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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9

     새근, 새근.

     

     아스타시아는 깊게 잠들었다.

     잘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그녀가 원하는 방식으로 놀고, 잘 때까지 자장가를 불러줬다.

     “…….”

     깊게 잠든 아스타시아를 보며, 나는 회귀 전과 지금이 확연히 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

     -저는 부학생회장으로서, 최선을 다할 거랍니다!

     아스타시아는 부학생회장이었다.

     원래는 138표 이상을 얻어서 학생회장에 당선되었지만,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의 왕명에 의해 2등이었던 자가 학생회장이 되었다.

     -그런데, 계속 그녀만을 바라보고 계실 건가요오…?

     그녀는 물었다.

     그때의 나는 여러모로 한 곳에 미쳐있었기에, 주변으로 시선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괜찮아요. 당신이 그걸 바란다면, 얼마든지 따라줄게요.

     그때, 그녀는 어떻게 했더라.

     언제나처럼 씁쓸해하며 웃고, 그러면서도 언제든지 나의 행동을 도와주려고 최선을 다했다.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이라는 게 조금은 마음이 아프지만, 그래도 언젠가 보답받게 된다면 그 과정은 따뜻한 봄이 찾아올 때까지 겪게 될 긴 겨울일 뿐이에요.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가 어떤 감정을 품었는지.

     하지만 지금은 잘 알고 있다.

     “우우웅….”

     “안녕히 주무시길.”

     나는 아스타시아의 이불을 잘 덮은 뒤, 소리 없이 그녀의 방을 떠났다.

     스르륵.

     기둥 속의 공간을 통해 지하로 내려가고, 한 명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기나긴 통로가 나를 맞이했다.

     ‘이거 뚫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엘프의 숲에서 마수 오염지대까지 난 ‘테르시안 지하통로’를 보며, 나는 그 지하통로를 만드는 법을 백금경으로부터 배웠다.

     약 한 달.

     약 200m 정도 되는 거리.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지만, 누구에게도 걸리지 않을 비밀통로.

     위이잉.

     끝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승강기 역할을 대신하는 발판에 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위로.”

     내 마력에 반응하자마자 발판에 저장된 ‘부유 마법’이 활성화되고, 곧 나는 수 층에 이르는 높이를 오르게 되었다.

     

     고오오오.

     장학재단 건물에서도 마찬가지로 기둥 속을 지나 도착한 곳은 당연히 재단 이사장실.

     나의 방.

     “후우.”

     방에 불은 켜놓고 나왔었고, 그 누구도 방에 침입한 흔적은 ‘아직’ 없다.

     침입하려고 감히 시도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닌 ‘나의 거처’인 이상.

     ‘침입자 흔적, 시도 없음.’

     지브롤터의 캐롤라인 저택, 어머니의 방과 마찬가지로 막강한 보안 마법이 설치된 방.

     당연히 이런 게 설치되어 있다고 널리 알려져 있기에, 침입자들도 함부로 이곳에 들어올 생각을 하지 못하겠지.

     “오셨습니까.”

     

     이미, 내가 ‘자유로운 출입’을 허락한 사람을 제외하면.

     “오랜만이야, 로버트 경. 입학식 이후로 처음이군.”

     로버트 세빌리야.

     내가 이곳 오로솔 아카데미에 있는 동안, 사실상 지브롤터 백작령에서 내 일을 대신하고 있는 대리인.

     “뭔가 보고할 거라도 있나?”

     “세빌리야 영지에 이상한 자들이 포착되었습니다.”

     “이상한 자들?”

     “예.”

     어떠한 의미에서 이상한가.

     그 판단의 기준은 로버트에게 달려있으나-

     “가모스 세빌리야의 가신이 되었는데, 제국 문화를 받아들이는 게 어떠냐고 옆에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주로 어떤?”

     “화장실이라거나, 세면장이라거나.”

     “99% 첩자로군.”

     농담이다.

     설마 첩자가 제국에서 왕국으로 넘어왔는데, 왕국에서의 위생이 불편해서 친제국적인 움직임을 보이거나 그러겠는가.

     

     아무리 세빌리야 영지가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여관도 허름해서 지내기 힘든 촌동네라고 하더라도.

     “다른 의혹은?”

     “죽은 전대 세빌리야가 어떤 사람인지 물어보고 다녔다는 것 정도…?”

     “그 정도면 확실히 의혹을 담기에는 충분하군. 하지만 내게 보고할 정도라면, 뭔가 확신이 있는 것 같은데?”

     “제 감입니다.”

     로버트는 당당히 자기 가슴을 두드렸다.

     “며칠 전에 가모스 남작의 초대를 받아 저택에서 마주쳤는데, 제가 가늠을 해봤더니 이길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 100%군.”

     “벌써 2년 전에 세빌리야 영지에 들어와 있던 자들을 이제야 발견했다는 것이 조금 죄송스럽지만, 아무래도 그 실력이 범상치 않습니다.”

     “흐음…. 지금 발견한 거야 큰 문제는 아니지. 지금까지 무슨 짓을 해왔든.”

     로버트가 실력이 범상치 않다고 하는 건 분명 보통내기가 아니다.

     “백금경은 혹시 뭐라고 말을 하던가?”

     “아니요. 그분은 그냥 흡혈귀들 잡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순수한 인간이 넘어왔다는 건데….”

     가능성이 있다면, 아마도 백은의 주요 고객이었던 전대 세빌리야 남작에 이어 당대의 세빌리야 남작까지 꾀어내려고 하는 첩자인 경우.

     “상급 그림자 그 이상, 혹은 최악의 경우 마스터 급.”

     “그, 그러면 큰일난 거 아닙니까?”

     “세빌리야 남작이 큰일난 거지, 우리는 딱히? 우리는 지금 제국주의자에 가깝잖아.”

     “아.”

     로버트 경이 머리를 긁적였다.

     “자네가 화를 내지 않는 걸 보면 아직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거나 한 것 같지는 않은데.”

     “예. 오히려 너무 정직하게 세빌리야에 녹아들어 있어서, 제가 가족들에게도 뭐라고 말 못 할 정도였습니다.”

     “그게 첩자질의 기본이지. 일상에 녹아들어서 민간인들도 위장을 자연스럽게 돕게 될 정도로.”

     어떻게 한다.

     “모른 척 해.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다.”

     “하지만….”

     “암 덩어리가 번지고 터져도 노스트럼이 터지지, 우리가 터지는 건 아니다. 그대야 고향에 악영향이 갈까봐 걱정되기도 하겠지만, 반대로 생각해 봐.”

     나는 손날을 세워 내 목을 쓱 그었다.

     “첩자가 세빌리야의 가신 노릇을 하는 동안, 과연 허투루 일할까?”

     “아니요…?”

     “열심히 일하겠지. 누구보다도 세빌리야를, 노스트럼을 위해서. 그러면 오히려 세빌리야 남작’령’에는 이득이잖아.”

     “세빌리야 남작’가’에는 이득이 아니잖습니까.” 

     “가모스 남작, 그대가 목숨 걸고 지켜야 하는 친우인가?”

     “음…아뇨?”

     로버트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2년 전이라면 그랬는데, 지금은 좀.”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법이지. 자네가 지금 ‘유령기사단’의 일원인 것처럼.”

     “……아, 그거 좀.”

     로버트는 손사래를 치며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암흑기사단이라거나 유령기사단이라거나. 그 이름 도대체 누가 지어준 겁니까?”

     “아스타시아가.”

     “직관적이면서도 확실한 이름이라, 매번 감탄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자체적으로 ‘재의 기사’라고 부르고 있지만요.”

     사락.

     로버트가 넓은 종이를 깔고 주머니 안의 내용물을 붓자, 곧 회색 잿가루가 종이봉투 위에 소복하게 쌓였다.

     “이번 주 동안 사냥한 흡혈귀 가루입니다.”

     “생각보다 양이 적군?”

     “세빌리야 남작가에서 본격적으로 마수 오염지대를 사냥하고 나서기 시작했고, 첩자로 의심되는 자들이 열심히 사냥하고 있어서.”

     “재를 빼앗겼다는 건가?”

     다른 건 괜찮다.

     하지만 흡혈귀의 재, 은(銀)은 곤란하다.

     “저희가 확보하기는 했는데, 비공식적인 길이 아니라 정식으로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잡것들이랑 같이.”

     “그게 불만인 거군.”

     다행히, 은의 양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

     “예. 이게 참 공교롭네요. 남작가 입장에서는 올바른 행동을 하는 건데, 그거 때문에 저희가 금전적 피해를 보게 된다니.”

     “원래 그게 ‘불법’을 저지르는 자들의 마음가짐이지.”

     로버트가 헛웃음을 흘렸다.

     “오염지대가 세빌리야 가문에서 관리하는 땅도 아닌데, 그 땅에서 사냥한 물건 중 일부를 몰래 빼돌린다고 불법은 아니잖습니까?”

     “역시. 100점.”

     

     테이블 위에 올려진 흡혈귀 가루에 대한 관점은 지브롤터와 세빌리야가 각각 다르다.

     지브롤터는 잿빛기사단이 사냥해서 얻은 정당한 전리품.

     세빌리야는 그래도 우리 관할에서 사냥한 거니까 신고를 하든 일정 수수료를 내든 좀 내놓으라는 입장.

     

     물론, 지난 2년 동안 단 한 번도 흡혈귀의 가루는 내어준 적이 없다.

     트롤의 피나 오크의 가죽, 고블린 이빨 같은 온갖 부산물은 막말로 ‘짬처리’를 한 적도 있었지만.

     “알겠네. 하루 쉬었다 돌아가.”

     “저 바쁩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기다린다?”

     “여기까지 제가 말을 타고 왔겠습니까, 아니면 죽어라 달려왔겠습니까?”

     “호오.”

     모처럼 쉬고 가라는 제안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로버트는 이 늦은 밤에도 돌아가겠다고 자처했다.

     “유령기사 중에서 누구 한 명 괜찮은 사람 생겼나 봐?”

     “크흠. 그런 거 아닙니다. 그녀와 저는 그런 사이가….”

     “‘자연주의자’들 실제 나이가 얼마인 줄 알고 그래?”

     “왜 그런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고 그러십니까. 그녀는 이미 마음만은 20살로 살고 있습니다.”

     “혹시 막 오빠 소리 듣고 그러는 건 아니지?”

     “크흠! 됐습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조금 짓궂었나.

     로버트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고 했다.

     “로버트 경.”

     “예.”

     “항상 고마워. 특히, 오늘은 이게 엄청 필요했던 날이었거든.”

     “……마나가 그렇게 급하십니까?”

     “그런 게 있어.”

     나는 집무실 서랍 안에 있는 상자를 꺼낸 다음, 상자 안에 가득 담긴 말린 꽃가루를 그대로 흡혈귀의 잿가루에 들이부었다.

     사아아아.

     두 개의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백과 은이 닿으며 일어나는 작용은 언제봐도 새롭다.

     “이만 돌아가 봐. 여기는 걱정하지 말고. 가는 길에 안전 비행하고.”

     “예. 도련님도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지.”

     쿵.

     로버트는 가볍게 주먹을 움켜쥐고 가슴에 두드리며, 곧 집무실을 떠났다.

     

     “…진짜 고맙다.”

     나가고 난 뒤라 들리지는 않겠지만, 진짜 기적과도 같은 타이밍이었다.

     “안 그래도 백은 다 닳아서 직접 해결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나는 손가락으로 백은을 휘저은 다음, 백은의 일부를 두 손으로 종이봉투에 담아 침실로 향했다.

     끼이익.

     아무것도 없는 을씨년스러운 방.

     특징적인 게 있다면, 협탁 옆에 놓여있는 램프 하나.

     화륵.

     내가 다가가자마자 램프에 불이 붙고, 나는 갓 제조한 백은을 그대로 램프에 부었다.

     화르륵.

     불씨가 피어오르며, 곧 방 안에 연기가 차오른다.

     “쓰으읍….”

     폐 깊은 곳까지 차오르는 알싸한 향기.

     “아스타시아랑 지내는 거, 신체접촉은 좀 자제해야겠어.”

     나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은 뒤, 눈을 감았다.

     “3년….”

     제법 길고 힘든 시간이겠지만, 참을 수 있다.

     “후.”

     꿈속에서는, 무엇을 해도 위법이 아니니까.

     * * *

     다음 날.

     덜커덩.

     아침 식사를 차려주기 위해 모처럼 비밀통로를 통해 들어갔으나.

     위잉.

     “……?”

     문이 열리지 않았다.

     

     톡, 톡톡.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을 가볍게 두드려 봤는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음….”

     고장?

     아니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비밀의 문인 이상, 내가 열고자 하면 언제든지 열린다.

     이 비밀의 문이 열리지 않는 경우는 단 하나뿐.

     아스타시아가 잠근 경우.

     ‘방에 누가 왔나?’

     가능성이 있다.

     사실 이상하지도 않은 게, 아무리 아스타시아 혼자라고 해도 넓은 방을 항상 혼자 관리할 수는 없다.

     만일 가능성이 있다면-

     “…황녀님.”

     

     아주 작게 들려오는 소리.

     그 목소리는 아스타시아의 목소리가 아니라-

     ‘305호.’

     메이드 겸 관리인으로 온 제국의 첩자 중 한 명.

     “새벽부터 빨래를 하시겠다면서 내려오시면 어쩌십니까. 그것도 이런 이유로.”

     “그, 그게….”

     “하아. 다음부터는 이렇게 할 거면, 차라리 저를 호출해주십시오. 제가 이 방에서 세탁하고 말리고 그러겠습니다. 고귀하신 분의 옷과 침구를 저희것과 같이 세탁을 할 수 없잖습니까?”

     “그, 그냥 옷이랑 이불일 뿐인데….”

     “그냥 옷이 아니라…!”

     “…….”

     나는 조용히,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부유석 발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하.”

     참는 게 나만 그런 건 아니라서 다행인가 싶으면서도.

     아무래도.

     ‘305호. 영입해야겠어.’

     아스타시아의 편리한 생활을 위해서라면, 제국의 첩자 중 한 명 정도는 완전한 우리편으로 만들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그레이 지브롤터
    아스타시아 폰 테르시안

    성인까지 앞으로 2년하고도 약 9개월

    풋풋한 하이틴 청춘남녀의 로맨스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런 건 없습니다

    다음화 보기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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