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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1

       잿빛이 뒤섞인 거무죽죽한 세상.

       

       매일 밤 찾아오는 꿈이 이제는 불안한 걸 넘어 지루하기까지 하다.

       

       이것이 불길한 미래를 암시하는 악몽일지, 아니면 뇌가 만들어낸 개꿈에 불과한지는 모른다. 아마 후자에 가깝지 않을까.

       

        사해에 떠 있는 듯한 부유감에 정신이 몽롱하다. 꿈속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온 관객처럼 그저 관찰하는 것만이 허락된 일이었다.

       

       청각에 집중하고 있으면 비명과 고함이 연달아 들린다.

       

       나무는 불타고, 철은 녹는다.

       

       하늘은 검고, 땅은 불그스름하다.

       

       오늘도 세상이 끊어지는 미래를 본다.

       

        도수 높은 술에 취한 것처럼 후끈한 열기에 잠에서 깨어났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잠옷이 축축해진 뒤였다. 나는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로테, 먼저 가 있을래?”

        “늦으면 안 된다?”

       

       로테를 먼저 보내고는 샤워를 하고 나왔다. 냉수로 충격요법을 하고 나서야 찝찝한 기분이 사라졌다.

       

        교복을 차려입고 로브를 둘렀다. 처음에는 적응 안 되던 테니스 스커트도 자신을 스코틀랜드인이라고 최면을 거니까 그럭저럭 입고 돌아다닐 만한 의복이 되었다. 이래서 사람은 마인드셋이 중요하다.

       

        뭐 어쩌겠는가. 이 몸으로 생활한 지도 4년인 것을. 슬슬 본 주인이 나타나서 텃세를 부릴 때도 되었지.

       

       그래도 지금은 안 된다. 임차료를 지불하는 건 못해도 지구로 귀환이 가능하다는 확신이 섰을 때부터다.

       

        머리맡에 놓인 자리끼를 들이키고 뒤늦게 기숙사를 나섰다. 조만간 걷자 분수대 앞에서 익숙한 얼굴을 만났다.

       

        정장을 잘 차려입은 붉은 눈의 중년 신사. 근대 프랑스 귀족이 연상되는 인상착의다. 모노클을 낀 오른쪽 눈에서는 단정함과 함께 공포감이 묻어나왔다. 그가 올백 머리를 뒤로 넘기며 나에게 다가왔다.

       

        “좋은 아침이에요, 학생.”

        “이사장님도 그간 강녕하셨나요?”

       

        틸레트 아카데미의 이사장, 로베스피에르.

       

        제국에서 제일가는 아카데미의 실권자이자, 의회파의 수장. 동시에 나의 후견인 중 한 사람.

       

        “강녕은 무슨, 얼굴 본 지 며칠 되지도 않았잖아요. 그나저나 학생은 등교 중인가요?”

        “네. 이사장님도 출근하시는 건가요?”

       

        이사장은 멋쩍게 웃었다. 

       

        “이미 출근했죠. 학생에게 해 줄 말이 있어서 나왔습니다.”

        “직접 오신 건가요?”

        “지금 아니면 시간이 안 날 것 같아서요.”

       

        그래도 이사장이 일개 학생을 보러 맨발로 나섰다는 건 경이로운 일이다. 아니면 그만큼 급하다는 방증이거나.

       

        이사장과 나는 일련의 거래를 했다. 내 학교생활이 평탄하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는 대신에 나는 이 사람에게 닭다리 크기만 한 플레어를 만들어 드려야 한다.

       

        계약을 생각한다면 이사장이 날 보러 온 이유는 이것 때문일 터.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철, 텅스텐, 니켈 같은 물품 먼저 연성부 동아리로 보내 놓았습니다.”

        “벌써요? 언제요?”

        “오늘 새벽에 물품을 들여왔습니다. 한 번 보고 연구에 도움이 될지 판단하면 좋겠군요.”

        “…알겠습니다.” 

       

        더 늦게 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일 처리가 빠르구나.

       

        이러면 문화제 준비하기도 한결 수월해지겠는걸.

       

        “이런 지원으로 소형화 연구가 충분히 가능한 거겠죠?”

        “예, 틀림없이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다른 게 아니라 며칠 전 조치가 영 마음에 걸리는군요.”

       

        조치라. 아, 그렇지. 로즈마리가 시행한 플레어 제한 조치를 말하는 것이로군.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이사장님 의도에 맞추어 유연하게 만들어 드릴 테니까요.”

        “학생이 그렇게 말해주니 한숨 돌리겠군요.”

       

        이사장은 자기가 한 말대로 푸욱 숨을 내쉬었다. 윽, 시가 냄새.

       

        “그러면 전 다시 업무를 보러 가겠습니다. 문제 있으면 곧바로 찾아와요. 알겠죠?”

        “알겠습니다. 조심히 살펴 가세요!”

       

        들판에 내리쬐는 태양처럼 환한 미소로 이사장을 배웅했다.

       

        이렇게 되면 연구 하나를 후딱 끝내버리고 텔러-울람 설계에 집중할 수 있겠다.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계획이 짜맞춰지기 시작한다. 나는 싱글벙글해하며 양장본에 적힌 진행 상황을 살폈다.

       

        [현재 ‘텔러-울람 설계’의 진행 단계는 전체 4단계 중 2단계입니다.]

       

        우라늄과 플루토늄처럼 핵융합의 뇌관 역할을 하는 재료를 모으는 것이 1단계.

       

        폭탄 자체를 만드는 것이 2단계.

       

        이후 격발하는 메커니즘과 투하 수단을 제작하는 것이 3단계와 4단계다. 4단계를 제외하면 현재 2단계와 3단계를 한꺼번에 끝낼 수 있다. 2단계는 프레이의 도움을 받아서, 3단계는 백야의 해석을 통해서 말이다.

       

        물론 3단계가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겠지. 핵융합 메커니즘을 마법이라는 이름으로 잘 포장하여 재해석하는 과정이 필요할 테니까.

       

        [잠깐, 뭔가요 이건.]

       

        사근사근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교실로 향하던 도중 양장본이 물었다. 의미심장해하는 음색이다.

       

        [이사장에게는 언제 스폰을 받은 거예요?]

       

        “글쎄다. 까먹었어.”

       

        [어쩐지, 돈 걱정 안 하고 학교 다닌다 했어요. 그래서 방금 대화는 뭔가요? 저 놔두고 이상한 거래한 거 아니겠죠?]

       

        “아니야, 그런 거.”

       

        완벽한 기브 엔 테이크였다. 이사장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만족스럽다.

       

        그래도 양장본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약간의 각색을 더해 그동안 이사장과 있었던 일을 짤막하게 설명했다.

       

        모든 사실을 얘기해 주지는 않았다. 이사장에게 소형 스크롤을 만들 수 있느냐고 연구 수주를 받은 것이라는 이야기만 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양장본은 혀 차는 소음을 내며 태클을 걸었다.

       

        [플레어 소형화요? 소형화는 나노구조가 중요한 거 아시잖아요. 현미경이나 초미세 식각기구가 없으면 의미 없는 작업이라고요. 그런데 철이나 니켈…? 저런 주문을 왜 하신 거죠?]

       

        양장본의 질문에 나는 씩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잠깐, 설마.]

       

        그렇다.

       

        [여, 여, 연구비를 횡령한 거예요…?]

       

        어허, 횡령이라니, 말이 심하네.

       

        어디까지나 ‘보탬’이다. 나와 이사장 모두를 위한 플러스알파라고.

       

        [뭔 개소리예요! 이거 빼도 박도 못 하고 횡령이잖아요! 스크롤 소형화 과제를 내줬으면 그것만 딱 하고 보수를 받아야지, 그걸 왜 핵폭탄 만드는데 가져다 쓰냐고! 아악! 난 몰라!]

       

        “시끄러운데 그, 조금 닥쳐주면 안 되나.”

       

        [주인님 변했어요. 역시 그 거울을 본 뒤로 이렇게 된 건가? 아니, 아닌데. 하는 짓 보면 평소 주인님 같기도 하고…. 어쨌든 머릿속에 수소탄 생각밖에 없잖아요! 제 말 틀려요?]

       

        내가 이래서 양장본을 요새 잘 안 들고 다닌다. 분명 ‘중급’으로 각성하기 전에는 할 일만 뚝딱뚝딱 처리해주는 컴퓨터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스파게티 코드로 짜인 빡대가리 AI에 불과한 것 같다.

       

        [와, 지금 말 다했어요? 여신님이 저 창조하시느라 사흘 밤낮을 새셨는데…!]

       

        나는 휘파람을 불며 교실로 들어왔다. 평소대로의 학급이다.

       

        로테는 앞줄에 앉아 공부하고 있고, 프레이는 또 엎어져 자는 중이다. 학급 반장인 메이릴은 청소 당번을 도와 교실 뒷자리에서 빗자루를 쓸었다. 몇 달 전부터 보아온 평범한 풍경이었다.

       

        황자는 급우 중 아무에게나 추파를 던지다가 된통 깨지고 있다. 가만 보니까 클리온 옆에는 로즈마리가 붙어 있었다. 클리온의 표정이 영 좋지 못했다.

       

        ‘저 녀석, 사실 불쌍한 녀석이었어’ 따위의 전개는 안 좋아하지만, 어쩔 수 없지. 가능한 안 엮이는 게 서로에게 최선이다.

       

        늘 그랬듯이 의자를 끌고 로테 옆에 앉았다. 당연히 뒷자리는 로즈마리의 몫이었다. 고등학교처럼 여기도 지정좌석제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그건 너무 로또인가.

       

        -톡톡

       

        “뭐야.”

        “언니, 어제 말씀하신 거 주문해 놓았어요.”

        “뭘 주문했는데.”

        “그새 까먹으셨나요? 달콤한 설탕이 20kg이나 올 거랍니다.”

       

        입꼬리를 올리며 헤실거리는 로즈마리. 이 미소를 보고 있자니 버티기 힘들다.

       

        “일단 알았어.”

       

        어쨌든 이걸로 중성자 감속재도 간단하게 확보했다.

       

        [와, 이건 좀 너무한데.]

       

        나는 의도적으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봤다. 때마침 오른쪽 앞문을 통해 헤를라인 선생님이 들어오고 있었다.

       

        “뭐지?”

        “표정이 안 좋으신데?”

       

        항상 밝은 표정을 하고 다니던 헤를라인이 오늘따라 침울한 얼굴로 나타났다. 학생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조금씩 갸웃거렸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버멜의 말대로라면 헤를라인은 마지막까지 살아 있어야 하는 주요 인물. 평소와는 다른 징후가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곧바로 신경 써야 한다고 들었다. 그러니 버멜이 없는 지금은 내가 여쭤봐야 한다.

       

        “선생님,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신가요?”

        “어…? 응, 아무것도 아니야.”

       

        헤를라인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언제 그랬냐는 듯 곧바로 표정이 돌아온다.

       

        프레이, 로테 다음에는 헤를라인 선생님인가.

       

        아니, 헤를라인 선생님은 버멜이 북방 전선으로 가는 걸 막았잖아. 그러면 걔 말로 당장 이벤트 하나 무사히 넘긴 거 아닌가?

       

       게임을 안 해봐서 잘 모르겠다. 이거… 어떻게든 버멜과 한 번 얘기를 나눠 봐야 하는데.

       

        버멜이 로즈마리의 눈을 피해 도망 다니는 것까진 OK.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래도 어디 있는지 알아야 뭘 하든 말든 하지. 이것 때문에 로즈마리를 곱게만은 못 본다. 

       

        로즈마리가 나에게 잘 대해주긴 해도 장기적으로 보면 이런 방해를 낳는 존재라는 건 변함이 없다. 어떻게든 생각을 정리하고 수를 써야 했다. 그렇게 내가 메마른 입에 침을 묻히며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얘들아, 오늘 공지사항이 하나 있어.”

       

        헤를라인 선생님의 말씀에 자연스레 시선이 교탁을 향했다.

       

        “이번 주에 재학생 모두가 건강검진을 받을 거야.”

       

        뭐야, 별다른 건 아니네. 이건 뭐 문제 될 거 없겠고….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피 뽑고 혈압 재는 것 정도만 하면 끝이거든.”

       

        …잠깐.

       

        “어…?”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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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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