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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4


    ​
    ‘잠깐…잠깐 그러니까.. 저 아가씨가 각하의 따님이라는.. ’
    ​
    ​
    집사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썼다. 
    ​
    ​
    그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과 동시에 오랜 세월 동안 가문을 섬기면서 마주쳤던 다양한 사건들을 떠올렸다. 그 경험들은 그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
    ​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얼굴 위로 평온한 미소가 돌아왔다. 놀라움이 완전히 가신 건 아니지만 이성을 붙잡아 추태를 보이는 건 멈출 수 있었다.
    ​
    ​
    ‘어떻게 아가씨가 각하의 핏줄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는 거지?’
    ​
    ​
    집사의 시선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아이리스와 리안을 향했다. 
    ​
    ​
    ‘설마 동생만이라도 좋은 가문에 남겨놓고 싶어서 그런 건가?’
    ​
    ​
    아이리스와 리안이 공작가의 핏줄로 의심된다는 건 성에 거주하는 웬만한 이들이라면 다 알고 있었다.
    ​
    ​
    굳이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낼 사람은 없겠지만(그런 이들은 견습 시기에 전부 쫓겨난다.), 100%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니다.
    ​
    ​
    입이 가볍거나 혹은 매수된 누군가가 리안에게 바람을 넣어줬다면 지금 같은 상황이 전부 설명되었다.
    ​
    ​
    살짝 탁하기는 하지만 하얀 머리카락과 리안보다 조금 더 짙어 더욱 영롱해 보이는 금안. 빼어난 외모와 관리받은 귀족처럼 뽀얀 피부. 공작과 너무나 유사한 성격까지.
    ​
    ​
    작정하고 준비한 거라면 못할 것도 없었다.
    ​
    ​
    ‘하지만… 이 노인네는 그저 믿고 싶군요.’
    ​
    ​
    어리석은 말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잃어버렸던 공작의 하나뿐인 핏줄이 돌아왔다고 무지한 이들처럼 믿고 싶었다.
    ​
    ​
    낡은 사진을 바라보는 것처럼 살짝은 촉촉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의 집사와 달리, 아이리스와 리안 쪽 분위기는 성 밖에 쌓인 눈처럼 시리게 굳어있었다.
    ​
    ​
    리안은 언젠가 반드시 해야 했던, 이미 정해진 이야기를 한 것뿐이었지만 아이리스에겐 갑작스럽게 떨어진 벼락처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일 뿐이었다.
    ​
    ​
    아이리스는 갓난아기 시절, 집사조차 그녀의 성별을 알지 못할 정도로 갓난아기 시절에 실종되었다.
    ​
    ​
    그녀가 자란 세계에서는 ‘엄마’나 ‘아빠’라는 단어보다 죽음이 얼마나 가까이 있고 쉽게 닥칠 수 있는지 배워야 했다.
    ​
    ​
    제국의 제일 검이라 불리는 공작과 세계를 구할 용사의 핏줄을 이었기에 그녀는 끔찍한 환경에서도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존재했다.
    ​
    ​
    처음으로 생긴 친구도, 자신을 위해 음식을 나눠주었던 언니도, 제 먹이를 나눠주면서 친해졌던 한쪽 눈이 없는 쥐도.. 전부 남김없이 그녀의 눈앞에서 싸늘하게 식어갔다.
    ​
    ​
    어디에도 의지할 수 없는 마음은 쉽게 무너져 내렸다. 부서지고, 부서져서 더 이상 그 형체조차 남지 않으려 할 때.
    ​
    ​
    그녀는 살기 위해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죽음만큼이나 조용한 고요 속에서 아이리스는 영원히 잠들기를 바랐다. 그런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따스한 빛이 다가왔다.
    ​
    ​
    아이리스의 마음은 마치 오랜 겨울을 지난 땅이 첫 봄비를 맞이하는 것처럼, 리안의 애정에 젖어 서서히 따스함을 되찾았다.
    ​
    ​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사막에 내리는 소중한 단비처럼 그녀의 마른 감정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 갈망했던 안식처를 찾은 것 같았다.
    ​
    ​
    그러나 그녀의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불안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마치 바람에 휘청이는 작은 배처럼, 행복한 순간마다 조금씩 흔들렸다. 
    ​
    ​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이 행복이 전부 가짜면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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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안은 왜 이렇게까지 나를 챙겨주는 걸까?
    ​
    ​
    돈이든 권력이든, 마왕의 땅에서는 사랑이나 애정조차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했다. 아이리스는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랐기에,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
    ​
    하지만 리안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깊이를 알 수 없는 애정을 끝없이 그녀에게 쏟아줄 뿐이었다. 아이리스는 행복하면서도, 언젠가 이 행복이 모래성처럼 무너질 것 같아 불안했다. 
    ​
    ​
    그런 아이리스의 불안을 가볍게 날려버린 말이 ‘가족’이었다.
    ​
    ​
    “우린 가족이잖아. 서로 애정하고 챙겨주는 게 당연한 거야!”
    ​
    ​
    가족이니까, 같은 핏줄이니까. 같은 하얀 머리, 같은 금안.
    ​
    ​
    같은… 같은..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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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리스에게 ‘가족’이란 리안에게 대가 없이 애정을 받아도 되는 면죄부였다. 리안을 마음껏 사랑하고, 마음껏 칭얼거리고 안아달라 조를 수 있는 그녀의 ‘특권’이었다.
    ​
    ​
    “말해야지. 말해야지 했는데… 널 집에 데려다줄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나서 까먹고 말았어. 미안해, 아이리스.”
   
    ​
    살짝 늘어진 하얀 눈썹과 내리 깐 눈동자 속에 미안하다는 감정이 가득했다. 따스한 봄날의 햇살처럼 부드러워 듣기 좋았던 리안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시체의 살을 파먹는 새의 울음처럼 섬뜩하게 들렸다.
    ​
    ​
    “앞으로는 -…”
    ​
    ​
    물속에 잠수한 채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리안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들려왔다. 아스라이 먼 곳에서 환호하는 소리와 박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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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끝에 비릿한 향기 맴돌고 비참한 울음이 들려왔다. 코끝에 비릿한 냄새가 맴돌았다.
    ​
    ​
    그건, 그래. 시체 처리장의 냄새였다. 시린 열기로 가득한 투기장의 목소리였고 차갑게 식어가던 제 오빠의 죽음이었다.
    ​
    ​
    리안이 아이리스를 가족이 아니라고 부정한 순간, 아이리스는 리안이 완전히 제 곁을 떠났던 그날을 상기했다.
    ​
    ​
    아이리스의 안쪽에 억눌려있던 것이 꿈틀거렸다.
    ​
    ​
    [ 가족도 아닌 널 사랑하겠어? ]
    [ 넌 버려질 거야. ]
    [ 봐봐, 벌써 떠나려고 짐도 다 챙겼잖아? ]
    ​
    ​
    그것은 절망과 함께 달콤한 말을 속닥거렸다.
    ​
    ​
    [ 가두자. ]
    [ 어디에도 갈 수 없게 가둬버리자. ]
    [ 그리고 오빠가 그랬던 것처럼 애정을 쏟아주는 거야. ]
    [ 받은 만큼 돌려주면 되잖아. ]
    ​
    ​
    그의 발목에 족쇄를 채워도 좋고, 다리를 부러뜨려도 좋으리라. 고통에 둔감한 오빠이니 그저 곤란하다는 듯 웃으며 받아줄지도 몰랐다.
    ​
    ​
    아무도 그와 그녀를 찾을 수 없는 세상의 끝에 집을 짓고, 단둘이서 행복했던 그 시절처럼 살아간다면 -…
    ​
    ​
    머릿속이 광기로 젖어 들고 하얗던 머리가 회색으로 물들려는 순간. 아이리스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
    ​
    ‘아니야, 싫어.’
    ​
    ​
    어느새 원래의 색으로 돌아온 그녀의 눈동자는 습기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눈동자 속에 간절함과 공허함이 함께 공존하고 있었지만 조금 전에 보여주었던 광기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
    ​
    ‘…오빠를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
    ​
    그를 제 곁에만 두고 싶었지만, 그것이 제 욕심이라는 걸 아이리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리안을 사랑하고 있기에 그를 괴롭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
    ​
    그렇기에 아이리스는 애절하고 절박하게 그를 붙잡았다. 그녀의 손끝은 버림받는 아이처럼 떨리고 있었다.
    ​
    ​
    “싫어. 오빠…나는.. 나는 싫어.”
    ​
    ​
    가지마, 제발 날 버리지 마. 
    ​
    ​
    “난, 나는… 오빠 동생이잖아. 그게 당연한 거 잖아.”
    ​
    ​
    어느새 그녀의 눈가와 목소리에 울음이 가득했다. 볼을 타고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흘러내리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
    ​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따스한 품이 아이리스를 안아주었다. 등을 토닥거리는 손길에서, 어쩔 줄 몰라 잔뜩 굳어버린 몸에서 아이리스가 그리도 원하던 애정이 가득 묻어났다.
    ​
    ​
    그녀는 뭣 모르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그의 품에서 억눌린 울음을 쏟아냈다. 
    ​
    ​
    ***
    ​
    ​
    ‘너, 너무 갑작스러웠나?’
    ​
    ​
    리안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소리 내 우는 아이리스의 모습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했다. 그저 어렸을 때 아이리스를 안아주었을 때처럼 조심스럽게 등을 토닥거릴 뿐이었다.
    ​
    ​
    ‘…언제 이렇게 컸지?’
    ​
    ​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겨우 걸음마를 시작했던 것 같은데(과장된 기억입니다.), 어느덧 내 턱 끝에 정수리가 닿을 정도로 자라있었다.
    ​
    ​
    허리에 매달리거나 무릎 위에 올라탈 때마다 ‘많이 컸네 -’ 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훌쩍 컸다는 사실을 이제야 눈치챘다.
    ​
    ​
    스륵.
    ​
    ​
    울음이 훌쩍임으로 변하자 그녀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 리안의 허리를 휘감았다. 두 사람의 거리가 틈 없이 맞물렸다. 
    ​
    ​
    “어…?”
    ​
    ​
    그저 따끈따끈하기만 했던 어린아이의 몸이 어느새 이리도 훌쩍 자랐는지, 섬세한 곡선을 그리는 허리선과 상체를 짓누르는 말랑한 감촉에 얼빠진 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
    ​
    ‘이, 이런 상황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
    ​
    겨우 얼굴이 홧홧해지는 생각을 털어내고 훌쩍거리는 아이리스의 등을 어색하게 토닥였다.
    ​
    ​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던 집사는 기척을 죽였다.
    ​
    ​
    ‘어째서 아가씨를 각하의 핏줄이라 확신하는지 궁금하긴 하지만… 지금은 그럴 분위기가 아닌 것 같으니 자리를 피해드려야지.’
    ​
    ​
    그는 소리 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
    ​
    스륵.
    ​
    ​
    문이 소리 없이 닫히고, 복도에 선 집사는 사색에 잠겼다.
    ​
    ​
    ‘어떠한 이유를 가지고 있든… 각하께서 돌아와야 정확한 확인이 가능할 터.’
    ​
    ​
    집사는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생각했다.
    ​
    ​
    ‘..각하께서 말은 안 하셔도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상처를 많이 받으셔서 내 선에서 처리하고 싶었는데.’
    ​
    ​
    공작이 화를 달래기 위해 사냥을 떠났다고는 하지만, 마왕군이 언제 공격해 올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 멀리까지 나갔을 리 없었다. 전선구를 보내면 며칠 내로 금방 돌아오실 것이다.
    ​
    ​
    그걸 알면서도 공작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연락을 미룬 건, 기대를 안고 돌아온 공작이 받을 상처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Ilham Senjaya님 오늘도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다음편 바로 올라옵니다!

추천과 선작은 사랑입니다!다음화 보기

‘잠깐…잠깐 그러니까.. 저 아가씨가 각하의 따님이라는.. ’

집사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썼다.

그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과 동시에 오랜 세월 동안 가문을 섬기면서 마주쳤던 다양한 사건들을 떠올렸다. 그 경험들은 그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얼굴 위로 평온한 미소가 돌아왔다. 놀라움이 완전히 가신 건 아니지만 이성을 붙잡아 추태를 보이는 건 멈출 수 있었다.

‘어떻게 아가씨가 각하의 핏줄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는 거지?’

집사의 시선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아이리스와 리안을 향했다.

‘설마 동생만이라도 좋은 가문에 남겨놓고 싶어서 그런 건가?’

아이리스와 리안이 공작가의 핏줄로 의심된다는 건 성에 거주하는 웬만한 이들이라면 다 알고 있었다.

굳이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낼 사람은 없겠지만(그런 이들은 견습 시기에 전부 쫓겨난다.), 100%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입이 가볍거나 혹은 매수된 누군가가 리안에게 바람을 넣어줬다면 지금 같은 상황이 전부 설명되었다.

살짝 탁하기는 하지만 하얀 머리카락과 리안보다 조금 더 짙어 더욱 영롱해 보이는 금안. 빼어난 외모와 관리받은 귀족처럼 뽀얀 피부. 공작과 너무나 유사한 성격까지.

작정하고 준비한 거라면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 노인네는 그저 믿고 싶군요.’

어리석은 말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잃어버렸던 공작의 하나뿐인 핏줄이 돌아왔다고 무지한 이들처럼 믿고 싶었다.

낡은 사진을 바라보는 것처럼 살짝은 촉촉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의 집사와 달리, 아이리스와 리안 쪽 분위기는 성 밖에 쌓인 눈처럼 시리게 굳어있었다.

리안은 언젠가 반드시 해야 했던, 이미 정해진 이야기를 한 것뿐이었지만 아이리스에겐 갑작스럽게 떨어진 벼락처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일 뿐이었다.

아이리스는 갓난아기 시절, 집사조차 그녀의 성별을 알지 못할 정도로 갓난아기 시절에 실종되었다.

그녀가 자란 세계에서는 ‘엄마’나 ‘아빠’라는 단어보다 죽음이 얼마나 가까이 있고 쉽게 닥칠 수 있는지 배워야 했다.

제국의 제일 검이라 불리는 공작과 세계를 구할 용사의 핏줄을 이었기에 그녀는 끔찍한 환경에서도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존재했다.

처음으로 생긴 친구도, 자신을 위해 음식을 나눠주었던 언니도, 제 먹이를 나눠주면서 친해졌던 한쪽 눈이 없는 쥐도.. 전부 남김없이 그녀의 눈앞에서 싸늘하게 식어갔다.

어디에도 의지할 수 없는 마음은 쉽게 무너져 내렸다. 부서지고, 부서져서 더 이상 그 형체조차 남지 않으려 할 때.

그녀는 살기 위해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죽음만큼이나 조용한 고요 속에서 아이리스는 영원히 잠들기를 바랐다. 그런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따스한 빛이 다가왔다.

아이리스의 마음은 마치 오랜 겨울을 지난 땅이 첫 봄비를 맞이하는 것처럼, 리안의 애정에 젖어 서서히 따스함을 되찾았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사막에 내리는 소중한 단비처럼 그녀의 마른 감정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 갈망했던 안식처를 찾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불안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마치 바람에 휘청이는 작은 배처럼, 행복한 순간마다 조금씩 흔들렸다.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이 행복이 전부 가짜면 어떡하지?

..리안은 왜 이렇게까지 나를 챙겨주는 걸까?

돈이든 권력이든, 마왕의 땅에서는 사랑이나 애정조차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했다. 아이리스는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랐기에,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리안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깊이를 알 수 없는 애정을 끝없이 그녀에게 쏟아줄 뿐이었다. 아이리스는 행복하면서도, 언젠가 이 행복이 모래성처럼 무너질 것 같아 불안했다.

그런 아이리스의 불안을 가볍게 날려버린 말이 ‘가족’이었다.

“우린 가족이잖아. 서로 애정하고 챙겨주는 게 당연한 거야!”

가족이니까, 같은 핏줄이니까. 같은 하얀 머리, 같은 금안.

같은… 같은.. 같은…

아이리스에게 ‘가족’이란 리안에게 대가 없이 애정을 받아도 되는 면죄부였다. 리안을 마음껏 사랑하고, 마음껏 칭얼거리고 안아달라 조를 수 있는 그녀의 ‘특권’이었다.

“말해야지. 말해야지 했는데… 널 집에 데려다줄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나서 까먹고 말았어. 미안해, 아이리스.”

살짝 늘어진 하얀 눈썹과 내리 깐 눈동자 속에 미안하다는 감정이 가득했다. 따스한 봄날의 햇살처럼 부드러워 듣기 좋았던 리안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시체의 살을 파먹는 새의 울음처럼 섬뜩하게 들렸다.

“앞으로는 -…”

물속에 잠수한 채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리안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들려왔다. 아스라이 먼 곳에서 환호하는 소리와 박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코끝에 비릿한 향기 맴돌고 비참한 울음이 들려왔다. 코끝에 비릿한 냄새가 맴돌았다.

그건, 그래. 시체 처리장의 냄새였다. 시린 열기로 가득한 투기장의 목소리였고 차갑게 식어가던 제 오빠의 죽음이었다.

리안이 아이리스를 가족이 아니라고 부정한 순간, 아이리스는 리안이 완전히 제 곁을 떠났던 그날을 상기했다.

아이리스의 안쪽에 억눌려있던 것이 꿈틀거렸다.

[ 가족도 아닌 널 사랑하겠어? ]

[ 넌 버려질 거야. ]

[ 봐봐, 벌써 떠나려고 짐도 다 챙겼잖아? ]

그것은 절망과 함께 달콤한 말을 속닥거렸다.

[ 가두자. ]

[ 어디에도 갈 수 없게 가둬버리자. ]

[ 그리고 오빠가 그랬던 것처럼 애정을 쏟아주는 거야. ]

[ 받은 만큼 돌려주면 되잖아. ]

그의 발목에 족쇄를 채워도 좋고, 다리를 부러뜨려도 좋으리라. 고통에 둔감한 오빠이니 그저 곤란하다는 듯 웃으며 받아줄지도 몰랐다.

아무도 그와 그녀를 찾을 수 없는 세상의 끝에 집을 짓고, 단둘이서 행복했던 그 시절처럼 살아간다면 -…

머릿속이 광기로 젖어 들고 하얗던 머리가 회색으로 물들려는 순간. 아이리스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싫어.’

어느새 원래의 색으로 돌아온 그녀의 눈동자는 습기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눈동자 속에 간절함과 공허함이 함께 공존하고 있었지만 조금 전에 보여주었던 광기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오빠를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그를 제 곁에만 두고 싶었지만, 그것이 제 욕심이라는 걸 아이리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리안을 사랑하고 있기에 그를 괴롭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이리스는 애절하고 절박하게 그를 붙잡았다. 그녀의 손끝은 버림받는 아이처럼 떨리고 있었다.

“싫어. 오빠…나는.. 나는 싫어.”

가지마, 제발 날 버리지 마.

“난, 나는… 오빠 동생이잖아. 그게 당연한 거 잖아.”

어느새 그녀의 눈가와 목소리에 울음이 가득했다. 볼을 타고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흘러내리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따스한 품이 아이리스를 안아주었다. 등을 토닥거리는 손길에서, 어쩔 줄 몰라 잔뜩 굳어버린 몸에서 아이리스가 그리도 원하던 애정이 가득 묻어났다.

그녀는 뭣 모르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그의 품에서 억눌린 울음을 쏟아냈다.

***

‘너, 너무 갑작스러웠나?’

리안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소리 내 우는 아이리스의 모습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했다. 그저 어렸을 때 아이리스를 안아주었을 때처럼 조심스럽게 등을 토닥거릴 뿐이었다.

‘…언제 이렇게 컸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겨우 걸음마를 시작했던 것 같은데(과장된 기억입니다.), 어느덧 내 턱 끝에 정수리가 닿을 정도로 자라있었다.

허리에 매달리거나 무릎 위에 올라탈 때마다 ‘많이 컸네 -’ 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훌쩍 컸다는 사실을 이제야 눈치챘다.

스륵.

울음이 훌쩍임으로 변하자 그녀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 리안의 허리를 휘감았다. 두 사람의 거리가 틈 없이 맞물렸다.

“어…?”

그저 따끈따끈하기만 했던 어린아이의 몸이 어느새 이리도 훌쩍 자랐는지, 섬세한 곡선을 그리는 허리선과 상체를 짓누르는 말랑한 감촉에 얼빠진 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이, 이런 상황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겨우 얼굴이 홧홧해지는 생각을 털어내고 훌쩍거리는 아이리스의 등을 어색하게 토닥였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던 집사는 기척을 죽였다.

‘어째서 아가씨를 각하의 핏줄이라 확신하는지 궁금하긴 하지만… 지금은 그럴 분위기가 아닌 것 같으니 자리를 피해드려야지.’

그는 소리 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스륵.

문이 소리 없이 닫히고, 복도에 선 집사는 사색에 잠겼다.

‘어떠한 이유를 가지고 있든… 각하께서 돌아와야 정확한 확인이 가능할 터.’

집사는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생각했다.

‘..각하께서 말은 안 하셔도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상처를 많이 받으셔서 내 선에서 처리하고 싶었는데.’

공작이 화를 달래기 위해 사냥을 떠났다고는 하지만, 마왕군이 언제 공격해 올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 멀리까지 나갔을 리 없었다. 전선구를 보내면 며칠 내로 금방 돌아오실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공작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연락을 미룬 건, 기대를 안고 돌아온 공작이 받을 상처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I’m the Only One With a Different Genre

I’m the Only One With a Different Genre

나 혼자 장르가 다르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n the world of comedy anime, I was living an ordinary life until I became possessed by a dark fantasy novel I was reading before falling asleep. ‘Hahaha! Don’t hold a grudge -..!’ ‘Ugh, cough cough…seriously…my clothes are ruined.’ ‘…!?’ Though I was stabbed in the stomach, I calmly stood up and pulled out the spear. Originally, residents of the comedy world are a race that can be torn into 100 pieces and still come back to life the next day. ‘Stop it! Stop now! How long do you plan to sacrifice me?’ ‘No…I mean..’ ‘I’ve become strong to protect you…what have I become?’ Residents in the comedy world are just a race that vomits blood even if they stub their toe. I never made any sacrifices..but my delusion deepens and my obsession grows. One day, while I was half-imprisoned and taking care of some pitiful kids… ‘Are you the boss?’ ‘Excuse me?’ Before I knew it, I had become the behind-the-scenes boss of a huge underworld orga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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