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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1

     저녁.

     아스타시아는 305호, 스칼렛의 방문을 받았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한기가 풀풀 날리는 차가운 태도.

     마치 즐거운 시간을 방해받은 것 같은 아스타시아의 날카로운 태도에 스칼렛은 침음성을 흘렸으나, 곧 태도를 바로잡으며 담담히 앞을 바라봤다.

     “그레이 지브롤터 이사장께서 제게 접근하셨습니다.”

     “…뭐?”

     아스타시아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그런 소리, 들은 적 없는데?”

     “장학회를 통해 호출하셨고, 우수 봉사 장학생으로 임명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그리고 그분은 제게 이런 제안을 하셨습니다. 그.”

     스칼렛은 자세를 반듯하게 잡으며 허리를 숙였다.

     “아스타시아 전하와의 개인적인 시간에 대하여, 제게 연막을 펼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연막…?”

     “예. 가령, 제가 전하를 모시고 어딘가를 갔을 때. 그곳에는 저와 전하 둘만 있다고 공식적으로는 알려지게 되겠지만….”

     “사실은 이사장님과 내가 따로 있는 것이다?”

     “예.”

     “……흐흠.”

     아스타시아는 약간 긴장과 경계를 풀고 느긋하게 자세를 잡았다.

     “또.”

     “거래의 대가로 제게 이런 걸 주셨습니다.”

     스칼렛은 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크림슨 지브롤터 변경백의 사진. 아마도 지브롤터 백작가에서 확보한 사진기로 직접 찍은 사진 같습니다.”

     “흐음….”

     “제국의 뒤에서 어둠의 경로로 유통되는 화보에 비하면 압도적인 화질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애초에 화보라는 거, 멀리서 찍은 도촬밖에 없잖아.”

     “예.”

     사진 속 피사체는 사진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만큼 가까이에서 찍었다는 말이며, 동시에 사진을 찍히는 당사자가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다는 뜻.

     “그레이 지브롤터에 의해 직접 찍힌 사진. 그것이 제게 들어왔습니다. 이거, 보고하면 저는 죽습니다.”

     “…….”

     “하지만 보고하지 않을 수는 없는 내용입니다. 마시는 찻잔. 창가에 비치는 햇빛으로 보면 오후 3시 정도쯤으로 유추되는데, 그 시간에 이렇게 찻잔을 들고 밖을 바라보며 마실 일이 무엇이 있는가. 아마 연무장에서 훈련하는 기사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일과’일 가능성이 큽니다.”

     “복잡하고 머리 아픈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뤘으면 좋겠는데….”

     “알겠습니다.”

     아스타시아가 손을 흔들자, 스칼렛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황손녀님.”

     “응.”

     “저는 황손녀님이 ‘타깃’과 어떠한 행동을 하든, 거래에 따라 함구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설령…제국법에 위반되는 사항이라도 말이죠.”

     “뭐?”

     “여기는 왕국이고, 제국법을 그대로 들이미는 것도 어폐가 있는 법. 노스트럼에 왔으면 노스트럼의 법을 따르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그, 그건…! 너, 설마…?”

     “노스트럼에서는 16세만 되어도 다들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다고 합니다.”

     “그건 엄청 옛날이야기야!! 누가 진짜로 그런다고 그래?”

     아스타시아는 얼굴을 붉히며 빽 소리를 질렀다.

     “너, 너 지금 나보고 이사장님이랑 그렇고 그런 행동을 하라는 거야?”

     “황손녀님께서는 황궁에 계셔서 잘 모르시겠지만, 저희 그림자들은 ‘허니트랩’도 익혔습니다.”

     “!!”

     “인간의 본성과 본능을 이용해 타깃을 방심하게 한 뒤, 몸으로 유혹하는 방법이야말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회유…혹은, 암살 방법이죠.”

     “너….”

     “물론, 그레이 지브롤터 이사장님은 저를 육체적으로 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

     스칼렛의 말에 아스타시아의 굳은 표정이 살짝 풀렸다.

     “그러니 안심하시고 그레이 지브롤터를 유혹하는 데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제가 돕겠습니다. 그 대신.”

     “그 대신…?”

     “그렇게 된다면 제가 노려야 할 타깃과 접선하는데 여러모로 애로사항이 생길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므로 제게 주어진 임무에 대하여, 상위 임무를 내려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그래.”

     아스타시아는 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열었다.

     “내가 그레이 지브롤터를 상대로 뭘 하든…그래, 막말로 그를 내 방으로 초대하든 침실로 들이든, 너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거야. 알겠어?”

     “예.”

     “어기면…진짜 가만두지 않을 거야. 좋아. 가봐.”

     “실례하겠습니다.”

     스칼렛이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방을 나섰다.

     철컥.

     현관문이 자동으로 닫히자마자 즉시 잠금장치가 걸렸다.

     “하.”

     “잘 된 거 아닙니까?”

     안방, 아스타시아의 침실.

     “이제 합법적으로 어디에서든 둘이 있을 수 있게 되었는데.”

     그레이 지브롤터가 한 손에 길쭉한 유리병을 든 채, 씩 웃으며 침실에서 나왔다.

     * * *

     듣는 귀는 어디에든 있다.

     

     스칼렛이 아마 다른 마음을 품고 나와 했던 거래와 다른 이야기를 했다면 가만두지 않았겠지만, 다행히 그녀는 이 아카데미에서 가장 가까운 권력자와 손을 잡기로 했다.

     “앞으로는 스칼렛을 대동한 채로 돌아다녀야겠군요. 겸사겸사, 필요한 물품들은 스칼렛을 통해서 보급하는 것도 생각해봐야겠어요.”

     “스칼렛,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솔직히….”

     “솔직히, 저도 믿지는 않습니다.”

     그림자가 황손녀나 재단 이사장에게 충성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스칼렛, 그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임무입니다. 그러니 황손녀님께 새로운 상위 명령을 내려달라고 한 거 아니겠습니까?”

     “제게 딱히 그런 권한은 없는데.”

     “구두로 허가하셨다는 게 중요하죠. 아마 지금 방에서 보고서를 쓰고 있을 겁니다. 상황이 이러이러하니, 자신의 임무를 전용으로 돌려달라고.”

     “황손녀보좌?”

     “예.”

     아무리 제국 그림자 부대가 비합리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기본적으로는 합리적인 선에서 움직이는 이들이다.

     “제국으로 파견된 그림자, 유학생들을 관리하는 최종 결정권자는 황태자일 겁니다.”

     “…….”

     “비교를 하게 될 수밖에 없겠죠. 스칼렛을 자기 목표에게 집중시킬 것인가, 아니면 그레이와 아스타시아 사이를 좀 더 명확하고 확실하게 잇는데 쓸 보조 인원으로 쓸 것인가?”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요?”

     “당연히 이쪽이죠.”

     나는 아스타시아가 앉은 소파 옆에 앉았다.

     “9명 모두 실패해도 좋다. 아스타시아를 이용하여, 그레이 지브롤터를 유혹할 수 있다면.”

     “…….”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테니, 그에 맞춰주면 되는 겁니다. 스칼렛, 있는 게 황손녀님께도 편하잖아요?”

     “편하긴 편하겠지만….”

     아스타시아는 뚱한 얼굴로 볼을 부풀렸다.

     “뭔가요?”

     “흥.”

     “말하지 않으면 모릅니다?”

     “저랑 당신, 둘이 함께 지내는 공간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게 싫은 거죠.”

     아스타시아는 솔직하게 답했다.

     “그리고 당신이 아버지를 팔아서 이렇게 연애를 한다는 사람으로 인식되는 것도.”

     “…….”

     “스칼렛, 분명-”

     “사진, 절대 안 넘길 겁니다.”

     나는 아스타시아의 어깨를 당기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한 가지, 상대가 모르는 첩보망이 제게도 있습니다.”

     “첩보망…?”

     “이쪽은 상업 쪽의 이야기인데, 물건을 사고판 기록 또한 정보가 되는 법이죠.”

     “바로바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몰라요.”

     “에르윈 회장님.”

     아스타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그분이 왜…?”

     “제국으로 유통된 아버지의 불법화보집 말입니다. 그걸 누가 사고팔았는지, 그 모든 현금 흐름은 아이페리아 인더스트리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

     “그리고 그중 하나, 누군가가 웃돈을 주고 사들인 기록이 제게는 있죠.”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제가 설마 그 알량한 푼돈 때문에 아버지의 사진을 팔아치웠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설마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그런 겁니다.”

     돈도 돈이지만.

     “그리고 아버지도 좋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의도와 과정은 어찌 됐든, 결국 자신의 인적자원을 판매하여 벌어들인 돈이 자식에게 가도록 되어있으니.”

     “어떻게요? 그 돈, 에르윈 회장이 관리하고 있을 텐데. 심지어 탈러로요.”

     “에르윈 회장님이 황손녀님의 결혼식에 크게 금전적 지원을 하실 거 아닙니까.”

     “…당신.”

     제국에서 팔린 그 수많은 화보집의 판매 이익은 에르윈 회장이 꽉 쥐고 있으며, 언젠가 아스타시아가 결혼하는 날을 위한 지참금 겸 혼수로 들어오게 되겠지.

     “그러면 결과적으로 제게 들어오니까 괜찮은 거죠.”

     “변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변태라고 하는 겁니까?”

     “벌써 결혼할 생각을 하고 있다니. 엉큼해요.”

     “엉큼? …하.”

     나는 아스타시아를 내게 당기며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진짜로 엉큼한 건 누구?”

     “자, 잠깐…!”

     “저는 당신이 지난 새벽에 한 일을 알고 있습니다만.”

     “시, 시끄러워요!”

     아스타시아는 빽 소리를 내질렀으나, 나를 밀쳐내지는 않았다.

     “그,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제가 뭘요?”

     “저, 저도 그 정도는 알고 있거든요? 남자들은 사춘기만 지나도 그, 그, 자체적으로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손을 쓴다고!”

     “아, 그거 말입니까?”

     나는 아스타시아의 손을 잡고 내 가슴에 올렸다.

     “죄송하지만,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습니다.”

     “……네?”

     “다 당신을 위해서 남겨둔 겁니다.”

     “뭐, 뭐라고요?”

     “성인이 되어, 당신과 결혼하여, 당신과 첫날밤을 치르게 될 날. 오직 그날을 위해 아껴두고 또 아껴두고 있습니다.”

     “…….”

     아스타시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어른이 될 때까지 참을 수 있죠?”

     “그, 그건….”

     “저는 믿습니다. 아스타시아가 그런 순간적인 욕구에 휘말려 선을 넘거나 그런 짓을 저지르지는 않을 거라는 걸.”

     “…….”

     “물론 아스타시아도 사람은 사람이니까, 필요하다면 중간중간에 쌓인 불만을 풀어낼 수도 있겠죠. 그 뒤를 해결해주는 게 스칼렛일 수도 있고.”

     “으, 으윽….”

     “하지만 만일 원하신다면.”

     나는 아스타시아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

     “……아 이!!”

     말하자마자, 아스타시아가 바로 내 목을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이 변태가!”

     “제가 무슨 말을, 했다고, 변태라고 그, 러십니까?”

     “아으, 진짜!”

     “가장 확실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됐어요! 그 문제에 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해요!”

     나중에.

     접수.

     “그보다, 진짜로 스칼렛 괜찮은 거 맞아요?”

     “이미 확인한 문제를 다시 꺼내면서 화제를 돌리려고 하다니.”

     “그런 거 맞으니까, 빨리 답변이나 해줘요. 미래의 장인어른이 괜히 제국 그림자에 의해 정보가 새어나가게 생겼는데.”

     “…….”

     “왜 그러세요?”

     “아뇨, 그냥.”

     딱히 의도 없이 한 말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약간 더 설레는 기분이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화보집을 사들인 이들에 관한 정보는 제가 다 알고 있습니다.”

     “스칼렛이 크림슨 변경백을 선망한다는 거잖아요.”

     “그리고 아버지의 사진을 꺼낸 것도 그러한 이유고요.”

     “그러니까….”

     “우상.”

     아버지의 화보집, 숨겨진 효과.

     “때로는 제국의 그림자라고 해도, 개인적으로 쌓인 불만을 해결하기에 적절한 요소가 있다면 그건 또 그거대로 나름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되는 거예요? 아버지 사진을?”

     “뭘 보고 하든, 당사자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그만이죠.”

     나는 아래를 가리켰다.

     “이 방 아래, 305호에서 스칼렛 양이 아버지 사진을어디 천장에 붙여두고 침대에 누워서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전ㅡ혀 모르는 겁니다.”

     마치.

     “우리가 나중에 둘이서 아카데미를 걸을 때마다, 다른 이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몰래 손을 잡고 다니는 걸 스칼렛이 눈 감아주는 것처럼 말이죠.”

     “…어.”

     아스타시아가 잠시 표정을 굳히더니, 아래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잠깐만요, 설마, 이 소리…?”

     “정확히 이 아래가 305호입니다.”

     “…그러면 우리 침실은요?”

     “당연히.”

     나는 아스타시아를 향해 눈을 찡긋거리며, 소파에서 그녀를 번쩍 들어올렸다.

     “원래 당신이 들어가야 했을 빈 방이죠.”

     제국 기숙사도 마찬가지지만, 기숙사에는 층간소음이라는 게 없다.

     마스터급 신체 스펙을 가진 인간이 일부러 아래층에서 울리는 진동에 귀를 기울이는 게 아니라면.

     * * *

     아카데미 생활도 어느덧 시간이 흘러, 약 3주.

     제국 유학생들은 무난하게 아카데미에 녹아들었고.

     동아리를 구성한 학생들은 저마다 동아리에 어울리는 활동을 하며 청춘을 구가하고 있으며.

     학생회는 나리아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다음 행사를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때.

     3월의 마지막 날에 가까워지는 시기.

     “스칼렛.”

     “예, 그레이 이사장님.”

     최근 들어 피부가 이전보다 더 좋아진 스칼렛이 메이드처럼 내게 따라붙어, 오로솔 아카데미 성벽 너머에 도착한 선물을 가리켰다.

     “저게 그러니까….”

     “그레이 이사장님을 위한 ‘그분’의 선물입니다.”

     “…그러니까 저기 있는 저 거대한 배가, 선물이라고?”

     “예. 그렇습니다.”

     선물.

     “아무리 봐도 프리깃에다가 바퀴 12개를 좌우로 달아둔 것 같은 저것이?”

     “예.”

     “왜?”

     “그야.”

     어느덧.

     “그레이 이사장님의 생일 선물이라고, 합스베르크 전하께서 ‘마도자동차’를 선물하셨습니다.”

     “…배잖아.”

     “배처럼 생긴 자동차일 뿐입니다.”

     3월 말.

     나의 생일에 가까워졌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생일선물(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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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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