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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9

       

       『시라바야시 데쓰젠입니다.』

       

       이름을 밝히는 나의 대답을 들은 다나까 교수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시라바야시? 본 수업에서 못 보던 얼굴인데.』

       『청강이라서요.』

       『뭣?』

       『호기심에 한 번 수업을 받아봤습니다만.』

       

       내가 이렇게 말하자, 강의실 구석에서 「하긴, 저렇게 영어를 잘 하는데 왜 이 수업을 듣겠어?」 하는 속닥거림과 함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큿……』

       

       신음을 토하던 다나까 교수는 다시 교탁을 향해 홱 돌아서며,

       

       『……금일 수업은 여기까지! 생도들은 다음 수업까지,  교과서 삼십칠 페-지의 단어를 백 번씩 써 온다!』

       

       하고 외쳤다. 아무리 봐도 나에게 치욕을 받고 홧김에 숙제를 내는 모습이었다.

       

       『에엣……!』

       『단어가 삼백 개가 넘어!』

       『너무한……』

       

       난데없는 봉변을 당한 학생들이 투덜거렸다. 뭐, 이제 이 수업 들을 일 없는 내가 알 바는 아니지.

       

       

       

       ***

       

       

       

       『크흐! 네 녀석이 영어의 다나까 선생에게 한 잔 먹였다고!』

        

       이후의 수업도 모두 끝나고 방과 후 버스 정거장을 향해 언덕길을 내려가는 길에, 무라사끼 녀석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아아.』

       

       그런 것까지 소문이 돈 건가. 사실, 내 영어도 21세기에서는 그저 평범한 정도였기에 ‘영어 잘 하는 녀석’으로 소문이 도는 것은 좀 민망했다. 그나마 이 정도는 되어야 미국가서 정 할거 없으면 세탁소를 열기라도 하지.

       

       나는 무라사끼에게 물었다.

       

       『근데 너는, 영어 좀 하냐?』

       『흥! 무엇이 영어냐! 영국도 미국도, 공연히 우리 일본의 하는 일에 대해 반기를 드는 적성(敵性) 국가다! 적성어(敵性語) 따위를 배워 봐야 비국민(非國民)의 앞잡이가 될 뿐이지!』 

       

       역시 이 녀석은 영어 따위는 못 할 줄 알았다. 하긴 뭐, 이런 녀석은 영어따위 할 줄 몰라도 먹고사는데엔 지장 없겠지. 애초에 종로경찰서장의 아들이고, 검술도 학기 초에 비하면  나날이 늘어가고 있었으니까.

       

       ‘그야, 내가 지도해주고 있었으니.’

       

       검술 전공수업에서도 주로 녀석과 대련하는 식으로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물론, 내가 수업을 빠지는 일이 많아서 내가 지도해준 적은 몇 번 안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녀석 나름대로 꾸준히 연습하고는 있었는지, 오늘 확인해보니 공격 일변도였던 처음에 비해 실력이, 특히 회피라고나 할까, 상대방의 공격을 피하는 움직임이 꽤나 늘어 있었다.

       

       적어도 1년동안은 계속 같은 분대원으로서 합동 점수를 받을 운명공동체이니만큼, 녀석의 실력이 좋아지는 것은 나로써도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공팔자, 걔는 왜 안 나왔지?』

       

       나는 문득 물었다. 그 회색 머리칼의 여자애. 같은 검술 전공이었으며, 양손 단검을 쓴다는 것이 호기심이 들어 모처럼 오랜만에 검술 전공수업을 들었는데 막상 없었던 것이다.

       

       『응? 코팟챠-? 누구냐, 그건.』

       『내가 잘못 말했네. 일본식으로 하찌꼬, 랬던가.』

       『아아, 그 여자 말인가. 흥! 네 녀석 못지 않게 건방진 여자니까다! 성적이 좋아진 뒤로는 네 녀석처럼 빈번하게 빠지더군!』

        

       ‘흠…….’

       

       갑자기 실력이 늘었다는 소문도 있고 해서 한번쯤 보고 싶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무라사끼가 말했다.

       

       『그래서, 오늘 경찰서에는 못 온다는 것이냐?』 

       『어? 응. 뭐 잠깐 알아볼 게 있어서.』

       

       경성 시내에 가서, 배표를 구하는 연습을 해 볼 작정이었다. 미리미리 해두지 않으면 나중에 가서 해멜 것이 분명하니, 기왕 생각났을 때 빨리빨리 해치워 둘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무라사끼 녀석이 이렇게까지 재차 물어보는 일은 드물었기에, 나는 혹시 무슨 일인가 싶어서 되물었다.

       

       『왜? 오늘 꼭 가야 돼?』

       『아버지가 말하기를, 네놈과 저녁의 식사라도 같이 하자고 하셨다! 흥! 경찰서장으로부터의 식사 자리를 거절하다니, 너 같이 건방진 조선인 녀석도 없겠지……』 

       『저녁?』

       

       그냥 대면도 아니고, 저녁 식사 자리라. 으음. 확실히 이걸 거절하면 너무 무례하게 비춰질 가능성도 있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경찰서장의 호감을 얻기 위해 만나려는 것이었으니, 이런 자리까지 피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겠지. 나는 무라사끼에게 물었다.

       

       『저녁 식사가 몇 시인데?』 

       『오후 육 시다!』

       

       오후 6시라. 하교하는 지금이 오후 3시였으니, 경성 시내에서 볼일을 보고나서 종로경찰서로 가는 것도 시간상 충분할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간다고 전해드려.』

       『오오! 정말이냐? 좋아! 아버지에겐 전해두겠다! ……저기 차가 왔군! 오이! 태워 주랴?』

       

       언덕길을 다 내려와 버스 정류장이 있는 진입로에 도착하자, 무라사끼를 태우러 차가 온 것이 보였다.

       

       『아니. 너 먼저 가.』 

       

       송병오 녀석이 당분간 내 하숙방에서 묵는지라, 나는 송병오 녀석과 함께 하교하러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릴 셈이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무라사끼는 코웃음치며 말했다.

         

       『크흐! 그 불량한 안경의 녀석 때문에 너도 고생이 많군! 그럼 난 먼저 간다!』

       

       그렇게 주차된 차를 향해 걸어가던 무라사끼는,

       

       『……잠깐, 저기 안경 조선인 녀석이 아니냐?』

       

       차에 타려다가 문득 언덕길을 보더니 외쳤다. 녀석이 말하는 안경 조선인이라면 송병오를 부르는 말이었다. 그런데, 무라사끼는 방향을 바라보더니 의문을 담아 말을 이었다.

       

        『엥? 그런데, 그의 옆은?』

       

       옆? 나도 언덕길 쪽을 보니, 송병오 녀석은 옆의 누군가와 즐겁게 대화하며 언덕길을 내려오고 있는데, 옆의 누군가는 다름아닌…… 

       

       아침에 우리 분대원들과 잠시 얼굴을 마주했던 그 회색 머리칼의 여학생, 공팔자였다.

       

       그 모습을 본 무라사끼가 놀라며 말했다.

       

       『저 여자, 이곳저곳 기웃거리더니만 저런 비실한 놈이 취향이었나!』

       

       멀리서 봐도 송병오 녀석은 뭔가 즐겁게 설명을 쏟아내고 있고, 공팔자는 맞장구를 쳐 주며 즐겁게 대화를 하는 모습이었다.

       

       ‘뭐야?’

       

       마치 절친한 친구, 아니 그보다 더 한 관계같은 모습이었다. 무라사끼는 그 둘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차에 올라 떠나갔다.

       

       그리고 송병오와 공팔자, 두 명은 담소를 나누며 언덕길을 내려오다가 진입로의 아치를 지나고 버스 정거장 근처에 이르러서,

       

       “그럼, 난 갈게! 내일 또 봐!”

       “그래! 잘 들어가게!” 

       

       하고 서로 정답게 인사하는 것이다. 공팔자는 붉은 입술 아래로 흰 건치를 드러내고 활짝 웃으며 송병오에게 인사하고는 다른 방향으로 멀어져 갔다. 

       

       나는 버스 정거장 쪽으로 걸어오는 송병오를 향해 어처구니가 없어서 물었다.

       

       “아니, 쟤랑 무슨 사이야?” 

       

       분명 아침만 해도, 둘이 처음 보는 사이가 아니었던가?  오히려 무슨 이상한 책을 읽으니 하며, 첫인상이 좋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오전에 이 녀석과 함께 영어 수업을 들을 때만 해도, 뭔가 수상한 기색은 없었다. 그런데 몇 시간 만에 저 공팔자라는 여자애와 갑자기 이렇게 친해졌다니?

       

       송병오 녀석은 안경을 올리고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후후…… 저 계집애 말인가? 아니 글쎄, 내가 오후에 전공 수업을 들어갔는데, 저 계집애가 사격교장에 참관하러 오지 않았겠나? 마침 나한테 인사를 하길래 얘기를 좀 나누었지!』

       

       아닌게 아니라 나는 검술 전공수업때 공팔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아쉽던 차였다. 전공수업까지 빠져가며 뭘 하나 했더니, 송병오 녀석에게 기웃거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나는 아침에 양복자로부터 들은 소문도 있고 해서, 송병오에게 말했다.

       

       “쟤, 소문이 안 좋던데.”

       “허어! 자네까지!”

       

       그런데 내 말에 송병오 녀석은 마치 화를 낼 듯 하며 반박하는 것이다.

       

       “아니, 자네마저 그런 소리를 하나? 내 얘기를 나누어 보니 썩 괜찮은 아이더군! 이래저래 오해받고 있지만 사실 그런 아이가 아니야. ……그리고 웬걸, 내 얘기를 이렇게 귀담아 들어주는 여자는 생전 처음 봤네!”

       “어…… 그래?”

       “그렇다니까 말이! 자네도…… 아, 저기 뻐스가 오는군. 타세. 하여튼 자네도 소문을 너무 믿으면 못 쓰는 게야!”

       

       나는 버스에 오르고 나서도 곰곰히 생각했다. 여자에게는 일절 관심 없는 것처럼 보였던 송병오가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옹호하고 나서는 모습이 조금 놀라웠다.

       

       ‘흐음, 둘이 뭔가 코드가 맞는 걸까?’

        

       아까의 모습만 봐도 서로 즐겁게 대화하며 언덕길을 내려오지 않았던가. 주로 신나서 떠드는 것은 송병오 녀석이었고, 공팔자는 웃으며 맞장구를 쳐 주는 쪽이었지만 말이다.

       

       사실, 송병오 녀석의 사회적 불만 가득한 설명충짓을 들어준다는 그 한가지 만으로도 의외로 괜찮은 면이 있는 여자애일지도. 

       

       ‘양복자는 쟤를 ‘논다니’라며 싫어했고, 이유하는 친일파라며 경멸했지만……’

       

       그저 악의적인 소문이었을까? 하긴, 어디까지나 소문에 불과했다. 

       

       친일파라고 해도 나같은 생계형 위장 친일파일 수도 있는 것이고, 애초에 양복자의 말대로 ‘남자를 꼬셔서 잡아먹고 다니는 암캐 같은 년’이라든지 하는, 그런 소문은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송병오라는 녀석의 설명충 토크를 즐겁게 들어주는 것은 어지간히 착하고 인내심이 있지 않는 이상 어려운 일이었으니 말이다.

       

       왜 하필 송병오에게 접근했냐는 것이 조금 수상하긴 했지만……

       

       ‘그런 취향도 있는 거지.’

       

       피지컬이 뛰어난 여성이 지적인 남성에게 빠지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송병오 녀석이 더벅머리에 말라깽이긴 해도 그리 못난 인상은 아니었고.

       

       옆에서 손잡이를 잡고 선 송병오 녀석은,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창 밖을 보고 있었다. 

       

       ‘푹 빠진 모양이네. 뭐, 잘 된 일이긴 한데.’

       

       나는 노파심에 말했다.

       

       “그, 혹시라도 공산주의니 뭐니 얘기는 하지 말고.” 

       “허어! 나를 뭐로 보고 그런 소릴 하나? 내 지금 생각해보니 맑스니 레닌이니, 혁명이니…… 다아 못난 놈들의 부질없는 얘길세. 세상의 밝은 면을 못 보는 불우한 놈들이지!”

       

       ‘뭣이라!’

       

       차라리 개가 똥을 끊지, 이 녀석이 여자애랑 즐겁게 대화를 나눈 것 만으로 빨갱이 사상을 끊었다고?

       

       믿을 수 없는 변화였다. 

       

       송병오 녀석은 버스 차창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고는, 군데군데 녹색이 낀 갈색 더벅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이 빌어먹을 머리도 조만간 좀 어떻게 해야겠군! 원, 이렇게 지저분할 데가 있나!”

       

       사람이 이렇게 바뀌다니?

       

       하지만 남녀간의 애정이라는 것은 본래 기적같은 일. 돌이 빵으로 바뀌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사람이 바뀌는 것이 기적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래. 사람이 바뀌는 것이 기적이지…….’

       

       

       

       ***

       

       

       

       학교, 본관 건물 어딘가의 복도.

       

       이 시간까지 수업이 이루어지는 강의실은 없는지, 계단에서부터 ‘제3 회의실’이라는 문패가 걸려 있는 문 앞까지, 복도에는 사람 한 명 없었다.

       

       자물쇠로 잠겨 있는 제3 회의실 안을 엿보면, 어두운 가운데에 큰 테이블이 있고, 테이블을 둘러싸고 의자들이 놓여 있다. 이윽고 자물쇠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대여섯 명의 교수들이 걸어들어온다.

       

       『이거, 나까모리 선생이 없어지니 회의를 열기도 어렵군요.』

       『다들 각자의 일로 바쁘니까요.』

       『죽은 나까모리 선생은 바쁘지 않았답니까? 가르치고 연구하는 와중에도 회의를 주관했는데 말이죠.』

       『참, 부지런한 선생이었는데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교수들은 며칠 전 창경원에서 죽은 나까모리 교수에 대해 몇 마디씩 얹으며 각자 자리에 앉았다. 불도 켜지 않은데다가 창문 역시 커튼으로 가리워진 회의실은 어두워, 교수들의 면면(面面)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까모리 선생이 모또야마 이사에게도 신임받았던 것이겠지요. ……헌데, 모또야마 이사는 오늘 참석하지 않았습니까?』

       

       교수 중 한 명이 테이블의 다른 교수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이 학교의 재정을 운영하고 있는 대동아엽사재단의 대표이사인 모또야마 이사의 참석 여부에 대한 질문이었다.

       

       평소라면 이 회의의 상석에 앉던 모또야마 이사를 대신해 상석에 앉은 교수가 입을 열었다.

       

       『가고시마(鹿兒島)에 가 있답니다. 시마즈의 당주가 소집했다더군요. 시마즈 아가씨도 소집되었다던데요.』

       『시마즈 아가씨까지……!』 

       

       시마즈 아가씨란, 시마즈 가문 당주의 딸이자 이 학교 일학년생으로 다니고 있는 여학생, 시마즈 렌까를 뜻했다. 화제는 나까모리 교수에서 모또야마 이사로, 그리고 시마즈 렌까에게로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아아. 그렇다면 당주는 드디어, 시마즈 아가씨에게도 우리의 ‘계획’을 알려줄 속셈일까요?』

       

       교수들 중 누군가의, 기대감 섞인 그 물음에 다른 교수가 대답한다.

       

       『그러려고 부른 것이 않을까 싶습니다. 시마즈 아가씨도 슬슬 알아야지요. 물론, 당주가 전부는 말해주지 않겠지만요.』

       『그거야 그렇지요! 전부 말해줄 수는…….』

       『시마즈 아가씨는 중요한 계획의 일부이니까요.』 

       

       어둠 속에서 교수 몇 명이 동의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아가씨가 제한적이나마 우리의 일을 도와준다면 훨씬 일이 수월해지겠군요.』

       『정말입니다.』

       

       교수들이 다들 자리에 앉고 회의실 문을 안에서 걸어잠그고 나서, 교수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올 사람은 다 온 것 같군요. 오늘 회의는 어느 안건 때문에 모인 겁니까?』

       

       그 질문에, 상석에 앉은 교수가 대답했다.

       

       『아아. 다름이 아니라 ‘충견(忠犬)’ 때문입니다. ‘충견’은 지금, 어느 분이 관리하고 있습니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은 여기까지!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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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yeongseong’s Hunter Academy

Gyeongseong’s Hunter Academy

경성의 헌터 아카데미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Artist: Native Language: Korean

I woke up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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