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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3

     

    축제 기간은 황명으로 정해진 휴식 기간이기도 해서, 대부분 궁의 기능도 최소한으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승계전도 멈추는 건 아니기에 아셀라가 긴장을 놓고 펑펑 놀아대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남는 시간에도 책을 읽거나 귀족을 관리하는 등 참 바쁘게 지내신다.

     

    그래도 조금은 마음에 여유가 있었는지 평소보다 휴식 시간을 길게 가졌다.

     

    “막스, 잡아 와.”

     

    정원에서 마법 재료용 도마뱀을 풀어다가는 막스가 헥헥대며 쫓는 모습을 보고는 즐거워했다.

     

    정서 교육상 어떨까 싶은데. 막스와 아셀라에게 둘 다.

     

    남을 괴롭히는 가학적인 취향인 점은 역시 악녀라고 할까, 아셀라답다.

     

    “자고 일어나니 저 도마뱀이 내 논문을 찢어놨단 말이야.”

     

    “논문이요?”

     

    “시공간 마법진 구축식에 대한 이론. 용사 아카데미의 교수가 기고해보라고 해서 심심풀이로 쓰고 있었어. 박사 학위도 받을 수 있다나.”

     

    “학위는 과정 수료도 필요하실 텐데요. 최소 2년은 다니셔야 하지 않나요.”

     

    “그렇지. 그런 시시한 장소에 갈 생각은 없어. 제국의 황제가 아카데미를 2년이나 다닐 시간이 어디 있겠어. 그 정도는 융통성 있게 주지 않겠니.”

     

    나중에 자기가 황제가 됐을 때 패스된 논문을 빌미로 학위만 따올 생각인가 보다.

     

    제국의 황제 정도면 그래도 되긴 하지.

    미래를 위해 큰 그림도 그리는 아셀라였다.

     

    “막스, 얘! 잡아오랬지 누가 놀아주랬어.”

     

    순둥한 성격인 막스는 어느새 도마뱀을 붙잡고 혓바닥으로 배를 핥아주고 있었다.

     

    이 정도는 귀여운 장난으로 봐도 되겠지. 적어도 내가 위험에 시달리며 도망쳐다니진 않으니까.

     

    아셀라가 사람을 맹수 우리에 가두고 쫓기게 하며 즐기는 장면은 본 적 없긴 하지만, 미래에서는 충분히 그랬을 것 같다.

     

    “왜 그러니?”

     

    그런 상상을 하며 아셀라를 너무 빤히 쳐다봤나 보다.

     

    아셀라가 악마 같이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공자도 같이 놀고 싶구나.”

     

    “아뇨, 사양하겠습니다.”

     

    그녀가 내 체력을 신경 쓰고 있던 점은 알고 있었기에 즉시 거절했다. 대낮부터 땀으로 범벅되고 싶진 않았다.

     

    아셀라가 슥, 내 손목을 잡아 자기 목을 감싼 드레스의 초커 부분에 가져갔다.

     

    슥, 내 검지가 그녀의 초커에 걸렸다.

     

    꼭 개의 목줄 고리를 쥔 것 같이.

     

    “놀아 봐.”

     

    “뭘요.”

     

    “멍.”

     

    아셀라가 음흉하게 웃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흠.

     

    내가 생각한 거랑 역할이 반대네.

     

    “황녀님, 보는 눈도 있는데 궁의 주인으로서 체통을 지키셔야…”

     

    “어머, 시종과 기사가 주군의 사적인 시간에 있었던 일을 입 밖으로 내면 그것만으로 사형감이란 걸 모르니?”

     

    “그야 그런데요.”

     

    “놀아 봐.”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고백 이후로 묘하게 적극적인 태도가 늘어난 아셀라였다.

     

    ‘깊게 의미 부여하지 말자.’

     

    어차피 이제 신경 쓸 배드엔딩도 없고, 나도 별생각 없이 마음 가는 대로 아셀라를 대하기로 했다.

     

    “흠… 손.”

     

    “멍.”

     

    내 손바닥 위에 자기 손을 다소곳하게 내려놓는 아셀라.

     

    그러기도 잠시, 손가락 끝으로 내 손 위를 살살 간지럽혀온다.

     

    살짝 전기가 오른 느낌이었다.

     

    “즐거워 보이네, 라스 고트베르크.”

     

    아셀라는 코웃음을 치고는 고개를 탁 치켜들었다.

     

    “어땠니? 제국의 황녀를 개처럼 다뤄본 감상은.”

     

    “그 표현을 밖에서 그대로 쓰시면 제 목이 몇 개가 있어도 부족해지겠는데요.”

     

    “걱정 마. 그 죄를 물을 사람도 나니까.”

     

    아셀라는 당당하게 대답하고는 막스에게 간식거리를 던져주었다.

     

     

     

    ***

     

     

     

    “마력회로는 정상입니다. 모처럼 시간 여유가 있으니 정시에 취침하시죠. 숙면을 돕는 호르몬이 분비되어 컨디션이 더 좋아지실 거에요.”

     

    “호르몬 말이지. 그게 그렇게 좋아?”

     

    “그럼요. 피부도 탱탱해집니다. 제 고향엔 미녀는 잠이 많다는 속담도 있어요.”

     

    “아, 그래서 라우가가 잠이 많구나. 피부… 중요하지.”

     

    아셀라가 내 말에 집중했다.

     

    “신년부터 또 바빠질 테니 지금 자야겠네, 알았어. 네 말대로 할게.”

     

    밤 진찰도 일과대로. 나이트가운으로 갈아입은 아셀라의 방에서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함께한다.

     

    이렇게 보면 그간 참 징글징글하게 붙어있었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아, 진통제는 황녀님 방에서 폐기할 겁니다. 이제 저만한 강도의 약은 필요도 없고, 괜히 오래된 약을 먹었다가 더 탈 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 으음… 어쩐지 불안해.”

     

    조금 안절부절한 눈치의 아셀라.

     

    “마음은 이해 갑니다만, 이전 같은 발작은 앞으로 없으실 테니 괜찮아요. 여차해도 제가 어지간한 상비약은 늘 가지고 있고요.”

     

    “응, 그렇지. 내 몸 상태는 네가 가장 잘 아니까.”

     

    “주치의 아니겠습니까.”

     

    “너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아셀라가 한 손으론 턱을 괸 채로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혼약자니까.”

     

    “하하, 그 말씀은 살짝 무서운데요.”

     

    “겨우 이 정도로? 앞으로는 더 긴장해야겠구나.”

     

    이 황녀님은 어디까지 파고들어 오려고 그러시나.

     

    나도 조금 궁금해졌기에 아셀라를 향해 슥 고개를 내밀었다.

     

    “이래봬도 황녀님 앞에서는 항상 긴장을 풀지 않고 있습니다. 황실의 핏줄께 무례를 저리를 순 없지요.”

     

    내가 머리를 들이미니 이번엔 반대로 아셀라가 슬쩍 몸을 뒤로 뺐다.

     

    “…어쩐지 말이랑 행동이 반대 같은데.”

     

    “그렇게 보이신다면 황녀님의 위용에 영향받은 덕이겠지요. 어떻게, 오늘 밤도 찬란한 후광의 편린이라도 쬘 수 있을지요.”

     

    “크흠, 그거 말인데.”

     

    아셀라가 헛기침을 하고는 시선을 피했다.

     

    “당분간 너는 네 방에서 자.”

     

    “뭐, 그게 당연하긴 하지요. 지금까지는 황녀님이 발작하실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함께 했습니다만.”

     

    내가 슬쩍 덧붙였다.

     

    “애착인형은 필요 없으세요? 사실 지난 생일선물에 들어있었…”

     

    “시끄러.”

     

    아셀라의 손이 짝, 섬광같은 속도로 내 손등을 치고 사라졌다.

     

    “이 나이 먹고 무슨 인형을… 아니, 필요하긴 한데…”

     

    아셀라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뭐라 웅얼댔다.

     

    “지금은… 안 돼. 못 참아.”

     

     

     

    ***

     

     

     

    뭐, 그렇게 무던하게 흘러가던 축제 기간이었다.

     

    헤이케도 별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고 대륙에 정치적으로 큰 사건도 없었다.

     

    환자야 시기를 가리지 않는 법이기에 내의원은 상시 가동했지만 그 점만 빼면 나도 비교적 반쯤 휴가처럼 즐길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아셀라의 태도가 변한 게 컸고.

     

    축제는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제국민들은 신년을 맞으며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황실을 뒤집어놓을 정도의 큰 사건이 발생한 것도 그 날이었다.

     

    “급보입니다.”

     

    월광궁 기사단장의 보고였다. 이야기를 들은 아셀라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폐하께는?”

     

    “아직입니다만 시간문제입니다.”

     

    또각, 아셀라가 손톱을 깨물었다. 저 습관이 나올 정도면 정말 심한 사안이라는 의미다.

     

    “선수를 쳐야 해. 바로 전서구를 날려.”

     

    마침 월광궁에 있던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아셀라는 내게는 정말 이야기하기 싫다는 태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숨길 수도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한 후에 대답했다.

     

    “용사를 발견했어.”

     

    흠.

     

    예상치 못한 단어에 잠깐 나도 정신이 멍해졌다.

     

    용사는 한 명밖에 없으니 그녀를 지칭하는 말이겠지.

     

    “용사라니, 뜬금없이 무슨 말씀이세요?”

     

    나는 모른 척 아셀라에게 물었다.

     

    “볼펜뷔테르 자작이라고 알아?”

     

    “동부 지방에서 목초지를 운영하는 영주였죠. 장남이 월광궁에 호의적이고요.”

     

    “맞아. 너희 제약공장에서 만들어진 약품 샘플을 친 월광궁 귀족들에게도 배포하던 중이었어.”

     

    “영업이군요. 그래서요?”

     

    “약품을 호위하던 우리 기사단이 자작의 태도에서 수상함을 느끼고 조사했어. 귀족들의 약점이 될만한 요소는 평소에 모아놓으라고 명령해놨거든.”

     

    “그런데 자작이 용사를 데리고 있었단 말이군요.”

     

    “맞아. 벌써 1년 정도 숨기고 있었던 모양이야. 대처법을 몰랐든지, 협상할 거래처를 찾던 중이었나 보지. 안건이 안건이니 중죄로 취급될 수도 있겠어.”

     

    “그렇군요. 용사가 나타났다는 건 마계에 마왕도 강림했다는 뜻입니다. 대륙에 혼란이 일어나겠군요.”

     

    “…그렇지.”

     

    아셀라는 초조해 보였다. 한창 승계전에 집중해야 할 때에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나타나서 그랬을까.

     

    용사의 등장은 미리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아셀라처럼 놀라기는 했다.

     

    미래에서 용사에게 전해 들은 바로는, 그녀가 제도에 입성한 건 아셀라가 집권한 후, 지금으로부터 3년 후다.

     

    ‘본래 마력폭주가 작년 말에 일어날 사건이었지.’

     

    아셀라가 월광궁의 주도권을 갖고 성장시킨 건 분신 카밀라가 없어진 올해부터였다는 뜻이 된다.

     

    지금 용사를 발견한 건 아셀라다. 그녀의 행동이 바뀌면서 이 과정도 변했다.

     

    ‘내게는 좋은 기회일지도 모르겠어.’

     

    엔딩리스트를 확인해본다.

     

     

    ―――――――――――

    No. 005 : 마왕군 승리 58%

    No. 006 : 마신강림 26%

    No. 008 : 철옹성 33%

    No. 009 : 마계의 늪 4%

    No. 010 : 성검 파괴 72%

    ―――――――――――

     

     

    101개의 배드엔딩 중 아셀라와 관련된 배드엔딩은 52개였다.

     

    그 중 1개를 제외한 51개는 삭제했다.

     

    남은 50개 중 기슈타와 함께 삭제한 대악마와 야만족 관련 배드엔딩이 열셋.

     

    바위족 관련 하나는 미리 지웠고, 기슈타와 관련된 하나, [빙하기]도 지워져서 총 열다섯이 없어졌다.

     

    그 외 사룡과 휴고, 흑마술사 관련으로 지운 것이 셋.

     

    남은 배드엔딩은 서른두 개다.

     

    마왕군과 싸우다가 발생하는 전투 관련 배드엔딩도 있고, 자잘한 외부 세력과 관련된 문제도 있다.

     

    ‘가장 큰 걸림돌이 하나 있었지.’

     

    용사.

     

    그녀와 관련된 배드엔딩은 열네 개다.

     

    아셀라처럼 용사가 악의적으로 세상을 멸망시킨다거나 해서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대부분은 실수였다. 좀 치명적인.

     

    이를테면 [성검 파괴].

     

    성검이 없으면 마왕을 처치할 방법은 영영 없어진다.

     

    ‘우리 용사님은 참 활기차고 긍정적인 좋은 분인데 말이야.’

     

    여태 성검을 몇 번이나 깨먹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그때마다 세상이 멸망한 건 덤이었고.

     

    ‘어차피 황실을 나서면 한 번 그녀를 만나러 갈 생각이었어.’

     

    타냐를 붙여주려 한 것도 그녀를 좀 더 성장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이미 용사였다는 정보는 없었어.’

     

    본래 역사에서는 자작이 한참 숨기고 있었거나 정치적인 용도로 쓰이느라 여기저기 떠돌기라도 했었나. 아니면 기밀이었다든지.

     

    어쨌든 시간이 한참 더 생겼다. 심지어 월광궁이 먼저 그녀에게 접촉할 권한이 있는 상태다.

     

    ‘용사와 관련된 배드엔딩도 가능하면 바로 지우면 좋겠어.’

     

    그리 생각하니 아셀라도 마침 판단을 마친 모양이었다.

     

    “라스, 이만한 사항이니 폐하의 눈을 피할 순 없어. 먼저 보고드리는 게 상책이야.”

     

    “동의하는 바입니다. 전 대륙이 그를 가지고 싶어서 난리가 나겠지요.”

     

    “아, 그가 아니라 용사는…”

     

    “음? 다른 정보가 있습니까?”

     

    “…아냐, 아무것도.”

     

    아셀라가 고개를 저었다.

     

    “긴급하게 회의가 소집될 거야. 주치의인 너도 자리에 함께하겠지.”

     

    “그렇네요.”

     

    “라스.”

     

    아셀라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자리에서 혹여 발언할 기회가 오거든, 서슴지 말고 끼어들도록 해.”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비공개 독자님 100코인 후원 연속으로 감사해요! 최근에 너무 많이 해주시네요…!
    우연_866님 50코인 후원 감사해요!
    어제 회차를 재밌게 봐주신 것 같아 기쁩니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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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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