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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0

        

         

         “이건 전대의 짐이다.”

         “전하…?”

         “전대의 용사 파티가 당대의 용사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질 베르는 시원하게 웃으며 이자벨을 바라보았다.

         

         막시밀리앙의 딸. 정말 놀라울 정도로 그 녀석을 닮은 저 눈동자를.

         

         지독하게 질투했더란다. 아무리 쫓아도 따라잡을 수 없는 실력에 몇 번이고.

         

         하지만 그럼에도 그 시절, 목숨을 걸고 방패를 들어 지켰다. 열등감은 결코 의무와 정의보다 무거울 수 없으므로.

         

         이자벨이 칼을 뽑아든 자세와 기세를 읽고는, 질 베르는 피식 웃고 말았다.

         

         잘 자랐구나. 잘난 제 아비가 무언가를 가르쳐준 적이 없었음에도 정말 닮았어. 무서울 정도로.

         

         이젠 질투 따윈 없다. 막시밀리앙은 그가 질투하기엔 너무 빛나던 사내였으니. 그것을 깨닫고 난 뒤에 얼마나 후련했던지.

         

         마왕의 저주를 들은 뒤에 맹세했다. 그의 딸만큼은 지켜주겠노라고. 어느새 장성한 이자벨을 보니 웃음이 날 수 밖에는.

         

         

         “용사로서 걸어라. 너희의 도움이 필요한 땅으로 향해라.”

         “전하… 아니, 삼촌.”

         “벨라. 그리고 너희 모두. 당대의 용사에겐 당대의 일을 맡기마. 가라. 상 마틸렌느를 구원하고 이 나라를 지켜다오. 이것은 전대가 아닌, 호국경의 부탁이다.”

         

         

         질 베르는 기꺼이 고개를 숙였다. 일행 전원은 당황하며 그를 만류했다.

         

         그럼에도 질 베르는 우묵하게 말을 이었다.

         

         

         “이 나라를 지키는 것은 무릇 나의 일이나, 당대의 용사에게 감히 나의 의무를 의탁하겠다. 부디 이 임무를 수락해 주겠는가?”

         “삼촌…. 네, 기꺼이….”

         “고맙군, 용사.”

         

         

         질 베르는 이자벨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고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오스칼은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입술을 씹으며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들아.”

         “예, 아버지.”

         “이것은 에타크리히의 검이다. 상 마틸렌느의 모든 군권이 이 검의 권위 아래에 복종한다. 이제 이것은 네가 들어라.”

         “제게는… 너무 큰… 명예입니다….”

         “의무다.”

         

         

         질 베르는 아들의 뺨을 쓰다듬었다.

         

         오스칼의 젖은 눈이 질 베르를 올려보았다.

         

         

         “명예가 아니다. 그곳에 명예 따윈 없다. 오직 의무뿐. 이것을 쥐고 백성을 구하라. 나라를 구하고, 네 임금을 구하라. 그리고, 네 어머니와 네 동생을 지켜라.”

         “…예, 아버지.”

         “이제 너는 동방 기사단의 입회 기사다. 가라. 용사의 기사여. 너는 죽음 앞에서 의연히 용사를 지켜라. 네 의무에 충실하고 약자를 수호하며 도덕 앞에 언제나 당당할 수 있도록 행동해라.”

         “예, 아버지.”

         

         

         전대의 짐은 전대에게, 당대의 의무는 당대에게.

         

         군영에 남은 가장 좋은 말들을 내어주고는 질 베르는 다시 등을 돌렸다.

         

         짧은 인사 끝에, 일행은 산을 따라 내려갔다.

         

         

        *

         

         

         “늦었나.”

         

         

         이반은 거칠어진 호흡을 정리하며 정상에 다다랐다.

         

         아니, 아직 늦지 않았다.

         

         동방기사단은 아직 건재하다. 다소간의 손실은 있더라도 전투를 지속할 여력이 남았다.

         

         수도방위군은 거의 전멸했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이제 남은 수가 천여 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리고 질 베르는….

         

         에타크리히 공작은 한 손에 군기를 든 채로 용의 시체 위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질 베르—!!”

         “이반.”

         

         

         다가오는 이반에게 시선을 돌린 질 베르가, 투구 아래에서 히죽 하고 웃었다.

         

         

         “몇이나 죽였지?”

         “셋.”

         “하하, 나는 다섯을 죽였다. 내가 이겼군. 또!”

         “…가세하겠다.”

         

         

         다가오는 이반에게 질 베르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용의 공세는 잦아들었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창공을 날아오르던 용들은 지금 질 베르와 동방기사단의 전투에 질겁해 다가오지 않고 있었다.

         

         그 대신 베르니니 산맥의 모든 숲이 거의 다 소실되었다.

         

         재가 흩날린다. 벌거벗은 이 잿더미 위에 문득 바람이 불 때마다 안개가 흩어지듯 잿가루가 휘적거리며 물러났다.

         

         그 아래로 거대한 균열이 보였다.

         

         질 베르는 그 균열 앞에 서서 창을 들어 올렸다.

         

         

         “이 산 아래에 있다던 던전, 기억 나는가?”

         “음.”

         “던전이 아니었네. 굳이 따지자면, 신전이더군.”

         “…신전.”

         “용들의 신전.”

         

         

         질 베르의 곁에 서서 그와 같은 풍경을 내려보았다.

         

         갈라진 균열 아래에서 느껴지는 저릿한 감각. 용의 존재감이 저 아래에서부터 우글거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용들이 저 아래에 잠들어 있었을까?

         

         대체 어떻게? 그리고 언제부터? 그런 의문은 무의미했다.

         

         언젠가의 먼 시절 존재했던 이 신전 아래에 용들이 잠들었고, 마족들은 그 사실을 깨달았으며, 세 명의 대백작들은 마족들의 정보를 이용해 이 함정을 만들었다.

         

         굳이 따지자면, 틸레스 멸망의 위기라는 에피소드의 단초.

         

         크라실로프의 지하에 고대신이 봉인된 지하 신전이 있던 것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시스템. 어떤 악의마저 느껴지는 종류의.

         

         언젠가 깨어나 그 나라를 불태울, 그럼에도 나라의 누구도 사전에 인지하지 못하는 종류의.

         

         이 시대에도 새로운 용사가 필요한 이유가 그것이리라. 나라가 무너지고, 새로운 악이 도래하며, 옛 시절의 악들이 다시금 세상을 활보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으니.

         

         이러한 것들이 대체 얼마나 더 남았을까. 이 세상은 남은 칠용장뿐만 아니라, 저런 것들과도 투쟁해야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국가의 지하에 매설된 시한폭탄들과도.

         

         이반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어깨에 질 베르의 손이 얹어졌다.

         

         

         “떠나라.”

         “여기서 죽을 작정인가?”

         “그럴 리가.”

         

         

         질 베르는 하하, 하고 웃었다.

         

         

         “이 정도의 고난은 옛 시절에 충분히 이겨내지 않았던가. 고작 하늘 나는 도마뱀 따위가 감히 이 철산의 기사를 도모할 수 있겠나?”

         “…허세는.”

         “자네가 했던 말이 떠오르는군.”

         

         

         질 베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언젠가 자네가 투덜거린 적이 있었지. 목줄만 바뀌는 사냥개라고.”

         

         

         언제 했던 말이던가. 아마도 용사 파티에 처음 들어왔을 때와 떠날 때였을 것이다.

         

         마왕성으로 향하는 마지막 여정에서 이반은 파티를 이탈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시점이다.

         

         왕실의 명에 따라 종군했다. 용사 파티가 칠용장을 죽이며 밀어붙인 전선에서, 크라실로프의 북방군단을 지원해 활동하게 되었을 때다.

         

         이반은 파티를 떠나며 엔리케에게 투덜거린 적이 있었다. 목줄을 바꿔가며 잘도 써먹는다고.

         

         사냥개의 숙명이라 하겠다. 자조적인 농담이다.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떠올려 본다면 농담으로 끝날 일은 아니다. 그들은 사냥이 끝난 뒤에 삶아졌으므로. 절멸 부대는 대단히 유능한 사냥개가 아니었던가.

         

         질 베르는 웃음기 섞인 얼굴로 이반의 상념을 깼다.

         

         

         “사냥감에게 사냥꾼과 사냥개가 달리 보이겠는가?”

         “….”

         “사냥감에겐 둘 모두가 천적에 불과하다. 안 그런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용사가 마족의 천적이라면, 자네 또한 그렇다는 이야기지.”

         

         

         질 베르는 투구를 벗어 팔에 끼고는 한 손을 뻗었다.

         

         

         “나는 용사 파티가 아니다.”

         “전대의 입장에선… 글쎄.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너뿐이었을 것 같은데.”

         

         이반의 팔뚝을 강하게 쥐었다. 옛 나날의 경례였다.

         

         이반 또한 그의 팔을 마주 쥐었다. 시선을 마주한 채로, 질 베르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대의 입장을 대변해 보자면, 그것 또한 마찬가지다. 이반 페트로비치 예레모프. 그대는 그 시절에도, 지금도. 여전히 용사 파티의 일원이다.”

         “질 베르.”

         “더럽게 소심하기는. 자신감을 가져라. 그래서야 애들을 맡기기에 불안해지지 않겠느냐.”

         

         

         끅끅거리며 웃고는, 질 베르는 이반의 팔을 한 차례 흔들었다.

         

         두 사람의 손이 떨어졌다. 질 베르는 다시 투구를 쓰며 말했다.

         

         

         “전대의 짐은 전대가 맡겠다. 당대 용사의 척후야. 전대의 짐은 두고, 전대의 의무를 이어라. 당대의 앞길을 밝혀 다오.”

         

         

         당대 용사의 삼촌이며, 당대 기사의 아버지이며, 당대 척후의 친구로서.

         

         

         “죽을 것처럼 말하지 마라.”

         

         

         이반은 마른 입술을 간신히 떨어 말을 꺼냈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는, 질 베르가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오냐, 살아서 보자. 상 마틸렌느에서.”

         “무운을.”

         “무운을.”

         

         

         이반이 떠나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질 베르는 투구 아래에서 깊은 숨을 내쉬었다. 숨결이 바이저 아래에 갇혀 웅웅 울렸다.

         

         바이저의 갈라진 틈 사이로 깊은 협곡이 눈에 들어왔다.

         

         수많은 노란 동공이 그 아래에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웃음이 나왔다.

         

         

         “오라.”

         

         

         창을 들었다. 다행히 아직 가볍게도.

         

         하늘을 향해 뻗어 올린다. 연기에 가리워진 짙은 밤하늘 위로.

         

         

         “너희는 이 나라의 호국경을 눈 앞에 두고 있다.”

         

         

         하늘이 갈라진다. 샛별이 빛난다. 그 아래로 동방기사단이 모여들었다. 살아남은 수도방위군이 각자의 창칼을 들어올린 채 집결했다.

         

         희망의 상징을 향해서. 기꺼이.

         

         그들 자신의 희망이 아니라, 이 나라에 남은 희망들을 위해서.

         

         군기가 펄럭였다. 에타크리히의 인장과 동방기사단의 군기가, 벽처럼 너울졌다.

         

         

        -부우우우우우—!!

         

         

         호국경의 뿔나팔이 다시 한번 산하에 울려 퍼졌다.

         

         

       

       

       

       

       

       

       Ep 21. 의무와 계승.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자르기 애매하게 끝나길래 연참!
    휴!
    금요일에 걸맞는 에피소드 끝맺음이었따…
    *
    상 마틸렌느 수성전에서 다시 만나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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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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