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비아는 겁을 먹고 있었다.
그 사실이 새삼 내게 신선한 충격을 전해 주었다.
이제 와서 실비아 역시 어쩔 수 없는 가녀린 여자임을 깨달았다는, 그런 뻔하고 유치한 말은 아니었다.
실비아가 여자라는 사실은 거의 모든 밤마다 확실하게 내 몸 곳곳에 새겨진 데다가, 그런데도 여전히 나 따위를 우습게 압도하는 무력을 지녔다는 사실 역시 날마다 확실히 알 수 있었으니까.
내 충격은 내가 실비아를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새삼 깨닫게 된 것에서부터 기인했다.
마치 내가 나도 모르는 새 피아를 필요할 때만 찾는 편리한 존재라고 생각해 왔던 것처럼, 실비아 역시 막연히 강하고 든든한 버팀목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
그 어떤 말도 감히 전해줄 엄두가 나질 않았다.
섣불리 위로를 전하기엔 그동안 실비아를 무적 초인쯤으로 판단해온 내 착각이 너무나 무례했고, 그녀의 버팀목이 되어주겠다 함부로 장담하기엔 내 능력이 너무 보잘것없었기 때문이었다.
숨조차 함부로 쉴 수 없을 만큼 내 가슴을 짓누르는 죄책감에 압도당한 채, 그저 멍하니 실비아를 바라보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두껍게 쌓인 먼지처럼 조용하지만 쉬지 않고 이 작은 오두막을 뒤덮어가는 이 무거운 침묵 속에서, 작게 숨을 몰아쉬는 실비아의 서글픈 흐느낌만이 날카롭게 공기를 베어 가르며 내 고막을 두드렸다.
마음이 아팠다.
마냥 강하기만 할 줄 알았던 그녀가 무너져서 아픈 것이 아니라, 그녀가 이미 한참 전부터 위태롭게 서 있다는 걸 전혀 알아주지 못한 내가 너무나 한심해서,
아팠다.
“…실비아.”
염치도 없이 신음하는 심장의 통증에, 나는 쥐어짜듯 간신히 그녀의 이름만을 소리 내 불렀다.
그것은 실비아의 반응을 보기 위한 부름이 아닌, 탄식 혹은 울음소리에 더 가까운 말이었다.
“…하,”
나는 문득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지금껏 그녀에게 지껄여온 아무래도 좋을 수많은 헛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사랑 같은 소리하고 있네.
같이 살고 싶다니, 지랄하고 앉아 있네.
집착한다고? 변태라고? 내 몸을 탐한다고?
웃기고 앉아있네.
실비아가 무엇에 아파하는지, 무얼 두려워하고 있었는지,
왜 그렇게 집요하게 나와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했는지,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는 나야말로 실비아의 몸만 탐해온 변태 아닌가.
실비아는 강하니까,
그 사실에 단 한 번도 의문을 품지 않은 채 실비아가 아파하는 것도 몰랐다.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강한 실비아가 어련히 알아서 이겨내겠거니 생각한 건지, 애초부터 관심도 없던 건지,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왜 실비아가 그렇게나 불안에 떨며 나를 묶어두려 했는지 알만했다.
내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여자인 실비아는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리라.
내가 뱉는 근사한 말들이 얼마나 공허했는지 말이다.
“…읏,”
나는 정말 실비아를 사랑하긴 한 걸까.
나는 천천히 떨리는 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입술을 꾹 눌러 찌르는 송곳니에 조금씩 묻어나오던 피가 이내 왈칵 쏟아지며 입술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실비아는 그제서야 간신히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애써 밝은 말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 미안, 내가 이상한 소리를 했지?”
“…”
“신경 쓰지 마, 그냥 이상한 생각이 자꾸 들어서 조금 혼란스러웠던 것뿐이야.”
“…”
“아무래도 마왕을 잡으러 다시 간다고 생각하니까 조금 긴장한 것 같아. 나도 참, 용사씩이나 되는 경력이 있으면서 이런 아마추어 같은 짓을 하다니…”
“… 실비아.”
실비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이내 곧 두 눈을 크게 부라리며 소리쳤다.
“애쉬! 입술에 피나!”
“… 알아요.”
“입술 깨물었어? 고기 먹다가 잘못 씹기라도 한 거야? 세상에, 잠깐만…”
실비아는 황급히 무릎으로 걸어 내게 다가와 소매 끝으로 내 입술을 꾹 짓눌렀다.
떨리는 그녀의 억센 손가락이 지혈을 위해 입술을 아플 정도로 짓눌렀다.
“꽤 세게 깨물었네,”
그녀의 손가락에서 피어오른 옅은 황금빛 안개가 부드럽게 번쩍였다.
이내 곧 입술에 따듯한 온기가 번져 나갔다.
이미 몇번이나 받아온지라 이젠 익숙해진 신성력을 이용한 치료였다.
잠시 후 안개가 걷히자 실비아는 내 입술을 부드럽게 놓아주며 말했다.
“미안해. 내가 바보 같은 소리를 해서 괜히 신경 쓰게 했나보다.”
“… 하지마…”
“응?”
“사과… 하지 마, 왜 사과해… 왜 실비아가.”
“… 애쉬?”
“미안해, 미안해요.”
나는 고개를 숙였다.
염치없는 탁한 눈물이 툭, 바닥에 떨어졌다.
“애쉬,”
“미안해요… 정말, 내가… 나는 전혀 몰랐어, 실비아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라곤…”
무섭지 않을 리가 없다.
제아무리 실비아라 하더라도, 제아무리 용사라고 해도.
성공을 위해 목숨까지 버려가며 자신을 지지했던 동료들이 쓰러진 곳을 따라 걷는 것이 괜찮을 리 없었다.
자신의 과오와 실패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이 쉬울 리가 없었다.
자신이 망쳐버린 것을 인정하는 게 그렇게 간단할 리 없었다.
기대고 싶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애쉬…”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실비아는 분명히 내게 자신의 두려움을 전했다.
내가 마왕을 토벌하자 했을 때 분명히 그녀는 자기 입으로, 언어로, 말로서 내게 전했었다.
실패를 마주하는 것이 두렵다고, 끝없이 희생만 해온 삶에 질렸다고.
나를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다고.
그런데 나는 거기에다 대고 무슨 말을 했었던가.
결혼하자.
모든 게 다 끝나면 같이 결혼하자고…
하하,
미친놈.
능력도 안 되는 주제에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마치 로맨틱한 이야기 속 주인공인 것처럼 굴었다.
병신.
병신도 이런 병신이 없다.
추했다.
참, 못났다.
이런 머저리를 위해 끝내 고개를 끄덕인 실비아가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만,”
실비아는 부드럽게 내 머리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애쉬, 또 자학하고 있지?”
“…”
실비아는 천천히 양손으로 내 등을 쓸어내리듯 매만지며 토닥였다.
그 거칠고 억센 손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따듯한 손길이 등에서부터 온몸으로 천천히 번져나갔다.
“우리가 같이 산 날도 이젠 짧다고 보기 힘들어.”
실비아는 조곤조곤 부드럽고 편안한 목소리를 내었다.
조금 전까지 흐느끼던 탓에 여전히 물기가 어렴풋이 배어있는 목소리는 따듯함과 구슬픔이 조화롭게 뒤섞여 있었다.
“아니, 짧다고 말한다면 짧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겐 길었어. 지난 몇 년을 전부 보상하고도 남을 만큼.”
“… 윽,”
“그래서 이제는 애쉬가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어. 분명 또 자학하고 있지? 내가 실비아를 몰라주다니, 하면서.”
내 등을 쓸어주던 실비아의 손이 우뚝 멈추더니, 천천히 힘이 들어갔다.
그리곤 곧 내 등을 꼭 끌어안아 주었다.
이미 셀 수도 없이 해온 포옹.
나는 마치 자석처럼 그녀의 품속 빈 곳에 딱 맞아들어가듯 몸을 겹쳤다.
실비아는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지 마. 애쉬. 말 하지 마.”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마. 어차피 애쉬 혼자 스스로 욕하는 말만 할 게 뻔하니까.”
“…”
“애쉬라고 해도 애쉬를 욕하는 건 내가 듣기 싫거든.”
“… 실비아.”
“미안해, 불안한 모습 보여서. 내가 잘못했어.”
“아니에요, 실비아의 잘,”
“닥쳐. 내 잘못이야.”
“…”
실비아는 내 허리가 으스러지도록 꼭 끌어안았다.
“나는 용사야. 애쉬가 부탁해서 다시 용사가 되었어.”
“…”
“용사로서, 나는 세상을 지킬 거야.”
그리고는 천천히 나를 자신의 품에서 떨어트리더니, 내 얼굴을 부드럽게 붙잡고 마주 보았다.
물기로 인해 잔뜩 번진 시야 너머로, 아름다운 백금색 실크 사이에 빛나는 빨간 루비 두 개가 반짝거렸다.
여신께서 누우시는 침실의 천막처럼 아름답게 하늘거리는 백금의 장막이 흔들리면 황홀할 만큼 달콤한 실비아의 살냄새가 피어올랐다.
장막이, 루비가, 천천히 내 시야를 덮을 듯 가까이 다가왔다.
실비아의 향기가 콧속을 잔뜩 채웠다.
입술이 겹치기 직전, 살짝 멈춘 실비아는 내게 나지막이 속삭여주었다.
“애쉬가 내 세상이야.”
*
가벼운 입맞춤 후, 천천히 물기가 개이던 내 눈에 가장 먼저 비친 것은 그녀의 입술에 가득 묻은 내 피였다.
나는 뒤늦게 손바닥으로 입술을 훓듯이 닦아내었다.
실비아는 멍하니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말했다.
“아, 아니야. 실비아랑 입 맞춘 게 싫어서 닦은 게 아니라…”
“…후후, 알아. 피 닦은 거잖아.”
실비아는 손가락으로 자기 입술에 묻은 피를 살짝 찍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술에 묻은 피를 혀로 날름 훔쳤다.
“…”
“왜? 내가 애쉬의 피를 더럽다고 생각할 줄 알았어?”
“아, 아니…”
나는 천천히 입술에 묻은 피를 마저 닦아 내었다.
그 순간 내 손바닥은 나의 입술, 아니 입 주변에서부터 턱까지 느껴지는 낯선 촉감을 감지했다.
“…어,”
“왜 그래?”
“…실비아, 나 수염 났어?”
“났지. 몰랐어?”
“언제부터…?”
“우리 다시 만났을 때부터 조금 있었고, 지금 정도로 있던 건 우리 훈련하고 나고부터였을걸?”
“…”
나는 깜짝 놀라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물론 살면서 처음으로 수염이 났기 때문에 놀란 것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에 비해 수염이 잘 자라지 않는 편이긴 했지만, 놔두면 당연하게도 수염은 자라나고 실비아의 오두막에서 살 때는 실비아가 주었던 단검을 이용해 틈틈이 면도도 했었다.
그러나 녹색의 여인을 만난 후로는 한 번도 면도하지 않았다.
한 달을 넘도록 혼자 있었던 데다가 내가 지은 이 보잘 것 없는 나무 창고에는 거울, 혹은 거울로 쓸만한 물건이 전혀 없었다.
호숫가에서 씻을 때도 항상 첨벙거리며 수영하면 했었지 가만히 수면을 들여다보지는 않았었다.
덕분에 수염에 관한 건 까맣게 잊고 있었다.
“…말을 좀 해 주지.”
“왜?”
“내가 싫어, 나는 수염이 좀 멋없게 나는 편이거든.”
“나름 귀여운데?”
“실비아는 수염 좋아해?”
“아니,”
“… 그럼, 말을 해주지.”
“멋으로 기르나 싶었지.”
“…”
“헤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호수.”
“면도하려고?”
실비아의 말대로 면도하러 일어나는 것이었지만, 그것뿐 만은 아니었다.
피도 닦아야 하고, 벌겋게 부은 눈도 씻어내고 싶었다.
무엇보다, 이 한심한 내 모습을 멀끔히 씻어내 버리고 싶었다.
수염은 마침 좋은 핑곗거리였다.
지금까지 나의 아둔함과 멍청함을 모조리 수염에 담아 깎아 내버리면 조금 더 현명한 눈으로 세상과 실비아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애초부터 나는 옹졸하게 자라는 내 수염을 싫어했다.
내 한심한 모습을 투영해 버리기에 딱 걸맞은 희생양인 셈이다.
“피도 닦아야 하니까…”
“면도하고 나면 다시 훈련할까?”
“응, 한 십 분 정도 있다가 나와줘.”
“응, 알았어.”
입을 가린 채 발걸음을 옮기던 나는 문득 문 앞에서 멈추어 섰다.
그리곤 천천히 뒤돌아보며 말했다.
“고마워. 실비아.”
실비아는 웃으며 답했다.
“사랑해, 애쉬.”
*
애쉬가 나가자, 피아는 멀뚱히 앉아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행위를 멈추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피아의 눈에는 명백히 실비아가 애쉬를 탐하는 모습이었지만, 애쉬 역시 실비아가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전혀 보지 못한 채 두 사람만의 세계로 쉽게 끌려들어 가곤 했다.
조금 전만 해도 그랬다.
피아가 옆에서 보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애쉬는 마치 그 사실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실비아와 입을 맞추었다.
물론 조금이나마 이해는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고, 실비아는 피아를 전혀 보지 못하는 데다, 두 사람 사이엔 끈끈한 유대감과 더불어, 오직 서로만이 메꿀 수 있는 커다랗고 치명적인 빈틈이 존재해 끊임없이 서로를 갈망하니 말이다.
하지만 이해를 할 수 있다는 것과, 견딜 수 있다는 것은 차이가 있었다.
보기 좋은 애틋함도 어느 정도지, 밤마다 두 사람의 짐승 같은 교미를 계속 봐야 하는 건 피아에겐 몹시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그럴 때마다 자꾸만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다.
피아는 한숨을 내쉬며 먼저 나간 애쉬를 따라 나서기 위해 일어났다.
그때였다.
“피아라고 했나?”
잘못 들었나?
잘못 들었겠지.
피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애쉬 외에는 자신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건 당연한 추론이었다.
“거기 있지?”
“…어?”
피아는 화들짝 놀라며 천천히 목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돌아보았다.
“얘기 좀 할까?”
그곳엔 피아를 똑바로 바라보는 새빨간 두 개의 눈동자가 있었다.
조금 전 까지 오두막을 감싸던 달콤하면서도 씁쓸했던 분위기는 단숨에 날아갔다.
“피… 피아가 보여?”
“…”
실비아는 소름이 끼치는 미소를 지었다.
.
메리 크리스마스.
방구석에서 글쓰며 맞이하는 크리스마스.
… 하, 어디서부터 인생을 잘못 살았던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