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4

    블랙우드 영지에서는 오랜만에 활기가 돌고 있었다.

     

    오랜 시간 죽음의 냄새만이 맴돌던 영지에, 희망의 바람이 불어온 것이다.

     

    인족 용병단, 홍염단이 이끌어온 바람이었다.

     

     

    여인들의 눈물소리가 멎었고, 남자들의 훈련소리가 다시금 살아났다.

     

    하나 둘, 쓰러져있던 사람들이 일어서고 있었다.

     

    오지 않을거라 믿었던 미래를 향한 기대감을 품어가고 있었다.

     

     

    단 한사람만 빼고.

     

     

    “흐윽…흡…”

     

    네르 블랙우드는 매일 같이 방에 틀어박혀 눈물을 흘렸다.

     

    이 모든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희생을 해야하는 그녀였다.

     

    돈도, 식량도 없는 블랙우드가 값으로 지불할 수 있었던 건, 하나의 생명 뿐이었다.

     

     

    네르는 불합리함을 느꼈다.

     

    왜 자신이 팔려가야하는지 알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이기적인 생각은 입밖으로 꺼낼 수 없는 것이었기에, 그녀는 모든 불합리함을 홀로 껴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할머니의 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언젠가는 구원이 올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식으로, 그 꿈이 깨질거라 생길거라 생각하진 못했다.

     

    운명의 상대는 나타나지 못했고, 대신에 용병이 그녀를 취하러 왔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평생을 살라니.

     

    그건 그녀에게 죽음보다도 싫은 일이었다.

     

    그간 형제들의 괴롭힘보다 싫은 일이었다.

     

     

    늑인족으로서, 기다리던 운명의 상대를 만나, 뜨겁고 짙은 사랑을 나누고 싶었었다.

     

    서로가 없으면 죽을 것 같은 그런 불타오르는 사랑을 하고 싶었던 그녀였다.

     

     

    하지만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건, 인족과 함께하는 미래였다.

     

     

    네르는 인족에 대한 수많은 소문들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약한주제에, 잔인하다.

     

    야만스럽고, 명예를 모른다.

     

    상대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법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으며, 추잡해지고 더러워지는 걸 겁내지 않는다.

     

     

    또한, 문란하다. 특히나 인족 남성은 언제나 발정기라고 들은 네르였다.

     

    그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일부다처제라는 제도도 있고.

     

    인족만이 향유하는 제도였다.

     

    한 남성이 수많은 여성들을 거느리는 것이다.

     

    네르로서는 그 문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너무도 더럽고, 불결하게만 느껴졌다.

     

    사람을 장식품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건 분명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족은 다수의 사람을 한꺼번에 사랑할 수 있다는 변명을 내놓았지만, 네르는 그저 비겁한 변명이라 생각했다.

     

     

    그런 인족에게 팔려나가게 된 것이다.

     

    너무도 치욕스럽기 그지없었다.

     

    그 많은 종족 왜 인족이어야 하는 걸까.

     

    거기에 더해 용병이다.

     

    칼을 휘둘러서 돈을 버는 용병 말이다.

     

    용병들이 술과 여색을 좋아한다는 건 비밀이 아니었다.

     

    용병이 되면, 늑인족조차 여색을 즐길 정도라 들었다.

     

    당연하게도 인족이 덜할 리 없는 것이다.

     

     

    최악의 최악만 묶어놓은 상대와, 평생을 살게 되어 버렸다.

     

    성노리개처럼 이용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애초에, 운명의 상대가 아니라면 그 누가 됐든 싫었겠지만… 인족 용병이라는 조합은 그 불쾌함을 배로 불러 일으켰다.

     

     

    네르는 운명의 상대에 대한 할머니의 조언이 귀에서 맴돌았다.

     

    ‘그 아이를 놓치면 안된단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할머니…나 어떻게 해요?”

     

    이런식으로 운명의 상대를 놓치게 될 수도 있다는 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네르 블랙우드는 도망칠 수만 있다면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눈에 띄는 특이한 꼬리를 지닌 그녀가, 몰래 도망치기란 하늘에 별을 따는 것보다 어려웠다.

     

     

    -똑똑똑.

     

    그 순간, 방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네르는 순식간에 눈물을 닦아내며 표정을 정리했다.

     

    이내 허락의 말을 내뱉기도 전에, 문이 열린다.

     

    “네르.”

     

    “….오라버니.”

     

    네르는 껄끄러운 상대가 나타나자, 이불을 꾹 붙잡았다.

     

    얼굴을 가리며 눈물을 흘리지 않은척 했다.

     

    덩치가 거대한 그녀의 큰오빠, 기딘 블랙우드가 걸어 들어왔다.

     

    “후. 네 신랑이 찾아왔는데 방안에만 처박혀 있다니. 이게 무슨 무례냐. 네 덕분에 우리 입장이 얼마나 곤란해졌는지 알긴 하는 거냐.”

     

    네르는 대답 대신 몸을 웅크렸다.

     

    그는 네르를 조용히 내려보다 말했다.

     

    “하, 설마 울고 있었느냐.”

     

    이어져 터져나오는 한심하다는 한숨.

     

    “…영지민들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기쁘게 받아들여야하는 일이다. 그런데 눈물을 보이다니…”

     

    네르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고 싶은 말은 수도 없이 많았다.

     

    당사자가 아니니까 저렇게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기딘 블랙우드는 자신이 지정한 상대와 영혼결속을 맺었으니까.

     

    분명 네르 자신의 마음이 어떨지 알고 있을게 분명한데도, 이렇게 와서 도발하는 것이었다.

     

     

    평소의 네르는 불쾌한 마음을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언제나 기딘이 두려웠으니.

     

    하지만 이제 그녀로서는 잃을 것도 없었다.

     

    인족 용병에게 팔려나가는데, 그 무엇이 무서울까.

     

    네르는 등에 욱하는 마음을 업고, 용기를 끌어모았다.

     

    “…나가주시죠.”

     

    그럼에도 끝내 입밖으로 내뱉을 수 있었던건, 그저 혼자만의 시간을 달라는 부탁이었다.

     

    피부에 각인된 기딘에 대한 두려움이, 더한 말을 내뱉지 못하게 만들었다.

     

    “..쯧.”

     

    기딘은 오랜 침묵을 유지하다, 몸을 돌렸다.

     

    평소같았다면 이런 반항에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네르도 자신의 희생이 값지다는걸 이해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별다른 대화가 시작하기도 전에, 다행스럽게도 기딘을 밀어낼 수 있었다.

     

    애초에, 새신부가 멍을 껴안은채 혼인식을 할 수 있을리 없었다.

     

     

    “하루만 봐주겠다. 오늘은 네가 아프다는 변명을 어떻게든 둘러댔으니. 하지만 내일까지는 준비해야 할거다.”

     

    네르는 다시금 방안에 홀로 남는다.

     

    그녀는 이불보를 꽉 쥐며 분노를 표출했다.

     

    어딜가나 자신의 편은 나타나지 않는다.

     

    매번 적들만 쏟아져 내린다.

     

     

    지금도, 영지의 영웅이 될 그녀를 위로하는 가족이 하나도 없었다.

     

    조금 더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면 다른 운명을 맞이했을까.

     

    혼인하지 않은 언니들이 있음에도 자신이 팔려나가는데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네르는 달이 떠오르지도 않은 하늘을 바라보며 빌었다.

     

    “제발…시간이 없어.”

     

    누군가가 하늘에서 떨어지듯 나타나, 그녀를 구원해주었으면 했다.

     

    자신을 데리고 도망치는 것도 괜찮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무엇이 됐든, 인족 용병에게 팔려나가는 것 보단 나으리라.

     

    “제발 나타나줘…”

     

    네르는 밝고 맑은 하늘을 보며 빌고 또 빌었다.

     

     

    ****

     

     

    아담 형과 깁슨 블랙우드의 가벼운 회의가 끝이나자, 나는 아담 형과 블랙우드의 영지를 거닐었다.

     

    우리는 누구하나 먼저 불편한 주제를 꺼내지 않았다.

     

    반쯤은 예상했던 것이기에 그런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네르 블랙우드는 나타나지 않았고, 그게 시사하는 바는 하나였다.

     

    그녀는 이 혼인을 원치 않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이해하려 애썼다.

     

    애초에 늑인족은 단 한명만을 사랑한다 했다. 그만큼 사랑에 있어 진심인 종족이었다.

     

    갑작스러운 정략혼이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애초에 귀족이 용병에게 시집오는 것이 굴욕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르는거고.

     

     

    물론, 그 불쾌함을 티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지만.

     

     

    형과 난 그보다 다른 주제를 먼저 토론했다.

     

    “정찰대를 보냈어. 내일 쯤이면 우두머리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을거야.”

     

    “동쪽 숲도 제대로 확인하라 해. 우두머리 몇 마리가 더 숨어 있을법도 하니까.”

     

    “알아. 식사는 우리끼리 해결해야 한다 했나?”

     

    “그래.”

     

    대화 내내 아담 형은 미약한 불편함을 숨기지 않았다.

     

    깁슨 블랙우드와의 만남 이후, 그는 바보 같은 미소를 단 한번도 짓지 않았다.

     

    외려 내가 불편해져 먼저 물어볼 정도였다.

     

    “…왜.”

     

    “뭐가?”

     

    “형 기분 나쁜거 딱 보여. 뭐가 문젠데.”

     

    “…”

     

    형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긴 한숨과 함께 나를 돌아봤다.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하는 아담 형.

     

    “…베르그. 지금이라도 싫다면 의뢰 포기 할 수 있어.”

     

    “뭐?”

     

    “좋은 짝을 찾아주려 했는데, 이건 생각하지도 못했네.”

     

    나는 어깨에 손을 얹는 아담 형을 가볍게 털어내며 말했다.

     

    “됐어. 애초에 그것 때문에 혼인하겠다 결정한 것도 아닌데.”

     

    “…”

     

    계속해서 표정을 풀지 못하는 그를 보며 나는 언성을 높였다.

     

    “됐다고. 결국 홍염단을 위한 일이잖아.”

     

    그가 짜증을 내는게 나는 외려 불편했다.

     

    “싫다하는 널 끌고 왔는데, 일이 이렇게 되니까 내가 미안해서 그러지.”

     

    “미안했으면 애초부터 제안하지를 말던가. 상대가 당연히 날 좋아할거라 생각한것도 바보 같은 거 아니야?”

     

    “…최소한 감정을 숨기는 정성은 보일거라 생각했지. 하나만 봐도 열을 안다고 하잖아. 상대가 제대로-”

     

    “괜찮으니까, 그만해 이제. 끝났어.”

     

    아무리 입을 열어도 그가 인상을 풀지 않자, 나는 설명을 덧붙였다.

     

    “외려 나은거지, 이게.”

     

    “뭐?”

     

    “그만큼 상대방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말이잖아. 그러니 그만 표정 풀어. 이미 결정은 내렸고 되돌이킬수도 없어. 반지도 이미 샀다고.”

     

    “….”

     

    “시작이 이렇다고 끝까지 이럴거라는 보장은 없잖아. 앞으로 잘 맞춰서 이어나가면 되잖아. 형도 나랑 처음부터 친했어? 싸우면서 친해졌지.”

     

    “하.”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형은 이제 손 떼.”

     

    우리의 입장이 곧장 뒤바뀌었다.

     

    이제는 내가 혼인에 찬성하는 쪽이었고, 형이 반대하는 쪽이었다.

     

     

    형은 표정을 찌푸렸고, 나는 더는 그런 형을 위로하지 않았다.

     

     

    이미 결정을 내린 사항이었다. 겨우 이런 문제로 흔들릴 마음이었으면 하겠다고 결심하지도 않았다.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데 쉽지 않다는건,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마음을 정했다는 뜻을 전달하기 위해 물었다.

     

    “그래서 이렇게 되면, 혼인식은 언제지?”

     

    “…이틀 뒤.”

     

    “토벌은?”

     

    “토벌은 혼인이 끝난 이후에 진행할거야.”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사람이 급할때와 급하지 않을때는 입장이 다른 법이다.

     

    토벌 이후 네르 블랙우드를 내어주지 않겠다고 했다간 문제가 커진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잡다한 생각은 집어치웠다.

     

    “됐어, 형.”

     

    나는 멀리에서 흘러내리는 폭포를 바라보았다.

     

    이틀 뒤라.

     

    다짐하듯, 내가 속삭였다.

     

    “…내가 노력할게.”

     

    다음화 보기


           


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IW 섞일 수 없는 이종족 아내들
Score 4.3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Polygamy is abolished.

We don’t have to force ourselves to live together anymore…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