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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

       탁자에 앉자 방 안에는 침묵이 맴돌았다.

        ​

        나야 애초에 황후와 따로 나눌 이야기가 없었다. 애초에 마리아와 관련된 일로 부딪힌 걸 제외하면, 황후와 나 사이에 접점이랄 것이 없었다.

        ​

        그래서 의아한 거다.

        ​

        이 사람은 대체 왜 날 부른 걸까.

        ​

        한참을 그렇게 기다리고 있으니 황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

        ​

        “마리아가 너를 점찍었다고 들었느니라.”

        ​

        “…예, 그렇습니다.”

        ​

        이 이야기 때문인가.

        ​

        정말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불렀을 리는 없다. 그녀쯤 되는 위치면 궁에서 벌어지는 일의 진위여부를 파악하는 것쯤은 쉬웠을 거다.

        ​

        그렇다면, 분명 이와 관련해 다른 목적이 있다는 말이겠지.

        ​

        “네가 그걸 못마땅해한다는 것도 들었다.”

        ​

        하지만 이건 예상외였다.

        ​

        적어도 밖에서는 마리아가 내게 달라붙는 걸 거절 없이 다 받아들였었는데? 한탄도 욤이나 바오로 대주교 앞 외에서는 한 적 없고. 

        ​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

        “별궁에 사람을 심어두셨군요.”

        ​

        “네가 들어가기 전에 그곳을 이용한 사람이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

        …그래, 그러고 보면 이 사람도 정부 출신이랬지. 그러면 당연히 별궁 내 전각에 머물렀을 거다. 아마도 내가 쓰는 방이 이전에 그녀가 묵던 곳이겠지.

        ​

        핵심 인물들은 마리아가 원래부터 자신을 따르던 이들로 채워뒀다 하더라도, 원래 별궁 시설 관리를 책임지던 이들까지 전부 갈아치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

        엄연히 별궁은 황제가 소유한 건물이었다. 개인을 수행하는 이들이면 몰라도 시설 관리는 엄연히 그의 관할이었다. 만약 황후가 그들 중 몇몇을 매수했다면, 내부의 소식을 빼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겠지.

        ​

        “예, 그렇습니다. 솔직히, 마리아와 결혼하는 게 그리 끌리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겁니까?”

        ​

        “만약 마리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내 딸’을 소개해줄까 싶어서 말이지.”

        ​

        하아.

        ​

        한숨이 절로 나오는 걸 억눌렀다. 결국 이게 문제였나.

        ​

        “브란덴 변경백령은 지금까지도 그래왔듯 앞으로도 제국의 정치에 관여할 생각이 없습니다.”

        ​

        마리아가 내게 달라붙는 걸 정치적 동맹이라고 해석한 건가. 물론 마리아도 황녀인 만큼 정치적 목적이 아예 없으리라고 단언하긴 어려웠지만, 솔직히 그것보단 개인적인 이유가 더 커 보였다. 애초에 그녀가 황제 자리에 대단한 집착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

        하지만, 원래 사람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법 아니라던가. 심지어 이번 일은 충분히 그렇게 해석할 법한 여지도 있었다.

        ​

        “선제후가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니, 이미 말에 모순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더냐.”

        ​

        “그래서 지금껏 브란덴 선제후는 언제나 다수의 지지를 받는 자를 차기 황제로 지지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제게 따질 것이 아니라 브란덴 변경백을 선제후로 임명한 쪽에 묻는 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만.”

        ​

        황후는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드러내며 표독한 시선으로 날 노려봤다. 아무래도 내가 완전히 마리아의 편에 설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지.

        ​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누가 내 목에 칼 들이밀고 마리아와 황후 중 한쪽 편을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마리아를 선택할 테니까.

        ​

        하지만, 내 선택과 우리 가문의 선택은 다른 문제였다.

        ​

        우리 가족이 사이가 좋은 것과 별개로, 가문의 정치적 결정은 나와는 상관없이 돌아갔다. 삼남이란 그런 의미였다.

        ​

        “…그러면, 내 제안은 거절하는 것이렸다.”

        ​

        “애초에 그리 가치 있는 제안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황후 폐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든, 그리고 제가 누구와 손을 잡든 브란덴 선제후께서는 언제나와 같은 선택을 하실 거니까요.”

        ​

        황후의 눈썹이 굼틀거렸다.

        ​

        “마리아, 그년의 치마폭이 그렇게 좋더냐?”

        ​

        그 입에서 나온 말은 황후가 하는 말이라기에는 너무 천박했다. 나도 나름 모험가 비스무리한 생활을 하며 여러 모욕적인 언사를 들어본 적이 있긴 했지만, 설마 황후라는 사람 입에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

        “따님께 하는 말씀이라기엔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

        “딸은 무슨, 내 핏줄은 하나도 잇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게 내 딸이란 말이더냐.”

        ​

        눈살이 찌푸려졌다.

        ​

        그래, 이럴 거라고 생각은 했다. 제아무리 계모라지만, 그래도 모녀지간인데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사람을 죽이려 드는 건 흔치 않았다. 만약 이게 제국 황실 평균이었다면, 제국은 진작 망했을 거다.

        ​

        어느 때나 권력 다툼은 있었지만, 그건 서로 상대 세력을 회유하거나 요인을 암살하는 정도였지 이렇게 대놓고 상대를 죽이려 들지는 않았다.

        ​

        이건 아예 상대를 자기 가족은커녕 한 집안 사람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기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

        하지만, 짐작한 것보다 그 태도가 불쾌함이 느껴질 정도로 너무 완고했다.

        ​

        “…아, 그렇습니까.”

        ​

        더 이야기를 나눠봐야 머리만 아플 것 같았다. 제아무리 황후라지만, 이렇게 대놓고 모욕을 주는 건 본인도 예의를 대접받을 생각이 없는 것이었기에 그냥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래서, 하실 말씀은 제가 황후 폐하의 편을 들어달라는 것이 전부입니까?”

        ​

        “방금 전 네 손으로 거절했으니, 그래. 용건은 끝났구나.”

        ​

        “착각을 정정해드리자면, 황후 폐하께서는 줄을 대야 할 번지수를 잘못 짚으신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아무리 떠들어봐야 가문의 의사와는 아무 상관 없다는 걸 말씀드려야겠군요.”

        ​

        그러나 황후는 코웃음 쳤다.

        ​

        “하, 가문원의 혼사가 언제부터 가문의 결정과 따로 움직였다고. 하다못해 서로 정분이 나서 결혼하는 이들조차 가문이 결사반대하면 헤어질 수밖에 없거늘.”

        ​

        “…제 말을 전혀 듣지 않으시는군요.”

        ​

        물론, 황후의 말도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적어도 이곳 팔츠 주변이나 제국의 서부, 남부와 같이 풍요롭고 이권이 복잡하게 얽힌 지역에서는 연애는 자유로울지 몰라도 결혼은 가문의 의사가 어느 정도 반영되긴 했다.

        ​

        여행을 다니며 안타깝게도 연애 끝에 이어지지 못하고 서로 다른 파트너와 결혼한 이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

        …물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공식적인 배우자를 두고 바람을 피운다는 소문이 있긴 하지만, 난 내가 보지 않은 건 믿지 않았다. 아무튼 본 적 없다고.

        ​

        하여튼, 그런 풍요로운 지역들과 달리, 인구도, 작물 생산도 썩 만족스러울 정도는 아닌 동부와 북부는 이야기가 달랐다. 이곳은 적어도 귀족들 간에는 이해관계가 그렇게까지 복잡하게 얽히지 않았기에 연애가 결혼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잦았다.

        ​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진짜 서로 원수진 가문이 아닌 이상에야 가문에서 반대하는 일도 잘 없었다.

        ​

        “들을 필요도 없는 헛소리에 귀를 기울일 이유가 없지 않더냐.”

        ​

        그리고 황후는 굉장히 이질적인 제국 북동부의 사정에 완전히 무지했다. 말해줘도 이해할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

        그럼 더 이야기를 나눌 필요도 없었다.

        ​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

        적당히 인사하는 시늉을 하고 뒤돌아섰다.

        ​

        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으니 뒤에서 황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과연 내 아들이 황제가 되고 나서도 네가 이렇게 기고만장하게 나올 수 있을지 궁금하구나.”

        ​

        뒤끝이 심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그 말이 담고 있는 함의가 더 내 기분을 건드렸다.

        ​

        황후가 나를 건드릴 수 있는 방법은, 마리아에게 죄를 씌워 그녀를 처리하며 주변인들을 도매금으로 엮는 것뿐이었다. 애초에 이미 마리아를 상대로 온갖 수작질을 부려온 전적이 있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마리아의 호위를 담당했던 사람으로서 저런 말을 듣는 건 영 불쾌했다.

        ​

        괜히 반발심이 들어 나도 한 마디를 쏘아붙였다.

        ​

        “겨우 저 한 사람 어찌하지 못해 지금껏 마리아를 건들지도 못 하던 사람이, 선제후의 보호를 받는 사람은 잘도 건드리시겠습니다?”

        ​

        그리고 일부러 황후의 속을 박박 긁어놓을 말도 덧붙였다.

        ​

        “지금껏 선제후 하나 회유하지 못한 정치력으로, 참 잘도 선거에서 이기시겠군요. 건승을 빌어드리겠습니다. 잘하면 만장일치로 패배하는 일은 피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너, 지금 뭐라고 했더냐!”

        ​

        황후가 벌떡 일어나 나를 노려봤다. 한 번 피식 한쪽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비웃어주고는 방을 빠져나왔다.

        ​

        안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 들렸다. 한 번 제대로 긁어줬기에 속은 후련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들었다.

        ​

        저 정도로 고집불통에 세상을 자기 기준으로만 보는 사람이, 과연 이 이후로 내게 아무 짓도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

        아니, 장담컨데 아마 마리아와 엮어 내게도 뭔가 수작질을 부리려 하겠지. 그러면 곤란했다. 앞으로도 여러 곳을 돌아다녀야 하는 내게 제국 전역에 눈과 귀를 심어둘 수 있는 사람이 나를 노리는 건 굉장히 귀찮은 일이었다.

        ​

        어쩌면 귀찮은 걸 넘어 정말 위험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

        “아, 맞다. 마리아.”

        ​

        성인식 자체는 진작에 끝났을 테고, 아마 지금쯤이면 몇 명씩 돌아가며 황제를 알현하고 있을 것이다. 나와 마리아는 가장 마지막 차례였기에 마리아는 자리로 돌아와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고.

        ​

        서둘러 발을 놀리며 고민했다.

        ​

        어쩌면, 떠나기 전에 한 번쯤은 황후의 콧대를 눌러놔야 할 필요가 있는 것 아닐까.

        ​

        그녀가 뒤에서 수작질을 부리는 걸 완전히 차단하는 거야 어려울 수 있어도, 적어도 대놓고 나나 마리아의 목숨을 노리는 것 정도는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

        가장 쉬운 방법은 이쪽이 철저하게 상대의 위협을 응징할 힘이 있음을 증명하는 거지만, 아쉽게도 그건 어려웠다. 저쪽은 어쨌거나 황후였고, 황제의 권위를 훔쳐 오진 못해도 황후로서 주변에 뿌릴 수 있는 이권을 최대한 활용한다면 나나 마리아가 가진 힘이나 권력은 그녀에게는 턱도 없었다.

        ​

        무언가, 방법이 필요한 때였다.

       


           


I Wished for Romance, but it Turned Out to be a Romance Fantasy

I Wished for Romance, but it Turned Out to be a Romance Fantasy

낭만 판타지를 꿈꿨는데 로맨스 판타지였다
Score 7.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dreamed of a life filled with romance¹ and romanticism, but I didn’t dream of a romance fantasy… —- ¹ The “Romance” here means a feeling or atmosphere of something new, special and exciting, e.g., a hero’s adven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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