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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5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했다.

       

        채혈만 어떻게든 넘어가면 그다음은 편할 것이라며 안일한 태도를 보인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최고혈압이 80, 최저혈압은 40 근처…….”

        “엄청 저혈압이네요.”

        “그런데 맥박은 분당 170을 넘겼어.”

       

        이게 무슨 소리야.

       

        세피아의 말을 들은 로즈마리의 눈동자에 황망함이 깃들었다.

       

        “어, 언니.”

       

        자기 자신조차도 이번 일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입술을 우물거리는 로즈마리.

       

        80/40/170이라니. 일반인이 보더라도 말이 안 되는 수치다.

       

        “학생…. 정말 어떻게 살아있는 거야…?”

       

        혈압은 낮은데, 정작 심장은 마라톤이라도 한 것처럼 쿵쿵쿵쿵 뛰고 있다. 나는 내 심장이 2기통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효율 개쓰레기인 8기통이었던 것이다.

       

        “잘 들어, 학생.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알아?”

        “모, 몰라요.”

       

        나도 모른다.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고.

       

        “학생 몸이 많이 이상해. 비유하자면 구멍 뚫린 튜브에 펌프질 하고 있는 거랑 똑같아.”

       

        아.

       

        “어떡할까요? 정밀 검사를 받아보게 할까요?”

        “일단… 그래야겠는걸.”

       

        최악의 상황이다.

       

        심층적인 검사에 들어가면 정체를 들킬지도 모른다. 아니, 무조건 들킨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아예 안 잡히는 상황이라서, 머릿속이 평소의 배 이상으로 복잡해졌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시선이 좌우로 흔들렸다. 난시라도 겪는 것처럼 초점이 자꾸만 엇나갔다.

       

        “어, 언니.”

        “…….”

        “잠깐 기다려 봐.”

       

        로즈마리는 재빨리 아래층에서 임상병리사를 데리고 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조금 전에 내 피를 거짓 채혈해 간 웨이블이라는 이름의 청년이었다.

       

        웨이블에게선 알게 모르게 연초 냄새가 났다. 아무래도 마력초를 피우고 온 모양이다.

       

        “이 학생 혈압 상태가 이상하다고요?”

        “그래.”

       

        웨이블은 이마를 짚으며 픽 한숨을 쉬었다.

       

        “그럴 리가요.”

        “빈 말 아니고 정말 이상하다니까? 글리스턴 교수님이 여러 번 측정해 보셨는데 결과가 다 비슷하게 나왔어.”

        “아뇨, 잘못 측정하신 겁니다. 무조건이요.”

        “그, 그런가…?”

       

        초짜 임상병리사의 말 몇 마디에 어수선하던 검사실 분위기가 정돈되기 시작한다.

       

        “혈압이 어떻게 나오셨다고요?”

        “80/40/170이야.”

        “틀림없이 기구가 고장났겠죠. 아니면 잘못 측정하셨거나요.”

        “하지만….”

        “그 수치면 혈관 망가진 거나 다름없습니다. 분명히 아까 채혈할 때도 문제가 생겼을 거예요. 그런데 아무 문제 없었잖아요. 그렇죠?”

        “그, 그렇지.”

       

        세피아 선생님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부자연스러운 끄덕임이었다.

       

        조금 전까지 선생님은 내 혈압을 두고 크게 당황하셨었다. 그런데 지금은 훨씬 차분해진 태도로 웨이블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했다.

       

        “애초에 80/40/170이면 이 학생 당장 쓰러졌어야 해요. 지금 보세요. 안색 멀쩡하고, 잘 걸어다니고 있잖아요?”

       

        그의 언변에는 베테랑 치유마도사조차도 수긍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세피아를 포함한 모두가 웨이블의 말을 납득하는 표정이었다.

       

        그래, 이 분위기. 몇 번이고 경험한 적 있는 분위기다.

       

        이제야 알겠다. 눈앞의 남자는 인간이 아니다.

       

        “기다려 보세요. 제가 다시 한번 재 볼 테니까.”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 쓴 도플갱어는 다른 혈압계를 가져왔다.

       

        내 오른팔에 커프를 두르고,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도록 혈압계를 자기 쪽으로 돌렸다. 그걸 왜 돌리냐고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다.

       

        쉭쉭거리는 펌프질 몇 번과 함께 팔뚝이 조여들었고, 다시 풀렸다.

       

        “110에 80, 맥박은 분당 90. 정상이네요.”

        “어휴, 그럼 그렇지.”

        “글리스턴 선생님께서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어제 당직 아니셨나요?”

        “그, 그래서 그런가…? 아하하…. 내가 이런 실수를 다 하네…….”

       

        세피아 선생님은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나를 걱정하던 임상병리사들은 일이 일단락되자 제자리를 찾아 돌아갔다. 무슨 일인가 싶어 모여들었던 학생들도 이내 흥미를 잃고 떨어져 나갔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풀렸다.

       

        “이런 해프닝이 다 있네요.”

       

        가슴팍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로즈마리.

       

        “잠깐 귀 좀 빌려주세요.”

        “뭔데.”

        “……발각당하지 않으려면 빨리 정리하고 넘어오세요. 집에는 언니 편밖에 없으니까.”

        “…….”

       

        갑작스러운 귀가 요청에, 나는 무어라 말하지도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젓지도 않았다.

       

        지금은 그저,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

       

       

        그날 밤.

       

        황궁으로 돌아온 클리온 황자는 느닷없이 술병을 꺼내 병나발을 불기 시작했다.

       

        “황태자 전하, 얼마 안 있어 귀족 회의인데 음주를 하는 것은….”

        “에에이, 시끄럽다! 썩 나가봐라!!” 

       

        몇몇 가신들이 주중에 음주를 하는 것은 볼썽사납다며 걱정했지만 전부 뿌리쳤다. 분명 이런 자신을 본 궁중 시녀들은 망나니 황자라며 욕하고 돌아다니겠지.

       

        마음대로 하라 그래.

       

        “크흠, 퉷.”

       

        황성에서 자신의 입지가 얼마나 애매한지는 잘 알고 있다.

       

        인망 두터운 형은 마수가 지하감옥에 처넣었고, 여자나 밝히며 살던 자신은 이 모양 이 꼴이다.

       

        “인생 더럽게 안 풀리는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마 동급생들에게도 없는 사람 취급받을 줄이야.

       

        온더록스 잔에 담긴 술을 원샷하며 달큰한 트림을 삼킨다.

       

        되새김질하는 소처럼 추잡한 행동이었다. 클리온은 술김에 창문을 열고 투레질을 했다.

        “내일이 귀족 회의였나?”

       

        금칠을 한 창가 너머로 은은한 달무리가 내려왔다. 샛노랗게 빛나는 달을 보고 있자니 연회 때 드레스 코드를 노란색으로 잡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쪼르르

       

        클리온은 술잔에 달을 담았다. 보름달이 아닌 게 흠이지만 뭐 어쩌겠는가.

       

        달은 차면 기울어진다. 보름달을 잔에 담았더라면 곧 망할 제국의 모습이나 다름없다고 한탄을 했겠지. 그럴 바에야 차리라 반달이 낫지 않겠는가. 정취란 사람이 해석하기 나름인 것이다.

       

        씁쓸한 웃음을 지은 클리온은 푹 떨궜던 고개를 다시 들었다.

       

        “음…?”

       

        달이 사라졌다.

       

        클리온은 눈을 비비적거렸다. 이게 뭔 일인가 싶어 눈살을 찌푸렸 시선을 한데 모았다.

       

        웬 남자 하나가 창틀을 밟고 서 있었다.

       

        ‘뭐지…?’

       

        검고 두꺼운 로브를 두른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 자세히 보니 얼굴도 철제 가면으로 가리고 있다.

       

        괴이쩍은 패션이었다. 그러나 클리온은 눈 하나 끔뻑하지 않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웬 놈이냐.”

        “쉿.”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황자의 침실에 발을 디뎠다.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클리온은 불쾌감만 내비쳤을 뿐, 평소처럼 큰 목소리로 엄포를 늘어놓지는 않았다.

       

        이는 현명한 판단이었다.

       

        “나다, 버멜 호르데.”

        “호르데? 아, 그렇군.”

       

        목소리로 알아챘다.

       

        다소 우스꽝스러운 패션의 주인공은 엘프 유학생이었다.

       

        자신을 마수의 세뇌로부터 풀어준 인물. 몇 달간 틈틈이 교류하며 미약하게나마 신뢰를 다져나갔다. 세뇌가 풀린 클리온의 사교력은 못해도 평균 이상은 되었기에 버멜과 매끄러운 대화를 나누는 건 일도 아니었다.

       

        “여기 앉아도 되나?”

        “내 친히 허락하지.”

       

        클리온은 재빨리 방문에 잠금쇠를 걸었다. 이걸로 아무도 못 들어올 것이다.

       

        “받아.”

       

        기다렸다는 듯 스크롤을 건네는 버멜. 세뇌 방지 스크롤을 받은 클리온은 럭셔리 소파에 몸을 파묻으며 손을 깍지꼈다.

       

        “2학기 시작하자마자 자퇴했다고 들었는데.”

        “자퇴는 맞아. 마수에게 찍혔거든.”

        “…그렇군. 블랜튼 공녀가 널 죽이려고 하는 모양이지?”

        “정확해.”

       

        버멜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가면 너머로도 불안한 기색이 드러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재앙급, 혹은 그 이상의 마수는 아직 아카데미를 다니는 학생에게는 너무 버거운 상대였으니.

       

        “안심해라. 이 시간에 여기 들어올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안심 못 해. 공작 딸은 웬만한 곳을 원격으로 감시할 수 있어. 여기도 위험해.”

        “…그럼 용건만 나누고 빨리 찢어지는 게 좋겠군.”

       

        버멜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를 내밀었다. 하얀 알약이었다.

       

        “이건…?”

        “황제 폐하께 드리는 걸 추천할게.”

        “먹는 건가?”

        “독약의 일종이야.”

       

        ‘쇠락의 원(元)’. 음료베이스에 해당하는 약품으로써, 복용한 사람을 일주일간 앓아눕게 만드는 아이템이다.

       

        “이걸 아버지에게 드리라고…?”

       

        독약이라는 소리를 들은 클리온은 눈을 멀뚱거렸다.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곧 있으면 귀족 회의잖아.”

        “그런데?”

        “블랜튼 공작과 딸도 올 거야. 내가 무슨 말 하고 싶은지 알겠어?”

       

        나지막한 탄식이 클리온의 목구멍을 통해 흘러나왔다.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귀족 회의. 귀족 회의에서는 정무를 보는 모든 귀족과 그 자제가 참석한다.

       

        특히 4대공작은 전원 참석하게 되어 있다. 평소 비대한 제국의 각 영역을 통치하던 제후들이 한 곳에 모이는 자리이니 만큼 일시적인 행정 비대칭이 발생할 터.

       

        마수가 큰일을 벌이기에는 적기였다.

       

        “독약이라도 말은 했지만, 일시적으로 피곤하게 만드는 것 외에는 다른 기능 없는 약이야. 이걸 아버지에게 드리고, 네가 대신 회의를 주관하면서 일 커지는 걸 어떻게든 막아줘.”

       

        확실히, 일리는 있는 말이었다.

       

        지금 아버지 다음으로 서열이 높은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제아무리 블랜튼 공작이 뭘 한다고 해도 클리온이 제지한다면 수를 물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생긴다.

       

        그래도, 그래도 말이다.

       

        “그건 안 될 일이다.”

        “왜?”

        “위계에 맞지 않는 것이야.”

       

        황실의 최고권력자는 아버지다. 모든 권력은 황제로부터 나온다.

       

        “내가 아버지를 독살하려 했다는 소문이라도 나돌면 그땐 내가 어떻게 되나!”

        “그럴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거야.”

        “어떻게 장담하지?”

        “내가 그렇게 이끌 테니까.”

       

        논리는 빈약하기 그지없었지만, 목소리는 결연에 차 있었다. 클리온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 그리고 말이다. 이 약이 일주일만 쇠락하게 만든다는 보장이 어디 있지?”

        “내가 폐하를 암살 시도하는 거로 보여?”

        “아예 아니라고는 말 못하지.”

       

        버멜은 고개를 내저었다.

       

        “마수가 지금까지 잠자코 있었던 건 제국 최고권력자를 입맛대로 다룰 수 있기 때문이야.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가 폐하를 멋대로 시해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새 황제를 옹립하겠지.”

        “누구를?”

        “…….”

       

        다시 한번 말문이 막힌다.

       

        1황자인 형은 마수들이 이미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 지하감옥에 가둬버렸다. 클리온보다 세뇌 저항이 심했던 까닭이다.

       

        또한 클리온은 세뇌에서 풀려났다. 이걸 마수가 모를 리 없다. 그래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망나니를 연기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정통한 핏줄인 자신이나 형을 왕으로 세울 수 없다는 판단이 선다면….

       

        “폐하가 돌아가시면 제국은 끝장이야.”

       

        쓸모없는 건물을 철거하는 것처럼, 더는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제국을 아예 박살 낼지도 모른다. 일부 학자들은 이 과정을 ‘해체 작업’이라고 불렀다.

       

        “해체 작업이 진행되면 제국은 순식간에 무너지겠지. 귀족은 다 죽어. 민중은 도탄에 빠져. 틸레트에 있는 마도사들은 죄다 마왕성으로 끌려가 인간 마력초가 될 거야. 당연히 군대는 무너지고, 영토는 전부 마수들의 것이 되겠지.”

       

        제국이 무너지면 그 다음은 어디인가. 

       

        “카우렐리아 국경에 브릴뤼움 대폭포가 있는 건 알지?”

        “…정령계.”

       

        정령의 도원으로 통하는 입구가 정면으로 노출된다. 틀림없이 마수들의 다음 목표는 정령계일 것이다.

       

        클리온은 그 어느 때보다도 깊고 어두운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쪽이든 암울한 선택이었다.

       

        “이런, 시간이 없네.”

       

        철가면을 고쳐 쓴 버멜이 서둘러 창가에 발을 디뎠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말한 대로 해 주면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 하지만 어떻게 할지는 네 선택에 달렸어. 이 일은 너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버멜은 그렇게 떠났다. 클리온의 손에는 그가 주고 간 하얀 알약이 있었다.

       

        음료베이스라고 했나? 그렇다면 물에 타서 섭취하는 것일 터.

       

        “아버지….”

       

        명예와 위신을 지키고 마수에게 서서히 좀먹힐 것인가.

       

        불명예를 떠안고 위신조차 저버린 채 다른 나라에서 온 엘프의 말을 믿는 리스크를 감수할 것인가.

       

        고민은 동이 트도록 계속되었다. 달이 지는 동안 시원했던 술잔도 미지근하게 변했다.

       

        그러다가 문득.

       

        ‘잠깐. 인제 와서 잃어버릴 명예나 위신 같은 게 있던가?’

       

        머릿속을 스치는 기발한 변명거리가 하나.

       

        ‘나 망나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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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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