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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3

     “보아라, 왕의 행차이니라!”

     별로 보고 싶지는 않은데,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 전하를 뵙습니다.”

     “음! 그레이 지브롤터. 오랜만이로구나.”

     어딘가 나를 바라보는 눈에는 믿음이 담겨있다.

     “그래서 이 배가 자네에게 온 황태자의 선물이라는 건가?”

     “일단은 그렇습니다.”

     “일단은?”

     “아무리 제가 받은 선물이라고 하더라도, 제가 사용하기 곤란한 물건은 이용할 수는 없어서.”

     나는 오른손에 움켜쥔 지팡이를 슬쩍 들었다.

     “아마도 제가 다리가 불편해서 고향으로 돌아갈 때 타고 움직이라는 것 같은데, 제게는 딱히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으음….”

     

     은근한 얼굴로 헛기침하며 눈치를 준다.

     다른 이에게 말했다면 당당히 내어놓으라고 할 것을, 차마 ‘샤를로트의 아이’에게는 그러지 못하는 모습이 웃기기만 하다.

     “전하. 지브롤터의 것은 곧 노스트럼의 것.”

     “…호오?”

     “황태자 전하에게는 제가 따로 서신을 보낼 테니, 이 배에 대한 운용은 전하께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으음!!”

     무능왕이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좋다! 내가 한 번 직접 타보도록 하지! 마침 세이레네 영지까지 가야 할 일이 있었는데 잘 됐구나!”

     “전하.”

     “아, 뭐!”

     내가 부른 게 아니다.

     내가 불렀다면 저렇게 짜증을 내지 않았겠지.

     “저희가 먼저 올라가서 내부 상태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아카데미의 기사들이 먼저 확인하지 않았더냐?”

     “제국에서 온 것이니 한 번 더 확인해 보겠습니다. 혹시나 첩자가 배 안에 몰래 숨어있을 수도 있으니.”

     “으음…. 어쩔 수 없군. 한 번 살펴보거라.”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 국왕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황금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하나둘 배 위로 단숨에 뛰어올랐다.

     ‘아무래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인데. 혹은 알고도 모른척하고 있거나.’

     왕실기사단이든 국왕 본인이든, 그 수많은 선물 중에서 이 프리깃 비행선을 내게 보낸 배경을 아무도 모르고 있다.

     황태자가 내게 선물을 보낸 의도는 무엇일까.

     하나는 ‘내가 네 생일을 알고 있다’라는 것.

     ‘첩보력의 과시지.’

     

     이는 아스타시아를 통해 넘어간 정보는 아니고, 지브롤터 영지에서 일했던 이를 대상으로 파악한 정보일 가능성이 크다.

     -생일을 숨기려고 해도, 태어난 날과 시점은 숨길 수 없지. 아기 울음소리를 들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고 말이야.

     황태자는 주로 가문에서 오랫동안 일한 유모나 집사를 포섭했다.

     특히 가문에 불만을 품었거나, 혹은 가문의 후계자에게 모욕당한 이들을 상대로 주로 정보를 뜯어냈다.

     이건 주로 모르가니아의 방식.

     황태자는 정보를 사들이거나 협박해서 얻어내는 방법 이외에도, 그림자를 보내어 당사자의 단짝이 되어 당사자가 정보를 누설했는지도 모르게 정보를 얻는 걸 즐긴다.

     이 성향이 비행선(비행 장치 없음)을 선물한 두 번째 이유.

     ‘내부에 설치된 몰래카메라만 무려 39개.’

     미세한 마력 반응 때문에 마스터급의 인간이 아니라면 알아차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교묘하게 숨겨져 있는 마석들이 배 안 곳곳에 박혀있다.

     두 번째. 감시 및 사찰.

     실시간으로 어디론가 마석 안에 저장된 마력 정보가 흘러 나가지는 않겠지만, 나중에 마석을 회수한 다음 영상 마법으로 재현하면 금방 마석이 기록한 화상을 재생할 수 있을 터.

     ‘궁금하겠지. 내가 진짜로 아스타시아를 좋아하는 건지.’

     말과 행동은 사랑에 빠져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남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어떻게 행동하는지 누가 알까.

     아스타시아의 보고?

     황태자는 본인이 직접 보고 들은 걸 믿는다.

     타인의 보고는 그저 참고 사항일 뿐이다.

     “크흠. 그레이 지브롤터.”

     그리고 세 번째 이유.

     “정말로 내가 가져도 되는 건가?”

     “예. 전하께서 운용하시옵소서.”

     “아아, 고맙다. 이런 건 왕이 타야지. 음.”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을 향한 도발.

     바퀴를 달고 땅을 달리는 프리깃.

     세이레네 영지에서 왕도까지 움직이는 데 성공한 마도공학의 정수가 깃들어, 별다른 인력 없이도 프리깃을 움직이는 데 필요한 대량의 마나와 방향타를 움직일 함장만 있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마도자동선(공식 명칭이라고 한다).

     “배가 대지를 달리다니. 음. 이는 타지 않으면 안 될 일이지.”

     이걸 노스트럼에서 최초로 공개했는데, 그걸 국왕이 아닌 지브롤터의 장남에게 먼저 전한다?

     -감히 내가 아닌 지브롤터의, 크림슨의 아들에게 먼저 이런 선물을 보내?! 저들은 이 나라가 노스트럼이 아니라 지브롤터인 줄 알고 있는 것인가!

     내부 분란을 일으키려는 행위다.

     국왕은 자신의 것이 아닌 마도자동선에 부러워하고 질투할 것이며, 지브롤터는 자연스레 불편해지겠지.

     일국의 군왕보다 신하를 더 신경 쓰는 모습을 보이는 외교적 행동.

     제국이 그동안 여러 군소왕국을 점령할 때, 왕과 신하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이간질로 자주 써먹은 방법이다.

     하지만 그런 황태자도 이건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자! 기사단은 전원 승선하라!”

     “예, 전하.”

     신기하고 멋진 제국식 미래형 유희거리에 대하여, 남에게 주는 생일선물이라고 해도 자기 마음대로 어명으로 빼앗아 가는 왕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했어야지.’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은 제국에서 정식 무역을 통해 수출한 와인을 대량으로 확보하고 대금을 치르지 않은 적이 있다.

     상업 길드원 사이에서 소위 ‘먹고 짼다’라는 표현을 쓰는 상황으로, 전문용어로 ‘먹튀’라고도 부르는 행동.

     그걸 국왕이 해낸다.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이라는 인간에게는 양심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없으나, 이런 방면으로는 행동력 하나가 정말이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아쉽게 되었지만, 어쩔 수 없네.’

     제국 전쟁 박물관에서나 보던 프리깃 비행선을 눈 뜨고 빼앗긴 건 아쉽지만, 그렇다고 내가 아스타시아와 둘이 함께 지내는 모습을 다른 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생각은 없다.

     ‘몰래 설치해 둔 영상 마석만 아니었으면, 그게 최소한 침대가 있는 함장실에만 없었어도 사수하는 건데.’

     침대에 누웠을 때 보이는 천장 캐노피 가운데에도 마석이 눈처럼 달려있어, 나는 결국 얌전히 수령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영상 마석을 이용한 도둑 촬영.

     존재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편이 더 낫다.

     괜히 지금 눈치를 챈 척을 하면 다음에는 더 교묘하고 찾아내기 힘들게 마석을 숨겨놓을 테니까.

     그리고 한 가지 더.

     사실 이게 제일 큰 이유인데.

     ‘비행선인데 비행 기능을 빼고 주면 도대체 뭘 보고 타라는 거야.’

     좌우로 펼쳐진 날개가 없다.

     엔진과 연결되어 있어야 할 풍석도 없다.

     하다못해 돛대에 달려야 할 ‘프로펠러’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오히려 한 번 풀어헤쳤다가 다시 펼쳐놓은 것 같은 돛과 하얀색 마스트가 오히려 더 불쾌할 지경이었다.

     바닥을 달리는 바퀴는 도로를 쭉 달리기 위함이 아니라, 하늘을 날아오르기 직전 가속도를 받기 위해 달아둔 것.

     노스트럼의 전통 관점에서 본다면, 말을 선물해 놓고 말의 안장을 빼고 다리를 잘라버린 채 선물해 준 것과 같다.

     “…….”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은 모를 것이다.

     이 배는 마도공학 기술력의 차이에 따른 모욕과 무시가 담겨있다는걸.

     물론 나를 향한 건 아니고, 내가 이걸 타고다니면서 노스트럼의 백성들이-

     “우오오! 굉장하구나!!”

     …라는, 인간의 고차원적인 행동을 보고 열광하는 원숭이 같은 반응을 보이는 걸 즐기려고 하는 음습하고 저열한 욕구가 서려 있다.

     날지 못하는 배.

     세인트 지오에게 넘겨줘서 속 시끄러운 일이 일어나는 것보다는 훨씬 좋다.

     진짜 비행선이라면 모를까.

     * * *

     [하루 뒤, 3월 30일. 재단 이사장실.]

     “그래서 그걸 그냥 줬니?”

     “예.”

     나는 이사장실을 찾아온 카르멘 왕비를 맞이하여, 어제 있었던 이들을 간단히 설명했다.

     “…….”

     “그런 표정은 짓지 마십시오. 다 이유가 있는 거니까.”

     “그래. 네가 그냥 넘겨줬을 리는 없지. 어떤 이유가 있는 거니?”

     “침실에서 어딘가 음침한 시선 같은 게 느껴지는 것 같아서 불쾌했습니다. 이상.”

     “……이건 우리끼리만 알자꾸나.”

     “예.”

     카르멘 왕비와 약간의 합의점을 봤다.

     “천리안 마법이라도 걸어둔 건가….”

     “저야 모르죠. 해체하여 조사한다면 바로 알게 되겠지만.”

     “외교적 선물인데 어떻게 함부로 해체할 수 있겠니. 네게 준 거지만.”

     카르멘 왕비가 도둑 촬영용 마석을 알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마법을 이용한 원격 탐지’ 같은 건 인지하고 있으니.

     “제국에서는 별 반응이 없고?”

     “반응이 있다고 하더라도 공식적으로 뭐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왕명으로 징발해 갔는데, 그걸 가지고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지브롤터의 후계자에게 따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죠.”

     “왕명…하아. 도장을 냅다 챙겨가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카르멘 왕비는 소파에 앉은 채 등을 뒤로 기대었다.

     “그래. 됐어. 못난 국왕 전하 대신 내가 선물을 주도록 하마.”

     “독이 든 와인입니까?”

     “얘는. 내가 설마 아들에게 독을 선물하고 그러겠니?”

     “제가 크림슨의 아들이 아니고, 순수하게 샤를로트의 아들이라면 생각은 한번 해보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크림슨의 아들도 아닌데 내가 왜 너를 독살….”

     카르멘 왕비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너 설마?”

     “아닙니다. 그런 일 없습니다. 농담이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난 또. 샤를로트를 상대로 누가 외탁이라도 하고 간 줄 알았잖니.”

     “기대하셨나요?”

     “조금은.”

     카르멘 왕비가 약간은 실망한 얼굴로 옆으로 몸을 기대었다.

     “너도 이제 어느정도 커서 그런 말을 하니까 하는 이야기지만, 불륜 정도로는 이혼 사유가 못 된단다.”

     “……?”

     “최소한 남의 아이 정도는 몰래 낳아야 정식으로 이혼을 진행하고 그럴 수 있는 거지. 하아.”

     “…….”

     “응? 왜 그래?”

     “…아뇨. 그냥.”

     이건 차마 용기를 내지 못하겠다.

     용기를 내야 하는데, 그랬다가는 내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모든 기반이 흔들릴 것 같아서.

     “어머니.”

     

     하지만.

     “만일 샤를로트 백작 부인이 불륜을 하는 걸 넘어, 외탁을 하여 크림슨 변경백이 아닌 다른 이의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면….”

     “그럼 죽여야지.”

     “…….”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내가 가만히 있는 거야. 실제로도 그러지 않았고.”

     “그렇습니까.”

     카르멘 왕비의 답은 약간 불연소 될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나름 납득이 가는 답이다.

     노스트럼 왕국의 평균.

     정부를 두거나 하는 건 왕국 귀족 평균적인 시선으로 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렇기에 어머니만을 바라보는 아버지라거나, 그런 아버지만을 바라보는 카르멘 왕비의 이야기가 사교계에서 더 ‘순수한 사랑’으로 각광받고 있는 셈이고.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마음 놓고 생일선물을 요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요구하는 거니?”

     “보상해 주려고 오신 거 아닙니까?”

     “그래. 맞아. 빼앗긴 거 대신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내가 챙겨주는 거라도 있어야 남들이 뭐라고 안 하지.”

     국왕의 민폐에 왕비가 나서서 수습하다.

     노스트럼에서는 지난 17년가량 반복적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뭘 원하니? 내가 줄 수 있는 건 전부 주마.”

     “들으면 화를 내실 텐데.”

     “뭔데?”

     “그게.”

     생일선물을 지금 당장 받는다면, 역시 그게 좋겠다.

     “…너.”

     내 말을 들은 카르멘 왕비의 표정이 뒤틀렸다.

     “죽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

     진지한 걱정과 함께.

     “안 죽습니다.”

     나도 진지했다.

     “제가 그쪽으로는 좀 재능이 뛰어나서.”

     “처음 듣는데?”

     “이번에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하아. 좋아. 그러면 물어나 보자.”

     카르멘 왕비는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태도로, 그리고 나를 향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모르가니아에서 가장 빠른 드라군을 선물로 달라는 거.”

     “예.”

     “왜?”

     “좋아하는 여자랑 데이트하려고요.”

     “…….”

     카르멘의 인상이 험악하게 뒤틀렸다.

     “나리아는 아니지?”

     “어머님. 여동생과 데이트하는 오빠가 누가 있답니까?”

     “???”

     “나리아와 저는 그런 사이입니다.”

     차라리 안 타고 말지.

     “왕도에서 지브롤터까지 하늘을 날아갈 수 있는 드라군, 비룡(飛龍) 하나만 선물로 주시죠.”

     날개 없는 비행선?

     노스트럼에는 그리핀, 와이번, 드래곤-비룡이 있다.

     “어머님.”

     “…….”

     “아버지 등 뒤에 태워드리겠습니다.”

     “……..”

     “아니다.”

     나는 카르멘 왕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버지 앞에 태워드리겠습니다.”

     “얘.”

     카르멘 왕비가 나를 비웃었다.

     “고작 그런 걸로 나를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아주 크나큰 오산이란다. 인생이라는 게 그렇게 모든 것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하물며 언제나 나를 그런 식으로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말렴.”

     “어쩔 수 없군요. 이것만은 꺼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나는 품에서 마석 두 개를 꺼냈다.

     딸칵.

     [카르멘.]

     “……?”

     딸칵.

     [사랑한다.]

     “…….?!!”

     “드리겠습니다.”

     “하, 하하…. 그런 조작된, 거짓된 걸로 나를 현혹하려고? 안 돼. 돌아가. 들어줄 생각 없어.”

     “후. 이것만은 진짜 꺼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약물도 내성이 생긴다고 하더니, 무지성으로 아버지를 걸고넘어지는 것도 한계에 봉착한 모양이다.

     “어쩔 수 없군요. 진짜 이것만은 꺼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하. 네가 뭘 꺼내든-”

     [카르멘.]

     “음성 짜깁기로 나를 현혹하려고 하는 건 소용없다는-”

     [이 말을 듣고 있다면, 나의 아들 그레이가 뭔가 들어주기 힘든 부탁을 하고 있다는 거겠지.]

     “…어?”

     나는 모든 상황에 준비된 남자다.

     [부탁한다, 카르멘. 나를 봐서라도, 그레이의 말을 들어다오.]

     “지금 들어주신다면.”

     나는 새로운 마석을 꺼냈다.

     “아버지의 ‘모닝콜’이 담긴 마석도 같이 드리겠습니다.”

     “…….”

     “어머님 전용으로.”

     

     손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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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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