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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9

    회색 사신이 나무에 닿는 순간, 하늘이 빛으로 가득 차올랐다.

    그 빛은 미국을 서서히 좀먹어 가던 오브젝트에게 승리했다는 증거였다.

    박살 난 시간과 공간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제 나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긴 시체가 돼서 널브러지겠지.

    그래도 제임스 시티의 위기가 제대로 해결이 되는 걸 보고 눈을 감게 되어서 다행이야.

    부시장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움직여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제 서서히 망가져 가는 그의 눈은 하늘 위의 천체들을 흐릿하게 담아냈다.

    아름다운 달빛이 부시장의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부시장의 몸이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버린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속에는 성취감으로 가득했다.

    ‘겨우 6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으로 제임스 시티를 제대로 지켰어.’

    그것으로 부시장은 자신의 형상과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마지막 의지를 놓아버렸다.

    제어 콘솔을 꽉 쥐고 있던 손이 느슨해지면서 운명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몸이 점점 차갑게 식고 있었지만, 부시장은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끊임없이 반복되던 유리된 시간 속에서 풀려나자, 여러 가지 감정이 그의 안을 휘몰아쳤다.

    그는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도시를 지켰으며, 이제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면서 제임스 시티를 안전하게 남길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제대로 볼 수 없는 시야 구석에서 황금색으로 타오르는 불빛이 보였다.

    부시장은 그 불빛을 보고, 마치 자신을 데리러 온 천사의 불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내 주변은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통일되지 않은 양식과 재질의 건축물들이 아무렇게나 섞여 있었다.

    대리석으로 된 고대 신전처럼 보이는 기둥이 새것처럼 반짝거리며 잘린 채 바닥을 굴렀다.

    그 옆에는 종교적인 장면을 표현한 프레스코화의 단면이 날카롭게 사각형으로 잘려있었다.

    요즘은 쓰이지 않을 것 같은 거창한 무늬를 새긴 고풍스러운 철제 가구의 토막 난 일부분도 그 옆에 놓여있었다.

    한때 귀족들이나 썼을 법한 화려한 의자도 반으로 날카롭게 잘린 채 널브러져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장벽이 아니었으면, 여기가 제임스 시티가 아니라 박물관 폭파 현장이라고 믿을 정도였다.

    그나저나, 푸른 머리칼의 소녀는 도대체 누구인 걸까.

    왠지 친숙하면서도 명백한 타인인 것은 느껴지는데, 기억에도 없는데 친숙하다니 이상한 일이다.

    이상한 일들이 많았지만, 이번에 얻은 능력은 꽤 마음에 들었다.

    시간을 다루는 능력.

    공간을 잡아서 다룰 수 있는 것처럼, 시간도 조금은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뭐, 열화판이라서 원본처럼 시간과 공간을 마구잡이로 뒤섞거나, 잘라 붙이진 못했다. 

    자신의 시간을 가속하거나 감속하는 정도의 능력일 뿐이지만, 만족스러웠다.

    이제 황금 사신보다 명백하게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을 테니, 장난이 더 수월해지겠지.

    히히.

    뚜방뚜방뚜방뚜방.

    유령화도 안 하고 그저 천천히 걸어 다닐 뿐인데, 잔상이 이어질 정도의 고속 이동!

    왠지 빨리 움직이는 게 재미있어서 폐허 속을 돌아다니던 도중, 허공에서 사람이 느껴졌다.

    사람 하나 없는, 흉악한 공간에 사람이 있네? 

    그러고 보니 나무를 죽이러 갈 때도 장작이 조금씩 차오르길래 의아했는데, 아무래도 저 사람이었나보다.

    시간과 공간의 틈새에 갇힌 사람이었는데, 나무와 남색 달의 파괴로 인해 점점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것으로 보였다.

    공간의 틈새를 보니, 그 사람은 이미 온몸이 산산이 부서져서 죽은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내버려 두면 100% 죽을 것 같네.

    원래 공간을 다룰 수 있어서 할 수 있는 건지 아니면 시간 능력을 얻어서 할 수 있는 건지는 몰라도, 왠지 살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예린이가 찾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셈 치고, 틈새에서 흩어진 파편들을 끌어모았다.

    나무에게 다가갈 때 장작을 보충해 준 값을 돌려준다고 생각해야지.

    생각보다 작업은 쉬웠다.

    3d로 산산조각 났다면 진작에 때려치웠겠지만, 유리판 모양으로 압착한 뒤에 누군가가 깨버린 것 같은 형상이라 퍼즐 정도의 난이도였다.

    퍼즐보다 쉬운 점은 그냥 생각만으로도 파편들을 자유롭게 배치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생각보다 작업은 재미있었다.

    커다란 퍼즐을 맞추는 것 같은 재미였다.

    생각보다 퍼즐이 취향에 맞고 재밌어.

    나중에 세희 연구소로 돌아가게 되면 제대로 된 퍼즐도 좀 사달라고 해야지.

    멋진 풍경 같은 것들로 만든 퍼즐 말이야.

    지금 하는 퍼즐은 완성 보상이 근육질 흑인 아저씨라는 게 마음에 안 들어.

    장벽 내부의 나무가 사라진 것을 벌써 눈치챈 것인지,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근처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인공위성으로 확인한 건가? 생각보다 일 처리가 엄청 빠르네. 

    방호복으로 중무장한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할 때쯤, 나도 퍼즐을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세련된 양복을 갖춰 입은 아저씨가 허공에서 떨어져 내렸다.

    퍼즐이 완성되고 얼굴을 확인해보니, 아저씨는 나를 째려보던 부시장 아저씨였다.

    그 아저씨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하늘을 향해 손을 들어 올리고 소리쳤다.

    “신은 존재했다!”

    이어서 더욱 감격한 표정으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소리쳤다.

    “그리고 그 신은 회색의 피부를 가졌다!”

    그 소리를 들은 제임스 연구소 방호복을 입은 직원들의 표정이 이상하게 구겨졌다.

    그리고 직원들은 헛소리하는 흑인 아저씨에게 다가가서 전기로 지져버리고, 정신을 잃은 아저씨를 짊어지고 데려가기 시작했다.

    부시장씩이나 맡았으면서 불쌍하게도 시공간에 휩쓸려서 정신을 놓아버리다니….

    ***

    유리 플라밍고에게 상처를 입은 보안실 직원의 작은 원룸.

    좁지만 아늑한 원룸의 작은 창문을 통해서 은은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조용히 작동 중인 가습기에서 나오는 고운 물 입자들은 그 은은한 빛을 받아 마치 안개 같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공간은 좁지만, 방안은 깨끗하고 정갈하게 정돈이 되어있었다.

    특히 방안에는 먼지 하나 찾아보기 힘들었다.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서 있는 책꽂이에는 구석구석 먼지 하나 보이지 않았고, 침대 밑이나 옮기기 힘든 대형 가구들 밑에도 그러했다.

    침대 옆의 작지만, 튼튼한 탁자 위에는 사과 한 개가 먹기 좋은 크기로 깔끔하게 잘려져 있었다.

    그런 잘 정돈된 방의 침대 위에는 보안실 직원과 푸른 사신이 올라가 있었다.

    푸른 사신은 곤히 잠든 직원의 머리맡에서 차갑게 식힌 수건을 작은 몸으로 천천히 옮기고 있었다.

    “으음.”

    아침이 되어 기상한 직원은 눈을 뜨자마자, 물수건을 옮기는 푸른 사신과 눈이 마주쳤다.

    <!>

    푸른 사신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사라져 버렸고, 물수건은 침대 위로 철퍼덕 떨어졌다.

    직원은 떨어진 물수건을 주워서 탁자 위에 올려두며 주변을 둘러보자, 방의 정리 상태는 완벽했다.

    유리 플라밍고 사건 이후, 푸른 사신은 잠들기만 하면 방으로 찾아왔다.

    푸른 사신은 방에 와서는 방 청소도 하고, 가만히 침대 옆에 앉아서 직원을 쳐다보기도 했다.

    직원이 기대하던 것과는 조금 다른 방향의 관심이었다.

    직원은 깨어있을 때, 같이 푸딩도 먹고 황금 사신처럼 같이 놀고 싶었다.

    그런데, 푸른 사신의 우렁각시력이 더 강해져 버렸다.

    오히려 깨어있을 때는 더욱 보기 힘들어졌다.

    직원은 전보다 더욱 민첩하게 도망치는 푸른 사신을 보며, 괜히 억울했다.

    ‘우리 좀 더 친해진 거 아니었어?’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방안에 푸른 사신은 온데간데없었고, 푸른 사신이 머물렀다는 흔적인 상쾌한 향기만이 은은하게 남아있었다.

    ***

    회색 사신이도 없고, 평소 떠들썩한 예린이도 없어서 약간은 적막해진 격리실.

    간밤에 오래된 꿈을 꿔서, 시설 점검도 할 겸 격리실에 찾아와서 쉬고 있었다.

    별로 오래된 일은 아니지만, 왠지 오래전에 겪은 일 같은 기억을 꿈으로 봤다.

    서울숲 토굴에 갇혀서 회색 사신이를 만났던 기억의 일부였다.

    하지만 꿈의 결과는 현실과는 조금 달랐다.

    탈출의 기쁨에 취해서, 빛이 점점 희미해지고 푸석푸석해졌던 사신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연구소로 돌아와 버리는 꿈이었다.

    그리하여 회색 사신이가 없는 연구소를 힘들게 꾸려가는 꿈이었다.

    그리고 온몸이 푸석푸석 무너져 내리는 회색 사신이가 자신을 원망하는 눈초리로 쳐다보는 것으로 깨어나는 악몽이었다.

    설마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회색 사신이가 다치거나 위기에 빠지는 일은 상상하기 힘들었지만, 흉흉한 꿈을 꿔서 그런지 살짝 걱정되었다.

    내 걱정이 하늘에 닿았는지, 뉴스 속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방금 들어온 속보입니다.]

    [오브젝트 연구로 유명한 ‘제임스 시티’가 반파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제임스 푸딩’이 국내로 들어오면서 협력관계를 맺은 국내 유수의 연구소들에도 영향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TV 화면에는 헬기로 찍은 것 같은 동영상이 흘러나왔다.

    반으로 뚝 부러진 건물 위에 서서 폐허가 된 도시를 내려다보는 회색 사신의 모습이었다.

    사신아, 거기서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니?

    ***

    세희 연구소 수면실. 

    업무강도가 강하지 않고, 잘 꾸며진 휴게실 덕분에 언제나 한산한 수면실이었지만 지금은 꽤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다.

    모인 원인은 화분 가장자리에 돋아난 기묘한 오브젝트 때문이었다.

    화분에는 싱싱하고 귀여운 쌍떡잎이 살랑거렸다.

    남색인 점만 제외하면 촉촉하고 싱싱해 보이는 새싹이었다.

    물론 초록색이었더라도 100% 오브젝트인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야, 새싹 밑에는 얼굴이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회색 사신이랑 똑같이 생긴 미니 사신이 머리만 내놓은 채, 자기 몸을 흙 속에 파묻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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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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