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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시간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눈을 뜨면 훈련하고, 밥을 먹으며 잠시 휴식한 후 다시 훈련.
피곤해서 저녁 먹을 생각은 전혀 없지만 그래도 억지로나마 꾸역꾸역 실비아가 사냥해온 고기를 먹어 치운 뒤, 곧장 누워 잠드는 나날의 반복이 이어졌다.
정말 신기하게도… 아니, 이 고된 훈련이 의미가 있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듯, 내 몸은 점점 이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뛰어도 헉헉거리던 저질스러운 체력도, 온종일 달리고 나면 다음 날은 반드시 쉬어줘야 했던 후들거리는 다리도 이제는 다 옛일이 되었다.
모진 훈련에 드디어 내 다리가 맛이 가버린 것인지, 아니면 내가 달리는 것에 익숙해진 것인지는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이제는 실비아의 가벼운 뜀걸음 정도는 뒤처지지 않게 따라갈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감격스럽기도 했다.
내 훈련 교관이자, 동기 부여를 담당하는 존재인 실비아 역시 이런 내 변화에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비록 나뭇가지뿐 아니라 그녀가 애용하던 그 커다란 검마저도 세 번 중에 한번은 아슬아슬하게 피해내자 조금 경쟁심이 자극되는 모양이긴 했지만, 실비아는 분명 내 성장에 크게 기뻐하고 있었다.
솔직히 나로서는 당장에 느껴지는 피로도의 차이만 알아차렸을 뿐, 딱히 내 신체의 외형적인 변화를 느끼지 못했으나,
적어도 밤일을 할 때마다 내 몸을 쓰다듬으며 기분 좋은 듯 미소 짓는 실비아를 보면, 내가 전보다 더 단련된 신체를 지니게 되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인 모양이었다.
전보다 더 커진 탄성을 내지르며 활처럼 휘는 실비아의 허리 역시 그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방금 말한 내용으로도 눈치챌 수 있겠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비아와의 밤일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나로서는 마왕의 성으로 가는 것을 꺼리는 실비아를 독려하기 위한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과오를 되새기는 것이나 다름없는 그 여정을 강요한 것에 대한 나의 죄책감을 해소할 방법이 그것뿐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그녀의 아래에 깔려 허리를 들썩일 때마다 피아의 눈치가 보이긴 했지만, 피아 역시 실비아가 꼭꼭 숨겨왔던 나약한 모습을 본 이후론 아무런 불만도 내비치지 않았다.
아니, 적어도 불만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실비아가 거친 숨을 내쉬며 천천히 상의를 들어 올리면 떨떠름한 표정을 짓다가 금세 모습을 감추곤 했으나, 그 일로 나를 크게 나무라는 일은 없었다.
나는 정령 술사로서 피아의 스트레스를 관리해야 할 의무가 있었기에, 실비아씨가 내 곁에 없을 땐 늘 피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최대한 그녀의 비위를 맞춰 주려 노력했다.
피아도 그런 내 노력을 알아준 것일까,
정령 술 역시 날이 갈수록 조금씩 능숙해지고 있었다.
“애쉬.”
“… 응?”
어느 날 아침,
호수에서 잡아 온 물고기를 구워 먹은 나와 달리, 입맛이 없는지 작은 겨울딸기 몇 알 만을 집어먹던 실비아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입가에 묻은 잿가루를 닦아내며 그런 실비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래?”
“있잖아… 앨리스 말인데,”
“앨리스 누나?”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슬슬 올 때가 되지 않았어?”
“아… 그런가? 그렇겠네, 한 달이라고 했으니까… 음…”
나는 관자놀이를 긁적거렸다.
나 역시 이젠 숲에서 지낸 시간이 꽤 되는 데다가, 매일 매일 하는 것이라곤 훈련과 섹스 뿐이었다 보니, 점점 날짜를 세는 것이 어려워지고 있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체감상으로는 앨리스 누나가 약속한 한 달이 거의 다 되어가는 것 같았다.
아니면 이미 지났거나.
“곧 누나가 돌아오겠구나.”
“… 흐음.”
실비아는 조금 신경이 쓰이는지, 팔짱을 끼며 작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분명 앨리스 누나와 실비아는 서로를 격하게 싫어했을 텐데, 막상 약속한 시각이 되어가는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앨리스 누나가 걱정되기라도 하는 걸까?
하긴, 이제 곧 서로의 등을 맞대며 함께 여정에 올라야 할 사이인데, 언제까지고 으르렁거리는 건 프로답지 못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전설적인 용사인 실비아와 교황 직속 이단 심문관인 앨리스 누나는 분명 프로 중에 프로였다.
나는 고민 중인 실비아를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도 걱정되네, 바깥세상은 개판이라고 했으니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지.”
“응? 애쉬, 그게 무슨 소리야?”
“음?”
실비아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뜨며 내게 되물었다.
“걱정을 왜 해? 앨리스한테 무슨 일 생기기라도 했을까 봐?”
“어… 실비아도 그래서 말한 거 아니야?”
“아니, 나는 그년 걱정 안 하는데?”
“…”
“나는 그냥 앨리스 그 재수 없는 애가 올 때가 되었구나, 라는 생각만 했을 뿐이야.”
아니었나 보다.
아무래도 프로라는 건 으르렁거리면서도 할 일 다 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었던 모양이다.
실비아는 천천히 두 팔을 내리더니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즉, 우리가 마왕을 향해 여정을 떠날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해. 애쉬.”
“…아.”
나는 짧게 탄식을 내질렀다.
갑자기 막연하게만 느껴지던 미래가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온 기분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오늘 훈련 일정은 전부 취소야.”
“어? 정말?”
갑작스러운 훈련 취소 소식에 나는 나 자신도 모르는 새 얼굴 가득 활짝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실비아는 그런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
“아… 아니 그게.”
“애쉬… 너무 기뻐하는 거 아니야?”
“하, 하하… 훈련이 힘들긴 하니까.”
몸에 체력이 붙고,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어도 여전히 훈련은 고되고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강해져야 하는 목적이 분명한 주제에 순간적으로 기쁨을 숨길 생각도 못 했다는 사실이 왠지 수치스러워진 나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실비아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흐음… 그 기분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렇게 좋아하기엔 아직 일러.”
“무슨 소리야?”
“오늘은 훈련이 아니라 시험을 볼 생각이거든.”
“시험?”
“응. 시험. 애쉬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여정 중에 죽지는 않을지 판단해보려고.”
“… 어떻게?”
실비아는 손바닥을 천천히 펼쳐 보이며 짧게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거 기억나?”
실비아의 손바닥 위에 엄지손가락 만한 얼음이 천천히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 아, 그건…”
똑똑히 기억난다.
아직 내가 실비아를 실비아씨 라고 부르던 그 시절.
마물 곰에게 쫒겨 죽을 뻔했던 그날 이후, 내 마법을 훈련 시키겠다는 목적으로 그녀가 내게 던져대던 그 얼음 조각이었다.
실비아는 한손으로 천천히 얼음을 위로 던졌다 다시 받으며 말했다.
“규칙은 비슷해. 그때처럼 나는 이걸 애쉬에게 던질 거야.”
“그거… 무지 아팠던 거 알아?”
“음… 이번엔,”
그 순간, 내 얼굴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매서운 돌풍이 느껴졌다.
날카롭고 묵직한 바람이 뺨을 할퀴고 지나간 것 같기도 했다.
그때보다 더 길어진 머리카락이 세차게 휘날렸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벽에 자그마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동작이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실비아가 얼음 조각을 내 옆으로 지나가게 던진 모양이었다.
“맞으면 아픈 걸로는 끝나지 않을 거야.”
“… 죽겠는데.”
“즉사만 아니면 괜찮아. 내가 어떻게든 목숨줄은 붙여줄 거고, 앨리스가 오면 말끔히 나을 테니까.”
실비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무시한 말을 뱉었다.
예전에 보았던, 그녀가 던진 얼음 조각에 맞은 것만으로도 곰의 사체가 폭발하듯 터져나간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천천히 재생되었다.
이내 곧, 그 장면 속 곰의 사체가 내 몸뚱이로 대입되기 시작했다.
당연하겠지만, 저 위력은 제대로 맞는 순간 어떻게 손 써볼 겨를도 없이 즉사다.
“… 허,”
“애쉬.”
넋이 나가서 멍청하게 앉아있는 내게 실비아는 나지막이 말했다.
“만약 네가 정말로 마왕에게 가려면,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야 해. 그날 너를 죽일 뻔했던 그 곰 정도는 가볍게 쓰러트릴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야.”
“… 그렇겠지.”
솔직히 마왕이라는 존재는 너무나 크고 강해서 거리감이 있었다.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정작 그 강함이 상상도 되질 않아서, 막연하게 용기를 가질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막상 지금 내 눈앞에 그날 만났던 그 곰이 다시 나타난다면, 나는 그 곰을 쓰러트릴 수 있을까.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실비아는 그런 내 의심을 알아차린 듯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의 애쉬라면 분명 할 수 있어.”
“… 내 체력이 늘어났다는 건 알겠지만, 내가 그 곰을 쓰러트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안 드는데,”
“그렇겠지, 애쉬에겐 그런 승리의 경험이 만든 강렬한 성공의 이미지가 아직 없을 테니까.”
실비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그 이미지, 내가 만들어줄게. 오늘 내 시험을 통과한다면, 그건 그 곰 따위는 진작에 뛰어넘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거든.”
“… 정말 그럴까.”
“그럼, 오늘의 시험은 그만큼 힘들 테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저런 속도로 날아오는 걸 녹이는 건 어렵겠는…”
“어머, 누가 얼음을 녹이라고 했어?”
“… 어?”
실비아는 내게 천천히 다가와 고개를 숙이더니,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오늘의 시험, 합격 조건은 얼음 조각을 녹이거나 피하는 게 아니야. 이미 애쉬는 그때보다 달리기도 늘었고, 반사신경도 늘었고, 정령도 더 잘 다루게 되었으니 마법도 더 잘 쓰게 되었을 테니까, 그건 너무 쉽잖아.”
“… 그럼, 합격 조건은 대체…”
실비아는 웃었다.
뭘 그런 당연한 걸 묻냐는 듯한 까르륵 거리는 웃음소리였다.
새하얀 피부에 붉은 꽃처럼 반짝이는 눈과 입술이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그 모습이 왠지 무척이나 불길해 보였다.
잠시 후, 웃음을 멈춘 실비아는 내게 말했다.
“당연히 나를 쓰러트리는 거지”
“… 네?”
나도 모르게 존댓말이 다시 튀어나왔다.
“물론 나는 검을 쓰지 않을 거야. 내가 쓰는 건 오직 이 얼음 마법, 아니 얼음 마법도 아니지, 마법으로 만든 얼음을 너한테 힘껏 던지는 것뿐이야.”
“… 정신 나갔어?”
“나를 쓰러트리면 그깟 곰쯤이야. 그렇지?”
“실비아…”
그야 당연하다.
아무리 실비아가 검을 쓰지 않는다 해도, 그녀를 쓰러트릴 수 있다면 더 이상 곰 정도는 상대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 페널티로는 실비아를 이길 수 없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장담할 수 있었다.
왠지 막연하게만 느껴지는 마왕과는 달리, 실비아가 얼마나 강한지는 내가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못 해.”
“그렇게 일찍 포기하는 건 나쁜 버릇이야 애쉬, 물론 나를 완전히 제압하는 건 쉽지 않겠지.”
“쉽지 않은 게 아니라 불가능해.”
“… 또 머리가 굳었어. 그것도 애쉬의 나쁜 버릇이야.”
“무슨 소리야?”
실비아는 내 머리를 가볍게 콩 두드리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딱히 애쉬와 목숨을 걸고 사생결단을 하려는 것도 아니잖아.”
“… 어?”
“합격 조건은 어디까지나 제압. 그러니까, 나를 넘어트리거나 움직이지 못하게 하거나, 아니면 더 이상 공격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거나… 뭐 그 정도면 되는 거야.”
나는 순간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실질적으로 실비아나 앨리스 누나, 둘 중 그 누구도 내가 마왕을 직접 물리칠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내가 해야 할 것은 그 두사람의 서포트.
마왕의 발을 묶거나 잠시 비틀거리게만 만들어도, 내 몫은 충분하고도 넘칠 만큼 수행하는 셈이었다.
실비아의 의도를 알아차린 나는 천천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내 떨림이 멎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동료들과 함께하는 실전에선 그것만으로도 사실상 모든 게 결정되거든. 마무리는 옆 사람이 지으면 되니까. 실질적으로 애쉬가 적을 물리치는 것보단,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일이 더 많을 테고.”
“… 응, 그렇네. 내가 너무 바보 같은 생각했어.”
“애쉬는 똑똑하지만 은근히 바보 같을 때가 있지.”
실비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천천히 걸어 오두막을 나섰다.
오두막 문이 닫히기 직전, 그녀는 나지막이 말했다.
“준비되면 나와. 그때부터 시험 시작이니까.”
“…”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아니, 작전을 세우고 있었다는 게 더 올바른 말이었다.
하지만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실비아와 미친 듯 싸우는 게 아닌, 잠시라도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면 통과인 시험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쉬운 시험이라는 건 결코 아니었다.
제압이라는 게 말이 쉽지, 그녀는 사람을 넘어트리는 텀블 주문을 맞고나서도 버티며 서있을 수 있는 상식 밖의 존재였으니 말이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마법, 내가 할 수 있는 움직임.
그 모든 것을 고려해 보아도 적절한 답은 쉽게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실비아를 쓰러트릴 수 있을지 고민하던 그때,
“애쉬.”
어느샌가 나타난 피아가 내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애쉬, 하자.”
“… 피아?”
“하자, 할 수 있어. 애쉬.”
나는 갑자기 나타난 피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 귀를 쫑긋 세우고, 꼬리도 바짝 서 있는 모습은 마치 개나 늑대가 성내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 피아, 갑자기 왜 그래?”
“… 한 대만,”
“응?”
“저 여자, 어떻게든 한 대는 때려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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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요참치캔 님 10 코인 감사합니다.
늦게 봐서 몰랐는데, 크리스마스날 받은 선물이 있긴 했었네요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