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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0

       가장 앞서 나가는 사람은 엘라와 레이나였다.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첫 번째 장애물 앞에 도착했을 때, 벌써 두 번째 장애물을 통과하는 중이었다.

         

       엘라는 옛날로 돌아온 느낌을 받았다.

         

       마을 근처의 언덕과 계곡은 그들의 놀이터였다.

       연습을 쉬는 날이면 그곳을 쏘다니며 지형지물을 도구 삼아 기술을 단련하고 놀았다.

         

       덩굴을 붙들고, 땅굴을 기고, 나무를 타고, 절벽을 올랐다.

       찰리의 졸업과제는 그들의 어린 시절 그 자체였다.

       장애물을 하나 통과할 때마다 마치 찰리가 옆에 앉아 “이거 기억나?”라고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추억을 되새기면서도 그녀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고 날렵했다.

       객석에서는 아무도 그녀가 다른 생각에 잠겨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직 바로 옆에서 달리는 레이나만이 그녀가 여유를 부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엘라가 자신을 두고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여기저기 시선을 돌려가며 자신보고 들으라는 듯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어차피 내가 이길 테니까 놀아준다는 식으로.

         

       아버지는 시험 내내 저 여자애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얼굴에는 자신에게는 한 번도 지어주지 않았던 즐거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충격과 좌절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노력하면, 더 잘하면, 그녀를 꺾으면 돌아봐 주지 않을까, 계속해서 자신을 다독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신에게는 끝까지 냉소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자신이 그녀가 세운 기록을 12번이나 깼을 때도 아버지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레이나는 옆 트랙을 흘겨보며 속으로 조용히 비수를 갈았다.

       그래. 무승부 따위 아버지가 좋아할 리 없지.

       이기면 되는 거야.

       마지막에 이기면.

         

       ‘내 자리를 뺏은 여우 같은 년.’

         

       놀랍게도 레이나가 그 말을 속으로 내뱉었을 때, 다른 누군가도 그녀를 향해 그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클라라는 친구들과 함께 장비를 정리하고 점수를 집계하고 있었다.

       레카체프 학생들은 일하는 틈틈이 마지막 경기를 관람했다.

       다들 감독관 일이 끝나서인지 어딘가 후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클라라를 제외하면 말이다.

       그녀는 친구들의 말에 적당히 대꾸를 해 주며 굳은 얼굴로 레이나의 행동을 지켜봤다.

         

       그녀는 이제 곧 있으면 자신이 설치한 함정에 도달할 것이다.

         

       그녀의 독주를 저지한다는 목표는 이제 아무런 상관이 없어져 버렸다.

       엘라라는 다크호스의 등장 때문이다.

         

       24승 1패는 굴욕이 되지만, 12승 13패는 아니었다. 관객들은 그녀의 석패를 아쉬워하며 승자에게 향한 것만큼이나 패자에게도 찬사를 던질 것이다.

         

       이제 패배를 안겨주는 것만으로는 모자랐다.

       그녀가 크게 다치는 꼴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저 절대적인 균형감각을 가진 천재 곡예사를 어떻게 함정에 빠트릴 수 있을까?

         

       클라라는 레카체프에서 보낸 3년간에서 힌트를 얻었다.

       뛰어난 줄타기 전공자들일수록 더 위험했던 연습이 있었다.

       그들의 민첩함과 균형감각이 오히려 독이 됐던 연습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녀는 자신이 기르는 족제비를 기관실로 보내두었다.

       레이나가 해당 장애물을 통과할 때 기관을 작동시키도록 해두었다.

         

       클라라는 드디어 그들이 자신이 파둔 함정으로 뛰어드는 것을 보고 미소지었다.

         

       암벽타기로 절벽을 기어 올라온 엘라와 레이나는 잠시 멈춰 섰다.

       둘은 그들 앞에 펼쳐진 마지막 장애물을 봤다.

         

       그것은 절벽 사이에 드리워진 밧줄들이었다.

       수백 개의 작은 밧줄들이 복잡하게 뒤엉켜 마치 거미줄처럼 짜여 있었다.

         

       줄타기다.

       레이나는 이길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했다.

       지금까지 줄타기에서는 항상 엘라에게 우세를 보였던 그녀였다.

       그녀는 자신의 절대적인 균형감각을 믿고 바로 밧줄들 위로 뛰어들었다.

         

       어떤 밧줄에 무게를 싣자 핑하는 소리와 함께 그것의 걸쇠가 풀리며 줄이 끊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바로 거기서 발을 뗐기에 함정에 걸려들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가짜 밧줄들을 골라가며 절벽을 건넜다.

       옆 트랙에서는 엘라가 비슷한 속도로 그녀를 따라왔다.

         

       두 사람이 절벽을 중간쯤 건넜을 때였다.

         

       주인이 명령한 조건이 되자 족제비가 기관실의 레버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철컹하는 소리와 함께 양쪽 절벽에서 밧줄을 지탱해주던 수백 개의 걸쇠가 동시에 풀렸다.

         

       일정 무게를 감지하면 자동으로 풀리는 약한 걸쇠부터, 사람 몇 명 정도는 너끈히 감당해내는 단단한 걸쇠까지 전부.

       고정 걸쇠에 걸린 열댓 개의 밧줄을 빼고 모두 풀렸다.

         

       “어?”

       “무슨!”

         

       수백 개의 밧줄이 동시에 떨어져 내렸다.

       그와 추락하던 두 사람의 몸을 수십 개의 밧줄이 옭아맸다.

         

       다행히 바닥에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은 마치 거미줄에 걸린 고치처럼 허공에 매달린 신세가 되었다.

         

       ‘치사해, 찰리. 이런 것까지 구현한 거야?’

         

       엘라는 팔과 다리를 자꾸 짓누르는 밧줄을 헤집으며 그를 욕했다.

       덩굴이 늘어져 있는 절벽은 그들이 어릴 때 자주 지나던 코스였다.

       삭은 덩굴을 피하고, 단단한 덩굴만 디뎌야 했다.

         

       그런데 종종 이렇게 덩굴이 한꺼번에 풀리면서 와르르 끊어져 내리는 구역도 있었다.

       엘라는 그때의 경험을 떠올리며 조심히 밧줄을 풀었다.

         

       레이나는 팔과 다리를 움직였다.

       줄이 사정없이 엉켜왔다.

       그녀는 초조한 눈으로 엘라를 찾았다.

       안타깝게도 상대는 자신보다 위에 걸려 있었다.

         

       ‘안 돼. 질 수 없어.’

         

       레이나는 거추장스러운 밧줄 무더기를 빠르게 풀어냈다.

       몸을 짓누르는 이것들을 치워버리고 어서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클라라가 파둔 함정이었다.

         

       최대한 안전에 주의를 기울이는 레카체프였지만 하루에도 수십 명의 학생이 몇천 번이나 오르내리는 것을 매일 반복하다 보면 종종 예상치 못한 사고가 터지곤 했다.

         

       작년에 훈련 도중에 밧줄이 모두 풀려버리는 사고가 난 적이 있었다.

       밧줄들에 엉킨 클라라는 서둘러 몸에 붙은 그것들을 벗으려 했다.

       그러면 밑에 있는 매트에 착지할 수 있었다.

         

       그때, 찰리 선배가 무서운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다들 움직이지 마!”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각자의 몸에 걸린 밧줄들을 조심히 풀어주었다.

         

       처음엔 그가 왜 그러는지 몰랐던 학생들은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모두가 가짜 밧줄인 것보다 진짜 밧줄 몇 개가 섞여 있는 경우가 더 위험해.”

         

       그들의 몸을 공중에 지탱해주고 있는 것은 수십 개가 뒤엉킨 가짜 밧줄들이었다.

       그것들을 마구잡이로 벗어던진다면?

         

       몸에 한두 개 걸쳐져 있는 진짜 밧줄만 남았다.

       그게 문제였다.

         

       진짜 밧줄은 도르래에 걸쳐 있었다.

       그리고 도르래에는 갑자기 줄이 풀리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몇 바퀴 돌 때마다 걸려서 멈추도록 안전장치가 되어 있었다.

         

       그 안전장치가 이런 경우에는 사형집행 스위치로 변했다.

       중력에 의해 몸은 아래로 떨어지는데 진짜 밧줄은 덜컥 중간에 멈춰버린다면?

         

       손목이나 발목에 걸린다면, 어깨나 무릎이 탈골될 수 있었다.

       차라리 그러면 다행이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목에 걸린다면?

       목이 부러질 것이다.

         

       학생들은 진짜 밧줄을 막연히 생명줄이라 여겼지만,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반대로 작용할 수 있었다.

       평소의 훈련이 오히려 맹점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찰리는 밧줄을 조심히 풀어준 후, 클라라를 품에 안고 지상에 착지했다.

         

       원래부터 존경하고 신경 쓰였던 선배였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연모의 감정을 품은 건 그때부터였다.

         

       클라라는 운명이란 참 재밌다고 여겼다.

       그때의 경험이 이렇게 쓰일 줄이야.

         

       그녀는 진짜 밧줄이 레이나의 몸 어디에 걸쳐져 있는지 살폈다.

       왼쪽 어깨에 하나.

       그리고…….

         

       “하아, 하아, 거의 다…….”

         

       레이나는 이런 상황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을 몰랐다.

       그녀는 항상 완벽하게 준비된 장비로만 연습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평범한 수험생이었다면 한참을 어버버 거리다가 이제야 겨우 몸을 바둥거리며 밧줄을 풀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면 놀라서 달려오는 교수와 학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제지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레이나는 우수했다.

       그녀의 타고난 감각과 반사신경이 상황을 순식간에 파국으로 치닫게 했다.

       곡예사들이 상황을 파악하고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그녀는 이미 마지막 밧줄 무더기를 떨쳐버리기 직전이었다.

         

       엘라는 이런 것을 설치한 찰리를 속으로 욕했다.

       그때, 애들 몇 명이 절벽에서 죽을 뻔한 걸 알면서 이런 위험천만한 함정을 넣다니.

         

       멍청이 찰리.

       나중에 만나기만 해 봐.

       한소리 해줘야지.

         

       그렇게 밧줄을 조심히 끌러가던 그녀는 문뜩 레이나는 어떻게 됐나 아래를 살폈다.

         

       몸에 얽힌 것들을 거침없이 풀어 던지는 그녀가 보였다.

         

       “안 돼, 이 멍청이!”

         

       레이나는 엘라가 자신에게 왜 소리치는지 몰랐다.

       그저 서둘러 이걸 풀고 결승선으로 달려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만 작용했다.

         

       그렇게 밧줄 무더기를 아래로 다 던졌다고 생각한 순간.

       아래로 떨어지는 동시에 몸을 홱 잡아채는 강력한 장력을 느꼈다.

         

       왼쪽 어깨가 뒤로 꺾였다.

       그리고 무언가가 목을 옥죄고 들어왔다.

         

       우드득.

         

       뼈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밧줄에 매달린 레이나의 몸이 좌우로 흔들렸다.

         

       “꺄아악!”

       “사, 사람이 죽었다!”

         

       관객들이 비명을 질렀다.

       학생들도 사색이 된 채 그곳을 바라봤다.

         

       그러나 로드 판타스틱과 원더스타인, 교수들을 포함한 일류 곡예사들은 복잡한 한숨을 내쉬었다.

         

       “끄으윽, 헉, 헉.”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떨렸다.

       목 주위가 뻐근하고 화끈거렸다.

       목이 부러지는 줄 알았다.

         

       실제로 그렇게 될 뻔했다.

       그러나 바로 그 직전에 밧줄이 멈춰 섰다.

         

       “하아, 하아.”

         

       누군가가 밧줄을 붙들어준 덕분에.

       레이나는 위를 올려다봤다.

       그녀의 목을 감싼 밧줄을 엘라가 붙들고 있었다.

         

       그녀가 들은 관절이 끊어지는 소리는 엘라의 팔에서 난 것이다.

         

       “하하……다, 다행이다…….”

         

       엘라가 웃었다.

       그러나 그녀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레이나의 밧줄을 쥔 손은 마찰로 껍질이 다 벗어졌고, 팔꿈치와 어깨 관절은 탈골되어 덜렁거렸다.

         

       거기다 그녀의 몸에 얽매던 밧줄은 급히 던지고 나오느라 미처 제대로 풀지 못했다. 그녀의 반대편 손목은 위에서 내려오는 밧줄에 당겨져 손목의 피부가 다 벗겨져 시뻘건 속살이 다 드러났다. 거기다 그쪽 팔 역시 탈골된 듯 뼈가 관절을 뚫고 나온 게 보였다.

         

       “뭐……해……? 목에 걸린 거 풀어…….”

       “으……응…….”

         

       레이나는 자신이 울먹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밧줄을 풀어 던졌다.

       왼쪽 팔에 얽혀 있는 밧줄은 풀어서 오른손으로 쥐고 매달렸다.

         

       그녀가 완전히 풀려난 것을 확인한 엘라는 손을 놓았다.

       풀려난 밧줄이 좌우로 휘청거렸다.

         

       레이나는 이제 자유였다.

       왼쪽 팔이 부러지고 목은 여전히 얼얼했지만, 오른팔을 이용하면 밧줄을 타고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엘라는 여전히 팔을 늘어뜨린 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너, 너는 어떻게…….”

       “뭐가 어떻게야……이 팔로는 무리지…….”

         

       그녀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서 가……. 네가 1등을 해야 그나마 내가 2등 자리라도 지키지.”

         

       그녀의 애처로운 모습에 레이나는 울음이 터지려는 것을 꿀꺽 삼켰다.

         

       “미안…….”

         

       레아나는 경기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위로 기어올랐다.

         

       반대편 절벽에서 다른 도전자들이 도착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고정 밧줄 십여 개만 남은 절벽을 바라보며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사이 레이나는 밧줄을 타고 올라 결승선을 넘었다.

       멍하니 있던 르고 교수가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1등! 레이나 마기어!”

         

       함성은 없었다.

       박수 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레이나는 절벽 아래를 내려다봤다.

       감독 학생들이 엘라의 손에 묶인 밧줄을 풀고 아래로 끌어내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학교 병동의 나히모프 박사가 달려왔다.

         

       객석을 돌아봤다.

       아버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표정이 이상했다.

       웃는 듯 우는 듯, 화난 듯 기쁜 듯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감정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자신을 보고 대견스러워하는, 안쓰러운, 비웃는 얼굴들을 확인했다.

         

       도둑질한 1등이라 생각하는 걸까?

         

       그때, 그녀는 그 속삭임 속에서 한 단어를 알아들었다.

         

       아.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떨리는 고개를 숙여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봤다.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시큼한 냄새가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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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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