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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

       *

        밤을 넘어 이제 곧 해가 뜰 새벽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실비아는 아직도 잠에 들지 못했다.

        ​

        괜히 침대에서 뒤척거리던 그녀는 점점 푸르르게 밝아오는 새벽의 빛으로 시야가 밝아지는 것을 느끼고는 자신의 팔을 들어올려 저주받은 붉은 눈을 가렸다.

        ​

        차라리 날이 밝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

        실비아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

        어차피 망가진 세상이라면, 희망의 빛이 없는 세상이라면 하늘의 태양이 무슨 소용인가.

        ​

        비참한 세상을 비춰 구태여 보여줄 뿐인 그 심술궂은 광원은 없는게 낫지 않은가.

        ​

        차라리 밤이라면, 영원토록 끝나지 않는 어둠의 그늘 속 이라면.

        ​

        한탄스러운 이 세상도, 끔찍한 실패자인 본인도 영원히 모습을 숨길수라도 있을 텐데.

        ​

        실비아는 한탄섞인 한숨을 내 뱉었다.

        ​

        ​

        ​

        “애쉬…”

        ​

        ​

        ​

        실비아는 자신의 실패를 낮낮히 밝힌 애쉬의 고발에 괴로워 하면서도 그가 밉거나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

        그 역시 자신의 실패가 낳은 불행에 온몸으로 내던져진 사내였다.

        ​

        그가 죽어가는 몸을 힘겹게 이끌고 나를 찾아왔던 이유이자, 그의 하루 일과중 가장 중요하다고 할수 있는 라일라의 무덤.

        ​

        그 조그만 소녀의 죽음이 자신의 실패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에 실비아는 주체하지 못할 죄책감에 휩싸였다.

        ​

        게다가, 애쉬는 세상의 모습을 내게 고한 직후,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와, 자기도 모르게 내 뱉어 버린 성급함에 대한 반성,

        ​

        그리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고발이 화풀이에 불과한 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과 자학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

        ​

        ​

        “바보같이 착해 빠졌어.”

        ​

        ​

        ​

        실비아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는 그녀의 실패로 인한 세상의 타락에 직접적으로 피해를 받은 피해자일 뿐이었다.

        ​

        애쉬가 피눈물을 흘리고 쓸개를 씹는 심정으로 마음속에 묻었을 슬픔이 얼마나 될지 가늠조차 되질 않았다.

        ​

        헌데, 그런 그가 되려 실비아를 걱정하고 자신이 그녀에게 상처를 준 것은 아니었을지 걱정했다는 것이 그녀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

        실비아는 그런 그가 무척이나 고마웠다.

        ​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모든것과 격리된 채 숨어살고 있는 내게 찾아온 사람이 하필 애쉬였다는 것에 그녀는 무척이나 감사해했다.

        ​

        애쉬와 얼굴을 맞대고, 자신의 저주가 그에게 옮아간 그 날, 그녀가 했던 말은 빈말이 아닌 진심이었다.

        ​

        ​

        ​

        “…너는 어쩌면, 여신께서 내게 내리신 포상이 아닐까?”

        ​

        ​

        ​

        실비아는 굳이 그 때의 그 말을 다시한번 소리내어 말해보았다.

        ​

        갑자기 애쉬의 얼굴이 보고싶었다.

        ​

        견디지 못할만큼 강력한 충동이었다.

        ​

        어차피 이젠 얼굴을 가려야 할 필요도 없으니까.

        ​

        실비아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아직 어두컴컴한 새벽의 공기를 가르며 방문을 열었다. 

        ​

        ​

        ​

        “…애쉬.”

        ​

        ​

        ​

        천천히 애쉬가 잠들어 있을 침대를 향해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본다.

        ​

        끼익, 끼익,

        ​

        평소에는 신경도 쓰이지 않건만, 왠지 지금은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무척이나 크게 들렸다.

        ​

        실비아는 숨소리마저 참으며 애쉬를 향해 다가갔다.

        ​

        ​

        ​

        “…”

        ​

        ​

        ​

        애쉬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

        새근새근, 느리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조용히 그의 코에서 흘러나왔다.

        ​

        하긴, 평소에도 그는 점심때가 다가와야 겨우 눈을 뜨곤 했다.

        ​

        실비아는 옅은 미소와 함께 긴장을 풀고, 애쉬의 침대 옆 바닥에 앉아 애쉬의 얼굴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

        그리고는 조용히 새벽의 푸르른 공기 사이로 어슴푸레하게 비치는 그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

        ​

        ​

        ‘이렇게 보니 정말 어려보이네.’

        ​

        ​

        ​

        애쉬는 도대체 몇살인걸까?

        ​

        다시 생각해보면 두 사람은 서로의 나이, 가문명 등 기본적인 정보조차 공유되지 않은 채였다.

        ​

        같이 살아야 하기에 같이 살고 있을 뿐, 서로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무척이나 적었다.

        ​

        애쉬는 적어도 용사 실비아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알고 있던 것 같지만, 자신은 애쉬에 대해서 그 무엇도 알지 못했다.

        ​

        물론 가족을 다 잃은 그의 상처를 굳이 헤집어 파는 것 처럼 보일까봐, 구태여 묻지 않았던 점도 있었다.

        ​

        ​

        실비아는 조용히 잠든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겨주었다.

        ​

        무방비한 그의 얼굴이 조금 더 잘 드러나 보였다.

        ​

        ​

        ​

        ‘…성년이긴 한가?’

        ​

        ​

        ​

        푸른 잿빛이 비쳐보이는 단정한 검은 머리카락과 한때는 에메랄드 빛이었던 붉은 눈동자. 

        ​

        언제나 친절하려 노력하는 의젓한 모습과 타인의 심상을 헤아리려 애쓰는 모습을 보면 성인인것 같기는 한데, 겉모습만 보면 아직 앳된 티가 다 벗어지지 않았다.

        ​

        적어도 그녀 자신보다는 어릴게 분명했기에, 첫 대화부터 자연스럽게 말을 놓고는 있었다.

        ​

        설마 아직도 성년이 아닌 걸까?

        ​

        에이, 그정도로 어려보이지는 않는다.

        ​

        젖살이 살짝 남은 얼굴만 본다면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의외로 탄탄한 골격이라던가 말투에서 느껴지는 학식, 그리고 펜혹이 생긴 손가락 같은 걸 보면 적어도 성년은 지났을 게 분명했다.

        ​

        여동생을 살리기 위해서라지만, 걸을 수 없는 몸으로 그 긴 거리를 걸어온 그 정신력 역시 미성년의 것이라 생각하기엔 어려웠다.

        ​

        실비아는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그의 옆에 내려놓았다.

        ​

        살짝 단단한 매트리스가 뺨에 닿는 감촉이 느껴지자, 이내 곧 그의 옅은 숨이 그녀의 코끝을 스치는 것이 느껴졌다.

        ​

        살짝만 움직이면 서로의 코가 부딫힐 거리였다. 

        ​

        ​

        ​

        ‘…이제와서 부끄럽거나 하진 않지만.’

        ​

        ​

        ​

        이미 그가 이 오두막에 온 날 부터, 그가 깨어나는 열흘 후 까지.

        ​

        그녀는 음식을 먹을 수 없는 그를 위해 직접씹은 약재나 식사등을 그의 입으로 먹여주곤 했다.

        ​

        그 행위는 엄연한 치료 목적이었기에 이제와서 처녀처럼 수줍어 하거나 하진 않는다. 

        ​

        오히려 애쉬라면 입맞춤 정도는 몇번이고 해줄 수도 있었다.

        ​

        오두막 청소, 맛있는 식사, 즐거운 대화상대,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것은, 내가 고독하지 않도록 있어준 것…

        ​

        그녀는 애쉬에게 말로 다 하지 못할 만큼의 감사를 느끼고 있었다.

        ​

        두번다시 사람과 관계될 일이 없을것이라 여겼던 그녀였기에, 사실은 의식을 잃은 그를 돌볼 때 부터 이미 약간 즐거웠었다.

        ​

       마침내 깨어난 그가 무척이나 착한 사람이어서 너무나 다행이라 생각했다.

        ​

        비록 저주에 묶여 동거하게 되었지만, 그렇게라도 내 곁에 남아주었다는 것이 눈물이 날 만큼 황홀했다.

        ​

       게다가 솔직히 큰 기대까진 없었는데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멋진 요리를 만들어내는 그의 능력에 번번히 감탄하게 되곤 했다.

        ​

        ​

        ​

        ‘…’

        ​

        ​

        ​

        그렇기에 애쉬를 생각하면 무척이나 미안한 것 투성이었다.

        ​

        가족을 죽게 만들어서,

        ​

        여기에 묶어두게 되어서,

        ​

        모든게 내 잘못인데도 불구하고, 내게 은의를 느끼는 그의 순진함을 내가 이용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

        ​

        그 순간 그녀의 콧속으로 어떤 달짝지근한 향기가 죄책감을 뚫고 그녀의 뇌로 들어왔다.

        ​

        자극적이지 않은 부드러운 단내, 그리고 약간 독특한 느낌의 옅은 짠내.

        ​

        이 것이 무슨 냄새인지 그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

        며칠 전, 이불에 코를 박고 킁킁 대며 애타게 찾던 그 냄새였다.

        ​

        아, 하필 그 모습을 애쉬에게 보이고 말았었지.

        ​

        실비아는 갑작스레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

        입맞춤 따위보다 훨씬 부끄러운, 가능하다면 머릿속에서 도려내고 싶은 수치스러운 기억.

        ​

        머릿속이 간질간질해지는 그 향기가 그녀의 코 끝에 가득 맻혀 있었다.

        ​

        애쉬의 체향이 그녀의 가슴 깊숙히 침투해 들어왔다.

        ​

        ​

        ​

        “하아… 애쉬…”

        ​

        “으, 으음…”

        ​

        “앗,”

        ​

        ​

        ​

        실비아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애쉬는 잠결에 얼굴을 찌푸리며 뒤척거렸다.

        ​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당황하며 숨을 참으며 얼굴을 뒤로 빼내었다.

        ​

        애쉬는 잠시 쩝쩝 거리며 몸을 뒤척이더니,

        ​

        ​

        ​

        “…으우, 누나아… ”

        ​

        ​

        ​

        작게 잠꼬대를 하기 시작했다.

        ​

        ​

        ​

        “… 돌아와…”

        ​

        “…”

        ​

        “엄므아… 라일라…”

        ​

        “…!”

        ​

        “…아부지…”

        ​

        ​

        ​

        그리고 애쉬는 이내 곧 다시 고른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

        앗 하는 사이에 새벽은 빠르게 밝아왔다.

        ​

        검푸른 어둠속에서 희끄무레 하게 보이던 애쉬의 얼굴이 보다 밝은 파아란 공기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

        ​

        ​

        “…아,”

        ​

        ​

        ​

        애쉬의 눈가에 맻힌 눈물과, 그 아래 하얗게 남은 눈물자국이 실비아의 눈에 들어왔다.

        ​

        ​

        ​

        “…”

        ​

        ​

        ​

        여신께서 주신 선물이라니, 

        ​

        그는 물건 같은 것이 아니다.

        ​

        사람이다.  

        ​

        어리고 여린, 불행의 발톱이 할퀴고간 상처에 아파하는 사람.

        ​

        실비아는 애쉬의 이불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겨, 그의 어깨까지 덮어주었다.

        ​

        식탁보로 쓰이던 얇은 이불이니 너무 덥지는 않을 것이다.

        ​

        ​

        잠깐 얼굴을 가져다 대었을 뿐인데 애쉬의 잠자리가 얼마나 단단하게 느껴졌는지 실비아는 새삼 놀라웠다.

        ​

        여건만 된다면, 푹신한 잠자리와 질좋은 이불을 구해다 주고 싶었다.

        ​

        그러나 그녀가 사람의 손이 닿는 공산품을 구할 방법은 없었다.

        ​

        검사인 그녀가 뜨개질이나 바느질 따위에 소질이 있지도 않았다. 

        ​

        어쩌면 애쉬가 그녀보다 더 손재주가 좋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실비아는 자기 침대를 내주어야 할지 고민하며 천천히 방으로 돌아갔다.

        ​

        ​

        ​

        ​

        ​

        ​

        ​

        ​

        ​

        ​

        *

        용사와 뛰어난 전사들을 대부분 잃어버린 이 혼란한 시대.

        ​

        권력자들 사이에서 세상이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과 무력함이 퍼져,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이 시기에는 언제나 그런 틈을 파고들려 하는 자들의 암약이 끊이지 않곤 했다.

        ​

        하지만 정작 권력자들도, 그 권력을 노리는 자들도 하나 잊은 것이 있으니, 

        ​

        백성들의 삶 역시 끊임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

        ​

        모든 권력은 백성으로부터 나온다.

        ​

        이 말은 단순히 민초들을 달래기 위한 사탕발림이 아니다.

        ​

        제 아무리 달콤한 권력을 탐닉하는 귀족이라 할 지라도,

        ​

        아무리 뛰어난 권세를 누린 왕이라 할 지라도,

        ​

        분노한 민초들이 모두 들고 일어선다면, 그 수의 폭력 앞에 쫒겨나거나 참수되는 법이었다.

        ​

        허나, 백성들이 고통에 시달릴 수록, 되려 그 힘과 위세를 키워가는 권력들 역시 존재하는 법이었다.

        ​

        대표적으로는 종교가 그랬다.

        ​

        ​

        의지할 곳을 잃은 이들이 끝내 구원을 찾기 위해 방문하는 마지막 희망.

        ​

        비탄에 빠진 사람들을 구원하고, 침묵하는 권력을 꾸짖으며, 힘없는 백성들의 안위를 살피고자 하는 그들의 움직임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

        그렇게, 왕국에선 여신교의 위세가 나날이 커져만 갔다.

        ​

        그들은 왕궁을 좀먹는 부패한 귀족들을 여신의 이름으로 처단했다. 

        ​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제 자식까지 삶아 먹을 정도로 비참한 절망이 가득한 영지로 찾아가 그 관리를 소홀이 한 책임을 물어 영주들을 처형했다.

        ​

        이 혼란한 시기를 틈타 기존의 질서와 위계를 뒤집으려 하는 간악한 무리들을 찾아내 목을 베었다.  

        ​

        이웃 나라의 침략을 막느라 정신 없는 왕국을 대신해, 민생의 안정을 대신 살피었다.

        ​

        ​

        ​

        “그렇게나 아름다웠던 골드필드의 영지를 나는 기억한다.”

        ​

        ​

        ​

        여신교를 상징하는 표식이 박힌 하얀 갑옷을 입은 여기사가 식탁에 앉아있는 남자를 향해 읇조렸다.

        ​

        여기사의 목소리는 얼핏 들으면 담담하게 들리면서도, 그 목구멍 깊은 곳에서 이글거리는 분노를 채 숨기지 못한채 매캐한 연기처럼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

        ​

        “네놈이 간악한 술수를 부려 이 땅의 정당한 주인으로부터 영지와 가문을 강제로 찬탈했던 것을 기억한다.”

        ​

        “우읏, 흑, 후윽,”

        ​

        ​

        ​

        식탁에 앉아있는 남자는 몸을 벌벌 떨며 눈을 질끈 감은 채 여기사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

        그녀가 뱉는 문장중 탁성이 나올 때 마다 그는 거세게 움찔거렸다.

        ​

        남자의 몸은 의자에 묶여있었고, 눈은 거친 밧줄로 두바퀴 감겨져 있었다.

        ​

        워낙 거친 밧줄로 묶어서 그런지, 그가 움찔 거릴 때 마다 그의 얼굴이 찢어지며 피가 흘러 내렸다. 

        ​

        ​

        ​

        “그로 인해 내 친구와, 내 가족, 그리고 내 친구의 가족이 겪어야 했던 수모를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

        “흡, 흐윽…”

        ​

        ​

        ​

        공포에 질린 자신의 호흡소리를 뚫고, 남자의 귀에 바퀴를 끄는 소리가 들렸다.

        ​

        그 소리대로 여신교의 여기사는 뚜껑이 덮인 접시를 담은 트레이를 밀며 남자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

        그녀는 남자의 옆으로 다가와 그 접시를 남자의 앞에 놓으며 말을 이었다.

        ​

        ​

        ​

        “그렇게 찬탈한 영지의 백성들이 굶어 죽어갈 때, 네놈은 사치스러운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있었음을 나는 어제 분명히 보았다.”

        ​

        ​

        ​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남자의 눈을 가리고 있던 밧줄을 단검으로 거칠게 끊었다.

        ​

        남자는 자신의 뒤통수가 살짝 베여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고도 아무런 불평 하나 내뱉지 못했다.

        ​

        애초에 숨을 쉬는 것 조차 마음대로 되고 있지 않았다.

        ​

        남자는 피부가 다 벗겨진 눈 주변에 힘을 주어 어렵게 눈을 떴다.

        ​

        여기사는 그런 그의 앞에 놓인 접시의 뚜껑을 열어 주었다.

        ​

        ​

        ​

        “…이, 이건…?”

        ​

        “함박 스테이크.”

        ​

        ​

        ​

        접시 안에는 잘게 갈은 고기를 뭉쳐 노릇하게 구워낸 음식이 정갈하게 놓여있었다.

        ​

        붉은 산딸기 소스와 싱싱한 아스파라거스 하나가 멋스럽게 토핑 되어있는 한 접시였다.

        ​

        ​

        ​

        “…”

        ​

        “그렇게 고기를 좋아했던 너의 마지막 만찬이다.”

        ​

        “…하, 하흐, 흐윽,”

        ​

        ​

        ​

        남자는 여자의 말에 눈물을 흘렸다.

        ​

        눈물이 벗겨진 피부에 닿아 쓰라렸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멈출 수는 없었다.

        ​

        자신은 처형된다.

        ​

        죄목은 반란, 영지 찬탈, 비방, 살인 교사, 그리고 영지 관리 소홀.

        ​

        왕위를 노린 제 3 왕자에게 협력하기 위해, 이 영지를 비겁한 방법으로 차지했던 남자는 그저 눈물을 흘리며 비탄에 잠길 수 밖에 없었다.

        ​

        설마 수도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영지인 이곳까지 ‘여신교의 가장 무거운 검’ 이라 불리는 그녀가 찾아오리라고는 차마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

        ​

        ​

        “네놈이 식사를 마치면 형을 집행한다.”

        ​

        ​

        ​

        여기사는 단호한 목소리로 남자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

        남자는 그제서야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

        그 순간 심장을 조이는 듯한 충격을 느끼며 남자는 숨을 들이켰다.

        ​

        ​

        ​

        “그래, 네놈도 나를 기억하는 군.”

        ​

        “설마… 그럴리가… 말도 안…”

        ​

        ​

        ​

        여신교의 가장 무거운 검. 

        ​

        교황에게 하사받은 최고등급의 재판 및 집행 권한을 가진 그녀가 직접 이곳까지 행차한 이유.

        ​

        ​

        ​

        “애… 앨리스, 앨리스 골드필드…”

        ​

        “… 그래, 네놈이 쫒아낸 이 땅의 정당한 주인의 딸이자, 네놈이 강제로 병사들에게 던져줘 겁탈당한 끝에 자살해버린 어머님의 딸.”

        ​

        “…아, 요, 용서 해주시오.”

        ​

        “앨리스가 너에게 여신의 이름으로 복수하러 왔다.”

        ​

        “자… 잘못했소. 제발… 부디… 여신님께 빌테니, 용서를…”

        ​

        ​

        ​

        남자는 몸을 덜덜 떨며 고개를 쳐박고 빌었다.

        ​

        그러나 여기사는 단호하게 재촉했다.

        ​

        ​

        ​

        “어서, 마지막 식사를 즐겨라. 지금 당장 목이 베이고 싶지 않다면.”

        ​

        ​

        ​

        남자는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이며 간신히 나이프와 포크를 쥐었다.

        ​

        그녀가 두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한, 반항은 꿈도 꿀수 없었다.

        ​

        그 이유는 단순한 전투 실력의 차이 뿐만이 아니었다.

        ​

        전투력의 차이, 명분의 차이, 등에 업고 있는 권력의 크기의 차이, 백성들의 지지의 차이.

        ​

        그리고 무엇보다 남자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후회와 죄책감의 차이.

        ​

        남자는 맛도 제대로 느끼는 못한 채 눈물을 흘리며 꾸역꾸역 고기를 목구멍에 쑤셔 넣었다.

        ​

        고기가 줄어들 수록 다가오는 처형의 공포 떄문일까.

        ​

        보고있는 것이 답답할 정도로 무척이나 느린 속도였지만, 여기사는 인내심을 갖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

        마치 그가 공포에 떠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무척이나 흥미로운 듯이.

        ​

        그럴만도 했다.

        ​

        지금은 여신교에 의탁해 성을 버렸지만, 이건 그녀가 꿈꿔온 복수의 시간일 테니까.

        ​

        남자의 식사는 거의 세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천천히 진행되었다.

        ​

        하지만 아무리 시간을 길게 잡아 끈다 해도, 결국 다가오고 마는 끝은 남자에게 살벌한 미래를 예고하며 그 거대한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었다.

       

       마치 뱀 앞의 개구리처럼 굳어버린 남자를 바라보던 앨리스는 잔혹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

        ​

        ​

        “… 다 먹었군. 맛은 있었나?”

        ​

        “…욱, 윽… 흑,”

        ​

        ​

        ​

        오랜시간 천천히 이뤄진 식사였음에도 남자는 목이 메이고 뱃속이 더부룩하게 느껴졌다.

        ​

        입으로 들어가는 지 코로 들어가는 지도 모를 만큼 아무런 정신이 없었다.

        ​

        이제 죽는다.

        ​

        남자는 다시 거친 그 밧줄로 이번엔 양 손을 묶인 채 그녀에게 힘없이 끌려갔다.

        ​

        눈이 뜨여 있었기에 처형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남자를 무릎 꿇린 후, 그녀가 직접 내 목을 칠 것이다.

        ​

        그럼 잘린 목은 저 처형장 밑에서 서슬퍼런 눈빛으로 미친듯 소리치는 군중들 앞에 떨어지겠지.

        ​

        남자의 머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욕설과 침, 오물에 뒤덮여 썩어갈 것이다.

        ​

        남자는 그 사실을 겨우 받아 들였다.

        ​

        거의 세 시간쯤 되는 긴 식사 시간동안 어느정도 진정도 됐고, 마음의 정리도 되었다.

        ​

        그렇기에 마지막 순간만큼은 귀족답게 담담하게 있으려 했다.

        ​

        쳐형장에 도착하고, 천천히 무릎을 꿇으려는 그 순간,

        ​

        앨리스는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

        ​

        ​

        “그러고보니, 네놈에게는 네 살짜리 딸이 하나 있었지.”

        ​

        “… 그… 그렇소…”

        ​

        ​

        ​

        남자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면서도 다시한번 식은 땀을 흘렸다.

        ​

        처음부터 딸과 아내는 이 빌어먹을 영지로 데려오지 않았다.

        ​

        제 3왕자가 쿠데타를 일으켜 모든 것이 정리 되면, 그때야 비로소 가족들을 데려와 비옥하기로 유명한 이 영지에서 함께 살아갈 계획이었으니까.

        ​

       ​

        ​​

        “이름이 어떻게 되지?”

        ​

        ​

       

       

       헌데, 그녀는 갑자기 왜 딸의 이름을 묻는 건가.

       ​

        남자는 갑자기 드는 한기에 입을 다물었다.

        ​

        설마, 아무리 내게 품은 원한과, 그로부터 비롯된 복수심이 강하다 하더라도, 이젠 여신교의 상징과도 같은 그녀가 고작 네살밖에 되지 않은 내 딸에게 해코지를 하려는 건가?

       

       남자는 자신의 무릎을 꺠트릴 기세로 바닥에 무릎을 찧으며 빌었다.

        ​

        ​

        ​

        “안됍니다… 제발, 제 가족은 살려주시오. 내 잘못이오… 나만의 잘못이란 말이오! 제발, 그 어린 것은 이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

        ​

        “됐다, 내가 알 필요는 없지, 네 놈만 알고 있으면.”

        ​

        ​

        ​

        앨리스는 남자의 애원을 단칼에 끊으며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하고는 천천히 처형장 횃대에 기대어 있던 커다란 도끼를 들어 올렸다.

        ​

        ​

        ​

        “… 그게 무슨 말이오?”

        ​

        ​

        ​

        남자는 커다란 도끼를 번쩍 치켜드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

       그녀의 말과 태도가 너무나 의아해서 곧 죽을 상황이라는 공포마저 살짝 옅어진 것 같았다.

        ​

        앨리스는 미소지었다.

        ​

        아주 소름끼치는 미소였다.

        ​

        ​

        ​

        “네가 마지막으로 먹은 요리의 이름 정도는 네가 알아야 할 거 아니야.”

        ​

        “…뭐?”

        ​

        ​

        ​

        남자의 목은 잘려나갔다.

        ​

        죽음보다 더 끔찍한 경악으로 물든 남자의 얼굴이 분노한 군중들 사이로 굴러 떨어졌다.

        ​

        사람들은 그 얼굴을 밟고 침을 뱉고 모욕과 저주를 퍼부었다.

        ​

        남자의 얼굴에 원한을 풀기엔 먼 뒷자리에 위치한 백성들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

        ​

        ​

        “여신교의 성처녀. 앨리스 님, 만세!”

        ​

        “만세!”

        ​

        “여신의 빛이 정의를 비추리!”

        ​

        “만세!!”

        ​

        ​

        ​

        앨리스는 조용히 숨을 몰아쉬고는 도끼를 처형장의 바닥에 떨어트렸다.

        ​

        이로서 여신교의 정의도 바로 세우고,  자신의 가문을 노린 비열한 자에게 복수도 마쳤다.

        ​

        비단, 이 복수는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다.

        ​

        자신의 친구이자 골드필드 가문의 하위 가문이었던 스태프 가문의 복수이기도 했다.

        ​

        용사파티에 참가했다 죽은 자신의 친구, 마리아 스태프의 가족들을 지켜내지 못한 자신의 속죄이자 복수.

        ​

        비록 스태프 가문의 가주를 차지한 자는 도망쳐 버렸지만,

        ​

        ​

        ​

        “반드시 잡을거야.”

        ​

        ​

        ​

        앨리스는 이미 죽은 자신의 친구와 친구의 부모님.

        ​

        그리고,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던 친구의 두 동생들을 떠올리며 굳게 맹세했다.

        ​

        ​

        ​

        “마리아. 애쉬. 라일라. 반드시, 너희의 원한을 갚아줄게.”

       

       

       

       애쉬 스태프의 누나인 마리아 스태프의 친구이자 스태프 가문이 모시던 골드필드 백작가의 장녀.

       

       앨리스는 자신을 향해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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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Can’t Run Away from the Woman Who Saved Me.

I Can’t Run Away from the Woman Who Saved Me.

나를 살려준 그녀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
Score 4.2
Status: Completed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Having lost all my family, I fled. As I was running away, she saved me when I was on the brink of death due to an accident. The moment our eyes met, I knew I couldn’t leave 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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