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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86

    ***

    강수였다.

    그것도 초강수.

    충격에 휩싸인 세 사람을 보면서, 나도 내가 터트린 발언의 무게감을 실감했다.

    ‘비겁한 행동이지.’

    그리고 이게 얼마나 비겁한 지도 알았다.

    내가 지금 세 사람을 강제로 설득하려 하는 건지.

    그야 진실을 교묘히 왜곡하여, 세 사람으로선 당장 내 의견을 거부할 수 없게 만들었다.

    오직 나만이 알 수 있는 진실을, 그저 이 상황에 좋게 사용하며 설득력을 부여했다.

    유화가 내게 있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내가 그녀를 왜 거절할 수 없는지도.

    그것도 내 목숨을 빌미로.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세 사람에게 나는 사실상 강요하는 거였다.

    이래도, 내가 유화를 거절할 수 있겠냐고.

    ““…….””

    완전히 말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사이, 나는 그저 세 사람을 차례대로 응시했다.

    여전히 내 폰을 쥔 채 진료 기록을 확인하는 은하 씨는 세세히 확인하려는 듯했고, 그 곁에 살며시 몸을 붙인 유정 씨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따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그 눈엔 거대한 충격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건 은하 씨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마 나와 꽤 자주 만났다고 생각할 것이며, 나와 연인이 된 지금 나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이해했다고도 여겼을 것이다.

    그야, 그만큼 서로가 가까워졌으니까.

    그런데 저 진료 기록만큼은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을 게 분명했다.

    “……너무 충격받지 마요. 나 지금 정말 괜찮으니까, 두 사람도 날 보면 알잖아요. 이제 내가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을 수준으로 평범한 삶을 산다는 거.”

    그래서 조심스레 말을 이어야 했다.

    충격받은 두 사람이 조심스레 마음을 추스르길 바라며.

    두 사람이 그토록 사랑하는 내가, 불과 1년 전만 해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진료 기록들이 수십 개가 넘으며, 하루에도 수십 개의 약을 먹어야 겨우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건 아무래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 테니까.

    “전 지금…… 믿기지 않아요.”

    “하아.”

    유정 씨의 충격받은 대답.

    그리고 짙은 은하 씨의 한숨이 교차한다.

    그에 나는 조심스레 웃으며 제 뺨을 어루만질 뿐이었다.

    흘깃 수아를 바라보자, 웨이브 진 머리칼 사이 입술을 머뭇거리는 게 보였다.

    “…….”

    그러다 내 시선을 마주하자, 그대로 고개를 푹 숙였다.

    마치 눈을 마주치기 힘들다는 듯.

    ‘어지간히 충격받은 거겠지.’

    수아는 일찍이 내 진료 기록을 알았어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건 매한가지일 것이다.

    과거의 ‘내’가 얼마나 정신적으로 몰려 있었는지 유일하게 수아만이 안다. 과거 합방에서 내 발작 증상을 유일하게 아는 지켜본 사람이 바로 수아니까.

    그리고 그래서 더 차가움을 비추지 못하는 거였다.

    내가 밉고, 원망스럽고, 너무 서운할 텐데도.

    내 건강에 관한 것만큼은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정말 얼마나 비겁한 행동일까.’

    그래서 다시금 내 행동에 대해 체감했다.

    유화를 받아들이는 이유로, 내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을 벌이는지.

    그런데, 난 그렇게라도 해야겠다.

    유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그리고 세 사람을 절대 놓아주고 싶지 않으니까.

    그걸 위해서라면 거짓조차 스스럼없이 입에 담을 것이다.

    ‘필요하다면.’

    교묘히 진실을 비트는 짓도 나는 이제 스스럼없이 할 수 있다고 깨달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변한 거였다.

    “……계속 보실 거예요?”

    나는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진료 기록은 볼 만큼 다 봤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계속 내 폰의 액정을 터치하며 진료 기록을 확인하는 건 그만큼 믿기지 않아서 그런 걸 테니까.

    “돌려드릴게요.”

    조심스레 은하 씨가 내게 폰을 내밀자, 유정 씨의 멍한 눈이 보였다.

    툭.

    그리고 나는 은하 씨에게서 내 폰을 회수하면서도 새삼스레 시선이 갔다.

    “…….”

    빼곡하게 나타난 진료 기록들.

    거의 달마다 정기적으로 찍혀 있는 여러 진료 기록은 의심할 여지 없이 내 과거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것도 나조차 모르는 내 과거지.’

    진정한 의미의 ‘한세린’이었을 내 과거라 할 수 있지만, 나는 지금 이 과거조차 이용하고 있었다.

    지금의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하니까.

    그리고 실제로 발작 증상과 정신적 한계를 겪어본 나는 그 누구보다 ‘한세린’에 대해 잘 알았다. 과거의 삶은 절대 순탄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굉장히 힘들고 버거운 삶을 살았을 거라는 것 역시도.

    그래서 더 떳떳해지고 싶었다.

    그런 내가 더 행복을 위해서라면. 불행한 내 과거조차 과감하게 사용하겠다고.

    “많이 심란하실 거라 생각해요. 여태 밝히지 않은 제 과거기도 하고…… 사실 치부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그만큼 밝히지 않고 세 사람이 절 미워하지 않을 이유를 찾을 수 없었어요. 이제 제가 왜…… 유화라는 여자를 거부할 수 없는지 이해하실 거라 생각해요.”

    그리고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이 진료 기록이 있기에 유화는 더없이 내게 필요한 존재라고.

    “……예. 이해했어요.”

    아직도 충격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유정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린 언니, 대체 왜…… 왜 우리에게 먼저 말 안 했어요. 이런 깊은 사정이 있었으면 먼저 설명해줬어야죠. 천류화라는 분이…… 그렇게 큰 의미를 지닌 분이었다면, 저도 언니에게 이렇게 상처 주는 말은 안 했을 거예요.”

    크게 떨리는 수아의 음성은 아주 조심스럽게 내게 닿았다.

    불과 조금 전까지 보여주었던 차가움, 내게 완전히 정을 떼려는 듯한 그 모습이 거짓말처럼 태도가 급변했다.

    “하아. 그 유화 씨랑은…… 저희 언제 만날 수 있을까요. 제대로 만나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보고 싶어요.”

    끝으로 은하 씨의 차분하고 담담한 음성이 공간을 울렸다.

    그 순간 나는 조금 놀라게 됐다.

    날 바라보는 은하 씨의 두 눈은, 나로서도 처음 보는 눈을 하고 있었다.

    진지하고 또 더없이 차분하다.

    유정 씨처럼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것도.

    수아처럼 감정에 휩싸여 자신을 추스르려 하는 것도 아니었다.

    가장 현실을 바라보고 유화를 마주하려 한다.

    그 두 눈 속에 날 올곧이 담고 있자, 나는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어쩌면 지금 가장 충격받은 건…….’

    유정 씨도, 수아도 아닌 은하 씨가 아닐까ㅡ 하고.

    “저도 최대한 빨리 유화에게 연락을 전해볼게요. 그리고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정식으로 소개할게요. 그리고 저도…… 이렇게 갑작스레 유화에 관해 말을 전하게 돼서 진심으로 세 사람에겐 미안하게 생각해요. 제가 결코 세 사람을 기만하거나 아무렇지 않게 여자를 늘리려는 건 아니었어요.”

    조심스레 사과를 전하면서도 나는 마음이 좀 묘했다.

    더없는 진심이었다.

    그런데 그 진심에 거짓이 뒤섞여 있으니, 마음이 그저 편하지는 않았다.

    “……세린 씨, 전 충분히 이해해요.”

    “맞아요. 이건 이해할 수밖에 없죠. 하아, 저도 진짜 놀랐는데 이렇게 힘들 때 곁을 지켜주었으면 도저히 거절할 수 없으니까요.”

    은하 씨와 유정 씨의 대답.

    그리고 끝으로 이번엔 수아가 조심스레 숨을 고르는 게 보였다.

    “세린 언니.”

    “응. 수아야.”

    “……오늘 너무 화내서 진심으로 미안해요. 그리고 제가 날이 선 말을 한 것도…… 이젠 스스로가 좀 부끄러울 정도예요. 전 언니에게 그런 사정이 있는 줄도 모르고 제멋대로 오해하고, 언니에게 실망했었으니까요.”

    “아니야.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이건 내가 이기적으로 내 사정을 강요하는 거니까.”

    그런 내 말에 수아는 자신의 눈가를 살며시 훔치곤 깊은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더없이 투명한 눈으로 날 마주쳐왔다.

    “이건 강요가 아니라 그냥……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전 실제로 세린 언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직접 눈으로 봐서 아는데 제가 어떻게 유화 언니와의 관계를 반대하겠어요.”

    날 진지하게 생각해준 수아의 마음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렸다.

    “수아 씨는 실제로 본…… 거예요?”

    “네, 은하 언니. 전 몇 달 전에 세린 언니와 합방하면서 이 진료 기록에 나와 있는 증상을 조금이나마 봤어요.”

    “그런…… 세린 씨 그때 괜찮았던 거예요?”

    유정 씨가 다급히 묻는데, 난 그저 바라보게 됐다.

    힐끔 날 바라본 수아가 어색하게 웃는데,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제가 보기엔 전혀 안 괜찮았어요. 저로서도 처음 보는 언니 모습이었거든요. 아마 두 언니도 상상조차 가지 않으실 거예요. 평소 여유롭고 부드러운 세린 언니가 겁에 질린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광경이 얼마나 두렵게 보이는지…….”

    “수아야.”

    나도 모르게 그만 말을 건네야 했다. 이제 이 이상의 설명은 불필요했다.

    두 사람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으니까.

    “이건 전 제대로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때조차 세린 언니 증상이 많이 완화된 거잖아요? 과거엔 훨씬 심했던 거니까.”

    “……그건 그렇지만.”

    “그러니까, 제가 더 설명해야죠. 언니가 얼마나 심각한 상태였는지 서윤이도 모르는데, 저만 알고 있던 거잖아요.”

    “…….”

    순간 입을 다문 채, 나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저는 찬성이에요. 천류화라는 여성분. 그러니까 세린 언니가 가장 힘들 때 곁에서 언니를 지탱해준 사람이라면. 그것도 언니가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구해줬다고 말할 사람이라면, 전 반대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젠 오히려 확고하게 의견을 전하는데, 나는 조금 정신이 멍했다.

    결과로 보면 분명히 같다.

    천류화는 실제로 블랙 아크에서도, 그리고 이 세상에서도 내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해준 은인 중의 은인이었고, 내가 가장 힘들 때 날 지탱해준 존재라고 충분히 볼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 과정이 너무나도 달랐다.

    “……나도 찬성할게요.”

    “저도, 저도요!”

    은하 씨와 유정 씨마저 연달아 내게 그 뜻을 밝혀오자, 나는 그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고마워요. 정말…… 세 사람 모두 고마워요.”

    그래도 이 말만큼은 진실이었다.

    ‘내가 어떻게 이 세 사람과 인연을 맺게 되었을까.’

    이건 정말 다시 없을 천운이자, 내가 평생 감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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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eamer Crazy About Slaughter

Streamer Crazy About Slaughter

살육에 미친 스트리머
Score 3.9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After being trapped in the game world for several years, I was transported back to real world. However, my appearance was exactly like that of the character in the 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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