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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2

     

    우리는 제도 광장 거리에 들어서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여길 봐, 라스. 요즘은 길거리에서 마법사 지팡이를 파나 봐. 수준이 조악하네. 이딴 물품을 수입한 상인들을 조사해서 처벌해야겠어.”

     

    “축제용 아이들 장난감이에요.”

     

    “어머, 그러니?”

     

    아셀라가 멋쩍어하며 지팡이를 원위치했다.

     

    이런저런 가게를 구경하니 아셀라의 시선이 한 장소에 머물렀다. 분위기 좋아 보이는 카페였다.

     

    “궁금하세요?”

     

    “됐어. 보나 마나 네가 건강에 어쩌느니 하며 못 가게 할 거잖아.”

     

    “잠깐 있어 보세요.”

     

    나는 아셀라를 데리고 카페의 점상으로 가 물건을 몇 개 구매했다.

     

    그녀의 손에 하나를 쥐어줬다. 과일청으로 만든 막대사탕이었다.

     

    “대신 이거라도.”

     

    “애도 아니고. 언제까지 사탕만 줄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셀라는 그 자리에서 포장지를 벗겨 마스크 아래에서 쪽쪽 빨기 시작했다.

     

    그러실 줄 알았지.

     

    “슬슬 시간이야. 가자.”

     

    그리 말하고는 아셀라가 나를 끌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느새 해가 다 내려가 하늘에는 어둠이 가라앉았다.

     

     

    아셀라가 나를 데려간 곳은 한 성벽이었다.

     

    광장에서 조금 떨어져서 외진 곳이라 비교적 한산했다.

     

    슬슬 인파가 몰릴 시간이라 이동하기 힘들어지고 있었기에 아셀라의 선택은 탁월했다.

     

    “여기 경비대 궁병이 서는 자리 아닌가요? 보안이…”

     

    “미리 매수해놨어.”

     

    “아하.”

     

    역시 아셀라다. 준비성이 철저하다.

     

     

    …계단이 많다.

     

    반쯤 걸어 올라가다 숨을 돌릴 겸 뒤를 돌아보니 광장은 불꽃놀이를 보러 모여든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많은 이들이 연인이나 친구, 가족과 함께하며 평화로운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라스!”

     

    나를 부르는 목소리.

     

    먼저 성벽 위에 오른 아셀라는 어느새 변장을 벗고 무도회라도 나갈 기세였다.

     

    특유의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향해 손을 뻗는다.

     

    나는 그녀를 향해 마저 계단을 올랐다.

     

     

     

    ***

     

     

     

    성벽 위는 비유하자면, 두 사람만의 무도회장이었다.

     

    두 망루 사이의 짧은 성벽.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는 각도지만 위에서는 탁 트여 모두 내려다볼 수 있는 최고의 경치였다.

     

    라스가 돌아온다는 확신은 없었어도, 아셀라는 그와 함께 축제를 보고 싶다는 희망을 가지며 이 자리를 알아놨었다.

     

    쓸모없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열심히 연습했던 샌드위치도.

     

    라스가 무난하게 먹어준 정도면 성공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정신을 차리면 어느새 시간은 타협도 없이 성큼 코앞으로 다가왔다.

     

    아셀라가 그토록 기다렸던.

     

    한편으로는 심장이 너무나 두근거려서, 오지 않았으면 했던.

     

     

    ―퍼엉!

     

    심란한 마음을 다잡을 새도 없이 요란한 소리가 아셀라의 귓가를 메웠다.

     

    “불꽃이군요.”

     

    제도 광장에서 쏘아올려진 장인의 불꽃놀이가 형형색색으로 밤하늘을 싱그럽게 채운다.

     

     

    라스는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가슴이 묘하게 벅차올랐다. 성벽 아래의 제도민 누구나 들떠서 손뼉을 치는 걸 보면 누구나 같은 기분일 것이었다.

     

    아셀라도 이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그녀가 평소에 무엇을 느꼈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자신이 아는 황제 아셀라는, 정말 악령의 편린일 뿐이었는지.

     

    그렇다면 지금의 너는 무엇일까.

     

    라스는 확인하고 싶었다.

     

     

    그 질문을 위해, 라스는 다시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입을 뗐다.

     

    “어떠신가요, 황녀님. 불꽃놀이는 처음…”

     

    라스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턱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아셀라의 손가락.

     

    대조되듯, 자신의 뒤통수를 뽑아버릴 듯 꽉 쥔 격정적인 손길.

     

    아셀라의 입술이 라스의 그것과 겹쳤다.

     

    입술뿐만이 아니었다.

     

    ‘혀, 중설. glossa. 상태가 건조하거나 높은 산성도가 관측되면 xerostomia를 의심하여 설하선과 악하선, 이하선의 기능을 검사할 필요가 있다.’

     

    예고도 없이 이뤄진 두 사람의 첫 키스는 애정을 듬뿍 과시하는 연인들의 키스였다.

     

    아셀라는 라스라는 병을 자신의 애정으로 채워 넣으려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채워 넣은 만큼 흘러넘친 건 자신의 안에 받아들인다.

     

    이 행동으로 그가 자신의 것이 될 테니 언제까지고 탐하라고, 본능에 각인된 유전자가 끊임없이 강요한다.

     

    아셀라는 그 목소리를 거부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참았던 만큼 더, 1초가 아까운 사람처럼 무방비한 라스를 자신의 사랑으로 채워간다.

     

     

    …묘한 맛.

     

    어딘가 중독성 있는 은은한 약의 맛이다.

     

    그 안에 희미하게 퍼진 벌꿀과 과일의 향을 찾아내느라 더욱 열중하게 된다.

     

    그래서 첫 키스는 달콤하다고들 표현하는 걸까.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 같았던 키스는 톡.

     

    의욕이 너무 앞섰던 아셀라가 라스와 앞니를 부딪치며 정신을 차렸고.

     

    천천히 그에게서 어깨를 떨어트리며 끝을 맞이했다.

     

    “…하아.”

     

    부족했던 호흡을 몰아쉬는 두 사람.

     

    서로의 속눈썹까지 보이는 거리에서 마주친 두 눈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퍼엉!

     

    불꽃놀이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다.

    그저 그들이 소리를 듣지 못했을 뿐.

     

    “황녀님, 그…”

     

    “내가 먼저.”

     

    아셀라가 라스의 말을 끊었다.

     

    “내가 먼저 말할래.”

     

    아셀라는 라스의 몸에 반쯤 걸터 올라탄 채, 그의 어깨에 팔을 느슨하게 올리고 숨을 가다듬었다.

     

    …입술이 떨린다.

     

    항상 당당하게, 마음에 담은 단어는 서슴없이 내뱉었던 황녀 아셀라는 이 순간만큼은 곧장 숨을 음성으로 만들지 못했다.

     

    “후우.”

     

    아셀라가 그에게서 몸을 슬쩍 떨어트리며 심호흡을 했다.

     

     

    동시에.

     

    ‘이건.’

     

    라스의 상태창에 메시지가 표시됐다.

     

     

    ―퍼엉!

     

    불꽃이 터질 때마다 아셀라의 얼굴이 밝아지며 라스의 두 눈에 비추었다.

     

    마침내 그녀가 목소리를 냈다.

     

     

    “너를 좋아해, 라스.”

     

     

    [No. 056 악녀의 증오 7% → 0%]

    [엔딩이 삭제되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진 모르겠지만.”

     

     

    [No. 022 고립 14% → 0%]

    [엔딩이 삭제되었습니다]

     

     

    “네가 내 주치의여서도 아니고.”

     

     

    [No. 062 흑사병 23% → 0%]

    [엔딩이 삭제되었습니다]

     

     

    “네가 내 혼약자여서도 아냐.”

     

     

    [No. 101 마력폭주 11% → 0%]

    [엔딩이 삭제되었습니다]

     

     

    “좋아해.”

     

     

    ―퍼엉!

     

     

    폭죽 소리가 아무리 컸어도 라스가 아셀라의 말을 잘못 듣는 일은 없었다.

     

    가쁜 그녀의 숨소리조차 하나하나.

     

    빠트리지 않고 전부 들을 수 있었다.

     

     

     

    라스는 그제야 많은 것들이 이해가 되었다.

     

    이해가 되고, 또 시선이 바뀌었다.

     

    아셀라가 자신에게 베풀었던 것들.

     

    때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그녀의 행동들.

     

    이유 없이 올라가던 배드엔딩의 수치.

     

     

    추측은 하고 있었다.

     

    혹시, 혹시나.

     

    북부 미개척지에서 그녀가 자신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전제를 했을 때부터.

     

    그간 아셀라가 자신에게 신하로서 대가를 요구하기 위해 자비를 베푼 게 아니라.

     

    연인으로서 사랑받기 위해 관심을 끌려고 한 것이었다면.

     

    물론, 방법적으로는 초등학생 저학년이나 다름없는 미성숙하고 귀찮은 일이었지만.

     

    ‘꼭 귀찮기만 했던 것도 아니지.’

     

    자신이 위험했을 때 가장 먼저 달려왔던 사람도 아셀라였다.

     

    가장 걱정해줬던 사람도.

     

    누구보다 자신의 의학을 먼저 믿고 실력을 신뢰해준 사람도.

     

     

    지금의 아셀라는 자신이 알던 황제 아셀라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그 전제는.

     

    ‘…그게 맞을지도 모르겠어.’

     

    미래에서 라스는 아셀라에게 너무나 많이 시달렸다.

     

    처음에는 얼굴만 봐도 분노가 치밀었고, 중간에는 공포로 몸이 굳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기에.

     

    나중에는 마왕이나 끔찍한 괴물을 봐도 공략을 위해 몸이 먼저 반응하게끔 무감각하게 훈련만 했듯.

     

    아셀라도 그에게는 그저 그런 존재였다.

     

     

    하지만 이번 회귀에서는 주치의로서 그간 지켜본 기간이 있다.

     

    아셀라가 미쳐서 폭군이 됐던 이유도 알았다. 그 원인도 제거했다.

     

    그녀는 달라졌다.

     

    그리고 그런 아셀라와 지난 몇 년간 황실에서 보낸 시간이 끔찍했냐 하면.

     

    ‘즐거운 쪽이었지.’

     

    희망도 없이 마족과 싸우며 전장을 구르는 일보다는 보람찼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적어도, 이토록 강렬한 키스와 함께 당당하게 고백해오는 여자는 또 어디에도 없겠지.

     

    그 키스가 지금껏 잠들어있던 라스의 무언가를 깨웠다.

     

    라스는 다시 한 번 찬찬히 아셀라의 얼굴을 살폈다.

     

    …새삼 이렇게 아름다운 얼굴이었나, 생각하게 됐다.

     

    제국의 황제에 어울리는 기품과 아우라를 갖췄다.

     

    혼약자다.

     

    나를 애정하는.

     

    …정도가 과해서 종종 가둬놓으려고 하는 게 문제지만.

     

    ‘하지만 나는 어떻지.’

     

    라스는 추측과 분석은 하고 있었어도 아셀라가 신경 쓰였을 뿐.

     

    그게 진짜였을 때 어떻게 할지는 전혀 생각해 놓지 않았었다.

     

    ‘나는 아셀라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에 대해서는 느껴본 적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나 아셀라가 용기를 냈다.

     

    평소 안하무인이고 제멋대로인 그녀여도 용기는 용기다.

     

    대답은 제대로 해야 했다.

     

    ‘나는.’

     

    지금 라스가 아셀라에게 가진 감정은 비교적 긍정적이었다.

     

    그간 곁에서 지켜본 그녀의 노력과 변화를 알기에, 자신에 대한 애정을 알기에 호감이 더 컸다.

     

    “황녀님.”

     

    그곳부터 시작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라스가 입을 뗀 찰나.

     

     

    텁.

     

    아셀라가 손바닥으로 라스의 입을 막았다.

     

    “…아냐.”

     

    뭐가 아니라는 걸까. 라스는 의문이 들었다.

     

    “지금은 대답하지 마.”

     

    그렇게 명령하고는 스르륵, 아셀라가 힘없이 손을 내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라스의 가슴팍을 스친다.

     

    “황녀님?”

     

    “그런 식으로는 싫어.”

     

    표현은 서툴러도 인간을 파악하는 건 빠른 아셀라다.

     

    그녀는 라스의 태도를 눈치챘다.

     

    평소에는 알기 힘들지만, 라스에 대해 더 생각하고 관심을 가지게 된 지금은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라스의 반응이 너무 솔직하기도 했다.

     

    자신이 그를 사랑하는 만큼,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고백하자마자 곧장 알았다.

     

    동정이나 의무 따위로 사랑을 시작할 수는 없다.

     

    ‘…그럼 나를 좋아할 때까지.’

     

    나를, 이 아셀라 폰 뷔르템펠트를.

     

    원하고, 갈망하고, 갈증하고, 가지고 싶어서 안달이 나도록.

     

    너를 미치게 만들겠어.

     

    그 다음에 가지겠어.

     

    ‘너는 나를 고쳤어.’

     

    남은 일생도 평생 책임져야 해.

     

    나도 너를 책임지고 불타오르게 할 테니.

     

    매력 없는 여자 따위는 되지 않겠어.

     

    ‘초조해할 필요 없어.’

     

    아셀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그와 자신은 혼약 관계다.

     

    혼인을 하려면 자신이 성인이 될 때까지 몇 년 남았다.

     

    그 안에, 확실하게 그와 열렬한 관계를 성립시리키라.

     

    “일어나렴, 라스.”

     

    아셀라가 그의 몸에서 내려오며 넥타이를 잡아끌었다.

     

    라스가 이끌리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라스.”

     

    “네, 황녀님.”

     

    “고쳐줘서 고마워.”

     

    “별말씀을요.”

     

    두 사람이 마주 섰다.

     

    ―퍼엉!

     

    그 인사를 끝으로, 불꽃놀이도 종막을 맞이했다.

     

    광장에 가득했던 인파의 열기가 조금은 차분히 가라앉았다.

     

    방금까지 있었던 일이 꿈결 같다.

     

    하지만 확실히 꿈은 아니었다.

     

    ‘음?’

     

    라스는 문득, 상태창에 뜬 문구 하나에 어이가 없어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왜?”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43개 엔딩이 삭제되었습니다.]

     

    [No. 077 질투의 화신 13% → 15%]

     

     

    아셀라가 일으키는 다른 배드엔딩은 모두 삭제되었다.

     

    하지만 끝까지 살아남아 오히려 발생확률이 올라간 하나의 배드엔딩을 보고, 역시 아셀라는 아셀라라고 확인한 라스였다.

     

     

    “그러고 보면 약속했었지, 라스.”

     

    문득 생각난 듯 아셀라가 말했다.

     

    “나를 고치면 상을 주겠다고. 기아스의 맹약, 지금 이뤄줄까?”

     

    아셀라가 손지갑에서 편지를 꺼냈다.

     

    마법으로 보호되어 구김 하나 없다. 라스가 적었던 바로 그 봉투였다.

     

    라스는 그것을 보고 가볍게 미소 짓고는 아셀라의 손을 슬쩍 밀었다.

     

    “그리 급히 하실 일 있나요. 당분간은 미뤄두지요.”

     

    “그러니? 바로 원할 줄 알았는데 의외네.”

     

    실망한 아셀라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편지를 다시 집어넣었다.

     

    ‘조금만 기다려보자.’

     

    아셀라에게 아직 배드엔딩이 하나 남아있긴 했다. 라스의 입장에서는 사실 무시해도 될 수준이긴 했다.

     

    내의원도 내의원이고, 황제도 황제지만.

     

    그보다는 아셀라를 조금 더 지켜보고 싶어진 라스였다.

     

    다른 배드엔딩을 지울 계획을 세우기 전까지만이라도.

     

    “내려가서 조금만 돌아다니다 들어가자.”

     

    “좋지요.”

     

    “커피는 안 돼?”

     

    “절대 안 됩니다.”

     

    “그럼 네가 먹고 난 한 모금만 줘. 그 정도는 괜찮지?”

     

    “그건 뭐… 그러세요.”

     

    “아, 그 전에 한 번만 더.”

     

    아셀라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몸을 틀어 라스의 팔을 잡았다.

     

    그녀가 까치발을 들었다.

     

     

     

     

     

     

     

     

     

     

    축제가 끝나고, 신년이 시작된 날.

     

    용사가 발견됐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삽화는 쮸압님께서 작업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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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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