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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4

       황금 카니발의 숙소에 도착한 엘라는 레이나가 쓰던 방을 그대로 받았다.

       이곳까지 오는 길이 익숙했는데, 알고 보니 그들이 머무르는 별장이 바로 건너편에 있었다.

         

       엘라는 원더스타인에게 구돌이를 날려 보내볼까 하다가 그만뒀다.

       가스통으로부터 그가 ‘연락’하기로 한 시간을 전달받았다.

       조금만 기다리면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데, 굳이 비둘기가 들락날락하는 모습을 보여 이곳 사람들의 경계를 살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인스피라를 발동시켰다.

         

       그녀가 기르는 동물들의 감각을 공유받을 수 있는 ‘스피릿 링크’.

       찍순이를 내보내 저택 구석구석을 살폈다.

         

       그러다가 황금 카니발의 단원들이 휴게실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엿듣게 되었다.

         

       “단장 그 인간 정말 제정신인가?”

       “후원자의 요구를 아주 철저하게 지켜주시는군.”

       “매달 화젯거리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 말이지?”

       “그렇다고 레이나를 내보내고 웬 듣도 보도 못한 계집애를 데려와?”

       “봉황을 팔고 닭을 산 셈이지.”

         

       엘라는 울컥했다.

       자신이 이곳에서 환영받지 못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레이나와 비교해서 크게 떨어지는 것처럼 말하는 건 너무했다.

         

       다행히 오늘 입학시험에 왔던 단원도 그곳에 있었다.

       그가 자신을 변호해주었다.

         

       “애꿎은 애한테 괜히 화풀이하지 마세요. 걔도 오고 싶어서 온 거 아니니까요. 실력은 문제없어요. 레이나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라고요.”

       “뭐? 레이나 같은 애가 또 있다고?”

       “마지막에 사고가 없었다면 13승 12패로 레이나가 졌을 거예요.”

       “하하, 그런 천재가 한 시대에 둘이나 나올 줄이야.”

       “찰리도 있잖아. 셋이지 그럼.”

       “들어보세요. 그 애가 날아오던 공을 어떻게 받았냐면…….”

         

       해당 단원이 학교에서 있었던 엘라의 활약을 하나하나 풀어놓았다.

       단원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엘라는 속으로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음음. 이렇게 나오셔야지.

         

       그러나 훈훈했던 분위기도 드래프트 이야기로 넘어가자 다시 험악해졌다.

         

       이 부분은 엘라도 변명할 말이 없었다.

       그녀도 설마 로드 판타스틱이 자기 딸을 버려두고 자신을 선택할 줄 몰랐다.

       그건 단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인간 또 시작이군.”

       “레이나를 왜 그렇게 못살게 굴어서 안달이지?”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 아니겠나?”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심해.”

         

       엘라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안심했다.

       황금 카니발의 단원들은 모두 이전부터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아까 그녀 보고 닭이니 해댔던 인물도 평소 그녀가 좋아하던 곡예사 중 하나였다.

         

       한 명의 팬으로서 혹은 업계 후배로서 그들과 친해지고 싶은 것이 엘라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로드 판타스틱의 의도를 알 수 없어서 주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는 별다른 꿍꿍이가 있어서 그녀를 데려온 게 아니었다.

       그는 예전부터 딸에게 이런 식으로 여러 번 질책을 가했던 모양이었다.

         

       완벽해 보였던 그녀에게도 그림자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러나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정도로 동정심을 발휘하기에는 자신이 다니던 학교 친구들의 처지가 더 안 됐다.

       세끼 밥 잘 먹는 것만으로도 복 받는 거지.

         

       “그럼 나는 2주일 동안 견학을 왔다고 생각하면 되는 건가?”

         

       내일 아침에 단체 연습이 있다고 했다.

       일류 곡예사들의 훈련을 참관할 생각을 하니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침대에서 일어난 그녀는 레이나의 방을 둘러봤다.

         

       공작이 소유한 별장이라는데, 방의 내부 구성은 자신이 머무르던 곳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땅재주를 연습할 수 있는 매트가 바닥에 깔려 있었고, 구석에는 가볍게 몸을 풀기 좋은 도구들이 있었다.

       그리고 침대 머리맡에는 책들이 꽂혀 있었다.

         

       익숙한 표지들이었다.

       대부분이 서커스 잡지였다.

         

       얘도 나와 같은 서커스 외길인생이구나 싶던 엘라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책장에 꽂혀 있는 잡지들에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

       얼마 전에 나온 지난달 호까지 그랬다.

       책을 배달받자마자 책장에 꽂고는 손도 대지 않은 듯했다.

       심지어 과월호를 되짚어 나가다 보면, 포장조차 뜯지 않은 것들이 보였다.

         

       엘라는 잡지들을 펴보았다.

         

       몇 군데 읽은 티가 나는 곳도 있었다.

       그 기사들은 모두 공통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로드 판타스틱이 자신의 딸에 대해 언급한 인터뷰였다.

         

       엘라는 다시 방안을 둘러봤다.

       그제야 아까 보이지 않았던 몇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없었기에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 방의 주인은 자신과 달리 제일 좋아하는 곡예사의 포스터를 벽에 붙여두지 않았다.

       이 방의 주인은 자신과 달리 봤던 공연의 표를 모아두지 않았다.

       이 방의 주인은 자신과 달리 서커스 관련 기념품이나 장난감도 하나 가진 게 없었다.

         

       엘라는 살갑게 말을 붙여도 차갑게 반응하던 그녀가 떠올랐다.

       어려운 동작을 성공시키고 미소 한 번 짓지 않고 아버지가 앉은 객석만 돌아보던 그녀가 떠올랐다.

       동료 곡예사들이 그녀의 아버지에 대해 떠들던 말이 떠올랐다.

         

       그냥 막연히 승부에만 집착하는 재미없는 애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 상대방의 얼굴이 조금 보였다.

         

       ‘걔는 서커스를 좋아서 하는 게 아니구나.’

         

       그런데 그녀는 어떻게 그렇게 뛰어난 실력을 지닐 수 있는 걸까?

         

       엘라는 질투심이 울컥 솟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책장에서 가장 오래된 책을 뽑아 들었다.

       가장 낡고 헤졌지만, 또 가장 손때를 많이 탄 책이기도 했다.

         

       그것은 가족 앨범이었다.

       거기에는 환하게 웃는 아빠와 엄마 사이에 어설픈 동작으로 곡예를 흉내 내고 있는 어린 시절의 레이나가 있었다.

         

       ‘나는 아빠도 엄마도 모르는데…….’

         

       엘라는 지금쯤 원더스타인과 같이 있을 레이나를 떠올리며 볼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족이 있는 것만으로 감사할 줄 알아야지…….”

         

       그녀는 어서 파트너와 대화하기로 한 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

         

         

       다음 날, 레이나는 아침 일찍 훈련장을 찾았다.

         

       원더스타인은 해가 뜨기도 전에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나오는 그녀를 바라봤다.

         

       엘라도 늘 새벽부터 연습한다고 일어났기에 그도 일찍 일어나는 게 버릇이 됐다.

       루즈에서는 이러지 않았는데, 여기서는 아침 연습을 도와주지 않으면 토라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레이나의 눈가에는 애써 씻어내긴 했지만, 눈물에 부은 흔적이 또렷했다.

       아마 밤새 울었던 모양이다.

         

       원더스타인은 그녀의 뒤로 다가갔다.

         

       “엘라 양이 평소에 하던 훈련 메뉴대로 하겠습니까?”

         

       막 준비운동을 마치고 마당에 마련된 훈련 장비를 살펴보던 그녀의 몸이 순간 멈칫했다.

         

       엘라.

       그 이름이 언급되자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찰리에게 졌을 때도 찰리 본인에 대해서는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했던 그녀였다.

         

       그러나 엘라에 대해서는 달랐다.

       아버지를 뺏어간 계집애.

       시험을 치르는 내내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고 재잘거리는 것이 딱 그녀가 싫어하는 서커스 마니아의 행태를 보였던 그녀.

         

       그 애가 평소에 하는 훈련이라고?

       레이나는 보이지 않게 이를 악물고 원더스타인을 돌아봤다.

         

       “좋습니다.”

         

       원더스타인과 레이나는 10m 정도 거리를 두고 마주 보고 섰다.

         

       오늘 예정되어 있었던 엘라의 아침 수련은 ‘판자 격파’였다.

         

       원더스타인은 준비된 판자를 던지며 그녀에게 동작을 지시했다.

         

       그녀는 그가 지시하는 대로 판자를 정권 지르기로 부수고, 손날치기로 쪼개고, 발차기로 두 동강 냈다.

         

       판자들은 회전하며 날아갔고, 정확한 타이밍에 공격을 가하지 않으면 모서리에 적중당해 다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완벽에 가까운 동작과 속도로 무리 없이 판자를 격파해나갔다.

         

       ‘나는 지금 그 애와 겨루고 있는 거야. 아버지가 보고 계셔.’

         

       그녀는 그렇게 속으로 되뇌며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원더스타인은 2장, 3장을 한꺼번에 던져도, 여러 각도로 던져도 척척 잡아내는 그녀를 보며 미소지었다. 확실히 ‘설정상 최고’다운 솜씨였다. 엘라가 하는 훈련을 무리 없이 따라 해냈다.

         

       그렇게 2시간 넘게 지나자 단원들이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마당으로 나왔다.

       단원들은 둘이 연습하는 것을 지켜봤다.

         

       “저 애가 부단장과 마야 양이랑 또래라고?”

       “몇 살은 많아 보이는데…….”

         

       밴딕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상당한 미인인걸.”

       “그러게요.”

         

       우몬이 저도 모르게 맞장구를 쳐버렸고, 세쌍둥이 중 하나는 이놈 잘 걸렸다 하는 표정을 지었다.

         

       “우몬 요 녀석! 예쁜 누나만 보면 정신 못 차리지?”

       “마야가 들어왔을 때도 헤벌레하더니…….”

       “제, 제가 언제요!”

       “처음에는 엘라가 좋다고 따라다녔는데 말이지.”

       “자꾸 거짓말을! 크르르르!”

       “이크! 우몬 화났다!”

       “튀어!”

       “킥킥킥!”

         

       세쌍둥이는 정기적으로 이 덩치 큰 순박한 10살짜리 소년을 놀리는 낙에 살았다.

       우몬은 옆에 선 마야를 돌아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정작 당사자인 마야는 그를 흘끗 한 번 바라보고는 관심 없어 했다.

       유라크네는 빨간 피부가 더 빨갛게 변하는 우몬의 모습을 보며 쿡쿡 웃음을 흘렸다.

         

       그때, 가만히 있던 스벤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핫핫, 그러고 보니 둘이 부녀지간 같지 않습니까?”

         

       마지막 판자가 던져진 순간이었다.

         

       그는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다.

       판자를 던지고 받는 금발 남녀의 모습이 사이좋게 캐치볼을 하는 아빠와 딸을 연상시켰다.

         

       외모에서 보이는 나이 차이만 보면 부녀보다 남매에 가깝지만 말이다.

         

       “아.”

         

       부녀지간이라는 단어가 레이나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렸다.

       그녀는 그만 마지막 판자를 쳐내는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판자의 모서리가 그녀의 주먹을 때리고 떨어져 나갔다.

         

       실패다.

       완전 격파까지 한 장을 남겨두고.

         

       ‘또 졌어.’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며 질끈 눈을 감았다.

       몸이 떨렸다.

         

       그건 지난 10년간 몸에 밴 버릇 같은 거였다.

       그녀가 실수하는 순간 대번 싸늘한 시선이 그녀를 향해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책은 오지 않았다.

       대신 함성과 박수가 뒤따랐다.

         

       “대단하다! 주변에 널린 판자 조각들 좀 봐!”

       “엘라를 이겼다는 애가 쟤구나?”

       “와, 대단한데! 나는 날아오는 하나도 격파 못 했는데!”

       “나는 가만히 들고 있는 것도 못 부숴!”

         

       원더스타인이 그녀에게 웃으며 다가왔다.

         

       “잘하셨습니다! 후후, 과연 황금 천칭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군요.”

         

       레이나는 그제야 자신이 있는 곳이 황금 카니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진짜 대결이 아니었고, 지켜보는 아버지는 없었다.

       그 사실을 자각한 순간, 어떤 해방감 비슷한 것이 그녀의 겨드랑이를 간질이고 지나갔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손을 내민 원더스타인을 올려다봤다.

       마지막에 한 실수를 타박하기는커녕 잘했다고 칭찬해주었다.

       주변 단원들의 분위기를 보니 그녀가 손님이라고 특별히 배려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연습했구나, 그 애는.’

         

       그런데 그녀는 어떻게 그렇게 뛰어난 실력을 지닐 수 있는 걸까?

         

       레이나는 질투심이 울컥 솟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원더스타인의 손을 밀어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어젯밤 이곳에 오면서 깨닫게 되었다.

       그녀가 며칠 전에 내려보았던 골목길 사이로 사이좋게 손잡고 오르던 두 남녀.

         

       그 웃음소리와 목소리.

       비교해보니 알겠다.

       그들은 여기 있는 단장이라는 남자와 자신의 자리를 뺏어간 여자애가 틀림없었다.

         

       자신이 가는 길은 저들과 다르다며 애써 그들의 화목함을 깔봤었다.

         

       그런데 이 꼴은 뭔가.

       자부하던 곡예에서도 밀렸고, 아버지의 기대 역시 그 애가 앗아가 버렸다.

         

       “연습 끝났으면 같이 식사하죠!”

       “어제 새로운 단원이 오면 환영식을 하려고 준비한 것들입니다!”

       “핫핫, 저는 맛본 적이 없지만, 유라 씨의 요리 솜씨는 모두 알아주죠!”

         

       레이나는 괴물 단원들과 정원 테이블에 차려진 식사를 바라봤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둘러앉아 즐겁게 지내는 엘라의 모습이 떠올랐다.

         

       왠지 반발심이 들었다.

       그녀는 건물 방향으로 등을 돌렸다.

         

       “식사는 방 안에서 혼자 하겠습니다.”

         

       그건 평소의 싸늘하고 냉정한 그녀의 캐릭터 그대로였다.

       그녀는 당황해하는 단원들 사이를 지나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도로시 님, 30코인 후원! 1화 연재일이 6월 30일이니 어느새 반년입니다. 응원해주신 덕분에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완결까지 흐트러지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늘부터 그동안 혼란스러웠던 업로드 시간을 바로잡겠습니다.
    매일 오후 1시가 앞으로의 연재 시각입니다.

    1주일 6일 올리던 것도 7일로 다시 조정합니다.

    진행 속도가 느리다는 생각에 연재 속도에 박차를 가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연참이라는 것도 해보는 날이 오면 좋겠네요.
    우선은 비축분부터 쌓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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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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