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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

       검과 창.

       

       두 무기가 싸운다면 어느 쪽이 이길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창의 승리를 점칠 것이다.

       

       창의 긴 리치는 검과의 거리싸움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고는 하니까.

       

       실제로도 검과 창이 붙으면 열에 아홉은 창이 승리한다.

       

       

       무기간의 상성차.

       

       그것은 쉽게 극복할 수 없는 벽과도 같다.

       

       어느 정도냐면… 고양이가 아무리 거대하고 사나워봐야, 호랑이를 이기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면 이해가 되려나.

       

       아무튼, 검으로 창을 이기기 위해서는 정말 압도적인 실력차가 존재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행히도.

       

       나에게는 루시를 찍어누를만한 기술이 있었다.

       

       

       -캉!! 카그극…! 텅!!!

       

       서로의 날붙이가 부딪힐 때마다 강렬한 파열음들이 연무장 전체에 울려퍼졌다.

       

       나는 호흡을 갈무리하며 땀이 찬 눈을 부릅 떴다.

       

       차가운 시야 속으로는 허공을 날카롭게 가르는 참격들만이 비춰지고 있었다.

       

       

       -쐐애애액!!!

       

       화려하게 펼쳐지는 식들이 일점으로 모인다.

       

       그것은 이내 쾌속의 찌르기가 되어, 내 오른쪽 어깨를 겨냥한 채로 날아온다.

       

       나는 검날로 그것을 강하게 쳐올리며 방어했다.

       

       

       -카앙!!!

       

       이제껏 발생했던 것 중 가장 큰 소음이 고막을 찢고 들어온다.

       

       순간적으로 손의 힘이 빠질 뻔 했으나.

       

       바로 자세를 다잡고는 눈앞을 횡으로 강하게 베어냈다.

       

       견재타를 날리는 동시에, 스탭을 밟으며 재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허억… 허억…”

       

       

       입밖으로는 거친 날숨이 새어나오는 중이었다.

       

       젠장, 얼마나 움직였다고 이 모양인지.

       

       전생의 몸과 똑같이 생각하며 움직였더니 순식간에 체력이 바닥나 버렸다.

       

       기술의 재현도도 조금 떨어지는 것 같고.

       

       

       ‘그렇다고 질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조금 묘한 기분이 들기는 했다.

       

       전생이었다면 이 정도의 상대는 세 합 안으로 제압할 수 있었는데.

       

       물론 그때가 비정상이었던거지, 지금이 약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단순히 기술만으로도 나보다 월등한 체력과 근력을 가진 루시를 압도하고 있었으니까.

       

       

       -……

       

       

       주변의 어수선하던 소리들도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모두들 넋이 나간 채로 나와 루시의 대련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들 왜 저렇게 놀라는 거지…?

       

       선방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훌륭하다고는 못할 것 같은데.

       

       체력 분배의 실패, 허약한 근력, 어긋나는 스탭.

       

       무엇하나 깔끔하게 마음에 드는 것이 없는 대련이었다.

       

       아마도 아버지가 지금 이 대련을 보셨다면, 가르침이라는 명목으로 나를 존나게 패지 않으셨을까.

       

       

       “하윽, 하아… 대체 당신, 어떻게…?”

       

       

       루시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뭘 어떻게야.

       

       공격하기 전에 시선으로 어디 공격할지 다 알려주고 있으면서.

       

       이런 것도 못 막으면 내다버린 10년인거지.

       

       나는 검을 바로 잡으며 시계를 바라봤다

       

       

       ‘꽤나 지났네.’

       

       

       어느새 10분이 넘게 흘러있는 시간.

       

       체력을 생각하면 이번 합에서 승부를 봐야했다.

       

       굉장히 여유롭다는 듯이 말했지만, 나도 이제 좀 버거운 상태였으니.

       

       다시금 스탭을 밟으며 금발의 소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루시는 나의 접근을 저지하려는 듯이 창을 휘둘렀다.

       

       나는 몸을 가볍게 틀어 그것을 피하거나, 검으로 살짝 흘려내며 거리를 좁혀갔다.

       

       

       -쐐애액! 카드득…!!

       

       고개를 틀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는 창격들의 바람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현재 나는 모든 방어를 벗어던진 채로 공격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상태.

       

       조금이라도 스탭이 흐트러지면 바로 카운터를 허용하게 되겠지.

       

       

       “윽…!!”

       

       

       아슬아슬한 상황은 뇌를 흥분 상태로 이끌고.

       

       심장의 쿵쾅거리는 소음은 신경이 멍해지도록 만든다.

       

       전생의 감각들이 조금씩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지워지지 않는 연필 자국처럼, 내 영혼에 각인되어져 있었다.

       

       

       -챙!! 카각! 텅!!!

       

       보인다.

       

       점점 더 선명하게.

       

       눈앞의 소녀가 보이는 몸짓의 하나하나가.

       

       시선, 호흡, 예비동작, 걸음, 표정.

       

       전부.

       

       나는 이미 그녀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었다.

       

       

       ‘방어에만 전력을 다 하고 있네.’

       

       

       내 몸 상태가 곧 한계라는 것을 눈치챈 것일까.

       

       시간을 끌려는 모양이었다.

       

       억지로 뚫을 수야 있겠지만, 기본적인 스탯 격차가 심하다보니 체력이 간당간당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저 방어에 금이 가게 만들 수 있을까.

       

       찰나의 고민.

       

       나는 이내 입꼬리를 살짝 비틀며 입을 열었다.

       

       

       “주군.”

       

       

       역시.

       

       어린 애들한테는 이런게 직빵이지.

       

       

       “맹세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을 지키겠다고.”

       

       “……!!”

       

       

       순간적으로 정신을 흔들어놓는 묵직한 트래쉬 토킹.

       

       소녀의 얼굴 위로 동요가 드러났다.

       

       동시에 단단하던 방어가 잠시 헐거워지며 빈틈이 생겨났고, 나는 그것을 파고들었다.

       

       

       “이런…!!”

       

       

       뒤늦게 정신을 차린 루시가 창을 휘둘렀으나.

       

       그것은 내 이마를 살짝 긁어내고 지나갈 뿐, 정확한 타격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창끝이 스쳐지나간 부분으로부터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이것까지도 전부 설계된 상황이었으니까.

       

       

       -챙!!!

       

       전력으로 휘둘러진 검날이 창을 쳐냈고.

       

       당황으로 인해 느슨해져 있던 소녀의 손은 무기를 놓치고 말았다.

       

       

       “크흣…?!”

       

       

       아직이다.

       

       나는 루시의 무장이 해제되는 것을 확인함과 동시에.

       

       다리를 걸어 소녀의 몸을 넘어트렸다.

       

       그리고는 그녀의 얼굴을 바로 스쳐지나가도록 바닥에 검을 꽂아넣었다.

       

       

       -콱!!!

       

       아슬아슬하게 빗겨간 검격.

       

       나는 넘어진 소녀를 반쯤 덮친 자세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눈앞으로는 딱딱하게 굳어있는 아름다운 금발의 모습이 보였다.

       

       

       “하아… 하아…”

       

       “……”

       

       

       툭툭.

       

       내 이마에서 흘러내린 핏방울이 루시의 뺨에 떨어졌다.

       

       조금 전 루시의 공격으로 인해 생겨난 상처였다.

       

       나는 일부러 그것이 소녀의 볼에 닿도록 각도를 조정하고 있었다.

       

       

       -미, 친……

       

       -……

       

       -……

       

       

       관중들 또한 얼어있었다.

       

       지나치게 격렬한 분위기에 압도된 것이겠지.

       

       내가 의도한 바가 바로 이것이었다.

       

       충격으로 가득 찬 시선들, 당황에 젖은 표정, 차가운 적막.

       

       

       ‘성공이다.’

       

       

       나는 상황이 계획대로 흘러갔다는 만족감에 긴 숨을 토해냈다.

       

       좋든 싫든, 나는 앞으로 2년 동안 이 아카데미를 다닐 예정이다.

       

       그런데 재학 와중에도 과거의 라이덴 같은 망나니 취급을 받는 것은 곤란했다.

       

       내 멘탈은 그만큼 강하지 않으니까.

       

       

       그렇기에 확실한 반전이 필요했다.

       

       누구도 잊지 못할 정도의, 뇌리에 각인될 만한 자극적인 반전이.

       

       이번 대련은 그 시작을 알리는 퍼포먼스였다.

       

       동시에, 나를 아니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이들에게 던지는 경고이기도 했다.

       

       나는 미친놈이니까.

       

       괜히 깝칠 생각 같은 건 하지도 말라는 경고.

       

       

       ‘물론 루시가 대련 상대로 정해지는 것까지는 계획에 없었지만……’

       

       

       아무리 대련이라 할지라도 제국의 황녀를 피떡으로 만들어 버리면 문제가 생길테니.

       

       상처를 입히지 않고 제압하기 위해 노력했다.

       

       덕분에 꽤나 애를 먹었지.

       

       

       “……하하, 하하하!!”

       

       

       만족감과 상쾌함에 시원한 웃음이 터져나오고 말았다.

       

       조금 즐거웠던 것 같다.

       

       나를 노려보는 아버지도 없었고.

       

       악착같이 나를 두들겨 패려고 달려들던 달인들도 없었다.

       

       그렇다고 상대가 세계 결승 때처럼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압도적인 사람도 아니었고.

       

       

       “아하하… 하하!!”

       

       

       이렇게 마음 편히 검을 휘둘러 본 것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긴장이 풀려버린 탓인지, 나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박장대소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주변이 어떤 반응을 내보일지 예상하지 못한 채로.

       

       

       “……히끅.”

       

       

       시작은 바로 근처였다.

       

       귓가에 닿는 이질적인 소음에, 고개를 내려 앞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흐끅… 흐끄윽…”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푸른색 눈동자가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눈썹과 새하얗게 질려있는 얼굴은, 소녀가 겁에 질려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나는 그제서야 내 모습이 얼마나 이상해 보이는지 자각했다.

       

       황급히 몸을 일으키며 루시를 진정시키려 했으나……

       

       

       “흐윽… 으흑, 흐아아아앙!!!”

       

       

       금발의 소녀는 기어코 울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아.

       

       좆됐네.

       

       

       

       ***

       

       

       만인의 우상이자 태양이 낳은 별.

       

       황가의 금지옥엽.

       

       자애로운 성격과 화려한 아름다움으로 추앙받는 소녀.

       

       제국의 1황녀, 루시 폰 리에트로.

       

       언제나 황족으로서의 기품을 잃지 않는 소녀는 현재…

       

       

       “흐끅… 흐윽…”

       

       

       눈물을 흘리며 몸을 떨고 있었다.

       

       바다를 닮은 푸른색 눈동자 위로는 물기와 두려움이 공존했다.

       

       기괴한 상황을 마주했을 때, 인간은 이해나 공감보다는 공포를 먼저 느끼는 법.

       

       루시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하하… 하하!!”

       

       

       자신의 몸에 올라탄 채로 광기에 젖은 웃음을 토해내고 있는 소년.

       

       툭툭, 소년의 이마에서 떨어진 핏방울이 뺨에 닿을 때마다 루시는 몸을 움찔거렸다.

       

       가여운 소녀는 최대한 숨을 죽인 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이게 뭐야…’

       

       

       무섭다.

       

       너무 무섭다.

       

       처음에는 그저 나쁜 라이덴을 조금 혼내줄 생각이었는데.

       

       상황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버렸다.

       

       무언가 잘못 됐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순간은, 소년에게서 조롱을 들은 순간이었다.

       

       

       -푸훗… 황녀님, 괜찮으십니까?

       

       

       당황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기만하던 그 얼굴.

       

       얼마나 강하게 찬 것인지, 욱씬거리다 못해 쑤셔오는 복부.

       

       루시는 새어나오는 신음을 억누르며 몸을 일으켜야만 했다.

       

       

       이상하다.

       

       분명히 라이덴인데.

       

       어렸을 적부터 체술에 재능이 없어, 매번 나와 네리아에게 기대고는 했던 그 라이덴이 맞는데.

       

       어째서.

       

       전혀 다른 사람을 앞에 두고 있는 듯한 기분일까.

       

       

       -오늘 어떻게서든지…! 당신을 무릎 꿇리고 말겠어요…!!

       

       

       보기좋게 소리쳤지만, 루시는 대련 내내 끌려다니기만 했다.

       

       소년의 공격은 담백하면서도 날카로웠고.

       

       그의 방어는 소녀의 공격이 자신에게 닿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벽.

       

       거대한 벽을 상대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악착같이 창을 휘둘러 봤지만,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허공을 가르는 바람소리 뿐.

       

       루시는 점점 초조해져 갔다.

       

       

       ‘뭐야… 뭔데…!! 원래 이러지 않았잖아, 라이덴…!’

       

       

       소녀를 압박하는 것은 뛰어난 무위만이 아니었다.

       

       차갑게 빛나는 검은색 눈동자.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들로 꽉 채워져있는 그 눈빛은, 소녀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특히.

       

       

       -주군.

       

       -맹세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을 지키겠다고.

       

       

       입꼬리를 기이하게 비틀며 지어보이던 미소.

       

       그 이질적인 웃음은 소녀의 심장을 덜컹 내려앉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충격적인 말과 충격적인 표정.

       

       소년의 심리전에 완벽하게 당해버린 루시는 결국 패배해버렸고.

       

       그에게 반쯤 덮쳐진 자세로 울먹이고 있었다.

       

       아니, 사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유는 패배의 분함 때문이 아니었다.

       

       

       -……하하, 하하하!!

       

       

       숨을 헐떡거리며 굳어있던 소년이, 별안간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이 상황이 정말 즐겁기라도 하다는 듯이.

       

       순수하고 맑은 웃음 소리를 터트려냈다.

       

       그 미소는 방금까지 소년이 보여줬던 표독스러운 분위기와 뒤섞여 기괴한 풍경을 자아냈다.

       

       

       루시는 그에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

       

       바로 옆에는 소년의 검이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간 채로 박혀있었고.

       

       소년의 이마로부터 흘러내린 핏방울이 뺨을 톡톡 두드리는 중이었다.

       

       그에 더해, 눈앞의 소년은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상황.

       

       저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말았다.

       

       

       ‘울면 안돼… 울면 안돼…’

       

       

       루시는 황녀로서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꾸욱 울음소리를 참았지만…

       

       

       “하하, 아하하!! 아하…! 하… 어.”

       

       

       광기에 젖은 검은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흐윽… 으흑, 흐아아아앙!!!”

       

       

       결국 울음을 터트려버렸다.

       

       

       

       ***

       

       

       대련은 그렇게 종료되었다.

       

       서럽게 눈물을 흘리던 루시는 추종자들의 부축과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다들 나를 한 번씩 째려보고 지나가던데.

       

       솔직히 할 말이 없어서 고개만 푹 수그리고 있었다.

       

       

       “……”

       

       

       시발.

       

       왜 그랬지.

       

       어떻게 하면 황녀를 울릴 수가 있냐 병신아…

       

       안 그래도 쟤한테는 미운털이 단단하게 박혀있을텐데.

       

       

       내가 과오를 곱씹으며 참회의 시간을 가지고 있던 와중.

       

       누군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라이덴 학생.”

       

       

       루카스 교수였다.

       

       ……이거 혼나겠지?

       

       아버지는 내가 실수를 하면 한 건당 서른 대 꼴로 때리셨는데.

       

       이쪽은 얼마나 맞아야 되려나.

       

       

       “……예.”

       

       “이마를 다쳤네요.”

       

       “에?”

       

       

       나름 마음의 준비를 하며 곧 날아올 뺨 싸대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돌아온 것은 뜬금 없게도 상처를 묻는 말이었다.

       

       그에 흠칫거리며 고개를 들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루카스의 모습이 보였다.

       

       

       “상처가 심하진 않지만… 잘못하면 덧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답니다.”

       

       “……”

       

       “연무장 옆쪽에 있는 보건실 알죠? 그곳에 가서 치료받아요.”

       

       

       루카스는 이번에도 내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려주었다.

       

       나는 그 다정한 모습에 뒤늦게 어떤 사실을 깨닫고야 말았다.

       

       

       아.

       

       생각해보니 맞을리가 없겠구나.

       

       나 나름 공작가 장남이잖아.

       

       그런 사람에게 손찌검을 할 수 있는 교수가 있을리가 없지.

       

       슈테너랑 찐친인 코른은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하면서 후릴 것 같기는 한데.

       

       모든 교수들이 그 사람 같지는 않으니까.

       

       

       ‘개꿀인데…?’

       

       

       훈련이 끝난 뒤에도 구타 당하는 시간이 없다니.

       

       굉장히 신선한 교육 지침이었다.

       

       그럼 앞으로 자기 전에 몸에 연고 같은거 안 바르고 자도 되겠네.

       

       

       “라이덴 학생?”

       

       “……아, 아 예. 알겠습니다.”

       

       

       실없는 상념들에 잠겨있던 나는, 루카스의 부름에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피곤하긴 한가보네.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는 거 보면.

       

       

       “그럼, 가보겠습니다.”

       

       “치료받은 후에는 자유롭게 돌아가도 좋아요. 어차피 수업도 거의 끝나가니까요.”

       

       “예.”

       

       

       털레털레 연무장을 벗어나는 걸음.

       

       나는 푸르게 개어있는 하늘을 응시하며 기다란 숨을 뱉어냈다.

       

       분명 계획도 성공적이었고, 대련도 나름 즐거웠는데 말이지.

       

       왜 이리도 처량한 기분이 드는 걸까.

       

       

       -흐윽… 으흑, 흐아아아앙!!!

       

       

       “시발.”

       

       

       이슬을 담은 푸른색 눈동자가 자꾸만 아른거렸다.

       

       그 모습 위로, 라이덴의 기억 너머로 보았던 과거의 잔재가 겹쳐졌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하아……”

       

       

       ……조금 조절했어야 되는데.

       

       항상 이 모양이야.

       

       조금만 풀어지면 헤벌레 하고 정신을 못차리지.

       

       병신 새끼.

       

       그런 성격 때문에 몇 번이나 주변 사람들을 망쳐버렸으면서.

       

       

       “나중에 사과라도 해야되나.”

       

       

       안 받아주겠지.

       

       그동안 라이덴이 벌인 짓들이 있으니까.

       

       이번에는 아예 울려버리기까지 했으니 눈에 띄는 것조차 싫어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뭐… 라이덴도 루시를 여러 번 울리기는 했는데.

       

       나만큼 펑펑 울리지는 않았지.

       

       그것도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서.

       

       

       “자살할까.”

       

       

       문득 굉장히 합리적인 선택지가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애써 지워냈다.

       

       내가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마음속으로 반성문을 써내리고 있던 때.

       

       귓가에 익숙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띠링!

       

       [히든 퀘스트 달성]

       

       

       “……?”

       

       

       이건 또 뭐야 갑자기.

       

       히든 퀘스트라니. 내가 오늘 한게 뭐가 있다고 이런게 뜨는 거지.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상태창을 열었다.

       

       

       “상태창.”

       

       

       -띠링!

       

       [히든 퀘스트 달성]

       

       제목:무언가의 학살자

       

       달성 조건

        1.C등급 이상의 창술사를 상대로 승리할 것. (완료)

        2.피격 당한 횟수가 3회를 넘지 않을 것. (완료)

       

       보상:칭호 ‘창살자’

       

       

       “……”

       

       

       안 그래도 참회 중이었는데. 이걸 박제 해버린다고…?

       

       너무한거 아니야…?

       

       나는 원망어린 눈빛으로 상태창을 바라봤으나, 녀석은 침묵할 뿐이었다.

       

       그래, 너도 내 편이 아니다 이거냐.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보상 획득 버튼을 클릭했다.

       

       

       -띠링!

       

       [기존 칭호에 ‘창살자’가 추가됩니다.]

       

       [현재 보유 칭호]

       

       1.리시트 가문의 장남

        2.망나니

        3.외로운 소년

        4.창살자 (New!)

       

       

       [칭호-창살자]

       

       효과:창술사를 상대할 때 근력 스탯이 1 증가합니다.

       

       [이 칭호는 다른 ‘학살자’ 칭호들과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오…”

       

       

       뭐야 이거.

       

       효과는 꽤나 괜찮은데.

       

       거기다가 시너지형 칭호라니. 성장이 가능하다는 소리잖아.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좋은 걸 주워버렸다.

       

       마치 훈련이 2시간 남은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1시간 밖에 안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기분이랄까.

       

       

       -띠링!

       

       [나쁜 일이 있었다면, 좋은 일도 오는 법입니다.]

       

       [자책은 좋지 않습니다.]

       

       [실수는 성장의 기반이 되어야지, 자기혐오의 시작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상태창……”

       

       

       거기에 더해지는 상태창의 덕담까지.

       

       살짝 울컥하는 마음에 나는 미간을 굽히고 말았다.

       

       그래, 너가 날 놀리려고 했을 리가 없지.

       

       내 기분을 풀어주려던 거였구나.

       

       

       “……고마워. 항상.”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 녀석이 없었다면 나는 이곳에서 버틸 수 없었겠지.

       

       스킬 ‘철의 정신’으로 내 마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준 것도 이 녀석이었고.

       

       절망에 빠져있던 나를 일으켜 두 번째 기회로 이끌어준 것도 이 녀석이었으니까.

       

       수상하고, 모호한 존재다.

       

       물론 아직까지도 정말 이 녀석을 믿어도 되는 건지 의구심이 들고는 하지만.

       

       그래도, 고마운 감정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띠링!

       

       [메뉴얼에 따라 행동할 뿐입니다.]

       

       

       “그래 그래. 알겠어.”

       

       

       딱딱하게 대답하는 상태창.

       

       나는 그 반응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해내봐야지.

       

       조금만 더 힘내자.

       

       나는 이마에서 흘러내리고 있는 피를 닦아내며 가볍게 걸었다.

       

       

       ……근데 이거 괜찮은 건가?

       

       피가 좀 많이 나는 것 같은데…?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Wa! 조회수 4k!!
    4K UHD TV!!

    라이덴은 여러분의 생각보다도 더 심하게 망가져 있답니다.

    ===

    2024.2.16
    리메이크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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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Depressed Kendo Player Possesses a Bastard Aristocrat

A Depressed Kendo Player Possesses a Bastard Aristocrat

A Depressed Kendo Player Possessed by a Bastard Aristocrat DKPBA 망나니 귀족에 빙의한 우울증 검도 선수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Don’t worry, Mom.

This time I will be truly 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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