 말이었다.

        

       “나를 처음 찾아왔을 때. 알고서 도움을 요청했던 거 아니었어?”

        

       “네?”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아, 그런가.

        

       ‘내’가 ‘처음부터’ 이 사람과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뇨.”

        

       나는 고개를 저었다.

        

       “떠올린 건 최근이에요.”

        

       물론 내가 말하는 것은 ‘기억’이다. 아무리 그래도 내 안에 다른 인격이 잠들어 있고, 사실 당신을 지금까지 만났던 것은 그 사람이라는 말을 하기는 꺼려졌다.

        

       아무리 이 사람이, 고립되어있던 나에게 처음 말을 걸어줬던 사람이라도.

        

       그리고 그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근본적으로 바뀌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래? 음. 그랬구만.”

        

       읏샤, 하고 근처 벤치에 앉는 그를 따라서 나도 벤치에 앉았다. 단, 평소에 친구들과 앉던 것과는 조금 거리를 둔 채였다.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처음부터 알고 있었죠?”

        

       “그야 당연하지. 니 얼굴이 좀 개성적이냐.”

        

       남다운은 자기 얼굴 앞에서 손을 휘휘 저어보았다. 나는 그런 남다운을 살짝 노려보았지만, 남다운은 그저 가소롭다는 듯 흐, 하고 웃어 보일 뿐이었다.

        

       치익.

        

       캔을 따면서, 그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네가 무슨 상황이었는지 들었던 건 한참 뒤였어.”

        

       “내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그때 표정이 그랬던 거예요?”

        

       그 사람의 기억 속에서, 남다운은 처음 나를 보고 ‘칫’ 하는 소리를 냈었다.

        

       “…….”

        

       남다운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방금 했던 말은 무슨 의미예요?”

        

       “무슨 말?”

        

       손에 들고 있는 캔을 마시지는 않고, 그저 빙글빙글 돌리며 그가 되물었다.

        

       “너는 진짜 너구나, 하는 말.”

        

       “아, 그거.”

        

       나의 질문에, 남다운은 왼쪽 무릎 위에 오른쪽 발을 올리고, 오른쪽 무릎 위에 오른쪽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괴고 앉았다. 손에 들고 있는 캔이 맥주 캔이기만 했어도 완벽하게 양아치의 표본이었을 텐데.

        

       어렸을 때는 체리 맛 탄산이 좋은지 사과 맛 탄산이 좋은지 싸우기도 했던 것 같다.

        

       아니, 사실 첫 만남이 별것도 아니고 티격태격한 거였지.

        

       “이런 말을 하면 믿어줄까 싶은데, 사실 나는 그, 뭐냐. 사람의 근본적인 부분을 보는 재주가 있거든. 너랑 오랜만에 처음 마주쳤을 때는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거든. 아니, 그보다는 뭔가, 좀 다르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분명 얼굴도 너고, 이름도 넌데, 너와는 다르다고 생각했어.”

        

       “지금은 어때요?”

        

       “지금도…… 그때랑은 좀 달라. 어디가 다른지 콕 집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는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야, 손에 들고 있는 음료수를 한 모금 마셨다.

        

       ……솔직히, 저거 뭐가 맛있어서 먹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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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Q악역 영애가 되긴 싫어
Status: Completed Author:
I fell into the single-player game 'If You Wish' and decided to struggle to avoid becoming a villainess with a terrible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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