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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87

    ***

    1월 23일 일요일.

    하루가 지났다.

    가히 폭풍과 같은 하루였고, 내 삶을 통틀어 그렇게 수많은 생각을 했던 하루가 있을까 싶은 하루기도 했다.

    사르륵.

    시야를 어지럽히는 은발을 더 거칠게 헝클어트렸다.

    “…결국, 잘 된 거라고 봐야 할까.”

    무심코 중얼거리게 됐다.

    어제 세 사람과 만나서 내가 했던 언행들이 과연 옳은 것이었을까 하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나는 좀처럼 마음을 바로잡지 못했다.

    뭐라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 뒤섞이고 뒤섞여서 정신은 줄곧 멍했으니까.

    그리고 하루가 지난 지금.

    제 얼굴을 감싸 쥐면서도, 마음은 꽤 기울어 있었다.

    그 상황에서 내 최선이었다고.

    진료 기록을 밝히는 것으로 여론을 완전히 뒤집었고, 세 사람에게 유화에 대해 완전한 인정까지 받아냈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내가 세 사람을 만나기 전에 생각한 그 어떤 결과보다 훨씬 잘 풀렸다.

    단지 그 과정이 무척 찝찝할 뿐.

    “좋게 생각하자.”

    무거운 숨을 토해내며, 마음을 조금 비웠다.

    오늘은 천류화와 만나 그 정당성을 부여해야 했다. 지난 1년 전까지, 내가 여러 병을 앓았고 그사이 천류화와 내가 함께했다는 사실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관계가 원만해질 테니.

    “거짓말이 거짓말을 부른다고 하더니.”

    그 말이 확연히 체감됐다.

    아무리 필요한 거짓말이었어도, 결국 거짓은 거짓이었다.

    스륵!

    상체를 일으켜 가면서도 눈을 비볐다. 어찌 된 게 나는 최근 며칠 제대로 잠을 이룬 적이 없었다. 어제 늦잠을 잔 것조차 실제로 잔 시간을 따지면 5시간도 채 되지 않으니까.

    “하아으…….”

    피로에 멍하니 한숨을 내쉬면서도 실소가 새어 나왔다.

    어제 내 행동이 정당한지 아닌지는, 사실 그 누구도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고 여겼다.

    설령 진실에 거짓을 덮어씌운 나조차도 정확한 판단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하나만큼은 알았다.

    ‘옳게 만들어야지.’

    그 거짓이 진실보다 더 정답이 될 만큼 내가 잘해야 한다고.

    세 사람이 이런 날 받아주었고, 유화마저 받아주기로 한 만큼 내가 지금보다 더 잘해야 한다고.

    “분명 유화와 관계에 대해 알게 되면, 아리와 서윤이도 크게 놀라겠지만.”

    이조차 모두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길이 바로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

    24… 25… 26…….

    서서히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층수가 눈에 밟혔다.

    그렇게 끝내 28층에 도달하자, 나는 열린 문을 통해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사락.

    “……어떻게 된 게 쉬는 날이 더 힘든 건지 모르겠어.”

    저도 모르게 푸념이 새어 나왔다.

    세 사람에게 유화에 대해 설득한다는 가장 큰 고비를 넘겨서 그럴까, 이제야 내 마음에 여유가 생긴 듯했다.

    유화를 만나기 위해 오피스텔을 다시 찾아온 지금. 내 마음은 이전과 다른 의미로 두근거렸다.

    ‘남은 건 천류화가 세 사람에게도 부드러운 태도를 보이게끔.’

    내가 노력하는 일만 남았으니까.

    그리고 난 이것에 대해선 자신이 있었다. 적어도 유화가 진정으로 나를 사랑한다면 세 사람에게도 반드시 예의를 갖추게끔 나는 그렇게 만들 거니까.

    @#$%.

    벨을 누른 후 몇 초 지났을까.

    철컥.

    “들어와.”

    “……어.”

    열린 문 사이로 미소 짓는 유화를 마주 보며, 나는 그대로 순간적으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대체 무슨 옷이.’

    저렇게나 얇을까.

    거의 속옷이라고 봐야 할 얇은 네글리제를 걸치고 있는데, 그만큼 유화의 복장은 파격적이었다.

    현관에 들어서면서도 나는 대체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뭘 그렇게 시선을 방황하고 그래, 이 정도면 꽤 예쁘지 않아?”

    “……아니, 예쁘기는 예쁜데. 아무리 그래도 너무 파격적인 옷차림인 것 같아서.”

    저걸 돌직구로 묻는 것도, 나는 감히 유화가 아니면 그 누구도 행하지 못할 자신감처럼 보였다.

    씨익.

    “봐도 돼. 세린이 너니까, 나도 이렇게 입고 있던 거니까.”

    점입가경 네글리제 얇은 천 자락을 살며시 들어 올리며 묻는 유화의 아찔한 모습에, 나는 괜스레 손을 움켜쥐곤 빠르게 현관을 벗어났다.

    당황스럽다못해 대처가 안 됐다. 그만큼 천류화가 보이는 적극적인 모습에 내가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음료라도 내어줄 게, 소파에 앉아 있어.”

    “으, 으응.”

    그렇게 거실에 자리했지만, 나는 자꾸만 유화에게 시선이 갔다.

    하늘하늘한 네글리제 차림으로 부엌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은 아찔했다.

    ‘진짜 상상도 못 했는데.’

    만약 중원이었다면, 아마 내가 지금 본 광경을 설명해도 대다수가 믿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천마’였으니까.

    심지어 그게 오래된 과거조차 아니었다.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내가 아는 수많은 존재 중에서 감히 따라갈 자가 없는 무력을 지녔던 존재.

    ‘그런데, 그런 천마가 지금.’

    속살이 다 비칠 만큼 야한 옷을 입고서, 부엌에서 손님을 접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남편을 맞이한 신부처럼.

    “…….”

    나도 모르게 손을 꼼지락거리게 됐다.

    ‘진짜 말이 안 되긴 하는구나.’

    새삼 이 상황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다시 깨닫게 될 정도였다.

    ‘이 광경을 만약 광마나 혈마가 봤다면 기겁했겠지.’

    무심코 중원에서의 또 다른 인연이라 할 수 있는 두 존재가 떠올랐다. 두 존재 모두 천마의 오른팔과 왼팔로 볼 수 있는 절정 고수들.

    과거 내 전성기 시절의 힘과 맞먹었던 두 존재는 항상 유화에게 선망어린 시선을 보내곤 했다.

    그야 그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무림일통을 실현한 유일한 존재.

    천마의 세가 중원 천하를 뒤덮어 황실마저 아래로 두었으니, 그들이 천마 천류화에게 보내던 존경과 충의는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단했다.

    착.

    “뭘 그렇게까지 생각해?”

    불현듯 내 앞에 음료가 담긴 잔을 내려놓는 그녀의 모습에 움찔했다.

    “그냥, 이 순간이 신기해서.”

    “이 순간이?”

    내 맞은편에서 흥미를 보이는 그녀는, 여전히 아찔하기 그지없었다.

    그녀가 이 세상으로 온다고 해서 외관이 바뀐 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이질적이었다.

    그토록 고고하던 그녀가, 지금 내 환심을 사기 위해 저렇게 야한 차림을 하고 있다는 게…….

    “중원이라면 지금 이 상황은 꿈도 꿀 수 없던 상황이잖아.”

    “중원이라면…….”

    내 말에 웃음을 흘리는 그녀를 보며, 내가 순간 말실수를 한 건가 싶었다.

    내가 이렇게 유화의 변화를 느끼는 만큼, 유화도 알 것이다.

    자기가 얼마나 이질적으로 변했는지, 그리고 과거와 다른지도.

    “그렇지, 중원이라면 내가 이렇게 너에게 다가서는 것도 네가 이렇게 날 마주하는 일도 없었겠지.”

    “하긴 그랬겠구나.”

    “그럼, 너는 이 세상에서의 삶에 만족하고 있잖아? 그럼 네가 중원으로 다시 돌아오는 일을 절대 없었겠지.”

    “……아, 그건 그렇지.”

    순간 놀라게 됐다.

    유화는 지금 전혀 다른 걸 보고 있었다.

    자신의 과거가 아닌, 바로 현재의 나를 선명히 응시하고 있는 거였다.

    “그러니, 내가 중원에 있었다는 가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시기가 늦든 빠르든 간에 난 널 찾기 위해 이 세상으로 왔을 테니까. 그러기 위해 나는 천마라는 지고한 자리도, 무소불위의 권력조차 아무렇지 않게 모두 버렸을 테지.”

    그래서일까, 유화는 너무나 담담히 자신의 마음을 말해왔다.

    내가 무심코 중원에 대해 말하면 그녀가 멈칫하거나 지금 차림새에 부끄러움을 느낄까 싶었는데 그건 그저 내 생각일 뿐이었다.

    천류화는 여전히 당당하고 태연했다.

    천마였을 적과 지금도 별로 다르지 않다는 듯.

    자신이 지금 얼마나 야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 뻔히 알면서도, 그것에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내게 더 말하고 있었다.

    “……넌 진짜 대단하구나.”

    사고방식 자체가 달랐다.

    그냥 천마라는 자리에 오를 위인은, 자신의 힘을 잃었다고 해서 그 사고방식이 평범해지는 게 아니었다.

    “그럼 세린이 넌 더 대단하겠네?”

    “응?”

    “네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내가, 널 보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거잖아?”

    고혹적인 미소를 지은 유화가 살며시 턱을 괴며 눈을 마주쳐오는데,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그건 그녀의 야한 옷차림 때문일까.

    이전에 비해서도 유화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가벼운 말투, 날 바라보는 눈빛, 사소한 손짓하나조차 색기가 넘쳐흐른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여러 매력이 느껴졌다.

    “그걸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그러니까, 세린아. 너는 더 자신을 가져도 돼. 이 내가, 바로 널 사랑하고 있으니까. 더 떳떳하게 자신을 내세워도 충분하니까.”

    “고마운 말이네.”

    나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천류화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된 지금 그저 새삼스레 느꼈다.

    ‘굉장히 위험한 여자야.’

    중원에서 그녀가 누군가에게도 마음을 보이지 아서 몰랐지만, 작정하고 마음을 표현하기 시작한 유화는 현실에서 바라본 그 누구보다도 매력적이었다.

    그만큼 말이 안 됐다.

    ‘어쩌면 순수 매력만으로도 달기와 비슷할지도 모르겠어.’

    현실에서야 나는 달기에 관한 생각이 거의 없지만, 진심으로 난 유화의 매력은 장난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음은 제대로 정한 거야?”

    “……정했으니까, 이렇게 널 찾아온 거지.”

    “편하게 말해. 들어줄 테니까.”

    담담한 음성에 나는 잠시 숨을 가다듬고서 입을 열었다.

    “난 다 같이 사귀기로 했어. 기존의 연인관계에서 유화 너까지.”

    “다 같이…….’

    살며시 눈을 흘기는데, 나는 태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날 독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마. 그건 네가 내 목에 설령 칼을 들이민다고 해도, 절대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

    더 진지하게 말을 꺼내자, 턱을 괸 유화가 순간 웃음을 터트렸다.

    “독점이라…… 하긴, 그건 나로서 굉장히 아쉽긴 하지.”

    “난 미리 말했어. 이것만큼은 나도 너한테 양보할 수 없어.”

    “그래, 네 말대로 할 테니까, 너무 그렇게 경계하지 마.”

    생각 외로 순순히 수긍하는 모습에 좀 놀랐다.

    ‘이렇게 쉽게……?’

    나는 유화가 조금 더 내게 뭔가를 말할 줄 알았다.

    그녀의 성정상 나를 독점하려는 욕구가 분명히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사실 본녀도 꽤 많은 생각을 했지.”

    그 순간, 유화의 말투가 바뀌었다.

    더불어 날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조차도 모두.

    “…….”

    말 그대로 순간 숨이 막혔다.

    ‘어떻게…….’

    현실에서 저런 말도 안 되는 존재감을 구현하는 걸까.

    돌연 거대한 산이 내 앞에 존재하는 듯했다. 이전까지 야한 차림으로 날 유혹하려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서, 분위기가 완전히 급변했으니까.

    “그렇게 놀라지는 말 거라, 본녀도 조금 더 진심을 말하기 위해 이렇게 태도를 바꾼 것이니.”

    툭.

    직후 가볍게 테이블을 두드리는 손길에, 순간 날 옥죄던 위압감이 전부 사라진 걸 느꼈다.

    나는 한순간도 그녀의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본녀가 그대를 독점하고, 사실 강제할까도 생각은 해보았지.”

    “……그건 안 돼.”

    그 말만으로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본녀도 그대가 그리 반응할 것이라 생각했지. 지난 몇 번의 만남 사이로 사실 확신했지. 본녀가 그대와 아슬아슬한 선을 타려고 한다면…….”

    말끝을 흐린 천류화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그 가벼운 고갯짓조차 내겐 거대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대가 본녀를 거부할 것 같더구나.”

    “…그게 느껴졌어?”

    “그러지 않았다면 본녀가 왜 그대를 독점하지 않으려 했겠느냐?”

    웃으며 되묻는 천류화를 보며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네.’

    그것도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천류화가 작정하고 나를 독점하려 했다면, 난 그게 정말 힘든 시간이 됐을 것이다.

    ‘지금도 이렇게 날 홀리려고 하는데.’

    그녀가 만약 수를 가리지 않고 날 가지려 했다면, 내 마음을 망가트리거나 아니면 자신만 보게 강제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체로 내 삶은 지옥이 됐을 것이다.

    애초에 천마라는 건.

    마음먹고자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니까.

    “그래서 다른 여인들에겐 본녀에 관해 말한 것이냐?”

    “……어제 말했어. 나는 너와도 사귈 거라고.”

    “그걸 세 여인이 받아들였느냐?”

    야릇한 미소를 흘리며 흥미를 표현하자, 나는 조심스레 고갤 끄덕였다.

    “강하게 세 사람을 설득했으니까.”

    “호오. 린, 그대는 정말 언제 보더라도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구나. 도대체 어찌한 것이냐? 본녀라고 한들 이 세상에서 그런 관계에서 여인들의 마음을 돌리긴 힘들 것 같다만.”

    천류화의 천연덕스러운 태도에, 불현듯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가 널 팔았거든.”

    “……?”

    순간 미미하게 눈가를 찌푸린 천류화를 보며, 나 역시 태연스레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생각하면 겁먹을 필요는 없어.’

    유화가 아무리 위협적이고, 비정상적인 존재감을 보일 수 있다고 해도.

    그녀가 날 사랑한다는 가장 큰 약점을 보인 이상, 내가 위축될 필요가 없는 거였다.

    “그래서 협력이 필요해. 과거 너와 나에 관해 말을 맞춰야 하니까.”

    이제 천류화가 내게 맞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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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eamer Crazy About Slaugh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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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육에 미친 스트리머
Score 3.9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After being trapped in the game world for several years, I was transported back to real world. However, my appearance was exactly like that of the character in the 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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