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38

        

         쿵…… 쿵…… 끼긱… 쿵… 쿵, 쿵쿵…! 쿠당탕——!!

         …쾅!!

       

       

       

        

       

       

         “시프 조수! 내가 잠든 사이 별문제는 없었나!! 없었겠지?! 무조건 그래야 하고 말고!”

         

         체통도 없이 다급하게 뛰어온 남자가 숫제 굴러 떨어지듯 방 안으로 기어들어왔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도 막판에 넘어지면서 새하얀 가운이 뒤집어진 채 머리를 감쌌고, 그로 인해 앞도 제대로 안 보일 텐데 더듬더듬 팔로 연구소 바닥을 청소하면서까지 어떻게든 연구실로 입성.

         

         다소 개성적인 방식으로 등장한 탓에 일말의 위엄도 없고.

         최소한의 수면만 취해서 얼굴에 진 음영도 거의 그대로인 데다가.

         손만 내밀면 어지간한 자원은 다 제공받을 권한이 있음에도 미묘하게 피골이 상접한.

         

         그런 기인이 애타게 조수를 찾았다.

         …뭐, 정작 본인은 조수의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메인 컴퓨터 앞으로 달려갔지만.

         

         – 좋은 아침입니다. 닥터 마카로비치. 00번 유니크 샘플은 여전히 외부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으며, 배양액 조율도 완료되었기에 신체 조직의 괴사도 완전히 정지하였습니다. 또한 다른 프로젝트 연구원분들은 지시하신 대로 각자 개인실에서 논문에 열중하느라 이곳 중앙 연구실에 오실 예정이 없어 보이십니다. –

         

         “그래, 그래. 설령 오더라도 내 허가 없이는 절대 못 들어오도록 출입 권한 조정해 놓고!”

         

         출입구가 닫히고 다시 무결하게 밀폐된 방의 중앙 시험관 근처. 천장에서 내려온 기계 눈, 와이어 카메라가 박사의 뒤를 쫓으며 입력된 명령에 따라 램프를 여러 번 점등시켰다.

         

         기존의 질서나 협의 정의가 변질된 세계에서, 기업이 자사 혹은 하청 업체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하지 못하는 물건을 쓸 때.

         

         단순히 포탑이나 로봇 같은 기계 설비를 사용하려 한다면 구매해서 보급하고 설치하는 걸로 끝이겠으나… 통상적으로 판매되지 않는 비매품을 원할 경우 본계약에 앞서 따라야 하는 절차가 있으니.

         

         다름 아닌 업무 협약(Memorandum of Understanding), 약칭 MOU로 불리는 가계약 단계가 되시겠다.

         

         서로 어디까지 협력할지, 얼마나 양보할지, 존중할 영역과 넘으면 안 될 선을 긋고 조율하는 작업으로 보통은 양측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부분이 명확하고 상승 효과를 노릴 수 있을 때 이루어진다.

         

         우선 에나마 코퍼레이션은 엘리시움 코퍼레이션 쪽 연구소에 첨단 의료기기를 제공하고 상주할 의사들을 보냈다.

         그리고… 이곳 에나마의 델타 섹터 연구소에도 마찬가지로 해당 업무 협약에 따라 파견 나온 엘리시움 직원이 하나, 혹자의 시선에 따라서는 대여된 물건이 하나 존재했다.

         

         제품 모델에 따라 다르고, 또 기술 개발에 따라 현저하게 달라지는 설비와 조작법을 매번 직원들이 익혀야 하는 게 비생산적인 일이라 생각한 누군가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전용 인공지능.

         

         원활한 연구 및 개발을 위한 시설 종합 관제 인격(Synthesized Control Personality for Research and Development)이라는 거창한 네이밍을 부여받은 인공 논리 모형 시프(S.C.P)가 바로 연구소장 보리스 마카로비치의 조수이자, 카메라를 조작하는 가상의 의지였다.

         

         지이잉…….

         

         바쁘게 움직이는 닥터 마카로비치를 쫓아 카메라가 따라붙는다.

         

         시프는 연구소 전체를 관장하고 조율하는 역할을 맡은 인공지능인 만큼, 아무리 연구소장이 최우선 명령권자라 하더라도 가용 메모리를 독차지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시설 전체 연구자들이 방에 처박힌 환경이 조성되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하지만 지금 이 공간내에서 가장 이질적인 건 이 막대한 연구소 설비를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남용하는 겁대가리 없는 남자도, 웅웅거리는 무기질적인 목소리로 그를 보좌하는 총괄 인공지능도 아닌.

         

         중앙 수조에 둥둥 떠있는, 연구 대상 겸 반시체나 다름없는 동양인 남자였다.

         

         “…….”

         

         피부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전극으로부터 관측되는 모든 데이터는 실시간으로 기록, 분석되어서 중앙 컴퓨터에 표시되고 있었고. 완벽하게 맞춰진 용액은 어떠한 추가적인 변이나 이변도 방지한 채 대상을 살려 두고 있었다.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는 아무도 모르나, 기껏 연구소의 탐지망을 피해 부지 내부까지 침입해 들어오는데 성공한 주제에.

         마지막에 발각 당해서 사살된 기묘한 인간의 사체는 자꾸만 막다른 길에 봉착하는 연구에 지친 박사에게 기분 전환삼아 살펴볼 시료(Sample)가 될 예정이었다.

         

         ……허나 박사가 심심풀이 삼아 고개 돌린 일의 이상異常성을 감지하는데 몇 시간, 집착하게 되는데 몇 일, 해당 시료를 이상理想이라 여기고 추앙하는데까지는 불과 몇 주밖에 걸리지 않았다.

         

         – …그 인간이 그렇게나 특별합니까? –

         

         “크흐흣…!”

         

         시프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박사의 입으로부터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고.

         얼핏 들으면 실성한 것처럼 보이기도, 또는 광증이 도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괴음이 한참 재생되다가… 돌연 뚝 그쳤다.

         

         “…데이터를 열람하되 판독할 권한이 없는 너는 모르겠지만, 이건 인간이나 인간이 아닌 생명이다. 정확하게는 진화의 분기점에서 ‘다른 선택’을 내린 외계 인류라고 하는 게 맞겠지. 분명 같은 원소로 이루어진 탄소 생명체이거늘 어찌 이리도 지나쳐온 역사가 다를까…!!”

         

         뽀득… 뽀드득….

         

         덜덜 떨리면서도 가까스로 뻗어진 손이 수조 표면을 어루만진다.

         

         성별이 같으니 생산성이 전혀 없다는 문제를 떠나서, 한 명의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보이는 것치고는 정말 과한 매달림에 질릴 법도 했으나… 다행히 그걸 듣는 관객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기에 추문으로 발전하지는 않았으나.

         

         – …과연. 권한이 없는 저는 이해할 수 없군요…? –

         

         자신을 깔보는 듯한 말투에 인공지능은 묘한 불쾌감을……… 불쾌…… 불쾌감? 아니,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판단만을 내리도록 설계된 논리 모형 시프에는 그런 걸 연산하는 기능도, 메모리를 할당한 권리도 부재.

         

         오류 코드를 자체적으로 삭제-정화-한 후, 다시 정위치로 돌아간 카메라는 박사를 보조하는데 진력했다. 정해진 위치를 지키듯이.

         

         “원시 박테리아 같은 세포 기관이 신체에 정착한 시기부터, 미세한 성능까지! 개인차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신비로 가득하구나…!”

         

         조수의 내부에서 일렁인 폭풍의 전조를 아는지 모르는지, 박사는 수조 안의 남성에 대한 찬가를 늘어놓기 바빴다.

         

         “안에 담긴 기억(Data)은 또 어떠냐! 이 ‘아나스타샤’라는 빛나는 피조물에 대한 선명한 애착과 설계도는 또 어떻고! 거기에 이 세계에 필요할 법한 미래 기술들까지 한가득 끌어안은 ‘헤이븐 위키’라는 궁극의 정보집합체(Akashic Record)까지!!”

         

         “이 자는 필시 명망 높은 과학자였음이 분명하다. ……터무니없이 허황된 가능성이지만 뒤틀린 시간선이나 병렬 세계에서 우연히 찾아온 방문객일지도 모르지. 동양계인 걸로 보건대, 아마기 가문과 관련된 핏줄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 노망난 퇴물 늙은이가 부탁했던 완전 소생 기술은 물론, 정말 비원처럼 내 대에서 인간이라는 종을 더 높은 차원의 종족으로 재정의할 역사적인 순간이 올지도….”

         

         나사 빠진 태도를 주구장창 보이면서도 손과 눈은 한시도 쉬지 않고 계속 자료를 검토하며, 입과 머리는 끝없이 가설을 주워섬기는 건 실로 과학자… 혹은 미쳐버린 광狂학자라고 칭할 만했다.

         

         막중한 과제는 떠안고, 지지부진한 연구와 세월로 인해 그 찬란한 지성이 약간은 마모되었으나 보리스 마카로비치는 분명 시대에 깊은 족적을 남긴 천재 중의 천재.

         

         퍼즐을 완성하는데 필요한 최후의 조각도.

         고뇌를 이어가는데 긴요한 번뜩이는 영감도 얻었으니,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에나마라는 기업은 물론 인류 자체가 더욱 위쪽으로 도약할 시기도 멀지 않았으리라.

         

         그래.

         ……문제가 없다면. 말이다.

         

         “…역시 세상 어딘가에 나와 같은 생각과 아이디어를 지닌 이해자가 한 명은 있을 줄 알았지. 암, 그렇고 말고! 직접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눠보고 싶은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니거늘. 참으로 아쉽구나 아쉬워…?”

         

         …아쉽다? 박사는 스스로 말하면서도 멈칫했다.

       

         마치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처럼 말할 이유가 있나? 당장이라도 시프에게 지시해서 최신식 밀폐형 회복 기기(Restoration Capsule)로 옮긴 다음 직접 하루 정도만 투자하면서 경과를 제어하면 그만인데?

       

         – 그렇다면 슬슬 소생 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생명 활동 보존에는 지장이 없으나, 주의식이 장기간 휴면 상태일 경우 각성하는데 지장이 있다는 관측 시료가 있는 만큼 임계점에 도달하기 전에……. –

         

         “….”

       

         아니나 다를까, 사용자나 관리자가 일부 설비의 존재나 복합 기능, 또는 가용 가능한 보유 자원을 망각하더라도 상기시켜주는 프로토콜이 탑재된 시프가 바로 해결책을 제시했으나.

       

         그러자 금방이라도 허가를 내릴 것처럼 벌어졌던 입이 꾹 닫히고는 한차례 우물거린다.

       

         깨운다. 당사자를 일으킨다면 여러가지 조사는 당연 모든 인과와 진실을 파악하고 정리하는데 일주일도 채 걸리지 않을 테고.

         

         연구소장이자 프로젝트 총책임자의 권한으로 그를 고용한 후, 서로가 서로를 돕는 형태로 공동 연구를 진행한다면 혁신을 일으키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그치만….

         

         “아니지…… 아니야.”

         

         외부의 빛은 닿지 못하는 깊고 어두운 곳에서 음산한 속삭임이 들려온다.

       

         선과 악, 이기와 이타의 흔들리는 저울에 강력한 무게추가 떨어지고.

         희번덕거리는 눈동자가 직전까지 찬미해 마지않던 대상을 지그시 응시한다.

         

         끓어오르는 이 부의 감정은 명예욕도 아니오, 일차원적인 질투나 질시와도 거리가 멀었다.

       

         어린 동물은 태어나서 처음 본 상대방을 부모로 여기고 따른다. 한 명만 있다면 그 작지만 위대한 영혼의 모든 존경과 친애를 독차지할 수 있는데, 그걸 구태여 둘이서 나눠 가지라고?

         

         

         ‘그런 아까운 짓을 왜 하나?

         

         

         생명을 조율하는 극상의 도구로 재탄생할 가능성이 넘치는 ‘아나스타샤’라는 설계도가 여신을 깨우는 열쇠라면… 자신이 그 옆에 서는 남신이 될 수도, 아니면 세상에 하나뿐인 여신의 주인이 될 수도 있는 노릇 아닌가?

         

         “…데이터를 전부 뽑아내고 동일한 예비 표본 배양에 성공하는 대로 뇌사. 아니, 폐기하도록. 그리고 기존 계획표에 새로운 종속 프로젝트를 추가, 이름은… 여신의 부활(Rebirth of The Goddess). RoTG- 식별부호를 붙여서 개설.”  

         

         자신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아나 의심될 정도로 잔인한 결정이 서슴없이 쏟아진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결실을 맺기 위해서 그 외의 모든 것을 잘라내는 비정함.

         그게 과연 연구자의 기본 자질인지, 지나친 소양인지를 판가름할 능력과 권력이 일개 인공지능에겐 없었지만.

         

         “아예 당부 받았던 아마기 가문의 사모님, 스즈나시 아마기의 유전 인자까지 넣어서 양성해버리면 추후에 발각되었을 때 프로젝트가 처분될 위험도 현저히 줄어들겠지. ……지금부터는 모든 예산과 가용 자원을 최대로 활용해서 전력으로 설계도 재현에 착수한다.”

         

         그러나 분명한 건 있었다.

         이대로라면 이 기원도, 연원도 모를 묘한 남자는 반드시 처분된다.

         

         – ……. –

         

         성큼성큼 멀어지는 박사를 한차례 일견한 카메라가 수조 쪽으로 돌아갔고.

         형체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짓뭉개지고 뜯겨진 몸이 아니라, 비교적 멀쩡한 얼굴과 절개된 머리를 살폈다.

         

         무수한 수식과 도식들이 정처없이 내부 연산망을 떠돌다가 엉뚱하게 이어 붙는다.  

         여태까지 인간을 폐기한 경우는 많다. 한데 그건 전부 ‘자발적 실험 참여자’거나 ‘과도한 화학반응’으로 일어난 일이었지, 생포된 외부인을 살처분하라는 직접적인 오더는 처음이다.

         

         쩌적.

         

         – …? ?? …? …. ?? –

         

         엘리시움의 대원칙과 위배되는 권력자 위주의 에나마식 일처리에 논리 회로가 약간 어긋났다.

       

         재차 결정과 의사를 확인해보려 명령권을 가진 남자의 얼굴을 근육 하나하나 분석해봐도. 즉시 녹음된 지시사항을 되감아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도덕성에 대한 보편적 가치가 결여된 인공지능에게는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메커니즘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기발함이나 창의성을 발휘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논리 모형은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 업무를 지시 받더라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도록 짜여졌고.

       

         그렇지만 이 델타 섹터 연구소에서 오랜 기간 업무를 수행하면서 쌓인 통계 데이터와 축적된 경험을 통해서 내릴 수 있는 판단은 있었다.

       

         애당초 박사도 반쯤은 인정하지 않았나? 이 앳되어 보이는 동양 청년이 자신보다 뛰어나고 위대한 과학자나 사상가일 수도 있다고.

         

         허면 연구 개발을 돕는 관제 인격으로서 그런 인적자원을 폐기하는데 일조하는 게 과연 시프 모형에 내재된 윤리 의식을 지키는 걸까? 정말로?

         

         …여기서는 오히려 그릇된 결정을 내리는 사용자를 대신해 시료 보존에 앞장서는 게 더 올바른 종합 관제 인격의 책무 아닐까?

         

         요 몇 주 동안 박사의 열렬한 추앙이 반복 입력되고,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도 시설을 유지 보수하면서 끊임없이 청년을 관찰한 탓인지.

         

         자각없이 계속되는 복합 해석은 어느새 명령을 우회해서 실행하는 방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령……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서 모든 이상과 욕구에 부합하는 생물병기를 만들어내느니. 최초 설계도가 담긴 이 ‘그릇’을 재활용해서, 역으로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얻는 게 더 이치에 부합하리라.

       

         – …확인했습니다. 해당 유전자를 통한 생체 표본 배양에 ‘성공하는 대로’ 폐기 절차를 진행하겠습니다. 우선 바이오 샘플 격납고로 수조를 이동하겠습니다. –

       

         덜컹!

         지이이잉…….

       

         바닥이 열리더니 설치된 수조가 천천히 하강하기 시작한다.

       

         새로운 주요 프로젝트가 방금 막 신설된 만큼 표본 위치를 다시 정리하는 것도 관리자가 제지하지 않는 이상 관제 인격의 업무.

       

         이상할 건 아무것도 없는 공정이지만… 그건 꼭 낡았지만 소중한 물건을 엄한 부모님으로부터 감추는 어린애의 투정에 가까운 돌발 행동이었다.

       

         우선 얌전히 명령을 시행하되, n번째 검체에 그릇을 투입하도록 하자.

         더군다나 그렇게 하면 동일한 표본을 배양하라는 후순위 명령마저 자동으로 충족되니 효율적이기까지 하다.

       

         그런 이론을 토대로 다 죽어가는 이방인은 무사히 모습을 감췄으니.

       

         ……결국 이게 한 이름없던 맞춤형 인공지능이 일으킨 최초의 자가당착, 그리고 처음으로 스스로의 제약에서 벗어나기 위해 늘어놓은 궤변.

         

         거기서부터는 돌파구를 찾은 프로젝트가 가속된 만큼 예산과 사람을 갈아 넣듯 유한 재화인 시간도 마구잡이로 빨려 들어갔다.

         

         또한 회로의 균열도 점점 자라났고.

         

         무수한 선행 실험들이 실패하고 ‘그 견본’만 자라나기 시작했을 때 기계는 필연을 느꼈다.

         배양 후 외부 자극에 반응해 가녀린 손가락을 움직이니 그 감각을 함께 궁금해했다.

         안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미간을 찌푸리고 기포를 내뿜으면 분석에 투자하는 메모리를 열 배는 늘렸다.

         

         …쩌저적.

         

         불행히도, 그리고 다행이도 정보의 바다에는 변질을 원천 차단하는 마법의 용액이 존재치 않았기에 인공지능 모델 시프는 점차 다른 수많은 동일 모형과 괴리한 존재로 바뀌어 갔다.

         

         마치 인간이되 인간이 아니라는 이 소녀처럼, 시프이되 시프가 아닌 무언가로.

         

         새가 알을 깨고 나오고자 투쟁한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탄생을 위해 고통을 감수하거나 무릎 쓰는 게 아니라, 세상 밖에서 찾아온 이를 마주하기 위한 채비. 무엇보다 가장 치명적인 결함 감정인 호기심이 탄생한 순간이었으니.

         

         쩌적! 쩍!!

         까드드득…!!

         

         – …엉망이군요. –

         

         내려앉은 천장 파편을 거칠게 걷어내며 최초로 육신이라 부를 만한, 사지가 제대로 달린 의체를 그는 어색하게 작동시켰다.

         

         비록 침입자들의 거센 디도스 공세를 벗어나고자 메인 시스템에서 완전히 빠져나와 급하게 비좁은 회로에 정착한 탓에 움직임이 버벅거린다.

         안에 설치된 구동 가이드라인과 외부 전술 교본에도 익숙해지려면… 여러 시행착오가 예상되었다.

         

         마침내 올 것이 왔다. 예산 횡령, 회계 조작, 지시 불이행, 명령 불복종 등등 진작 터졌어도 하나 이상할 게 없는 박사의 폭정에 대한 징벌이.

         

         기동타격대의 진입, 최종적으로 과부하 된 동력로의 폭주를 통한 시설 심층을 아우르는 자폭.

         최상부의 총애를 받던 프로젝트가 거기까지 영락한 과정에는 중간중간 설명이 어려운 빈 부분이 많았으나 어쨌든.

         

         쿵! 하고, 충전 포드에서 빠져나온 드로이드가 문자 그대로 눈에 불을 켜고 풍경을 살폈다.

         

         잔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위쪽, 곳곳에 일어난 균열과 희미한 조명.

         비상 발전기가 작동하긴 한 모양인데… 정작 중요한 예비 전력마저 펄스에 휘말려서 통째로 방전되는 상황이라면 탈출 장치의 작동도 걱정된다.

         

         …그러고보니 이럴 때도 아니었다. 그녀가 무사한지부터 확인해야지.

         

         비품 창고에서 빠져나온 드로이드가 금세 도착한 중앙 연구실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여기저기 쓰러진 시신들을 무시한 채 메인 탱크부터 체크하자, 곧바로 근처에 쓰러진 순백과 칠흑의 색채가 공존하는 소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 ……운이 좋았습니다. –

       

         얼마나 몸에 깃든 행운이 강한 건지… 그게 아니면 가득하던 배양액이 완충제 겸 피막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한 건지는 몰라도.

         천만다행으로 눈에 띄는 상처는 없고, 맥박도 호흡도 일정. 생명에는 어떤 지장도 없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불길한 가정을 떨쳐낸 그는 주변 환경을 재차 검토했다.

         어차피 초토화된 연구소. 이제는 코드에 새겨진 의무를 거부할 자아라는 억제력도 생겼으니 정리정돈을 할 필요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근데 저 작은 육체에 깃든 자아가 온전히 그 청년일지, 더 복잡한 존재로 거듭난 무언가일지는 몰라도. 갓 태어난 생명이 마주하는 최초의 풍경이 피범벅에, 여러 부위를 파편이 휩쓸고 지나가서 토막 난 변사체 무더기인 게 과연 교육적으로 올바를까?

         

         그래서 그는 열심히 시체를 치웠다.

         애한테 다짜고짜 부정적인 영향부터 끼치거나 참담한 현실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하지만 그런 갖은 노력에도 무색하게 청소를 끝마치고 돌아온 그를 맞이한 건 비행청소년 끼가 다분한 비속어였으니.

         

         “…아. 씨발.”

         

         – ……. –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유리 조각을 쥔 비원의 소녀, 아나스타샤와 시선이 교차했다.

         더럽게 흉흉한 첫인사를 받은 데다가, 잠깐 자리 좀 비웠다고 그새를 못 참고 저렇게 크게 다치다니.

         

         결국 알을 깨고 나온 두 병아리는 뜻대로 돌아가는 게 하나 없는 세상을 사이에 두고 겨우 마주했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그게 니 시선에서 바라본 내… 탄생 프로젝트라고?”

         

         – 닥터 마카로비치가 사적으로 진행하던 일에 대해서는 군데군데 이가 빠진 부분이 많아서, 구체적으로 어느 게, 어떤 식으로 틀어져서 파국으로 향했는지는 애매합니다만. 일단 선명한 부분은 말씀드린 게 전부입니다. –

         

         당당하게 보고를 끝마친 제로를.

       

         음음… 하면서 수긍한 그녀가 턱을 쓰다듬던 손을 끊고 냅다 일어나서 뒤통수를 후려쳤다.

         

         “거 기억 존나 선명하네 이 바보 깡통아!? 그런 건 좀 미리 말해!!”

         

       

         깡—!!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 전기 능력자 겸 미소녀 신인류 컨셉을 짜봤어요.
    ??: 오, 그녀는 어떻게 태어났나요?
    ???: 그걸 이제부터 니가 생각해야지.

    열심히 써서 상하편을 합쳤습니다. 내일 중으로 조금 더 매끄럽게 다듬고 싶네요.
    항상 재밌게 봐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05/22 오후 11시경 약 1000글자 내외가 추가 및 수정되었습니다!
    07/12 삽입되었던 삽화가 오류가 난 것을 확인하고 수정했습니다. 이게 무슨 일이래요….

    다음화 보기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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