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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2

        정령마도 시간.

       

        수업에 집중해야 하는데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오늘은 한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합니다. 마수… 그중에서도 절멸급 마수가 우리보다 훨씬 강한 전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완벽하게 유린하고 있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것입니다.”

       

        흥미로운 주제였으나 정작 당사자 둘은 듣고 있지 않았다.

       

        이미 아는 내용이라서?

       

        아니, 들을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 내 머릿속은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다. 로즈마리도 다르진 않을 것이다.

       

        “모든 마수가 그렇듯이, 절멸급 또한 속은 기계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유효타를 날린 적은 없어 피가 어떤 색일지는 모르지만요. 그래도 재앙급과 비교하여 보았을 때 검정 혹은 진한 회색 계통의 피를 지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교수님, 질문 있습니다. 그러면 숨어든 마수를 그런 식으로 판독하는 건 못 하나요?”

        “피를 뽑거나 하는 방식 말이죠?”

        “네.”

        “좋은 질문이에요. 인간의태 마수는 교묘하기 때문에 그런 경우에서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할 겁니다. 아예 피를 흘릴 상황을 만들지 않거나, 어쩔 수 없이 흘리더라도 대비책을 준비해 놓았겠죠.”

       

        아, 이번 시간은 망했군. 카이뤼삭 교수의 말이 도저히 머리에 들어오질 않는다.

       

        이럴 수는 없다. 노예로 구르던 시절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올라왔는데….

       

        그래도 쫓겨나는 건 조금 너무한 처사 아닐까? 여태껏 한 게 있는데.

       

        들켰을 때를 대비해서 준비해 둔 변명거리는 몇 개 있다. 플레어를 만들고 스크롤 저작권을 포기한 것이나, 흑사병 사태 때 EMP 스크롤을 만들었던 것 등등. 후자의 경우에는 학생회 간부에게 칭찬까지 받았다.

       

        심지어 지금은 절멸급을 상대하기 위해 로테, 프레이와 협업하는 중이다.

       

        로테와 프레이와는 꽤 많은 시간 교감을 나눴다. 비록 만난 지 오래된 건 아니지만, 하루 중 붙어 있는 시간이 많았다. 공부도 함께 하고, 밥도 같이 먹고. 대형 연구 프로젝트는 벌써 두 개째였다.

       

        우정이라는 게 다른 게 아니다. 꼭 극적인 사건이 있지 않더라도 그냥 오랫동안 붙어 다니면 저절로 생겨나는 게 우정이다.

       

        그러니까 잘 풀릴 터다. 최악의 상황만 벌어지지 않는다면.

       

        “…해서 마수는 정령을 증오하는 겁니다. 아무래도 인간형 마수를 확실히 걸러낼 수 있는 건 상위 정령들 뿐이니까요. 정령들은 여신의 대행자로서 우리 세상이 유지될 수 있도록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 최악의 상황이라는 게 정령에게 발각당하는 거겠지.

       

        “조금 전에도 이야기헀지만 정령에게는 기계적인 악의를 감지해내는 힘이 있습니다. 물론 100퍼센트 맞는 건 아니죠. 그랬으면 진작 상급 정령과 계약한 이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숨어든 괴물들을 내쫒아버렸을 겁니다.”

       

        중간고사가 끝나면 일리야드 아카데미에서 교환학생이 온다. 엘프 나라에 있는 학교이니만큼 오는 학생 대부분이 엘프겠지. 그리고 엘프는 정령 친화력이 좋다. 못해도 반절 이상이 정령과 계약했을 터.

       

        “허어.”

       

        산 넘어 산이구나.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고…. 이번 주에 건강검진이 있죠? 학생들 차례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절 포함해서 많은 교수님이 휴강을 잡아놓으실 겁니다.”

       

        이런 걸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수업 종이 울리자마자 고개를 뒤로 돌렸다. 넋이 나간 얼굴로 천장과 칠판 사이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블루베리가 하나. 로즈마리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시선을 내렸다.

       

        “언니.”

        “동생아.”

        “오늘 학교 끝나고 저희 집에 올래요?”

        “그거 좋지.”

       

       

        **

       

       

        세상의 영원한 적은 없다.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될 수도, 혹은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이는 삼국지만 읽어도 아는 사실이다.

       

        오늘 계획했던 일정도 다 취소하고는 블랜튼 공작의 사저에 와 있다. 어느 곳을 둘러보더라도 황금과 백금으로 꾸민 장식뿐이다. 나라 망하라고 고사를 지내고 있구나.

       

        차를 대접받을 시간도 없다. 나와 로즈마리는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로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언니, 우리 좆됐어요.”

        “경박한 말 하지 마라.”

        “언니도 이런 단어 쓰잖아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뭐가 문제인지는 말 안 해도 알고 있다.

       

        “이거…. 이런 건 계획에 없었어요. 뜻하지 않은 방식으로 몰렸네요.”

        “그래? 처음에는 네가 날 담그려고 한 건 줄 알았는데.”

        “제가 왜요?”

        “던전 탐색 실습에서 비슷한 짓거리 했잖아.”

        “아.”

       

        로즈마리는 말하기 전에 잠깐 뜸을 들였다.

       

        “그런 방식을 지금 쓰면 악수죠. 그땐 언니가 기억을 잊었다는 쪽에 무게를 두고 벌인 일이었거든요.”

        “그러면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담그려는 계획이었던 거네?”

        “아니, 아니, 아니…! 그, 그게 아니라……!”

        “농담이다. 마저 얘기하자.”

       

        머리가 아무리 좋아봤자 동생은 동생이다. 본관이 몇 번 놀려주기만 하면 알아서 좋은 표정을 지어준다.

       

        “건강검진의 핵심은 채혈이 되겠군.”

        “애초에 우리 둘은 일반적인 주삿바늘로는 채혈을 못 해요. 바늘이 살갗을 못 뚫는다는 걸 알면 그날로 의심을 사게 될 거라고요.”

        “재앙급처럼 피부를 만들 순 없나?”

        “그 정도로 말랑말랑했으면 절멸급이 아니죠. 인간의 도구에 상처를 입는다니, 불명예나 다름없어요.”

       

        그러면 뭐 어쩌자는 말인가.

       

        하물며 피를 뽑게 되더라도 문제가 생긴다. 나와 로즈마리 둘 다 피 성분에 수은이 들어가 있다. 주사를 걸러내는 방법을 이 세계 사람들도 아니 피에 수은이 섞여 있다는 걸 검사하는 사람이 알게 되기라도 한다면….

       

        그나마 내 피는 붉은 색에 가까워서 변명할 기회가 한 번 있다. 로즈마리처럼 아예 검은색인 게 문제지.

       

        “두 분 모두 고민하고 계시는군요.”

       

        뒤통수에서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틀어 목소리의 진원지를 살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푸른 눈을 지닌 중후한 인상의 남자였다. 저런 녀석은 본 적 없는데.

       

        “누구더라?”

        “지금은 잭 블랜튼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아, 그렇지. 네가 7석이군.”

        “예. 기술고문이신 2석을 만날 수 있어 황송할 따름입니다.”

       

        블랜튼 공작은 하인이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는 앞에 다과와 홍차를 내려놓으며 맞은편 의자에 걸터앉았다.

       

        7석은 4석과는 달리 절대 부드럽지 않다. 이 몸으로 로즈마리와는 언니 동생하며 지냈지만 , 블랜튼… 그러니까 ‘오를레이앙’이라는 본명을 지니고 있는 이 녀석과는 데면데면한 사이이기 때문이다.

       

        “이번 건강검진 건은 저희가 아닌 의료계에서 직접 주문을 넣은 것입니다. 흑사병 이후로 공중보건에 더욱 힘쓰겠다는 입장에서 나온 일로 보입니다.”

        “그 흑사병을 누가 일으켰더라.”

        “플레어 건은 2석께서 먼저 벌이신 일입니다.”

        “따지고 싶으면 하스펠트 공작가에 가서 하시지.”

        “그러게 누가 노예상에게 잡히라 하셨습니까?”

       

        나는 잠시 블랜튼을 노려보았다.

       

        “…내 멋대로 잡힌 것도 아니잖나.”

        “소신을 밝히겠습니다. 멋대로 잡히신 게 맞는 듯합니다.”

        “무슨 근거로?”

        “스태프 한 번을 휘두르면 태산을 날려버리시는 분인데 어떻게 열등한 것에게 어쩔 수 없이 잡히겠습니까? 의도가 다분하다고 볼 수밖에 없지요.”

        “그땐 기억을 잃어서 내가 마왕군이라는 것도 잊고 있었다.”

        “망자의 랜턴을 멋대로 사용하신 게 누구신데요.”

        “허어.”

       

        이대로 가다간 시간 낭비만 계속되겠군.

       

        “워밍업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죠. 안 그래도 기분이 안 좋으신 모양입니다.”

       

        이렇게 둘러앉고 있으니 이 몸 원주인의 머릿속에서 종군하던 시절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여신에 ‘항의’하기 위해 정령족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던 시절.

       

        준비를 완벽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상보다 정령계의 저항이 강해 문제가 생길 때면 동료들과 함께 아무 장소에서나 둘러앉고 긴급회의를 진행하곤 했다. 영 좋은 추억은… 아니다. 다 죽었으니까.

       

        “의료협회에서 무료 건강검진을 하겠다고 아카데미에 의뢰를 넣은 거지?”

       

        “그렇습니다.”

        “그걸 그 이사장 새끼가 승인해 준 거고.”

        “그렇다고 볼 수 있겠죠.”

       

        로즈마리는 콧방귀를 뀌며 다리를 꼬았다. 

       

        “그 녀석들, 담가버리자.”

        “…의협 인원 전체를 말입니까?”

        “역시 안 되나?”

        “어렵습니다.”

       

        얘 말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에테르가 틈만 나면 남의 머리를 캘리퍼스로 찍어대는 버릇이 누구에게 옮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니면 마왕군 애들은 전부 이러거나.

       

        “정 안 되면 핵심 인물 몇 명만이라도 조져버린다거나.”

        “그런다고 달라지겠습니까?”

        “아니면 채혈 금지법을 만들…. 이건 너무 나갔네.”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뾰족한 수가 없다. 

       

        지금부터 빡세게 연구하고 앓아눕는다. 기계라고는 해도 무리를 하면 열이 펄펄 끓게 된다. 그리고 이걸 로테가 보증해 주기만 한다면 건강검진이 있는 이번 주를 결석계로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내가 내린 최선의 선택이었다. 

       

        분명 그랬을 텐데.

       

        “어쩔 수 없지요. 제가 직접 움직여 보겠습니다.”

        “뭘 어떻게 해 보려고?”

        “제 능력 아시잖습니까. 주중에 귀족 회의가 있기 전까지 최대한 시간적 여유를 만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로즈마리는 으음, 하며 침음을 삼켰다. 홍차를 홀짝이며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인다.

       

        “좋아, 네 재량에 맡기도록 하지. 이번 일은 네가 적임인 것 같으니.”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대신…….”

        “대신 뭐?”

        “이번 일을 도와드리는 조건으로 2석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래,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얘네가 공짜로 뭘 해줄 리가 없지.

       

        블랜튼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가지만을 요구했다. 물리적으로 그렇게까지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지만, 여러모로 난감한 것이었다. 동시에 예상한 부탁이기도 했고.

       

        “…알겠다.”

       

        부탁을 안 들어줬다간 당장 아카데미에서 내쫓길 것 같아서 마지못해 수락했다. 블랜튼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로즈마리의 얼굴은 들판에 핀 튤립처럼 만개했다.

       

        “2석께선 언약이라도 귀하게 여기시는 걸로 압니다. 좋은 계약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알겠다니까.”

       

        그 대화를 끝으로 블랜튼은 어딘가로 가 버렸다. 이제 남은 건 우리 둘뿐이었다.

       

        탁자에 놓인 쿠키를 집어먹고만 있자 로즈마리가 째진 눈으로 쳐다봤다.

       

        “언니, 그렇게 먹으면 몸무게 검사할 때 문제가 생길 텐데요.”

       

        뭐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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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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