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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0

     

    복귀하자마자 아셀라를 고치는 일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석 달이나 자리를 비웠다 보니 처리할 사안이 꽤 있었다.

     

    급한 것들을 넘기고 나머진 대충 클로에에게 짬처리하고 나니 이번엔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이슈가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제게 명예훈장 수여를 하신다는군요.”

     

    타냐가 머리를 긁적이며 어제 저녁밥이 별로더군요, 같은 느낌으로 평범한 일상문처럼 말했다.

     

    “폐하께서 직접? 궁이 아니라 단장 개인에게 수여한다고?”

     

    “예.”

     

    “명목이 뭔데?”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한 축하 훈장입니다.”

     

    그러고 보니 타냐가 소드 오러를 개방했을 때 헤이케의 기사단도 그 장면을 다들 목격했었지.

     

    놀라 까무러치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그때 내가 워낙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다.

     

    보고가 안 올라갔을 리가 없겠구나.

     

    “추, 추, 축하드려요오! 개, 개인 명예훈장은 어마어마한 영광 아닌가요?!”

     

    클로에가 깜짝 놀라며 손뼉을 쳤다.

     

    “궁이나 기사단에 내려와서 트로피처럼 장식하는 경우는 있어도 개인이 가슴팍에 다는 건 드물지. 확실히 엄청난 명예야. 근데 클로에 너 타냐한테 말 잘 한다?”

     

    “어헉.”

     

    클로에가 망각했던 본분이 떠올랐는지 다시 쭈그러들며 늘어진 차트 위로 엎어졌다.

     

    “수간호사님과는 종종 밤에 바에 술을 마시러 나가곤 합니다.”

     

    “언제 둘이 그렇게 친했어?”

     

    “내의원에는 타냐 공과 친하지 않은 분이 더 드뭅니다.”

     

    휴고가 약품 박스를 들고 지나가며 한 마디 거들었다.

     

    나만 몰랐나.

     

    아셀라에게도 유일한 절친이 있다면 타냐다. 평소 말수는 적은데 은근히 인싸 기질이 있다.

     

    하긴 그래서 후작가에서도 단장직을 잘 하기도 했었나.

     

    “잠깐, 근데 술이라니. 클로에, 너 술도 먹었어?”

     

    “어헉, 워, 원래는 퇴근하는 날엔 집에서 혼자 먹곤 했는데요… 그 얘기를 했더니 타냐 공이 아는 가게로 데려가 주신다고 해서…”

     

    클로에가 드레스를 차려입고 바에 가서 리퀴르를 주문하는 모습이라.

     

    흠.

     

    도무지 상상이 안 간다.

     

    평소 가슴이 무거워 보였으니, 올려놓을 수 있으니까 테이블보다 바가 편하긴 하겠네.

     

    “그으… 황궁 앞 광장에 있는 가게인데요… 카운터에 바텐더 언니가 계시는데요… 술도 맛있게 말아주시고 얘기도 잘 들어주시고요… 이런저런 아는 것도 많으시고요…”

     

    “수간호사님이 연상이십니다.”

     

    “지, 진짜요?! 으아, 으아아… 계속 언니언니 불렀는데…”

     

    “좌석은 거의 없고 스탠딩 테이블만 있는 가게입니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처음 보는 손님끼리도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죠.”

     

    타냐가 내게 설명했다. 이야기만 들으면 꽤 재미있어 보였다.

     

    방식만 들으면 꽤 모던하네. 제도엔 생각보다 즐길 게 많은데 나만 모르고 있었나.

     

    왠지 손해 본 기분이다.

     

    “단장은 거기서 뭐 하는데?”

     

    “이야기하죠. 특히.”

     

    타냐가 작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수간호사님은 남녀 불문하고 은근 접근해오는 사람이 많아서 재밌는 일이 많이 생깁니다.”

     

    “클로에가 미끼였냐.”

     

    “꼭 그런 건 아니고요. 수간호사님도 재미있는 분이죠.”

     

    “야야, 이상한 버릇 들면 어쩌려고.”

     

    “그래서 바텐더를 보호장치로 붙여놓지 않았습니까.”

     

    “흠.”

     

    여기서 내 두 가지 자아가 충돌했다.

     

    나는 지나가던 휴고에게 물었다.

     

    “휴고, 여기서 내가 환자 돌봐야 할 의료인이 밤새 취해있으면 되겠냐고 꾸중하면 꼰대 같아?”

     

    “예.”

     

    “그럼 나도 낄래.”

     

    “선생님이요?”

     

    타냐가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후작가에서 술은 끊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술은 원래 안 먹지만, 정작 난 먹어본 적도 없는데 억울하다.

     

    “지금도 안 먹고 먹을 생각 없어. 취한 상태로 진료 볼 순 없잖아. 단장이 추천할 정도면 분위기를 즐겨보고 싶어서. 성인이 되고 나서 이렇다 할 변화가 전혀 없었다고.”

     

    “원래 어른이 되어도 대단한 변화는 없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가시더라도 황녀님과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셀라가 성인이 되려면 이번 생일이 지나고도 2년은 더 있어야 하잖아.”

     

    “기다리세요.”

     

    “왜 나한테만 그렇게 엄격한데.”

     

    “혼약자가 있는 사람에겐 그렇게 추천해줍니다. 다른 쪽도 성인이 될 때까지 혈기를 억누르지 못하면 보통 문제가 따라옵니다.”

     

    라우가도 비슷한 얘기를 했었다.

     

    그래, 타냐와 클로에의 영역은 여자들의 구역이라는 느낌도 있고.

     

    나는 나중에 따로 내 구역을 만들어야겠다.

    브루노가 은근히 놀 땐 잘 노는 편인데, 데리고 다녀야지.

     

    “이야기가 샜는데, 축하해 단장.”

     

    “감사합니다.”

     

    “지그문트에게 배운 게 도움이 많이 됐나 보네.”

     

    “예. 그와의 대련에서 오러에 대한 감각을 잡았습니다.”

     

    아무리 숙련된 검사가 오러를 느끼고 감을 잡는다 한들 경지에 오르는 데엔 오랜 훈련이 필요하건만.

     

    타냐는 이미 그 단련이 되어있고 개방할 계기만 필요한 상태였단 뜻이다.

     

    검에 대한 재능만 따지면 아셀라가 가진 마법보다 더 고차원일지도 모르겠다.

     

    “실례합니다. 검은 잘 몰라서 그러는데, 경지에 도달한 것만으로 훈장이 부여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휴고가 질문했다.

     

    “소드마스터는 대단한 업적이야. 지금 대륙에 소드마스터는 둘밖에 없을 정도야. 삼검이라는 칭호로 불렸지만 한 명이 지난 전쟁에서 전사했거든.”

     

    “굉장히 어려운가 보군요.”

     

    “어렵지. 타냐 단장이 비었던 삼검의 한 자리에 들어가게 될 거야. 역사적으로도 거의 최연소일걸.”

     

    “음, 그리 들으니 여태 제가 타냐공께 저질렀던 무례가 떠오르는군요.”

     

    휴고가 살짝 긴장하며 몸을 뒤로 뺐다. 타냐는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해주사님도 해주 분야에서는 대륙 최고이시지 않습니까.”

     

    “경쟁자가 없을 뿐입니다.”

     

    “여기는 제국 내의원이라고. 당연히 최고들만 모여있어야지.”

     

    내가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훈장은 정치적인 이유가 커. 새로 탄생한 소드마스터가 제국 소속이라고 확실하게 타국에 공표하는 용도야. 수여식에선 단장도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할 수밖에 없고.”

     

    “그렇군요. 솔직히 폐하나 제국에는 별생각 없긴 합니다만.”

     

    “그 말 수여식에선 하지 마라.”

     

    “저도 바보는 아닙니다.”

     

    타냐가 콧방귀를 뀌었다.

     

    “훈장을 받으면 평생 제국민으로 남아야 할 의무도 생기지만 뭐, 소드마스터 정도 되면 그만큼 우대도 받으니 이후 행보는 맘대로 선택해도 돼. 그럴 입장이야.”

     

    지그문트도 황제 친위대에서 평생을 구르고 있다. 업무 강도는 별로 강하지 않아서 나름 귀족직도 받고 여유롭게 지낸다 한다.

     

    “음, 실은 그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은 게.”

     

    타냐가 뒷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웬 편지봉투를 잔뜩 꺼냈다.

     

    “전부 스카우트야?”

     

    “예.”

     

    “어디. 헤이케도 당연히 보냈고, 서부공작에 슈프레 상단, 왕국 왕실은 또 뭐냐.”

     

    “조건은 좋더군요.”

     

    소문도 참 빨랐다. 잠깐 신경 못 쓴 사이에 하이에나 같이도 타냐를 노려왔다.

     

    “마음에 드는 제안은 있어?”

     

    내가 먼저 슬쩍 운을 띄웠다.

     

    여기부터는 어떻게 보면 타냐와의 재계약 협상이다.

     

    상태창을 확인한다.

     

     

    ―――――――――――

    No. 005 : 마왕군 승리 58%

    No. 006 : 마신강림 26%

    ―――――――――――

     

     

    사천왕 둘을 무력화하긴 했어도 아직 용사가 마왕군을 쓰러트려야 하는 가장 단순한 과제가 남았다.

     

    ‘원래 용사파티였던 모험가 출신의 전사는 지나치게 거칠었어.’

     

    이름은 라르크. 성격 때문에 항상 용사와 마찰을 빚었던 친구다.

     

    ‘그가 아니라 타냐가 용사파티에 들어가서 전위를 맡아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승률은 올라간다.

     

    용사파티는 여러 국가의 이해관계가 겹쳐 구성되었기에 내가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지만, 최대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배드엔딩의 확률을 낮추려 한다.

     

    타냐의 얼굴도 모르는 녀석들이 소드마스터라는 이유만으로 뺏어가려 한다.

     

    그냥 둘 순 없지.

     

    “어때, 단장.”

     

    “음.”

     

    내 질문에 타냐는 난색을 보였다.

     

    “제가 경지에 다다른 건 그간 제가 하루도 빠짐없이 검을 단련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나도 잘 알지.”

     

    “하지만 북부에서 계속 혼자서만 휘둘렀다면 결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황실에서 강자들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했지요.”

     

    타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선생님께서 저를 데려와 주지 않으셨다면 불가능했습니다.”

     

    “과장이 심한데.”

     

    “선생님께서 결정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타냐의 생각은 잘 알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잠깐 둘이서 이야기하지.”

     

    타냐를 내 사무실로 데리고 들어가 탁, 문을 닫았다.

     

    “외부로 새면 안 되는 이야기입니까?”

     

    “맞아. 조금 위험한 내용이야.”

     

    “숙지했습니다.”

     

    기왕 타냐가 내 말을 듣겠다고 나섰다.

    적극적으로 활용해야겠지.

     

    “우리가 전에 만났던 사룡의 저주, 그리고 이번에 본 설인을 오염시킨 피 말이야.”

     

    “예. 잘은 모르는 분야입니다.”

     

    “설인은 악마의 피에 오염됐었어. 공허차원에 사는 대악마지. 그런데, 사룡과의 공통점을 하나 발견했거든.”

     

    “공통점?”

     

    “분석하다 보니 알게 됐는데, 둘 다 강대한 마기에 의해 증폭됐어. 설명하기는 복잡하지만 확실해.”

     

    “강대한 마기라면… 혹시.”

     

    나는 심각한 표정과 함께 뜸을 들인 후 대답했다.

     

    “마왕이 강림했어.”

     

    “…음.”

     

    물론 분석이니 뭐니 하는 얘기는 뻥이다. 내게 그런 기술은 없다.

     

    마기는 마족들의 마나다. 토벌했을 때 사룡은 아직 사천왕도 아니었다. 악마의 피와 공통점 따위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지금 마계에 마왕이 있는 건 사실이니 내 말이 틀린 건 아니다.

     

    타냐는 모처럼 진지한 얼굴이었다.

     

    “전쟁이 일어나겠군요.”

     

    “밖으로 알려지면 민중은 공포에 빠지겠지. 경제는 둔화하고 기사와 치유사의 수요는 더 증가하게 돼.”

     

    “철저히 비밀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알려질 일도 얼마 안 남았어. 마왕이 나타나면 필연적으로.”

     

    “용사도 나타나는군요.”

     

    타냐가 바로 알아들었다.

     

    “그럼 선생님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은?”

     

    “마왕군과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강대국인 제국은 인간계를 지키기 위해 토벌전에 앞장서야만 해. 용사파티의 주도권을 가질 확률이 높아.”

     

    “그렇군요.”

     

    “하지만 역사적으로 용사는 이미 완성된 강자가 선택받지 않았어. 가장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이가 받았지. 소위 대륙의 운명을 바꾸는 자들이라고 하더라고.”

     

    “음.”

     

    나는 타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제국의 현역 소드마스터라면 용사에게 검을 가르쳐줄 일도 생기지 않겠어?”

     

    타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습니다. 항상 생각하지만 선생님은 눈앞의 이익만 좇는 이런 이들과는 다르시군요.”

     

    타냐가 편지봉투를 다시 집어넣었다.

     

    “도움이 되었습니다. 수여식에는 참가하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 가야지. 누구 일인데.”

     

    나는 타냐와 주먹을 맞부딪쳤다.

     

     

     

    이틀 후, 수여식.

     

    내 예상보다도 규모가 컸다. 황실의 주요 인사가 모두 참여하고 기사단이 열을 맞춰 휘황찬란하게 진행됐다.

     

    타냐는 황제 앞에서 당당하고 절도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소드마스터 타냐. 이후 그대의 검은 어디에 머무를 예정인가. 짐의 친위대에서 삼검의 광검과 함께하는 길도 있다.”

     

    황제의 질문에 타냐가 즉답했다.

     

    “소인의 검은 고트베르크와 함께합니다.”

     

    자신의 친위대로 오라는 황제의 은근한 제안을 단숨에 거절한 타냐였다. 참관하던 전원이 조금 술렁였다.

     

    황제는 내 이름을 듣고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트베르크로군.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이유는 무엇인가.”

     

    타냐가 정갈한 예도와 함께 대답했다.

     

    “다른 누구도 보여줄 수 없는, 둘도 없을 진귀한 경험을 제안받았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CarPEDlEM님, 오스모님 후원과 응원 감사드려요! 최근 에피소드는 오랫동안 쓰고 싶었던 장면이라 즐겁게 썼네요. 물론 아직도 쓰고 싶은 장면은 많이 남았습니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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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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