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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3

    네르는 국왕을 찾아 떠나는 베르그의 뒷모습을 보다, 왕녀인 리아 드레이고를 마주했다.

     

    당연하게도, 적대감이 끝없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왕녀가 제멋대로라는 이야기는 한때 들어봤던것도 같았는데, 직접 마주하니 그 파급력이 상당했다.

     

     

    진심으로 그 모든걸 베르그에게 이야기했던 것인지, 혹은 그를 골리려고 그런 말을 내뱉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건, 왕녀로서 적절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끝없이 뱉어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말투 속에서 베르그를 향한 무시도 살짝은 엿보이고 있었다.

     

     

    베르그가 평민이라 그럴까.

     

    왕녀인 그녀가 베르그를 상대하는데 있어 거리낌이 없어보였다.

     

    존중하고 있었더라면 그러한 말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바랄 수 없는 이야기였다.

     

    평민을 존중하는 왕녀라니.

     

    왕녀에게 평민은 그저 수발을 들어주던 존재였을 뿐일거다.

     

     

    하다못해 네르 또한 한때 평민이었던 베르그를 무시할 정도였으니.

     

     

     

    왕녀도 떠나가는 베르그의 뒷모습을 보다, 미소를 지으며 네르와 아르윈을 마주했다.

     

    네르도 어렵게 표정을 고치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짓궂었죠?”

     

    베르그가 떠나자 왕녀가 건네온 첫 번째 말이었다.

     

    “솔직한 말씀으로는 관계를 엿보고 싶어서 흔들어본 감도 있어요.”

     

    “…네?”

     

    “특이한 관계인만큼 궁금했거든요. 사이가 좋은지, 나쁜지 말이에요.”

     

    “…”

     

    “저도 언젠가는 누군가와 정략혼을 하게 될텐데…그 미래를 봐두고픈 마음도 있었고. 도발을 살짝 해보면 어떤 관계인지 감이 오잖아요?”

     

    “….”

     

     

    네르는 그 말이 그저 포장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까 베르그를 건드리며 누구보다 재밌어하던 왕녀였다.

     

    어쩌면 이미 피어난 적대감에 왕녀의 말이 그 무엇도 믿기지 않는걸지도 몰랐고.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면전에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대화가 아무리 이상한 방향으로 튈지언정, 주도를 하는 건 왕녀였다.

     

     

    네르와 아르윈의 표정을 살피던 왕녀가 이어간다.

     

    “그래도 확실히 저 인족에게 사랑은 받고 계신가봐요. 도발에 진심으로 불쾌해하시던데.”

     

    “…”

     

    “하지만 두 분은….음…”

     

    쓰으읍-하며 숨을 들이키던 리아 드레이고는 끝내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정확히 그녀들의 마음은 파악할 수 없다는 듯.

     

     

    “제 앞에 계신만큼 솔직하게 이야기 해보세요. 현재 어떤 상황인가요? 도움이 필요하세요?”

     

    “…”

     

    “…어쨌든 좋지 못한 방법으로 혼인을 올리게 되셨잖아요?”

     

    아르윈이 곁에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소리에 리아 드레이고의 시선이 옮겨간다.

     

     

    아르윈은 처음의 그 딱딱한 분위기를 유지한채로 리아에게 말했다.

     

    “도움을 필요로 하냐고 묻는 것 치고는, 꽤나 즐거워 보이세요.”

     

    “즐겁죠. 새로운 친구들이 생길 것 같은데.”

     

    “…친구는 이런 식으로 맺는게 아니에요.”

     

    “…”

     

     

    딱딱하게 대응하는 아르윈의 모습에 리아 드레이고도 점차 미소를 지워갔다.

     

    작은 실랑이와도 같은 기싸움이 펼쳐진다.

     

     

    하지만 리아 드레이고는 끝내 어깨를 으쓱이며 분위기를 풀어냈다.

     

    그녀는 차례로 네르와 아르윈을 훑더니 말했다.

     

     

    “도움을 드리고 싶다는 말은 정말이었어요.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아르윈이 그런 리아에게 이어나갔다.

     

    “도움은 괜찮아요.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

     

    “정말요?”

     

     

    리아 드레이고는 순식간에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 변화에 아르윈도 잠시 주춤하는 듯 보였다.

     

    네르의 꼬리는 점차 쳐지기 시작했다.

     

    아까전부터 익숙하지 않은 이 살벌한 분위기에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베르그가 곁에 없으니 더욱 겁만 날 뿐이었다.

     

     

    리아 드레이고는 특유의 눈빛을 빛내며 속삭였다.

     

     

    “…도움이 필요하실텐데.”

     

    “…”

     

    “…”

     

     

    네르와 아르윈이 의아해하는 동안, 리아 드레이고는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들에게 쏠린 시선을 다시한번 이렇게 쳐냈다.

     

    애초에 리아가 풍기던 분위기에 맞춰, 거리를 벌린 귀족들도 많았다.

     

     

    리아는 이런 상황에서도 한발자국씩 네르와 아르윈에게 다가섰다.

     

     

     

    “…인족의 일부다처제 폐지가 논의되고 있는건 알고 계신가요?”

     

    리아가 말했다.

     

     

    “………………….네?”

     

    네르는 그 말에 아주 작은 소리로 답했다.

     

    심장이 잠시 철렁했다.

     

    일부다처제의 폐지라니.

     

    그게 무슨 말일까.

     

    그리고 곧 이어 자신은 어떻게 되는지도 생각한다.

     

    베르그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 인족이 이야기하지 않았나보네요?”

     

    리아가 물었다.

     

    “하기야, 욕심 많은 인족이 누굴 놓아주고 싶진 않겠죠.”

     

     

    네르는 곁에 있는 아르윈을 살폈다.

     

    아르윈도 네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둘은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

     

     

    “그래도 두 분의 의견도 중요한거잖아요?”

     

     

    리아 드레이고가 이어간다.

     

    “한 명은 자유를 얻을 수 있는건데. 일부다처제로 엮이지 않게 될테니까.”

     

    “…”

     

    “…”

     

    리아가 미소를 짓는다.

     

    네르의 심장은 어느새 쿵쿵대며 떨리고 있었다.

     

    일부다처제의 폐지.

     

    곱씹을수록 새롭게 들리는 이야기였다.

     

     

    네르는 다시금 아르윈을 곁눈질로 보았다.

     

    베르그를 사랑할 수 없다던 아르윈이었다.

     

    자유를 원한다던 그녀였다.

     

    우정 수준으로 베르그와 친분을 유지하던 그녀였다.

     

     

    …일부다처제가 폐지 되면, 누가 베르그의 곁에 남게 될지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아르윈과 네르는 계속해서 눈을 마주하게 된다.

     

     

    네르는 생각했다.

     

    저 법이 통과하면 네르는 베르그의 사랑을 독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와 격일로 함께 자는게 아니라, 매일 같이 그의 곁에서 숙면을 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서로가 서로만 바라보는 삶이 이어질 것이다.

     

    더는 경쟁자도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건, 네르로서 좋게만 들리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도와 드릴까요?”

     

    생각이 이어지는 동안, 리아 드레이고가 앞에서 물었다.

     

     

     

    ****

     

     

    나는 사용인의 안내를 따라 외딴 방으로 향했다.

     

    자연스레 문이 열리고, 안에 이미 자리해 있던 국왕을 마주한다.

     

    익숙한 자세로 서류를 보고 있는 국왕.

     

    아담 형의 느낌을 전달받는다.

     

     

    지도자는 저래야한다는 걸 다시금 느낀다.

     

     

    “왔군, 베르그. 배는 좀 채웠고?”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큰 숨을 들이쉰 그가 이내 말한다.

     

    “만찬을 열었지만, 나는 꽤나 껄끄러워서 말이야. 눈치도 봐야하고. 그래서 여기서 좀 쉬고 있었지.”

     

    “국왕폐하도 눈치를 보십니까.”

     

    “국왕이니 더 눈치를 보게 되지. 난 이 자리를 잃기 싫거든. 수백년간 우리 가문을 통해 이어져온 왕위를 내 대에서 놓칠 순 없으니까.”

     

    “…”

     

     

    잠시 잡담을 이어가던 우리의 분위기는 빠르게 변화한다.

     

    나를 찾은 이유가 있을게 분명했으니 그 주제로 넘어가고 싶어졌다.

     

    “잡담은 싫어하는 성격인가?”

     

    그런 나를 보며 국왕이 피식 웃었다.

     

    이내 서류를 뒤적이며, 그가 한 번 더 뜸을 들였다.

     

    “원래대로였다면 이런 이야기를 꺼내진 않았을거야. 하지만…상황이 급변하고 있으니 나도 이럴 수 밖에 없어. 자네가 수도에 도착한지 이제 8일이 지났던가?”

     

    “…?”

     

     

    국왕이 작은 편지를 하나 책상에 툭 내려놓았다.

     

     

    “글자는 읽을 줄 아나, 베르그.”

     

     

    유창하게 읽지는 못하지만, 어렵지 않은 단어들이라면 이제는 읽을 수 있었다.

     

     

    그가 건네온 편지를 들어보며, 나는 속으로 글자를 읽어보았다.

     

    ‘마왕을 향한…’

     

    어려운 단어들은 없었기에 읽을 수 있는 간단한 편지.

     

     

    ‘총공격.’

     

     

    그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잠시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이었다.

     

     

    마왕을 향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일까.

     

    나도 모르게 질문처럼 내가 중얼거렸다.

     

    “…전쟁은…”

     

    “끝나겠지. 어떤식으로든.”

     

    국왕이 그런 내 말을 끝맺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편지를 보았다.

     

    “…”

     

    “용사 일행에서 커다란 변화가 생긴 듯 해.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더군. 뭐, 왕국도 이제는 한계에 다다르고 있고. 그러니 우리도 곧 출정준비를 할 거야.”

     

     

    용사 일행에 생긴 변화가 무엇일지 나는 어렵지 않게 직감할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편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국왕이 양손을 들어보이며 이어갔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널 부른게 아니야. 전쟁은 네 몫이 아니니까. 이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전쟁이 끝나면 찾아올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 불렀어.”

     

    “…”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니 나도 그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왜 원래대로였다면 이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거라 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최근에 나누었던 주제였으니 그랬나보다.

     

     

    “…제 의견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

     

    내가 반대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싶긴 했지만, 나를 부른 이유가 분명 있을거라 생각했다.

     

     

    국왕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가 웃는 모습은 처음보는 듯 했다.

     

     

    “난 자네와 아담이랑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싶어. 솔직한 이야기로, 홍염단 수준의 무력집단은 껄끄럽거든.”

     

    “…”

     

    “또 자네의 아내들은 귀족 아닌가. 이왕 자네도 수도에 있는거, 대화를 조금 더 나눠보자고. 자네도 납득하고 돌아갔으면 해.”

     

    그의 말투 속에서 굳이 내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는 느낌이 전달되어 온다.

     

    납득했으면 하는것이지, 필요로 하지는 않았을테니.

     

    그럼에도 나를 향한 배려에, 이런 자리를 마련한 듯 했다.

     

     

    짧은 기간 동안 느낀 사실이지만, 국왕은 의견을 공유하는걸 좋아하는 듯 했다.

     

     

    그가 다음 서류들을 준비했다.

     

    한 손에 다 잡히지 않을만큼의 많은 양이었다.

     

     

    “읽을 필요는 없어. 하지만 설명하자면, 이건 다른 가문들의 의견이야. 일부다처제의 폐지에 관한 질문을 이곳저곳에 던졌지. 백이면 백, 거의 다 찬성하더군.”

     

    “…”

     

    서류를 뒤적이던 그가 두 개의 편지를 찾아낸다.

     

     

    “이건 블랙우드에서 온 것이고, 이건 셀레브리엔에서 왔어. 둘 다, 폐지에 찬성하고 있고.”

     

    “…”

     

    나는 그럼에도 고개를 저었다.

     

    남들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맺은 맹세를 떼어놓고 생각하더라도, 네르와 아르윈, 둘 중 한명이라도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욕심이 있었다.

     

    추악하다면 추악하다고 해도 된다.

     

    이건 오로지 나의 욕심이었다.

     

    아내들도 내 곁에서 행복해질 수 있다 믿고 싶었다.

     

    이제는 우리의 희생이 아쉬워서 이러는게 아니었다.

     

    홍염단을 위한 생각에 억지를 부리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원했다.

     

     

    좋지 못한 기억들도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공유한 추억들이 더 많았으니.

     

     

    “…자네의 아내들도 그리 원할까?”

     

    그런 내게 국왕이 묻는다.

     

    “…네.”

     

    나는 희망을 담아 답했다.

     

    아내들이 나와의 이별은 이제 원하지 않을거라 믿고 싶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점차 흔들리고 있는 생각이긴 했다.

     

     

    “…”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국왕이 내게 말한다.

     

     

    “그래. 알겠어. 이제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음.”

     

    “…?”

     

    “아니지, 저기에 잠시 앉아있어봐.”

     

    국왕은 방의 구석에 있던 작은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얼마나 어려운 일이라고. 속내가 어떤지는 직접 들어보면 되는 이야기지.”

     

    이내 그가 큰 소리로 외친다.

     

    “겐드리!”

     

     

    밖에 서 있던 국왕의 보좌관이 들어선다.

     

    “예, 폐하. 부르셨습니까.”

     

    “칸막이 하나를 저 의자 곁에 세워둬. 그 이후에는…블랙우드 영애와 셀레브리엔 영애를 불러와.”

     

     

    “…”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런 나를 보며 국왕이 말했다.

     

    “들어보자고. 문제를 미뤄둬서 좋을 건 없으니.”

     

     

    나는 침을 삼키다…눈을 감았다.

     

    왜 별로 듣고 싶지 않을까.

     

    당당히 아내들도 내 곁에 있기를 원할거라 말했지만, 나는 이 곳을 떠나고 싶었다.

     

     

    “듣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말했다.

     

    하지만 국왕이 물어왔다.

     

    “무엇이 두렵다고. 아내들도 자네의 곁에 있길 원한다고 했으면서.”

     

    “…”

     

    “아니면, 아내들의 고통을 무시할 생각인가?”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숨을 전부 내쉴때까지 국왕은 조용히 기다렸다.

     

    끝내 그를 바라보는 내게 말한다.

     

     

    “저기 잠시 앉아있어, 베르그. 이 선택은 어쩌면 자네를 위한 일일지도 몰라. 비참한 혼인을 이어나가는건 누구도 경험할 필요가 없는 일이야.”

     

    ****

     

     

    네르는 국왕의 부름에 따라 아르윈과 걸음을 옮겼다.

     

    베르그와 대화를 하다 무언가 해야할 이야기가 생긴걸까?

     

    리아 드레이고의 곁을 떠나는게 무엇보다 좋았다.

     

     

    그럼에도 머리에 맴돌고 있는 생각은 있었다.

     

    왕녀의 말이 진실일까.

     

    정말 일부다처제에 대한 폐지가 논의되고 있을까.

     

     

    네르는 다시금 아르윈을 살폈다.

     

    아르윈 또한 네르를 보았다.

     

     

    먼 예전에,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적이 있었다.

     

    일부다처제가 없었다면 얼마나 좋았을지에 대한 이야기를.

     

    둘 다 고통받을 필요는 없지 않냐는 대화를 나누었었다.

     

     

    네르는 그 말에 공감을 했다.

     

    아르윈이 베르그의 곁에서 힘들지 않았으면 하는건 빈말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가 원했던 자유를 찾아갔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떠나서, 베르그의 곁에서 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녀들은 걸음을 옮기다, 한 방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내 시종들이 문을 열었고, 안에 앉아있던 국왕과 마주했다.

     

     

    네르와 아르윈은 짧게 묵례를 한 뒤, 방에 들어섰다.

     

     

    어두침침한 방. 삭막한 가구들.

     

    구석에 존재하는 작은 칸막이.

     

     

    네르는 눈을 굴리며 베르그를 찾았다.

     

    그는 보이지 않았다.

     

     

    “…베르그는…”

     

    아르윈의 속삭임에 국왕이 답했다.

     

    “방으로 돌려 보냈습니다. 충분히 소문은 잠재웠을테니.”

     

    “…”

     

     

    네르는 이조차도 짧은 아쉬움을 느꼈다.

     

    최근에는 베르그가 보이지 않으면 감정이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곁에 있어야지만 메마른 감정들도 생기를 찾는 것 같았고.

     

    당장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느낀 실망감에,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잠시 물어볼게 있어서 불렀습니다.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을 것 같군요.”

     

     

    네르는 그 순간부터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왜인지 그가 무엇을 물어올지 알 수 있었다.

     

    베르그도 혹시나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국왕과 나눈게 아니었을까.

     

     

    그녀는 침을 꼴깍 삼켰다.

     

    “강대한 블랙우드 가문과, 셀레브리엔 가문의 의견도 들어보고 싶어서 말입니다. 당사자이기도 하고. 뭐, 어떤 대답을 하실지는 대충 보이는 것 같긴 해도요.”

     

    국왕의 눈이 아르윈과 네르를 훑었다.

     

    “인족의 일부다처제를 금지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나는 칸막이 뒤에서 무릎에 팔꿈치를 댄 채, 가만히 아내들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곳에서 엿듣고 있는게 내키지는 않았으나, 이미 굴러가기 시작한 바퀴였다.

     

     

    나는 눈을 감았다.

     

    아내들과의 추억이 다 하나같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녀들을 위해 했던 노력들과, 전달했던 진심이 떠오른다.

     

    무엇 하나 마음을 담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그만큼 그녀들과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싶었다.

     

     

    부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시작된 관계였으나, 부단히 노력해왔다.

     

     

    나름 사이가 좋아지고 있다고 판단한 순간들도 많았다.

     

    하지만 우정 단계 이상은 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은 지울수가 없었다.

     

     

    그러니 지금, 마치 그에 대한 대답을 듣고자 하는 듯 했다.

     

    앞으로도 나와 살 수 있는지, 묻고 있는 듯 했다.

     

     

    “블랙우드 영애. 먼저 답해봐.”

     

    국왕이 네르에게 물었다.

     

     

    천천히 숨을 삼키기도 전에 들려오는 네르의 목소리.

     

     

     

    “………폐지해주세요.”

     

    -쿵.

     

    심장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차가운 목소리는 평소에 내가 듣지 못하던 목소리였다.

     

    표정이 보이지 않아서 그럴까. 한 없이 매정한 느낌마저도 든다.

     

     

    어느새 주먹은 너무나도 강하게 말려 있었다.

     

    심장이 아프도록 떨린다.

     

    네르가 이어갔다.

     

    “…한 명은 자유를 얻는 거잖아요?”

     

     

    구속되는 느낌이 싫다던 네르.

     

    그 때문에 반지도 한 동안은 싫어했고, 산책을 하는 중 내가 찾아가는 것도 껄끄러워했다.

     

    그 이야기를 지금 하는 걸까.

     

     

    “아르윈님은…”

     

    국왕의 질문에, 아르윈도 답한다.

     

    “…폐지해주세요.”

     

    그녀는 별다른 말을 추가하지 않았다.

     

    짧고 간결하게, 제 의견을 피력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왜인지 그 순간, 맥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은 고뇌해주길 바랐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둘 다, 다가온 기회를 놓치기 싫은것처럼 대답을 쉽게 뱉어냈다.

     

    목소리에서는 간절함마저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어렵게 붙잡고 있던 끈을 놓아주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도 부족했던 걸까.

     

    정말 우리의 차이는 메꿀 수 없던 걸까.

     

     

    아무리 좋게 생각해보려해도 말처럼 되지 않는다.

     

     

    일부다처제라는 문화가 싫어서.

     

    내게 홀로 사랑 받고 싶어서.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서.

     

    등등…

     

    좋게 생각하려 머리를 굴려보아도 모든게 어색하게만 느껴지는 변명들이었다.

     

     

    그저, 자유를 얻고 싶어서.

     

    내 곁을 떠나고 싶어서.

     

    이 두 가지의 경우가 그 무엇보다 설득력 있게 들려왔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어쩌면 애당초 알고 있던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이걸 예상했기에 국왕에게 듣고 싶지 않다고 말했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과, 마주하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것도 안다.

     

    지금은 마주하기 싫었던 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정말 지금이 적기인걸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기도 했다.

     

    우정 단계로 머물고 있을 때…누구 하나 떠나보내야하는 걸지도.

     

     

    네르는 운명의 상대가 있다고 했던가.

     

    아르윈은 단명종을 사랑할 수 없다 했고.

     

     

    외면하려던 문제였으나, 그 문제들이 이제는 내 발목을 잡는다.

       

    이별은 싫다. 싫지만…둘 다 내 곁에 있기를 원하지 않아한다면, 한 명은 보내주는게 옳은 일일 것이다.

     

    그녀들을 위한다면 나의 욕심은 내려놓아야 하는 걸지도 몰랐다.

     

     

    나는 어둠속에서 다시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나 이별은 원치 않은 순간에 다가왔다.

     

    이조차도 갑작스럽기는 마찬가지지만…어쩌면 지난 이별들 보다는 훨씬 자비로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마음을 다잡을 시간이 주어진걸지도 몰랐다.

     

    국왕도 사실 내 의견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현실을 더 쉽게 마주하도록 도와준걸지도 모른다.

     

    어떤 식으로 보면 이걸 배려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홀로, 한 명과의 이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게 네르일지, 아르윈일지는 나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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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IW 섞일 수 없는 이종족 아내들
Score 4.3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Polygamy is abolished.

We don’t have to force ourselves to live together any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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