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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9

        

         “후우…….”

         

         묵묵히. 하지만 재빠르게. 또 수상한 스파크 같은 건 튀지 않도록 힘은 조절해서.

         

         예전이 밭을 갈아엎고 파묻혀 있던 내용물을 확보하는 섬세한 유물 발굴 작업에 가까웠다면, 지금 하는 건 한정된 저장 공간을 가진 서버라는 이름의 모래상자를 뒤집어 아예 탈탈 털어버리는 것.

         

         뭐? 그렇게 험하게 막 다루는 과정에서 자료에 손상이 생기거나 해서 상여금을 못 타게 되면 어쩌려고 그러냐고?

         

         …우리는 그걸 허용 손실(Acceptable Loss)이라 부르기로 협의했어요. 네.

         

         어떤 형태로든지간에 반박은 받지 않겠다.

         최근 잠자리도 편하고, 극상 품질의 식사도 거의 무제한으로 제공받으면서 살짝 긴장감이 해이해진 감이 있다는 건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긴 했는데 이런 식으로 가혹하게 정신을 차리고 싶지는 않았다.

         

         보수를 수령하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전부 상세히 확인하고 문제가 될 만한 자료는 파기해야 한다니.

         그것도 초대형 비밀 연구소 한 개 분량의 데이터를? ……난 과로와 능력 남용으로 죽었다 진짜.

         

         “저기… 귀염둥아? 전에 작업을 완전히 끝냈다고 한 서버랙들도 다 다시 점검한다고 한 거 진심……… 응, 그래, 당연히 하겠지. 고생해!!”

         

         “…….”

         

         어지간한 모닥불의 열량쯤은 우습게 뛰어넘었을, 작열하는 내 시선을 받은 마리나가 곧바로 딴청을 부리며 저 구석으로 도망쳤다.

         

         나라고 했던 보람도 없이 일을 또 하는 게 전혀 달가울 리가 있나. 하지만 능력으로 한 번 훑었으니 괜찮을 거라는 애매한 리스크를 짊어졌다가 나중에 나보다 훨씬 잘난 메가코프 소속 엔지니어들에게 자잘한 메타데이터가 발견되기라도 하면… 어우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

         

         – …아샤님? 오늘 몸 쪽을 자주 내려다보시고 쓰다듬으시는 것 같은데, 혹시 수면의 질이 떨어지거나 불편한 부분이 있으시다면 지체없이 의뢰주 측에 요청해서라도 개선을 꾀하시는 게…. –

         

         “글쎄… 이건 순전히 정신적인 문제가 아닐까…?”

         

         나름 집중한다고 노력은 하고 있으나, 중간중간 옆으로 새는 의식과 사소한 손동작 같은 곳에서 어색함을 감지한 제로가 잔소리를 던졌다.

         

         ‘육체가 정신의 영향을 받는 것처럼, 정신도 육체의 조건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같은.

         본인이야 단순히 건강 상태에 대한 충고를 건넨 거겠지만, 듣는 나로서는 전혀 위로가 안 되고 한층 더… 여러모로 심란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말을.

         

         다섯 손가락을 쫙 펼친 채 천장 쪽으로 가져다 대서 빛을 가려본다.

         

         구부렸다 펼쳤다를 반복해봐도 딱히 어색한 감각은 없다.

         

         총알에 스치거나 폭발에 휘말려서 긁힌 적은 있지만, 그렇게 온몸이 찢긴 광경이나 고통은 영상을 보기 전만 해도 까맣게 몰랐으니 이제 와서 환상통(Phantom Pain)같은 게 있을 이유는 물론.

         …내가 어디까지나 나라는 것도 재차 확인했으니 감상적일 필요도 없고.

         

         하지만 자아정체성이 미묘하게 뒤죽박죽인 걸 깨닫고, 그게 내 기준으로는 바로 직전까지 플레이하던 아나스타샤라는 것도 알았을 때야 이게 그 빙의인가 뭔가구나… 했지.

         

         기껏해야 기막힌 우연이나 생체 실험의 부산물인 줄로만 알았던 몸이 내 커스터마이징 설계도를 토대로 재구축한 육체라니, 멋대로 머리를 들여다봐 지고 게임 공략 정보들을 보존해야 할 지식의 보고 같은 헛소리로 평가 당한 건….

         

         “으이이씨…!!”

         

         좆같다. 진짜 좆같아…!

         

         이를 박박 갈고. 열 받은 김에 마침 손에 잡힌 보안 기록부를 갈아엎었다.

         안에 나와 관련된 정보가 있어서 그랬냐고? 몰라 시발! 또 기억에는 없지만 나랑 관련된 정보가 숨어있으면 어떡하는데! 그냥 터트려!! 누가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을 맡기래?!

         

         의심암귀疑心暗鬼가 지금 내게 딱 맞는 꼴이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거늘, 괜히 무섭고 가슴이 아리는 진실을 들추고 나니까 모든 대수롭지 않은 일까지 두려워진다.

         

         고어라 하기엔 정작 잔인한 건 기억나지 않고, 스릴러라 하기엔 이미 무대 뒤편의 비밀이 다 드러났는데 왜 뒤늦은 트라우마에 피해를 봐야 하냐고요.

         

         “……이건 끝! 다음!”

         

         – 그럼 B열 4번 서버랙도 완료로 마킹하겠습니다. –

         

         등판의 팡팡 두들기자 제로가 곧장 움직여 다음 하드웨어에 접선했다.

         솔직히 더럽게 어색한 건 둘째치고, 내가 천하에 다시없을 배은망덕한 새끼래서 얘를 이렇게 대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겨우 목숨 빚을 갚아서 동등한 관계라고 여기던 와중. 파묻혀 있던 차용증을, 그것도 이자가 어마막지하게 달린 놈을 추가로 끄집어낸 기분이라 어찌 감사를 표해야 할지 감도 안 오는 상황이라는 걸 부디 이해해주면 좋겠다.

         

         생명을 빚졌다는 게 들을 때는 멋있을지 몰라도 막상 본인이 지고 있으면 굉장히 부담된다니까?

         

         이걸 대체 어떻게 갚아야 하는데! ……역시 끝내주는 최신형 의체밖에 답이 없나?

         이 철두철미한 로봇에게서 미식의 즐거움을 압류하려던 내 계획은 애당초 이루어지기 힘들었던 걸지도….

         

         “저… 저기, 아나스타샤 누나? 안녕히 주무셨…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

         

         이번에는 늦게 일어난 켄이 인사를 하다 말고 알아서 분위기를 읽더니 자기 자리로 쓱 빠졌다.

         

         엉뚱한 화풀이를 하고 있다는 반성은 있으나, 내가 아나스타샤가 된 경위가 빙의나 유체이탈은커녕 물리적인 환생에 가깝다는 걸 깨닫고 나니까 저 꼬맹이의 이성을 보는 눈빛에도 뭐라 반응하기가 힘들었다.

         

         아니, 나라고 이세계 라이프를 최단 시간만에 마무리해 놓고. 수많은 우연이 겹친 필연, 기적과도 같은 온정과 배려를 받아서 간신히 두번째 기회-삶-을 얻은 주제에 배부른 투정을 부리고 싶지는 않은데….

         

         진짜 진짜 중요한 대전제가 어긋났다는 게 문제다.

         

         최초로 차원 간섭기를 무지성으로 이용한 바보 게이머가 그대로 차원을 넘어 이동했다는 건… 결국 내가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요리조리 빠져나가서 무사히 귀환하더라도 이 몸 그대로라는 결론이 나와버린다.

         

         그렇다는 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과는 별개로, 이제는 그만 바뀐 성별과 육신을 임시 차용물이라 여기는 게 아니라 영원히 안고 가야 할 나라는 존재의 일부라고 납득해야 한다는 말도 되고?

         

         “…….”

         

         그동안 겪었던 실체험을 반추해본다.

         찌릿한 운명을 느꼈다며 고백부터 처박던 어느 양배추 인간, 흥미를 보이고 사적으로 유혹도 하지 않았냐며 다짜고짜 육체관계부터 권해오시던 우리의 히로인님.

         

         와… 이걸 당사자가 마음만 정하면 되는 연애나 사랑에 관한 윤리관이 초파멸적인 사이버펑크 세계에 떨어진 걸 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아니면 대처를 잘못하면 성별 구분없이 그렇고 그런 질척한 사이로 발전한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거에 아찔한 감정을 느껴야 할지 모르겠네.

         

         “야, 혹시 전부터 물어보던 내… 그… 취향 얘기도 그런 의미였냐…?”

         

         – …? 당연합니다. 통상적인 성기 탈부착 시술이나 호르몬제 투입, 뇌파 전조정도 아니고 아예 육신을 무로부터 재구성하면서 염기 배열마저 바꾸는 대규모 임상실험이었던 데다가. 전기 뱀장어(Electrophorus)의 인자를 결합하는 시험적인 기법까지 투입되었던 만큼 아샤님의 자아가 멀쩡한 지 확인을…. –

         

         “그만… 그만…!”

         

         양손으로 귀를 막아버리고 더 안 말해줘도 알겠다는 뜻을 담아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어쩐지 이 녀석, 전부터 계속 내 성관념이 어떻게 돼먹은 건지 궁금해하는 이유가 있었어.

         그야 그런 무지막지한 실험과 대수술을 직관했는데 정작 결과물이 태연하게 일반인 흉내나 내고 있으면 신기하겠지.

         

         – 자신감을 가지시지요. 아나스타샤님의 설계도와 유려한 디자인을 보고 감탄하지 않은 연구원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죽하면 닥터께서 시험관이 있는 중앙 연구실에 눌러앉아 사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자들을 색출하고자 추가 방범 카메라까지 증설하셨…. –

         

         깡—!!

         

         제로는 기어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디테일을 나불거리다가, 매를 벌고 나서야 음성 모듈로 헛되게 질질 새는 전력을 차단했다.

         

         그래… 관찰 카메라를 잔뜩 설치 했었다고? 그것도 다 찾아서 삭제해야겠네 시발!

         

         거기에 더해 우리가 일을 마치고 나서도 추가적인 포렌식을 확실히 막으려면 어떤 방법이 있는지 은근슬쩍 켄에게 물어봐야겠다. 에나마 자산을 들어내다가 고층 빌딩에서 던지거나 소금물로 벅벅 문지를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티격태격하면서도 피고용인답게 착실하게 일하기를 몇 시간.

         이 모래사장……은 개뿔, 사막과 비견될 정도로 드넓은 공사 현장에서 유의미한 물건을 하나 더 끄집어내는데 성공했다.

         

         “…아, 이 뻑뻑한 감촉은 그건데.”

         

         파손 방지 프로텍트와 접근 제한이 둘둘 걸려있던 그 전자책. 군데군데 잘린 박사가 남긴 수기의 또 다른 부분이려나?

         어차피 나를 제외하면 누구보다 쌩쌩한 산 증인이나 다름없는 제로에게 설명도 대충 들었겠다 이대로 파기해버려도 괜찮겠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만일을 위해서 펼쳐본 것뿐인데.

         

         “어라…?”

         

         규격대로 쓰여진 가상 문자임에도 다급함이 전해지는 오타투성이 글귀들이 독자를 반겨주었다.

         

         [ 이 버러ㅈㅗㅈ 가튼 놈드ㄹ! 천하으ㅣ; 개썅머ㅓ저리들이!! ]

         [ 그 아이ㅣ는 하찮은 무기 따위ㄱ 아니라 인류의 등불 그 자체라고 몇 번이고 말했거늘! 생물 병기라는 이;ㄹ개ㅔ 명칭에 눈이 멀어선ㄴ는…!! ]

         

         그 외에도 어마어마한 양의 욕설과 이해하기 어려운 고유 명사나 전문단어들이 난잡하게 휘갈겨져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메모의 작성 날짜는 2195년 7월 15일, 폭발이 있던 당일. 거기에 눈에 띄는 명칭이 하나.

         

         [ 검은Black 용Dragon은 무ㅜㅡ슨! 역시 천박ㄲ한 칭크(Chink)와 거래르,ㄹ 트는게아니었다!! ]

         

         – …아무래도 박사께서 제 DB에 주입할 교전 프로토콜과 아샤님의 컴뱃 슈트, 무엇보다 망명처를 얻기 위해 다른 메가코프를 끌어들이셨던 모양이군요. 어쩐지 아무리 연구소에서 반역 행위가 검출되었다 하더라도 인력과 서버 양측을 동시에 말살하려는 처사-기동 제압 타격대 투입-은 괴이했습니다. –

         

         ‘아니… 나중에 서버 쪽에 결정타를 후려갈긴 건 나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슬쩍 시선을 내려 몇 번이나 신세를 진 프로토타입 전투 슈트를 한 번, 자동권총을 한 번. 그리고 이걸 친히 입수해온 게 그 닥터 마카로비치라는 말을 상기했다.

         

         …아이씨, 역시 천재 과학자라 그런가? 주변 사람 머리 아프게 만드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으시네.

         

         서로가 서로의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기업간 파워 플레이를 생각하면 이것도 스토리나 퀘스트에 악영향을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충분히 복잡한 머리는 더이상의 걱정을 포기해버렸다.

         

         그냥 그럴싸한 가설을 듣고도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지.

         …하지만 웬만해서는 침묵을 유지하는 추적자 씨의 전언까지 흘려들을 수는 없었으니.

         

         “엔지니어 여러분. 바쁘신 와중에 송구하오만, 곧 비서님과… 그분의 직계 상사께서도 함께 내려오실 예정이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소이다. ……당부드리건대 개인적인 일정을 발설하는 것조차 기밀누설이 되는 분이시니, 모쪼록 예의를 갖추시기를.”

         

         “아, 전에 말했던 그 업무 시찰인가 보네요….”

         “…기밀누설? 초고위층?? 누굴까?”

         

         조용히 다가온 그가 주로 마리나를 향한 당부를 마치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다시 문지기 역할을 수행하러 돌아가버렸다.

         

         아, 그래.

         높으신 분이 친히 시찰까지 온다는데 혼자서 머리 붙잡고 시발거리고 있으면 뭐하냐. 물주님께 눈도장이라도 잘 찍어 놓고 일하도록 하자.

         

         …….

         ….

         

         라는 어설픈 마음가짐은 부드럽게 열린 차단문 너머에서 당사자가 오연하게 걸어 들어오자 불행하게도 싹 날아가버렸다.

         

         바닥을 울리는 옅은 진동에 공기가 무거워졌다.

         

         일개 시설에 내려오는 데도 꽤 많은 병력을 대동해야 하는 인물이라면 못해도 전략기획부서실장인 아론급. 그러나 이런 일에 몸소 관심을 표하러 나올 에나마의 주력인사가 누가 있을까… 하는 고민은 짧았다.

         

         먼저 모습을 드러낸 카쿠바리 비서가, 추적자조차 턱짓으로 부리던 남자가 철저하게 사용인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모시는 분이 불편하지 않게 앞장서서 안내하는 건 물론이요, 그렇다고 자리를 만드는 흉내는 내지 않게 우아한 손짓만으로 우리를 가리켰고.

         

         마침내 얼굴을 마주하게 된 남성에 의해 내 입은 뜨악! 하고 벌어졌다. 잠깐만요, 이 미친 마마보이가 왜. 여기에. 아니.

         

         황망한 시선이 교차한다. 나는 있어서는 안 될 주요 캐릭터와의 조우로 인한 당황으로.

         그리고 그는 뜻밖의 인물을, 유령이라도 마주한 것처럼 바라본다. 왜 하필 그게 나인지는 모르겠지만.

         

         게다가 아무리 침묵은 금이요. 그것을 깨는 데는 합당한 가치가 있는 게 옳다지만… 보는 눈도 많은데 이런 말도 안 되는 폭탄을 떨어트릴 이유가 정말 존재했을까?

         

         “………. 어머…님?”

         

         ‘에?’

         

         움찔. 분명 방금 좌중의 시선이 모여들었다가 떨어졌다. 심지어 추적자 포함 훈련받은 정예 병력들마저 일순간 이쪽을 바라봤다가 놀라서 떨어져 나갔다.

         

         그게 대체 무슨 개미친 헛소리니 이 에나마의 광견아!!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자각과 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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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띠링띠링 님의 38코인 후원!! 모두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항상 재밌게 봐주시고 응원해 주셔서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꼴까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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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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