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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9

    베리튼, 타국으로 떠나기 위한 준비물은 역시 자국을 여행하는 것 보다 훨씬 많은 서류절차가 필요했다.

    하지만 정말 고맙게도 그런 일련의 복잡한 서류과정들은 아직 미성년자인 루크를 대신해 보호자인 예르나가 해결해주기로 했다.

    그래서, 루크는 단지 여행을 위한 짐만 준비하면 되었다.

    여행이라, 루크는 그 단어가 주는 두근거림을 아직 잊지 않았다.

    루크가 더 이상 여행을 떠나지 않고 정착하게 된 이유는 이미 당시 대륙의 모든 장소를 직접 답파해왔기 때문이지, 결코 여행에 질렸기 때문이 아니었으니까.

    새로운 곳에서 완전히 다른 것을 돌아보고 또 새로운 시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마법사가 추구해야 할 삶의 방향성이 아닐까?

    마탑에 처박혀 연구자료나 한참동안 들여보고 있어 봤자, 새로운 발상은 쉬이 떠오르지 않는다.

    항상 같은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데 색다른 발상이 떠오르겠는가.

    그런 부분에서, 루크는 아카데미를 다니며 얻게 된 이 기회가 그다지 나쁘지만 않다고 생각했다.

    메리가 문자로 보내 준 준비해야 할 물건들을 휴대폰으로 확인한다.

    루크가 준비해야 할 준비물들은 이쪽.

    가서 5일간 입을 겉옷과 잠옷, 그리고 속옷.

    칫솔, 치약, 비누, 썬 크림 등의 생필품이나 화장품.

    비행기를 타기 전, 버스에서 먹을 간식과 음료.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한 포션 등의 의료품등…….

    이 정도는 어느 시대에 어디를 가든 공통적으로 준비하는 것들이다.

    옛날에도 이런 여행준비쯤, 이미 많이 해 보았다.

    뭐, 그때는 모든 여행물품들을 죄다 공간을 압축한 차원에 집어넣고 필요할 때 꺼내서 사용하곤 했지만.

    루크는 커다란 캐리어에 물건들을 담으며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차원 한 켠에 처박아둔 수많은 아티팩트와 재화들은 아직 제대로 있을까?

    5000년이나 관리하지 않은 차원이라면 이미 자신의 개인차원이 타 차원과 융합해 자신의 물건들이 이공간을 하염없이 떠돌아다닌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루크는 잠깐 턱을 쓸었다.

    그러고보니 연구를 위해 만들어두고 방치한, 하지만 그냥 차원을 떠돌아다닌다면 위험한 아티팩트들도 꽤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가령, 작성하다가 변질되어서 파기한 마도서들, 물질의 구조를 뒤섞어버리는 만화경, ‘ ’를 도려내는 나이프, 평행세계를 간섭하는 장갑, 차원과 시간을 계산해 조작하는 주판, 차원의 조각으로 벼려낸 검/열쇠/그림자.

    그 말고도 당장 떠오르는 것들은 많지만, 그런데 그것을 마지막에 다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5000년이라면 몇 가지 물건이 차원의 통합에 의해서 현실에 나타났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인데…….

    “…….”

    루크가 갑자기 굳어진 가고일마냥 멈춰 있자, 걱정이 된 파이가 묻는다.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아무렴, ‘위대한 루크 이루시’께서 죽기전에 알아서 정리를 했겠지, 아직까지 세계가 멀쩡한 것을 보면.

    ‘아직 위대하지 않은 루크 이루시’는 아무리 고민해봤자 답이 없을 것이다.

    고작 3서클 마법사인 자신이 고민해서 답이 나올 문제가 아니다.

    ——-

    “좋아, 이정도면 되겠지.”

    루크는 꽤 묵직하게 부풀어오른 여행가방을 뿌듯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파이는 그 모습을 보며 불안하게 웅얼거린다.

    -이거, 터질 것 같아.

    “하하, 안 터진다네.”

    -안 터져?

    “그래, 당연하지.”

    가방의 내구성과 용량은 충분히 고려했다.

    그러니 이 정도는 무리없이 수용할 수 있으리라.

    -그래도 이건 너무 많이 담은 거 아니야?

    “파이, 그대는 정령이라 잘 모르는 모양인데, 준비는 언제나 충분히 하는게 최고일세.”

    정령은 어딜가든 짐이 필요하지 않았을테니 이런 준비과정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장소에 제약이 없는 정령에게나 국한된 일.

    자신은 아직 물질계의 원소밖에 지배할 수 없고, 그러니 공간에 큰 제약이 있다.

    아무때나 원하는 곳에 존재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대체 해외에서 어떤 일이 있을 줄 알고 대충 준비한단말인가.

    자신은 옛날처럼 전능하지도 않으니, 역시 준비는 많은 편이 좋았다.

    루크는 잠깐 짐을 들어올려보고는 묵직한 느낌에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모든 상황에 대비해야지.”

    아무튼, 이렇게 짐은 다 쌌다.

    루크는 고개를 돌려 파이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파이, 지금이 몇시지?”

    파이는 루크의 질문에 시계를 바라보고는 한참을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12시……?

    확신하지는 못하는지 말 끝을 흐리지만, 시계는 확실히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루크는 그런 파이에게 박수를 치며 칭찬했다.

    짝, 짝, 짝.

    “잘 읽었구나. 아주 훌륭해.”

    -진……짜?

    “그래. 드디어 시계를 볼 수 있게 되었군. 아주 감격스러워.”

    실로 그렇다.

    이 철부지 정령이 드디어 시계를 읽을 수 있게 되다니.

    -와!

    “파이, 그대의 모험이 마냥 헛된 것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로구나.”

    -그래, 얼마나 좋았는데!

    “그래, 그래. 제대로 설명하진 못하지만.”

    -파랗고 ……, ……는 최고였어! 그런데 갑자기 둥실둥실……? 그리고 ……는 하얘서 ……! 그리고……, …………!

    ‘역시 무슨 소린지…….’

    당최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지 모르겠다.

    파이의 한층 깊어진 어휘력은 비단 인간의 언어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었는지, 정령어도 좀체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음율로 변화했다.

    그래도 정령어라 대략적인 감정이나 의미는 전달되지만, 거의 대부분 알아들을 수 없는 소음이어서 답답해진다. 

    아마도 파이의 무용담으로 추측되는 것을 들으며 앉아있던 루크는, 문득 출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12시면 곧 예르나가 돌아올 시간이로고.’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파이의 말을 그냥 앉아있기보다야 뭐라도 하는게 좋겠다 싶어서 몸을 일으킨 루크는 서랍을 뒤져 머리끈을 하나 꺼냈다.

    목 뒤로 손을 넘겨서 편한 위치에 적당히 머리를 모아 묶는다. 뿔이 방해되어 뿌리부터 묶지는 못했지만, 머리가 모아지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럭저럭 만족스런 묶음.

    잘 묶인것을 확인한 루크는 곧바로 문을 열어 화단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 루크에게 파이는 하던 말들을 멈추고 따라가며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크, 뭐하게?

    “예르나가 오기 전에, 간식이라도 좀 만들어 둘까 해서 말일세.”

    화단의 마력초를 좀 캐서 차를 우리고, 남은 건 쿠키에 좀 사용하면 괜찮을 것 같다.

    아니면, 일전에 만들어본 식물성 우유를 만들어볼 수도 있겠지.

    마력초로 우유의 맛을 재현한 루크표 엘프식 우유.

    그러고보니 그 맛을 보지 못했었다. 

    성공인지 실패인지, 꽤 궁금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 제조법은 이미 루크의 머릿속에 잘 틀어박혀있는 상태라, 다시 만드는 것에 문제는 없다.

    재료만 있다면.

    “음, 제레늄, 디릭스, 지르코스……. 아, 좋군.”

    다행히 화단의 마력초들은 한번 옮겨심어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상태가 꽤 좋은 모습을 보였다.

    이 정도면 엘릭서, 아니. 우유를 만드는데 별 문제는 없겠지.

    약초를 빻고, 짓이기고, 짜내어 에센스를 추출하고, 증류하고.

    그렇게 완성된 진한 액체를 적당량을 물에 섞어낸 뒤에, 마력을 담아 인챈트를 걸듯이 잘 섞어주면 완성.

    -이거, 또 만드는거야?

    루크가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본 파이는 조금 환호하는 듯이 소리를 높였다.

    “그래, 그땐 내가 먹어보질 못 했으니 말일세.”

    이미 한번 만들어본터라, 루크의 손길엔 막힘이 없었다.

    일전의 것보다 훨씬 빨라진 속도엔 파이조차 없는 혀를 내둘렀다.

    -와아아……! 역시 대단해!

    루크는 완성된 반죽을 판에 떼어놓고는 차를 우려낼 준비를 했다.

    잠시 반죽을 숙성시킬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 시간을 유효하게 사용해야지.

    -우와……. 대단해……. 맛있어보여…….

    “하하, 그렇느냐.”

    아직 굽지도 않은 반죽인데 벌써부터 맛있어보인단다.

    참 귀여운 반응이로군, 루크는 피식 웃고는 막자사발에 마력초를 넣고는 으깨면서,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이제는 꽤 익숙해진 피로 회복의 영약희석작업이다.  

    하지만 루크는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심신안정의 효과도 추가할 생각이었다.

    일전에 너무 과도한 ‘피로 회복’의 효과가 시루드를 무리하게 만들었다.

    그건 아무래도 원약이 가진 너무나 동적인 효과가 문제가 된 것이리라.

    그야, 그것의 원본은 그걸 마시고 돌격하는 전사를 위한 것이었으니.

    아주 묽게 희석을 해서 그정도의 효과를 주지 못하는 것이지만, 실제 효과라면 그 피로회복은 전투적인 가능성을 품고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엔 전적으로 피로만을 회복하는 효과를 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평범히 하루를 마치거나, 쉬는 시간의 가벼운 감각을 원할때 기분좋게 피로가 풀리는 느낌을 말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며 레시피를 떠올리며 마력초를 살살 긁고 있으니 주전자에서 피쉬이익-!하는 휘파람 소리가 난다.

    그 소리를 들으니 루크는 문득 이젠 첼로 말고 관악기를 연습해보는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첼로는 솔직히 너무 커서 거추장스럽기는 하니까.

    그렇게 부피가 커서야, 이번에 여행을 가는데 들고갈 수도 없지 않은가.

    루크는 문득 좀 조그만 피리같은 종류를 연습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입을 열었다.

    “파이. 이제 첼로말고 다른 악기로 연주를 좀 하면 어떨까 싶다, 음. 관악기는 어떻게 생각하나? 소리가 그리 싫진 않은게지?”

    그때, 루크의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는 파이의 대답소리가 아니었다.

    -바스락.

    그 소리는 파이가 낸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인기척처럼 들려왔다.

    하지만 자신의 등 뒤엔 파이 말곤 어떤 존재도 없었기에, 또 무슨 기묘한 정령어겠거니 싶어서 루크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파이, 그게 무슨 뜻이…….”

    그리고 루크는 돌아보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저 맑은 물처럼 푸른 머릿결의 조그만 뒷모습은 대체 누구의 것인가.

    이 숙소에 아이가 자신 말고도 하나가 더 있었단 말인가?

    설마, 침입자인가? 아니, 그렇다면 자신이 기척을 못 느꼈을리가 없다.

    그렇게 루크가 혼란에 빠진 순간, 아이가 입을 연다.

    순진한 목소리로, 마치 흥얼거리듯이.

    “에레, 나 이거 먹어봐도 돼?”

    ‘……에레? 그 이름은 파이가 날 부르는 이름이 아닌가?’

    루크는 마치 깨달음을 얻기라도 한 것처럼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대, 설마 파이인가?”

    그 물음에 그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루크와 눈을 마추쳤다.

    아이의 두 눈은 모두 청록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천진한 목소리로 답한다.

    “아니? 난 파이 아닌데? 난 파이리스야!”

    “……둘이 다른건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피카츄와 라이츄는 다른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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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다시 대마법사를 꿈꾼다 대마법사였던것은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5000 Years in the future, the Archmage Luke Irushi opened her eyes again. The world has changes so much.

Horseless carriages, an entertainment box with audio and video, food and spices she has never seen before…

And, a changed magical system!

It wasn’t just the world that chang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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