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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2

       ……그런 생각을, 내가 모를 줄 알고?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나와 완전히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내가 그에게 이런 모습을 취하도록 한 것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그를 똑바로 보기도 힘들기 때문이었다.

        

       눈부신 빛 덩어리.

        

       내 인생의 방향성을, 문자 그대로 새로 만들어 준 사람.

        

       ……이 사람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이미 이 사람의 생각을 읽고 있다.

        

       아니, 친구들에게도 비슷한 거짓말을 했으니 모두에게 미안해야 하는 걸까.

        

       이 사람이 나의 기억을 읽을 수 있는 것처럼, 나도 이 사람의 기억에 어느 정도 접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난 시간 동안 나는 이 사람의 기억 속을 거닐 시간이 많았다. 지금 이 사람이 그런 것처럼.

        

       모든 기억이 즐거운 기억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기억이 나쁜 기억이었다고 할 수도 없다.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우울해하고, 때로는 힘들어했지만,

        

       때로는 웃고, 때로는 즐거워하고, 때로는 기뻐했다.

        

       나의 단조로운 기억과는 다르게, 이 사람의 기억은 다채롭고 길어서, 모두 다 보지는 못했지만.

        

       왠지, 이 사람이 나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는 이유를 알 것 같은, 그런 기억들이었다.

        

       이기적이고 뒤틀린 성격인 나와는 다르게, 다정하고 성실했던 사람.

        

       그리고 그런 사람이었기에, 나에게 나의 삶을 다시 돌려주려고 하는 거겠지.

        

       ……하지만, 싫다.

        

       아니, 나의 삶이 싫다는 말은 아니었다. 내가 미워하고 증오하던 나의 삶을, 이 사람은 절대로 잃고 싶지 않은 삶으로 바꿔주었다.

        

       하지만, 그 삶에서 이 사람이 떠나는 것은 싫다.

        

       하늘이도, 소희도, 수아도. 그리고 나를 도와주는 모든 사람도. 나의 삶을 이루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존재를 나 삶에 연결해준 것은 이 사람이다.

        

       이 사람이 빠지면, 내 삶은 그만큼 의미가 없다.

        

       지금의 내 삶을 이루는 가장 큰 존재. 그 모든 것을 이어주는 끈이 사라지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으니까.

        

       그러니까, 안 돼.

        

       떠나지 마.

        

       여기서 나랑 오래오래 있자.

        

       제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

        

       내가 그의 옆에 조금 더 바싹 붙어 팔짱을 끼자, 그는 팔에 살짝 힘을 빼고 나의 손길을 받아들여 주었다. 비록 실체 없는 기억 속, 꿈속이나 다름없는 환상일 뿐이었지만, 그의 몸은 따듯했다. 내가 기댈 수 있을 만큼 컸다.

        

       이러고 있으면 마음이 진정되었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 사람도 그런 기분이 들까?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

        

       한참 동안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그가 문득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응?”

        

       나의 되물음에, 그는 자기 목 언저리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이거 말야.”

        

       정확히는, 목에 달린 천 부분을 만지고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셔츠였지만, 일상적으로 입는 셔츠와는 많이 다르게 생겼다. 사실 요즘 입었다가는 누가 코스프레 아니냐고 물어볼 법한, 고풍스러운 장식이 달린 옷이었으니까.

        

       여자가 입는 옷은 아니다. 오히려 따지자면 남자가 입는 옷이었다.

        

       드문드문 레이스가 달리고, 목에는 너무 길어서 레이스인지 스카프인지 구분하기 힘든 천이 하늘하늘 달려있었다. 그에 반해 바지는 별다른 장식이 없는 검은 바지.

        

       흔히 ‘르네상스’ 하면 떠올릴 법한 옷이다.

        

       그 시대를 다루는 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남주인공이 단추 몇 개 풀어두고 입을 법한 옷.

        

       “이거, 그, 중세…… 아니, 르네상스 시대라고 해야 하나? 그때쯤 입던 옷 아냐?”

        

       그 물음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건 완전히 내 취향용으로 입혀둔 거니까.

        

       “음…….”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있자, 그 사람은 잠깐 생각하다가,

        

       “혹시, 이거 네가 예전에 써둔 그 소설에서 따 온 거야?”

        

       하고,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질문을 했다.

        

       아주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한 질문이긴 했지만, 나는 순간적으로 머리에 있던 모든 것이 하얗게 변했다.

        

       “앗, 잠깐……!”

        

       내 머리가 하얗게 물드는 것과 동시에, 이 방도 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내 어깨를 잡더니 말했다.

        

       “잠깐만, 정신 좀 차려봐!”

        

       “헿……?”

        

       그 사람이 내 어깨를 잡고 흔들어서, 간신히 날아가려던 이성을 붙잡을 수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가 앉아있는 침대를 제외하고 나머지 부분이 이미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가 되어있었다.

        

       뭐, 실제로 우리가 앉아있는 곳까지 하얗게 물들었어도 이 사람에게 해가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괜히 분위기 망가질 뻔—

        

       —한 게 아니라, 망가졌구나.

        

       “그, 그그 그거…….”

        

       읽었어? 라고 물어보려다가, 그게 엄청 바보스러운 질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 당연히 읽어봤겠지. 이미 내 유서도 읽어봤을 텐데.

        

       ……하지만, 문제는 그거다. 내 유서는 그렇게 부끄러운 점이 없었다. 그저 어머님께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았을 뿐이고, 유서를 쓰는 내내 한없이 진심이었으니까.

        

       하지만 같은 서랍에 들어있는 소설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다르다.

        

       ……내가 살면서 바라던 것.

        

       그러니까 바꿔말하면 이루어질 리 없는 망상을 마구 써놓은 소설이었으니까.

        

       아니, 소설이라고 불러도 되는 물건일까?

        

       게다가 뒷부분은 그럭저럭 마음에 들어도, 앞부분은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오그라들 정도로 그렇고 그런 표현들이 많았다.

        

       아무리 남들과 떨어져 살던 나라도, 그런 것을 보이는 것이 부끄럽다는 생각은 할 수 있으니까. 내가 읽어본 책들과 비교하면……아니, 따지자면 비교할 수조차 없는 물건이었으니까.

        

       “으음…….”

        

       몹시 당황한 나의 얼굴을 보며, 그 사람이 조금 고민하는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당황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그, 너무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아마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읽어본 적 없을 테니까.”

        

       “……정말로?”

        

       다행히 친구 중에서 그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던 아이는 없었다.

        

       하지만 이 사람도 지금까지 그 소설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다가 물어본 거잖아.

        

       “어…… 아마도?”

        

       그리고 역시나, 돌아온 대답은 한없이 애매한 대답이었다.

        

       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런 나를 보고, 그 사람은 더더욱 당황한 듯, 나의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

        

       “그, 괜찮아. 살면서 소설 한 편 다 완성해보는 사람이 얼마나 적은데. 하나 다 완성해봤으니 너무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어. 뒤로 갈수록 훨씬 더 잘 썼고.”

        

       “아, 흐엫…….”

        

       그 말을 듣고, 나는 부끄러움에 몸서리쳤다.

        

       그 말은 즉, 앞부분도 다 읽어봤다는 소리가 아닌가.

        

       ……내가 왜 그 부분을 남겨뒀을까? 잘못 쓴 부분이라고 생각했으면 그냥 날려버렸으면 될 일인데. 진작에 찢어서 버렸어야 했다.

        

       그래도 뒷부분…… 그러니까, 완성된 소설 부분은 차마 버릴 수가 없었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어린 시절의 내가 스스로의 힘으로 일구어낸 이야기였다. 내 평생 ‘제대로 끝까지 한 것’을 꼽아보라면, 그거 하나뿐이다.

        

       그러니, 함부로 폐기할 수는 없었다.

        

       ……아니, 애초에 남이 읽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 더 타당하겠지만.

        

       그렇다. 혼자 사는 것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친구들을 집에 데려다 놓고도 생각도 못 했던 것이다.

        

       지금이라도 읽지 말아 달라고 부탁해야 하나?

        

       아냐, 그러다가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하면?

        

       아니, 그보다, ‘어…… 미안, 이미 읽어봤는데……’같은 말을 들어버리면?

        

       “음…… 그러니까,”

        

       한동안 웅크린 내 등을 토닥이던 그 사람이,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무 부끄러워할 거 없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읽은 것도 아닌데, 뭐.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야기를 완성한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잖아. 앞부분만 계속 쓰다가 포기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너처럼 끝까지 쓸 수 있었다는 게 대단한 거야.”

        

       “……정말?”

        

       나는 조심스럽게 그 사람을 올려다보며 되물었다. 그 사람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럼, 너도 이런 일을 했던 적 있어?”

        

       나는 매달리듯 물었다.

        

       “어…… 그게, 그러니까……”

        

       잠깐 고민하던 그 사람은, 짝, 하고 손뼉을 치면서 말했다.

        

       “아, 그래, 어린 시절에 사다 놓고 만들다 만 프라모델이 엄청나게 많거든? 나는 그런 것도 다 만들어보지 못했으니까……”

        

       “그거랑 그거는 다르잖아.”

        

       나는 그 사람의 말을 중간에서 잘랐다.

        

       “글은? 아니면 만화는? 노트에 망상 같은 거 적어본 적 있어?”

        

       “어, 으음…….”

        

       그 사람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

        

       나는 빤히 올려다보았다.

        

       오호라.

        

       그러니까,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아니다’라고 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있구나.”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 사람의 몸이 움찔 떨렸다.

        

       “어, 아, 아, 그래!”

        

       그리고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이제 아침 될 시간 아냐? 곧 있으면 일어날 시간이니까—”

        

       “헛소리 하지 마. 내가 알람 맞춰놓고 자는 거 알잖아.”

        

       나는 몸을 일으켜, 그 사람의 얼굴에 내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나도 보여줘.”

        

       “어…….”

        

       “보여줘. 불공평하잖아. 너만 보는 건.”

        

       “아, 그, 내가 이쪽으로 올 때 노트를 들고 왔던 것도 아니고……”

        

       기억이라면 읽을 수 있는데.

        

       ……뭐, 지금 그걸 밝힐 이유는 없겠지.

        

       “그럼 들려줘.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내가 그렇게 말을 바꾸자, 그 사람은 눈을 감은 채로 엄청나게 고민하더니, 결국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알았어…….”

        

       “히힛.”

        

       나는 그 사람에게 달려들어, 무릎을 베고 누웠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주저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공유하는 비밀이 하나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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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Q악역 영애가 되긴 싫어
Status: Completed Author:
I fell into the single-player game 'If You Wish' and decided to struggle to avoid becoming a villainess with a terrible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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