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멀었습니다.”
“한 번만 더 넘으면 초절정일 텐데, 그 정도면 대단하지.”
나도 미친 듯이 빨리 경지를 올렸지만 목경이는 서너 달 만에 절정 끝자락까지 경지를 끌어올린 걸 보면 괜히 주인공이 아니네.
아마 이번 일을 해결하면서 실전 경험 좀 그득하게 쌓아주면 머지않아 나와 같은 경지에 도달하겠지.
그 전에 차이를 좀 벌려놓고 싶지만…그게 마음대로 될 리가 없다. 차라리 혜령이를 절정고수로 만드는 게 더 쉬우니, 한동안은 혜령이를 집중적으로 봐주든가 해야지.
나 혼자만 강해져선 의미가 없으니까.
“등에 멘 건 비동에 있던 물건이야?”
“그렇습니다. 비급 몇 권과 검과 도장과 벽에 새겨진 검흔뿐입니다만…”
“이런 상황에 미리 대비해둔 것 같은데.”
마치 멸문당할 것을 알기라도 하듯이.
나는 갑자기 급부상한 의문점에 턱을 긁적이며 내 맞은편에 앉은 목경이를 쳐다보았다. 목경이는 머리와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는, 모닥불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버지께서 가문이 습격당할 것을 대비해 미리 운남단가의 비급과 가주의 증표인 검을 이곳에 숨겨놓으신 듯합니다.”
“철두철미한 분이셨군.”
“…언제나 모든 일에 대비해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으셨던 분이셨죠.”
모든 일에 대비해야 한다라.
“유산은 찾았으니, 몸을 추스른 후에 사혈방을 칠 준비를 하자.”
“…셋이서 말입니까?”
“사람이 많아지면 귀찮아질 뿐이야. 우린 사혈방주만 잡으면 돼.”
사혈방에 쳐들어가서 죄다 밀어버리는 게 더 쉽겠지만, 굳이 사람을 더 많이 죽이는 선택을 고를 필요는 없었다.
손에 피를 최소한으로 묻힐 방법이 있는데도, 피를 더 묻히려 하는 건 살인귀나 하는 짓이니까.
천살성이 아닌 이상에야 그런 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
요 근래 전장에서 싸우던 시절의 기억이 자꾸 떠오르는 것도…
그리 좋은 징조는 아니었으니.
“…놈을 죽일 기회를 제게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물론. 그놈을 죽이는 건 네 몫이다. 나는…그저 기회를 만들어 줄 뿐이지.”
“감사합니다…은공.”
“그게 내가 내건 조건이었으니.”
“…은공을 만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첫 만남은 당혹스럽기는 했지만…”
첫만남이 좀 미묘하긴 했지. 내가 뜬금없이 찾아와서 단목경이 맞냐고 물었으니. 목경이 입장에서 참 당혹스러운 이야기긴 했겠네.
“원래 만남이란 건 예기치 않은 거지.”
계획된 만남이 아니라면 모든 만남은 우연이니까.
“아저씨이…”
무슨 꿈을 꾸고 있길래 헤실헤실 웃는 걸까. 나는 몸을 뒤척이며 뒤로 쓰러질 뻔한 혜령이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그러자 혜령이는 노렸다는 듯이 내게 몸을 바싹 붙였다.
…자는 거야, 아니면 자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달라붙는 거야?
“…혜령 소저는 남자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지요.”
“그렇긴 하지.”
사실 여자들 시선도 잡아끄는 것 같은데.
나는 목경이의 시선이 혜령이의 가슴께에 머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니다.”
“뭐라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너무 작게 말해서 제대로 못 들었는데. 뭐라고 중얼거린 거지?
궁금증을 담아 목경이를 쳐다보았지만, 목경이는 어색하게 눈을 내리 깐 채로 내 시선을 피했다. 삽시간에 어색해진 분위기가 우리 둘 사이에 자리 잡았을 즈음, 나는 혜령이를 끌어안은 채로 몸을 일으켰다.
“슬슬 자자. 내일 아침부터 바빠질 테니.”
“…예, 은공. 안녕히 주무십시오.”
나는 담요를 꺼내 바닥에 깔고 혜령이를 그 위에 올려놓았다. 담요 위에 드러누운 혜령이는 세상모르고 곯아떨어진 채로 몸을 뒤척였다.
“으음…아저씨…엉큼해요…”
도대체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거야.
나도 모르게 목경이에게로 시선이 간다. 목경이도 혜령이의 잠꼬대를 들은 듯, 어색한 미소로 내게 화답해왔다.
“…잘 자라.”
“은공도 안녕히 주무십시오.”
우리는 밤하늘의 별을 이불 삼아 자갈밭에 드러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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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요? 이제 많이 능숙해졌죠?”
“처음 했을 때보단 훨씬 낫네.”
“헤헤.”
열심히 가르친 보람이 있네. 처음에는 야채를 자르려다 도마까지 잘라버려서 애꿏은 생돈이 나갔었는데, 이제는 나름 능숙하게 재료도 다듬고 요리도 할 줄 알게 된다니.
…가르친 게 야매요리긴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나 대신 요리 담당을 맡아도 되지 않을까.
“요리 실력이 일취월장하셨군요.”
“열심히 연습했거든! 꿈에서도 연습했어!”
무림인이 꿈속에서까지 요리 연습이라. 이걸 칭찬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애매한 발언이네. 나는 혜령이의 귀여운 모습이 피식 웃으며 즉석에서 만든 나무젓가락을 모닥불에 던져넣었다.
“오늘은 운남성의 성도인 곤명으로 간다. 썩어도 성도니까 뭔가 유용한 정보를 구하기엔 거기만 한 게 없겠지.”
사혈방의 본단이 있다는 원강으로 바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원강에 가는 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닐 것 같았다.
사혈방은 현재 거대한 세력을 자랑하는 방파. 그런 방파가 과연 도시를 장악하지 못했을까.
원강의 하오문이 멀쩡한지 알 수도 없거니와, 사혈방이 하오문지부에 간자를 심어두지 않았으리라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 생각 없이 바로 원강으로 달려가는 건 지양해야지.
나야 어떻게든 되겠지만, 목경이나 혜령이는 위험할 수 있으니까.
“곤명에서 하오문지부에 방문하는 거예요?”
“맞아. 하오문지부에 가서 일단 사혈방에 대한 정보를 더 찾아본다. 성도에 있는 지부가 운남에선 가장 클 테니 거기엔 뭐라도 있겠지.”
다른 지부는 겉도는 수준의 정보밖에 없었지만, 곤명지부라면 이야기가 다를 수도 있으리라.
“그럼 곤명 지부에 갔다가 사혈방주가 있는 곳으로 가는 거네요?”
“정답이야.”
“이번에도 엄청 뛰어다녀야겠네요. 덕분에 경공 실력이 엄청나게 늘어난 것 같아요.”
“…호북에서 하북까지, 호북에서 운남까지 경공을 펼쳤으니 천 리를 넘게 달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많이 뛰었으니 경공 실력이 안 늘래야 안 늘 수가 없지. 내 경공도 더 다듬어져서 이제 내공 소모도 어느 정도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됐고.
“뛴만큼 보상이 뒤따를 테니 오늘도 발바닥에 불붙도록 경공을 펼쳐보자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경공을 펼쳤다. 내 시야의 양 끝 쪽에 긴 잔상이 눈을 간지럽힌다. 전보다 더 빨라진 덕이었다.
아직 수상비니 초상비니 궁신탄영이니 하는 기예를 펼치기엔 많이 부족하지만, 평생 경공이라곤 배워본 적도 없는 기사가 이 정도 펼치는 게 어디야.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유용한데.
…갑옷을 입고 펼칠 수 있냐 없냐가 문제지만.
몸에 얼추 50근짜리 갑옷을 입고 경공을 펼치는 건 아직 시도해보지 못한 영역이었으니까.
맨몸 검술과 갑주 검술이 다르듯이, 갑옷을 입은 상태에서의 경공을 펼치려면 더 큰 노력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불현듯 떠오른 새로운 과제에 경공을 펼치기를 반나절. 우리는 문산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인 개원(開遠)에 도착해 방을 잡고 여독을 풀었다.
당연하게도 방은 3개.
목경이가 여자인 것을 알게 된 이상 같은 방에서 잘 수는 없으니 당연한 일.
혜령이는 목경이와 같이 자도 된다고 했지만, 목경이가 생각할 것이 있다며 방 3개를 잡아달라고 요청했기에 나는 목경이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목경이가 나에게 부탁을 하는 건 드문 일이었으니.
“아저씨, 하오문지부는 언제 가려구요?”
“이제 가봐야지.”
“다녀오세요~”
“다녀오십시오.”
둘의 배웅을 받으며 방을 나선 나는 삿갓을 푹 눌러썼다. 내 눈에 띄는 외모를 최대한 덜 노출하려면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이렇게 해도 키가 커서 제대로 가려지지는 않지만.
“여기 하오문지부는 어디 있을까.”
사람들이 모인 장터를 지나 골목길에 들어선다. 어둠침침한 골목은 축축하고 기분 나쁜 공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골목 안쪽 깊숙이 들어갔다.
하오문지부를 찾으려면 음지에 들어서는 게 나았으니까.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나는 허름한 옷차림을 한, 거친 인상의 사내들이 모여있는 길거리에 도착했다. 칼을 차고 있는 걸 보니 낭인인가.
낭인들이 모여 있는 걸 보니 여기 어딘가에 의뢰를 맡기는 중개소가 있을 듯한데.
내게 쏠리는 시선을 무시하며 얼마나 더 걸었을까, 나는 중개소로 보이는 전각을 발견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전각으로 들어가, 곰방대를 문 채로 책상에 턱을 괸 중년의 남성에게 다가갔다.
“이보시오.”
“어, 또 뭐…?!”
뭘 그리 놀라. 색목인 처음 보나.
나는 얼빠진 얼굴로 곰방대를 떨어트린 남성이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해 책상을 손가락으로 세 번 두드렸다.
“사, 사자검협께서 여긴 어인 일로…”
“하오문. 어딘지 아나?”
“이곳에서 나가 좌측으로 걷다 보면 황가객잔이란 곳이 있소이다. 그곳에서 접선하면 될 것이오.”
“고맙군.”
나는 은근슬쩍 상 위에 은자를 하나 올려놓고는 등을 돌렸다.
“…저자가 사자검협?”
“듣던 대로 기골이 장대하군.”
“색목인들은 다 저런가?”
쑥덕거림을 흘려넘기고, 황가객잔을 향해 걸어간다. 다행스럽게도 황가객잔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나는 곧장 문을 열고 황가객잔에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문 바로 앞에서 나를 향해 포권을 하고 있는 남성을 발견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이미 내가 온 거 알고 있었구만.
나는 남성을 따라 객잔 깊은 곳으로 이동했다.
피부에 염증 생기니까 죽겠네요…
간지러워 죽을거가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