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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4

        채혈 검사실에는 칸막이가 다섯 개 놓여있었다.

       

        칸막이마다 임상병리사가 한 명씩 앉아서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프레이와 함께 막 채혈실에 들어온 나는 그 광경을 보고 질겁했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씹으며 대기줄에 섰다.

       

        떨고 있는 내 모습을 눈치라도 챈 건지, 프레이는 큭큭거리며 입을 열었다.

       

        “너 주사 무섭구나?”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왕창 떨고 있으면서.”

       

        그래,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떨리는 시선으로 검사실 내부를 훑어보았다. 검정, 노랑, 빨강, 하양…. 검진을 받으러 온 학생들의 머리색은 생각보다 훨씬 제각각이었다. 판타지는 판타지구나 싶었다.

       

        “누구 찾아?”

        “군청색.”

       

        오래 두리번거릴 필요도 없었다. 블루베리와도 같은 머리색을 지닌 여자아이 한 명이 이쪽으로 뚜방뚜방 걸어왔다.

       

        “언니!”

       

        로즈마리였다.

       

        “언니, 앞선 검사는 잘 받았나요?”

        “어떻게든.”

        “저 이쪽에 줄 서도 되죠?”

        “마음대로 해.”

        “그럼 실례할게요~”

       

        로즈마리는 쿡쿡 웃으며 새치기를 시전했다.

       

        “야, 너 왜 새치기 해!”

        “제가 순번이 더 빠르니까 그렇죠.”

       

        둘이서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뭐라 싸우는지 귀에 안 들어온다. 지금 내 머릿속은 걱정으로 엉망진창이었다.

       

        “와, 드디어 앉을 수 있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대기실 가장 깊숙한 곳까지 와 있었다. 우리는 빈 의자에 셋이서 나란히 앉았다. 몸이 긴장한 탓인지 어깨는 경직되고, 허리는 꼿꼿한 채였다. 심지어 양쪽 다리는 스키장 리프트를 탄 것처럼 붕 떠 있는 느낌이었다.

       

        -쿡쿡

       

        “뭐야.”

       

        고개를 슬쩍 돌아보니 로즈마리가 미어캣처럼 허리를 곧추세운 채 앉아있었다.

       

        “뭐.”

        “밑에 보세요.”

       

        그 말을 따라 눈동자를 아래로 내렸다. 고사리처럼 아담한 그녀의 손에는 무엇인가가 들려있었다. 순번 대기표였다.

       

        “가져가요.”

       

        나는 조용히 동생이 준 것을 챙겼다. 먼저 들고 있었던 번호표는 신줏단지 모시듯이 주머니에 고이 접어서 넣어두었다.

       

        [대기 순번 : 492]

       

        “흠.”

       

        492번이라.

       

        칸막이는 다섯 개. 따라서 피검사를 진행하는 임상병리사의 수는 6.

       

        그리고 492는 6으로 나누었을 때 정확히 나누어떨어진다.

       

        그렇구나. 뭔지 알겠다.

       

        나는 6번 테이블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웬 처음 보는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순간 나와 시선을 마주치더니 모스부호라도 보내는 것처럼 여러 번 눈을 깜빡였다. 뭐지, 추파라도 던지는 건가?

       

        그냥 미친놈 아닌가, 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신 나는 로즈마리가 들고 있는 번호표를 확인했다. 로즈마리의 순번은 486번, 나보다 딱 6만큼 작다.

       

        그렇다면 저 사람이 로즈마리가 매수해 둔 사람일 것이다. 나는 살짝 안도했다.

       

        로즈마리는 자신이 먼저 채혈을 받아 나를 안심시킬 작정이다.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나도 저 사람에게 검사받고 어영부영 넘어가겠지.

       

        그래도 떨리는 건 떨리는 거다. 전교 1등이라고 해서 시험 때 아예 긴장하지 않는 건 아닌 것처럼.

       

        “450번 들어오세요.”

        “460번, 이쪽 검사실로 와 주세요.”

        “470번이요!”

        “480번 학생, 이쪽이에요!”

       

        점점 순번이 가까워지고 있다.

       

        “후우.”

       

        심장이 쿵쿵거린다.

       

        미리 준비한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묻은 땀을 거둬냈다. 하도 긴장한 탓에 나도 모르게 팔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한숨을 연달아 내쉬고 있자 프레이가 등을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괜찮아. 걱정할 거 없다니까?”

       

        프레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어조였다. 그 모습에 괴리감이 있어, 나는 그만 입꼬리를 올리고 말았다.

       

        “주사 생각보다 안 아파. 잠깐 따끔하고 끝일걸?”

        “프레이.”

        “왜?”

        “우리 우정 변치 말자.”

        “…갑자기?”

       

        그래, 틀림없이 괜찮을 것이다.

       

        “486번, 이쪽으로 오세요.”

       

        번호를 불리자마자 로즈마리는 6번 채혈실로 쪼르르 걸어갔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당당하고 차분한 표정이었다. 로즈마리는 팔뚝을 걷고 토니켓을 묶었다

       

        “…….”

       

        둘이서 뭐라고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데.

       

        검사실에 사람이 하도 많다 보니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는 잘 안 들린다.

       

        그 뒤로 채혈 과정을 목 빠지게 지켜보았으나 어떤 식으로 피를 뽑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하다못해 뽑은 피가 무슨 색이었는지도 보지 못하고 끝났다.

       

        나는 입안에 도는 쓴맛을 애써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492번 이쪽으로 오세요.”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잘 다녀와!”

       

        응원하듯이 내 등을 다시 한번 툭툭 두드리는 프레이. 아침에 먹은 것도 없는데 체할 것 같다.

       

        떨리는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고 자리에 앉았다. 앉기 무섭게 남자는 이것저것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임상병리사 웨이블이라고 합니다. 어제저녁부터 금식 진행하셨죠?”

        “아뇨.”

        “문제없으십니다. 바로 채혈 진행할게요.”

       

        이 새끼 뭐야.

       

        “어디 보자. 주사기를 어디에 뒀더라….”

       

        야 이 돌팔이 새끼야.

       

        이거, 정말 믿고 맡겨도 되는 걸까.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팔을 내밀었다. 그래도 로즈마리가 매수한 녀석이니 증거 은폐 하나는 기깔나게 잘 해줄 거라 믿는다.

       

        “팔 걷어주세요.”

       

        소매를 걷자 잡티 하나 없는 매끈한 피부가 드러난다. 확실히, 사람답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깔끔한 피부다.

       

        팔꿈치보다 약간 높은 위치에 고무줄을 묶는다. 조이는 감각이 예사롭지 않다. 그, 보통은 손가락 하나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여유를 두고 묶지 않나…?

       

        주먹을 꽉 쥐어보라는 소리도 없다. 남자는 주변을 두리번거린 뒤 아래쪽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붉은 피가 담긴 채혈통이었다.

       

        “채혈 진행하겠습니다. 힘 빼 주세요.”

       

        웨이블은 주삿바늘을 놓는 시늉을 했다. 팔이 찔렸다는 감각은 없는데 푹, 하고 기묘한 소리가 났다. 언제 붙인 건진 모르겠는데, 오른쪽 팔에 살점 패치처럼 생긴 무언가가 있다.

       

        저게 뭐였더라. 인공 피부인가?

       

        “끝났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 남자가 토니켓을 풀었다. 솜 하나 던져주고 5분간 지혈하란다. 얼씨구.

       

        결과적으로 피는 안 뽑았다. 다만, 내 피가 아닌 다른 사람의 피로 검사를 진행하게 될 뿐.

       

        한숨을 픽 내쉬며 자리로 돌아왔다. 프레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팠어?”

        “아니.”

        “거 봐.”

        “그나저나 이제 뭐 남았지.”

        “이거 하고 혈압만 재면 끝나는 거 아니야?”

       

        세상에, 아직 하나 남았다니.

       

        -꼬르륵

       

        배고프다. 배고파서 뒤질 것 같다.

       

        오늘 하루는 어느 날과도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든 날이다. 랭킹을 매기자면, 그래. 하스펠트에게 뒤통수를 맞았던 날과 비견할 만하지 않을까. 그 정도로 정신력 소모가 크다.

       

        여하튼 이거 끝나면 뭐 먹을까 고민하던 참이었다.

       

        “다들 배고프지? 조금만 참으렴.”

       

        의사 가운을 입은 엘프가 우리에게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웨이브 펌. 너무 진하지 않은 시트러스 향. 

       

        그 두 가지 특징만으로도 나와 프레이에게 말을 건 사람이 누구인지 유추할 수 있었다.

       

        “글리스턴 선생님.”

       

        틸레트 아카데미의 전담 보건교수인 세피아 글리스턴이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야 엘프이지 않은가. 

       

        심지어 대륙을 다 뒤져봐도 보기 힘들다는 치유마도사다. 온갖 천재들이 교수로 앉아 있는 틸레트에서조차도 1군 소리를 듣는 분이었다.

       

        “저번에 아팠다고 들었어. 내가 준 약은 잘 들었니?”

        “네, 덕분에요.”

        “이상한 학생이야. 흑사병 땐 멀쩡했으면서 환절기 감기에 취약하면 안 되지.”

       

        선생님의 농담에 나는 아하하, 하는 기계적인 웃음으로 상황을 넘겼다.

       

        여기서 30분을 더 기다려야 한다니. 오늘따라 죽을 맛이구나.

       

        안 그래도 요즘 시간 손실이 많이 나고 있다. 프로 헬스러에게 근손실이 있는 것처럼, 나에게도 물손실이 있다. 온종일 펜을 안 잡고 이러고 있으니 피곤하다.

       

        “어우.”

       

        몸도 마음도 허기진 상태.

       

        시장기를 조금이라도 잠재우고자 침을 삼키던 중이었다. 채혈을 마친 같은 반 학생 몇 명이 옆자리에 쪼르르 앉았다.

       

        차례대로 로테, 반장인 메이릴, 그리고….

       

        “주사 한번 더럽게 못 놓는군.”

       

        언젠가부터 반에서 기수열외 당하기 시작한 황태자.

       

        클리온 황자는 노인네처럼 혀를 끌끌 차며 임상병리사 흉을 보았다. 그 옆자리에 앉아 있던 다른 반 여학생은 눈치를 보다가 자리를 떴다. 그 때문에 황자 옆에 같은 반 여자애 다섯 명이 연달아 앉은 모양새가 됐다.

       

        영 좋은 자리 배치는 아닌데.

       

        “휘유, 아가씨들. 피는 잘 뽑았나?”

        “말 걸지 마세요.”

       

        학급 반장을 맡고 있는 메이릴이 자리를 떠났다.

       

        “…무엄한 년이구나. 그래도 살리에르. 그쪽은 백작 딸이니 좀 더 교양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군.”

        “로테, 나 목말라.”

        “우리 물 마시러 갈래?”

        “좋아!”

       

        로테와 프레이도 자리를 떠났다.

       

        그 때문에 나와 황자 사이를 든든히 가로막고 있던 3중 가드가 깨져버리고 말았다.

       

        “…….”

        “…….”

       

        잠시간의 정적.

       

        “마저 말씀하세요, 황자님. 저희는 떠나지 않는답니다.”

        “크흠, 흠.”

       

        황자는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로 도망쳤다.

       

        [와.]

       

        양장본의 탄식과 함께 배가 완전히 꺼졌다. 이러다가 저혈당으로 쓰러지는 거 아닌가 몰라.

       

        꽁무니 빠지게 도망가는 황자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블랜튼 공작, 즉 7석인 오를레이앙과 나눈 약속을 되짚기 시작했다.

       

        -계약은 간단합니다. 저희가 이번 사태를 잘 넘겨드릴 터이니, 2석께서는 겨울방학 때 마왕성에서 지내 주시길 바랍니다. 이후로는 다시 교내에 복귀하더라도 말리지 않겠습니다.

       

        기브 엔 테이크.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게 있어야 하는 법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

       

        이번에 잘 넘어가면 로즈마리에게는 빚이 생긴다. 그러니 그녀의 부탁대로 나는 좋든 싫든 마왕성에서 두 달을 지내야 한다. 시간상으로 잃는 게 많겠지.

       

        이건 나중에 숙고해 봐야겠다. 원래 이런 계획은 길게 끌고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눈앞의 연구를 처리하는 게 우선이다.

       

        그도 그럴게, 당장 밀린 과제만 해도….

       

        [1. 로테와 함께 백야를 해석한다.]

        [2. 프레이와 함께 예술대회에 출품할 가짜 핵탄두를 만든다.]

        [3. 1에서 해석한 백야 스크롤을 바탕으로 플레어를 대체할 초소형 병기를 제작한다.]

        [4. 피치블렌드 마석을 정련하여 응급용 핵분열탄을 만든다.]

       

        …이렇게 4개가 됐으니까. 그나마 각각의 과제가 외딴섬처럼 따로따로 떨어져 있지 않기에 망정이지.

       

        심지어 이래도 시간이 부족하다. 일단 중간고사가 끝나면 로테가 엘프국으로 교환학생을 가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로테의 교환학생은 내 부탁이다. 문화제를 같이하지 못하고 보내야 한다는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친구를 피신시켜 놓는 것이다.

       

        그러니 촉박한 시간을 잘 활용하자. 이르면 이번 주, 늦어도 다음 주에 1번과 3번의 가닥을 잡도록 하자.

       

        “채혈 끝난 학생분들은 절 따라와 주세요.”

       

        이번에는 세피아 선생님이 우리를 직접 이끌고 3층으로 올라갔다.

       

        혈압계가 몇 대씩 있는 방이다. 대수를 새어보니 일찍 끝날 듯싶다.

       

        혈압 측정만 끝나면 저녁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헬륨을 가득 채워 넣은 풍선처럼 들뜬 기분으로 내 차례를 기다렸다.

       

        “자, 에테르는 선생님이 직접 해 줄게. 문제없지?”

        “그럼요.”

       

        뭐 별일 있겠냐고. 편한 마음으로 저녁 메뉴나 고르고 있기로 했다.

       

        그런데.

       

        “…어?”

       

        측정에 문제라도 생긴 모양인지, 세피아 선생님의 낯빛이 장마철 하늘처럼 우중충해졌다.

       

        “미안해. 한 번만 더 할게.”

       

        그 뒤로 세피아 선생님은 초보자처럼 몇 번이고 측정을 반복했다. 그 사이에 로즈마리는 측정을 끝내고 나를 기다렸다.

       

        로즈마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와 세피아 선생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언니, 무슨 일 있어요?”

        “글쎄.”

       

        커프를 채운 위치를 바꿔가면서 측정을 여덟 번이나 했다. 횟수가 거듭될수록 선생님의 얼굴이 밀가루처럼 새하얗게 변해갔다.

       

        “이, 이상하다. 수치가 이렇게 나올 수가 없는데…….”

        “왜요?”

        “학생, 혈압이 말도 안 되게 이상해요.”

       

        내 안색도 선생님처럼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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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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