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을 넘어 이제 곧 해가 뜰 새벽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실비아는 아직도 잠에 들지 못했다.
괜히 침대에서 뒤척거리던 그녀는 점점 푸르르게 밝아오는 새벽의 빛으로 시야가 밝아지는 것을 느끼고는 자신의 팔을 들어올려 저주받은 붉은 눈을 가렸다.
차라리 날이 밝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실비아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망가진 세상이라면, 희망의 빛이 없는 세상이라면 하늘의 태양이 무슨 소용인가.
비참한 세상을 비춰 구태여 보여줄 뿐인 그 심술궂은 광원은 없는게 낫지 않은가.
차라리 밤이라면, 영원토록 끝나지 않는 어둠의 그늘 속 이라면.
한탄스러운 이 세상도, 끔찍한 실패자인 본인도 영원히 모습을 숨길수라도 있을 텐데.
실비아는 한탄섞인 한숨을 내 뱉었다.
“애쉬…”
실비아는 자신의 실패를 낮낮히 밝힌 애쉬의 고발에 괴로워 하면서도 그가 밉거나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그 역시 자신의 실패가 낳은 불행에 온몸으로 내던져진 사내였다.
그가 죽어가는 몸을 힘겹게 이끌고 나를 찾아왔던 이유이자, 그의 하루 일과중 가장 중요하다고 할수 있는 라일라의 무덤.
그 조그만 소녀의 죽음이 자신의 실패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에 실비아는 주체하지 못할 죄책감에 휩싸였다.
게다가, 애쉬는 세상의 모습을 내게 고한 직후,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와, 자기도 모르게 내 뱉어 버린 성급함에 대한 반성,
그리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고발이 화풀이에 불과한 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과 자학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바보같이 착해 빠졌어.”
실비아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는 그녀의 실패로 인한 세상의 타락에 직접적으로 피해를 받은 피해자일 뿐이었다.
애쉬가 피눈물을 흘리고 쓸개를 씹는 심정으로 마음속에 묻었을 슬픔이 얼마나 될지 가늠조차 되질 않았다.
헌데, 그런 그가 되려 실비아를 걱정하고 자신이 그녀에게 상처를 준 것은 아니었을지 걱정했다는 것이 그녀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실비아는 그런 그가 무척이나 고마웠다.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모든것과 격리된 채 숨어살고 있는 내게 찾아온 사람이 하필 애쉬였다는 것에 그녀는 무척이나 감사해했다.
애쉬와 얼굴을 맞대고, 자신의 저주가 그에게 옮아간 그 날, 그녀가 했던 말은 빈말이 아닌 진심이었다.
“…너는 어쩌면, 여신께서 내게 내리신 포상이 아닐까?”
실비아는 굳이 그 때의 그 말을 다시한번 소리내어 말해보았다.
갑자기 애쉬의 얼굴이 보고싶었다.
견디지 못할만큼 강력한 충동이었다.
어차피 이젠 얼굴을 가려야 할 필요도 없으니까.
실비아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아직 어두컴컴한 새벽의 공기를 가르며 방문을 열었다.
“…애쉬.”
천천히 애쉬가 잠들어 있을 침대를 향해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본다.
끼익, 끼익,
평소에는 신경도 쓰이지 않건만, 왠지 지금은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무척이나 크게 들렸다.
실비아는 숨소리마저 참으며 애쉬를 향해 다가갔다.
“…”
애쉬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새근새근, 느리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조용히 그의 코에서 흘러나왔다.
하긴, 평소에도 그는 점심때가 다가와야 겨우 눈을 뜨곤 했다.
실비아는 옅은 미소와 함께 긴장을 풀고, 애쉬의 침대 옆 바닥에 앉아 애쉬의 얼굴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는 조용히 새벽의 푸르른 공기 사이로 어슴푸레하게 비치는 그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보니 정말 어려보이네.’
애쉬는 도대체 몇살인걸까?
다시 생각해보면 두 사람은 서로의 나이, 가문명 등 기본적인 정보조차 공유되지 않은 채였다.
같이 살아야 하기에 같이 살고 있을 뿐, 서로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무척이나 적었다.
애쉬는 적어도 용사 실비아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알고 있던 것 같지만, 자신은 애쉬에 대해서 그 무엇도 알지 못했다.
물론 가족을 다 잃은 그의 상처를 굳이 헤집어 파는 것 처럼 보일까봐, 구태여 묻지 않았던 점도 있었다.
실비아는 조용히 잠든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겨주었다.
무방비한 그의 얼굴이 조금 더 잘 드러나 보였다.
‘…성년이긴 한가?’
푸른 잿빛이 비쳐보이는 단정한 검은 머리카락과 한때는 에메랄드 빛이었던 붉은 눈동자.
언제나 친절하려 노력하는 의젓한 모습과 타인의 심상을 헤아리려 애쓰는 모습을 보면 성인인것 같기는 한데, 겉모습만 보면 아직 앳된 티가 다 벗어지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 자신보다는 어릴게 분명했기에, 첫 대화부터 자연스럽게 말을 놓고는 있었다.
설마 아직도 성년이 아닌 걸까?
에이, 그정도로 어려보이지는 않는다.
젖살이 살짝 남은 얼굴만 본다면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의외로 탄탄한 골격이라던가 말투에서 느껴지는 학식, 그리고 펜혹이 생긴 손가락 같은 걸 보면 적어도 성년은 지났을 게 분명했다.
여동생을 살리기 위해서라지만, 걸을 수 없는 몸으로 그 긴 거리를 걸어온 그 정신력 역시 미성년의 것이라 생각하기엔 어려웠다.
실비아는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그의 옆에 내려놓았다.
살짝 단단한 매트리스가 뺨에 닿는 감촉이 느껴지자, 이내 곧 그의 옅은 숨이 그녀의 코끝을 스치는 것이 느껴졌다.
살짝만 움직이면 서로의 코가 부딫힐 거리였다.
‘…이제와서 부끄럽거나 하진 않지만.’
이미 그가 이 오두막에 온 날 부터, 그가 깨어나는 열흘 후 까지.
그녀는 음식을 먹을 수 없는 그를 위해 직접씹은 약재나 식사등을 그의 입으로 먹여주곤 했다.
그 행위는 엄연한 치료 목적이었기에 이제와서 처녀처럼 수줍어 하거나 하진 않는다.
오히려 애쉬라면 입맞춤 정도는 몇번이고 해줄 수도 있었다.
오두막 청소, 맛있는 식사, 즐거운 대화상대,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것은, 내가 고독하지 않도록 있어준 것…
그녀는 애쉬에게 말로 다 하지 못할 만큼의 감사를 느끼고 있었다.
두번다시 사람과 관계될 일이 없을것이라 여겼던 그녀였기에, 사실은 의식을 잃은 그를 돌볼 때 부터 이미 약간 즐거웠었다.
마침내 깨어난 그가 무척이나 착한 사람이어서 너무나 다행이라 생각했다.
비록 저주에 묶여 동거하게 되었지만, 그렇게라도 내 곁에 남아주었다는 것이 눈물이 날 만큼 황홀했다.
게다가 솔직히 큰 기대까진 없었는데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멋진 요리를 만들어내는 그의 능력에 번번히 감탄하게 되곤 했다.
‘…’
그렇기에 애쉬를 생각하면 무척이나 미안한 것 투성이었다.
가족을 죽게 만들어서,
여기에 묶어두게 되어서,
모든게 내 잘못인데도 불구하고, 내게 은의를 느끼는 그의 순진함을 내가 이용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그 순간 그녀의 콧속으로 어떤 달짝지근한 향기가 죄책감을 뚫고 그녀의 뇌로 들어왔다.
자극적이지 않은 부드러운 단내, 그리고 약간 독특한 느낌의 옅은 짠내.
이 것이 무슨 냄새인지 그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며칠 전, 이불에 코를 박고 킁킁 대며 애타게 찾던 그 냄새였다.
아, 하필 그 모습을 애쉬에게 보이고 말았었지.
실비아는 갑작스레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입맞춤 따위보다 훨씬 부끄러운, 가능하다면 머릿속에서 도려내고 싶은 수치스러운 기억.
머릿속이 간질간질해지는 그 향기가 그녀의 코 끝에 가득 맻혀 있었다.
애쉬의 체향이 그녀의 가슴 깊숙히 침투해 들어왔다.
“하아… 애쉬…”
“으, 으음…”
“앗,”
실비아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애쉬는 잠결에 얼굴을 찌푸리며 뒤척거렸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당황하며 숨을 참으며 얼굴을 뒤로 빼내었다.
애쉬는 잠시 쩝쩝 거리며 몸을 뒤척이더니,
“…으우, 누나아… ”
작게 잠꼬대를 하기 시작했다.
“… 돌아와…”
“…”
“엄므아… 라일라…”
“…!”
“…아부지…”
그리고 애쉬는 이내 곧 다시 고른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앗 하는 사이에 새벽은 빠르게 밝아왔다.
검푸른 어둠속에서 희끄무레 하게 보이던 애쉬의 얼굴이 보다 밝은 파아란 공기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
애쉬의 눈가에 맻힌 눈물과, 그 아래 하얗게 남은 눈물자국이 실비아의 눈에 들어왔다.
“…”
여신께서 주신 선물이라니,
그는 물건 같은 것이 아니다.
사람이다.
어리고 여린, 불행의 발톱이 할퀴고간 상처에 아파하는 사람.
실비아는 애쉬의 이불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겨, 그의 어깨까지 덮어주었다.
식탁보로 쓰이던 얇은 이불이니 너무 덥지는 않을 것이다.
잠깐 얼굴을 가져다 대었을 뿐인데 애쉬의 잠자리가 얼마나 단단하게 느껴졌는지 실비아는 새삼 놀라웠다.
여건만 된다면, 푹신한 잠자리와 질좋은 이불을 구해다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사람의 손이 닿는 공산품을 구할 방법은 없었다.
검사인 그녀가 뜨개질이나 바느질 따위에 소질이 있지도 않았다.
어쩌면 애쉬가 그녀보다 더 손재주가 좋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실비아는 자기 침대를 내주어야 할지 고민하며 천천히 방으로 돌아갔다.
*
용사와 뛰어난 전사들을 대부분 잃어버린 이 혼란한 시대.
권력자들 사이에서 세상이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과 무력함이 퍼져,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이 시기에는 언제나 그런 틈을 파고들려 하는 자들의 암약이 끊이지 않곤 했다.
하지만 정작 권력자들도, 그 권력을 노리는 자들도 하나 잊은 것이 있으니,
백성들의 삶 역시 끊임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모든 권력은 백성으로부터 나온다.
이 말은 단순히 민초들을 달래기 위한 사탕발림이 아니다.
제 아무리 달콤한 권력을 탐닉하는 귀족이라 할 지라도,
아무리 뛰어난 권세를 누린 왕이라 할 지라도,
분노한 민초들이 모두 들고 일어선다면, 그 수의 폭력 앞에 쫒겨나거나 참수되는 법이었다.
허나, 백성들이 고통에 시달릴 수록, 되려 그 힘과 위세를 키워가는 권력들 역시 존재하는 법이었다.
대표적으로는 종교가 그랬다.
의지할 곳을 잃은 이들이 끝내 구원을 찾기 위해 방문하는 마지막 희망.
비탄에 빠진 사람들을 구원하고, 침묵하는 권력을 꾸짖으며, 힘없는 백성들의 안위를 살피고자 하는 그들의 움직임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그렇게, 왕국에선 여신교의 위세가 나날이 커져만 갔다.
그들은 왕궁을 좀먹는 부패한 귀족들을 여신의 이름으로 처단했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제 자식까지 삶아 먹을 정도로 비참한 절망이 가득한 영지로 찾아가 그 관리를 소홀이 한 책임을 물어 영주들을 처형했다.
이 혼란한 시기를 틈타 기존의 질서와 위계를 뒤집으려 하는 간악한 무리들을 찾아내 목을 베었다.
이웃 나라의 침략을 막느라 정신 없는 왕국을 대신해, 민생의 안정을 대신 살피었다.
“그렇게나 아름다웠던 골드필드의 영지를 나는 기억한다.”
여신교를 상징하는 표식이 박힌 하얀 갑옷을 입은 여기사가 식탁에 앉아있는 남자를 향해 읇조렸다.
여기사의 목소리는 얼핏 들으면 담담하게 들리면서도, 그 목구멍 깊은 곳에서 이글거리는 분노를 채 숨기지 못한채 매캐한 연기처럼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네놈이 간악한 술수를 부려 이 땅의 정당한 주인으로부터 영지와 가문을 강제로 찬탈했던 것을 기억한다.”
“우읏, 흑, 후윽,”
식탁에 앉아있는 남자는 몸을 벌벌 떨며 눈을 질끈 감은 채 여기사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녀가 뱉는 문장중 탁성이 나올 때 마다 그는 거세게 움찔거렸다.
남자의 몸은 의자에 묶여있었고, 눈은 거친 밧줄로 두바퀴 감겨져 있었다.
워낙 거친 밧줄로 묶어서 그런지, 그가 움찔 거릴 때 마다 그의 얼굴이 찢어지며 피가 흘러 내렸다.
“그로 인해 내 친구와, 내 가족, 그리고 내 친구의 가족이 겪어야 했던 수모를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흡, 흐윽…”
공포에 질린 자신의 호흡소리를 뚫고, 남자의 귀에 바퀴를 끄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대로 여신교의 여기사는 뚜껑이 덮인 접시를 담은 트레이를 밀며 남자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남자의 옆으로 다가와 그 접시를 남자의 앞에 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찬탈한 영지의 백성들이 굶어 죽어갈 때, 네놈은 사치스러운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있었음을 나는 어제 분명히 보았다.”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남자의 눈을 가리고 있던 밧줄을 단검으로 거칠게 끊었다.
남자는 자신의 뒤통수가 살짝 베여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고도 아무런 불평 하나 내뱉지 못했다.
애초에 숨을 쉬는 것 조차 마음대로 되고 있지 않았다.
남자는 피부가 다 벗겨진 눈 주변에 힘을 주어 어렵게 눈을 떴다.
여기사는 그런 그의 앞에 놓인 접시의 뚜껑을 열어 주었다.
“…이, 이건…?”
“함박 스테이크.”
접시 안에는 잘게 갈은 고기를 뭉쳐 노릇하게 구워낸 음식이 정갈하게 놓여있었다.
붉은 산딸기 소스와 싱싱한 아스파라거스 하나가 멋스럽게 토핑 되어있는 한 접시였다.
“…”
“그렇게 고기를 좋아했던 너의 마지막 만찬이다.”
“…하, 하흐, 흐윽,”
남자는 여자의 말에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벗겨진 피부에 닿아 쓰라렸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멈출 수는 없었다.
자신은 처형된다.
죄목은 반란, 영지 찬탈, 비방, 살인 교사, 그리고 영지 관리 소홀.
왕위를 노린 제 3 왕자에게 협력하기 위해, 이 영지를 비겁한 방법으로 차지했던 남자는 그저 눈물을 흘리며 비탄에 잠길 수 밖에 없었다.
설마 수도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영지인 이곳까지 ‘여신교의 가장 무거운 검’ 이라 불리는 그녀가 찾아오리라고는 차마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네놈이 식사를 마치면 형을 집행한다.”
여기사는 단호한 목소리로 남자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남자는 그제서야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그 순간 심장을 조이는 듯한 충격을 느끼며 남자는 숨을 들이켰다.
“그래, 네놈도 나를 기억하는 군.”
“설마… 그럴리가… 말도 안…”
여신교의 가장 무거운 검.
교황에게 하사받은 최고등급의 재판 및 집행 권한을 가진 그녀가 직접 이곳까지 행차한 이유.
“애… 앨리스, 앨리스 골드필드…”
“… 그래, 네놈이 쫒아낸 이 땅의 정당한 주인의 딸이자, 네놈이 강제로 병사들에게 던져줘 겁탈당한 끝에 자살해버린 어머님의 딸.”
“…아, 요, 용서 해주시오.”
“앨리스가 너에게 여신의 이름으로 복수하러 왔다.”
“자… 잘못했소. 제발… 부디… 여신님께 빌테니, 용서를…”
남자는 몸을 덜덜 떨며 고개를 쳐박고 빌었다.
그러나 여기사는 단호하게 재촉했다.
“어서, 마지막 식사를 즐겨라. 지금 당장 목이 베이고 싶지 않다면.”
남자는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이며 간신히 나이프와 포크를 쥐었다.
그녀가 두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한, 반항은 꿈도 꿀수 없었다.
그 이유는 단순한 전투 실력의 차이 뿐만이 아니었다.
전투력의 차이, 명분의 차이, 등에 업고 있는 권력의 크기의 차이, 백성들의 지지의 차이.
그리고 무엇보다 남자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후회와 죄책감의 차이.
남자는 맛도 제대로 느끼는 못한 채 눈물을 흘리며 꾸역꾸역 고기를 목구멍에 쑤셔 넣었다.
고기가 줄어들 수록 다가오는 처형의 공포 떄문일까.
보고있는 것이 답답할 정도로 무척이나 느린 속도였지만, 여기사는 인내심을 갖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가 공포에 떠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무척이나 흥미로운 듯이.
그럴만도 했다.
지금은 여신교에 의탁해 성을 버렸지만, 이건 그녀가 꿈꿔온 복수의 시간일 테니까.
남자의 식사는 거의 세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천천히 진행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을 길게 잡아 끈다 해도, 결국 다가오고 마는 끝은 남자에게 살벌한 미래를 예고하며 그 거대한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었다.
마치 뱀 앞의 개구리처럼 굳어버린 남자를 바라보던 앨리스는 잔혹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 다 먹었군. 맛은 있었나?”
“…욱, 윽… 흑,”
오랜시간 천천히 이뤄진 식사였음에도 남자는 목이 메이고 뱃속이 더부룩하게 느껴졌다.
입으로 들어가는 지 코로 들어가는 지도 모를 만큼 아무런 정신이 없었다.
이제 죽는다.
남자는 다시 거친 그 밧줄로 이번엔 양 손을 묶인 채 그녀에게 힘없이 끌려갔다.
눈이 뜨여 있었기에 처형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자를 무릎 꿇린 후, 그녀가 직접 내 목을 칠 것이다.
그럼 잘린 목은 저 처형장 밑에서 서슬퍼런 눈빛으로 미친듯 소리치는 군중들 앞에 떨어지겠지.
남자의 머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욕설과 침, 오물에 뒤덮여 썩어갈 것이다.
남자는 그 사실을 겨우 받아 들였다.
거의 세 시간쯤 되는 긴 식사 시간동안 어느정도 진정도 됐고, 마음의 정리도 되었다.
그렇기에 마지막 순간만큼은 귀족답게 담담하게 있으려 했다.
쳐형장에 도착하고, 천천히 무릎을 꿇으려는 그 순간,
앨리스는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보니, 네놈에게는 네 살짜리 딸이 하나 있었지.”
“… 그… 그렇소…”
남자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면서도 다시한번 식은 땀을 흘렸다.
처음부터 딸과 아내는 이 빌어먹을 영지로 데려오지 않았다.
제 3왕자가 쿠데타를 일으켜 모든 것이 정리 되면, 그때야 비로소 가족들을 데려와 비옥하기로 유명한 이 영지에서 함께 살아갈 계획이었으니까.
“이름이 어떻게 되지?”
헌데, 그녀는 갑자기 왜 딸의 이름을 묻는 건가.
남자는 갑자기 드는 한기에 입을 다물었다.
설마, 아무리 내게 품은 원한과, 그로부터 비롯된 복수심이 강하다 하더라도, 이젠 여신교의 상징과도 같은 그녀가 고작 네살밖에 되지 않은 내 딸에게 해코지를 하려는 건가?
남자는 자신의 무릎을 꺠트릴 기세로 바닥에 무릎을 찧으며 빌었다.
“안됍니다… 제발, 제 가족은 살려주시오. 내 잘못이오… 나만의 잘못이란 말이오! 제발, 그 어린 것은 이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
“됐다, 내가 알 필요는 없지, 네 놈만 알고 있으면.”
앨리스는 남자의 애원을 단칼에 끊으며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하고는 천천히 처형장 횃대에 기대어 있던 커다란 도끼를 들어 올렸다.
“… 그게 무슨 말이오?”
남자는 커다란 도끼를 번쩍 치켜드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의 말과 태도가 너무나 의아해서 곧 죽을 상황이라는 공포마저 살짝 옅어진 것 같았다.
앨리스는 미소지었다.
아주 소름끼치는 미소였다.
“네가 마지막으로 먹은 요리의 이름 정도는 네가 알아야 할 거 아니야.”
“…뭐?”
남자의 목은 잘려나갔다.
죽음보다 더 끔찍한 경악으로 물든 남자의 얼굴이 분노한 군중들 사이로 굴러 떨어졌다.
사람들은 그 얼굴을 밟고 침을 뱉고 모욕과 저주를 퍼부었다.
남자의 얼굴에 원한을 풀기엔 먼 뒷자리에 위치한 백성들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여신교의 성처녀. 앨리스 님, 만세!”
“만세!”
“여신의 빛이 정의를 비추리!”
“만세!!”
앨리스는 조용히 숨을 몰아쉬고는 도끼를 처형장의 바닥에 떨어트렸다.
이로서 여신교의 정의도 바로 세우고, 자신의 가문을 노린 비열한 자에게 복수도 마쳤다.
비단, 이 복수는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친구이자 골드필드 가문의 하위 가문이었던 스태프 가문의 복수이기도 했다.
용사파티에 참가했다 죽은 자신의 친구, 마리아 스태프의 가족들을 지켜내지 못한 자신의 속죄이자 복수.
비록 스태프 가문의 가주를 차지한 자는 도망쳐 버렸지만,
“반드시 잡을거야.”
앨리스는 이미 죽은 자신의 친구와 친구의 부모님.
그리고,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던 친구의 두 동생들을 떠올리며 굳게 맹세했다.
“마리아. 애쉬. 라일라. 반드시, 너희의 원한을 갚아줄게.”
애쉬 스태프의 누나인 마리아 스태프의 친구이자 스태프 가문이 모시던 골드필드 백작가의 장녀.
앨리스는 자신을 향해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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