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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5

     

    이후 몇 가지 내용을 더 정리한 후 회의는 끝났다.

     

    하지만 나와 아셀라는 바로 돌아가지는 못했는데, 황제가 황녀 셋만 따로 불러 자리에 남겼기 때문이었다.

     

    “헤이케, 라우가, 아셀라.”

     

    그가 셋을 모아놓고 말했다.

     

    “게오르크는 아직인가.”

     

    “얼마 안 있어 황궁으로 돌아올 시기가 됩니다.”

     

    “음, 그럼 나중에 전하라.”

     

    황제가 세 사람에게 전했다.

     

    “마왕군과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짐이 살아있다는 보장이 없다. 아니, 어쩌면 전쟁 발발 전까지도 모를 일이다.”

     

    “폐하.”

     

    “들어라. 짐의 몸은 짐이 가장 잘 안다. 이 육체는 수명이 다했다. 고트베르크가 아니었으면 진작 병상에 누워 일어나지도 못했으리라.”

     

    세 황녀는 엄숙하게 황제의 말을 들었다.

     

    “자네가 보기엔 어떠한가, 앰브로시아.”

     

    “그것은…”

     

    앰브로시아가 말을 흐렸다. 황제에게 거짓을 고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분명 내 케어 덕에 황제의 건강 상태는 본래의 역사보다 훨씬 좋다.

     

    하지만 삶의 질을 올려놓기는 했어도 수명 자체가 대단히 늘어나지는 않았을 터다.

     

    본래 역사에서는 리비오의 암살이 결정타였을 뿐, 본래 시름시름한 상태였다는 기록이 있었다.

     

    리비오야 황제가 암살로 죽었다는 결과가 필요했으니 굳이 그리 행동했었겠지. 병자이니 암살하기도 더 쉬웠을 터다.

     

    팔켄하인이나 시모어에 비하면 젊은 나이이지만 신체가 한계를 맞이했다. 젊은 시절에 정기를 너무 많이 썼다.

     

    “승계권자인 너희와 게오르크까지 넷에게 내리는 진언이다.”

     

    “예.”

     

    세 황녀는 황제의 말을 어느 때보다도 진중한 자세로 경청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짐이 없다면, 너희 중 마왕 토벌전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이가 차기 황제가 되어라.”

     

    새로운 기준이었다.

    이로써 승계전은 새 국면을 맞이했다.

     

    “너희가 그간 성장시켜온 궁의 정치력과 재원은 앞으로 있을 마계와의 전쟁에 있어 사용할 기반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진행된 승계전도 토대가 된다는 뜻이다.

     

    “평가 기준은 세세하게 세워놓겠다. 짐에게만 충성하고 내가 믿을 수 있는 자들에게 채점을 맡길 것이다.”

     

    지금처럼 완전히 경쟁으로 이어진 승계전은 공공의 적이 생겼으므로 비교적 협력과 보이지 않는 견제가 펼쳐지는 양상으로 변하지 않을까 예상됐다.

     

    그나저나 황제는 마왕군에게 패배하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감이 대단했다.

     

    “뷔르템펠트는 승리한다.”

     

    그의 선언과 함께 세 황녀는 해산했다.

     

     

     

    ***

     

     

     

    죽음을 준비하면서도 제국을 위해 쉴 틈 하나 없던 황제의 모습은 내게도 꽤 인상 깊게 남았다.

     

    ‘그게 황제가 가진 재능의 대가일지도.’

     

    천부적인 통치의 재능을 가진 대신 그것을 펼치려면 평생 죽는 순간까지.

     

    어찌 보면 황제는 자신만의 삶을 산 적은 없었으니 꼭 행복한 인생은 아니었겠지.

     

    본인도 어느 정도 후회하는 듯했고.

     

    ‘나도 마찬가지야.’

     

    배드엔딩을 다 지우고 의사로 업적을 세운다 한들 디버프 때문에 요절해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다.

     

    지금도 약제인 사탕을 달고 살아야 하니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문제다.

     

    ‘연금술이 없었으면 진작 죽었겠지.’

     

    의학으로 내 디버프를 진단하고 상쇄할 순 없다. 초자연적인 현상에는 과학법칙을 무시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언젠가 내 디버프도 지울 수 있을지도.’

     

    현재 연금술의 통합 스킬랭크는 C다.

    이제 B에서 성장이 더뎌 멈춘 의학보다 이쪽을 키우는 건 어떨까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기사단이 복귀하는군요.”

     

    그런 생각을 하며 상태창을 보고 있으니 타냐가 말해왔다.

     

    외부에서 기밀 임무를 수행한 월광궁 기사단이 도착하는 참이었다.

     

    물론 내용은 용사 호위다.

     

    자작령은 텔레포트 게이트도 없는 깡촌이라 직접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후우.”

     

    내 옆에서 아셀라가 불안했는지 손가락을 한 자리에 두지 못하고 톡톡 두들겨댔다.

     

    용사를 당분간 관리하게 된 막중한 임무가 부담된 모양이다.

     

    “황녀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용사가 지방 출신이어도 그렇게 무뢰한은 아닐 겁니다. 뭐, 인성 파탄자가 선택받은 적도 있었다고는 하지만 제 느낌은 왠지 좋아요.”

     

    “뭐? 아니, 그런 걱정은 안 해. 말을 안 들으면 들을 때까지 매질하면 그만이잖아.”

     

    아, 아셀라는 그런 스타일이었지.

     

    “내가 걱정하는 건 그런 게 아니라… 라스, 혹시 눈도 고칠 수 있니?”

     

    “눈이요? 시력을 보호하는 방법은 몇 추천해드릴 수 있지요. 하지만 잃어버린 시력은 치유술로는 일단 회복이 불가능하고, 어디 보자.”

     

    상태창을 확인한다. 라식 수술은 가능하긴 할 듯했다.

     

    “시야 방해 마법에 걸려도 원상복구가 가능하냐는 의미였어.”

     

    “이미 제 영역이 아닌데요.”

     

    “그렇네… 됐어, 내가 잘못 생각했어. 아무리 그래도 네게 그런 위험한 마법을 걸면 안 되겠지.”

     

    자기가 아니라 내 시력 얘기였어?

    뜬금없이 어쩌다 그런 발상이 떠오르셨는지 모르겠네.

     

    아셀라가 슬그머니 내 백의의 끄트머리를 잡아왔다.

     

    “라스, 폐하가 새 임무를 내리셨어도 네 본분은 안 잊을 거지?”

     

    “제가 황녀님의 주치의라는 말씀이시죠.”

     

    “…맞아.”

     

    아셀라가 불안해한 이유는 그쪽이었다.

     

    혹시 내가 용사를 관리하다가 자기를 덜 신경 쓸 줄 알았나.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용사는 제가 주치의로서 담당하기엔 이해관계가 많이 걸려있죠. 내의원의 협력을 받아 팀 단위 프로젝트로 진행하는 형태가 됩니다.”

     

    내가 아셀라의 손목을 슬쩍 잡아 손가락을 동글게 말았다.

     

    “아침에는 황녀님의 맥을 먼저 짚으러 올게요. 약속하죠.”

     

    “흐응, 그렇구나. ”

     

    내 대답을 들은 아셀라는 주체하지 못하는 입꼬리를 숨기려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머리칼이 기품있게 휘날렸다.

     

     

    ―히히힝!

     

    마차를 끌고 온 말들이 월광궁의 정문 앞에서 멈추었다.

     

    임무를 수행한 기사들이 단장에게 보고를 올리고 태세를 정비한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안에서 기사와 함께 한 명이 내린다.

     

    “와아!”

     

    커다란 눈망울에는 별자리라도 담아왔는지 한없이 반짝인다.

     

    살짝 붉은 계열인 머리칼과 피부에는 시골의 흙밭 느낌이 물씬 풍긴다.

     

    따뜻한 목초지 지방에서 와서 그런지 이 한겨울에도 다 낡아 떨어진 천 한 장만을 입고 있다.

     

    촌스러운 시골 처녀라고 할까.

     

    그것이 용사.

     

    리셰라는 여자를 처음 본 사람들이 가질 첫인상이었다.

     

    다만 탄탄한 몸 곳곳에서 보이는 건강함은 그 시골의 풍취로도 숨길 수 없었다.

     

    “여기가 왕궁이구나! 이렇게 커다란 건물은 처음 봐요. 기사님 기사님, 저기에 왕님이 살아요?”

     

    용사의 높은 텐션에 당황한 기사는 마차의 계단을 내려주며 천천히 대답했다.

     

    “그… 저희 국가는 제국입니다. 왕이 아니라 황제 폐하가 계십니다.”

     

    “같은 거 아니에요?”

     

    “아뇨, 그리고 여기는 저희 궁으로 황녀님께서 운영하시는…”

     

    “황녀님! 아, 발판 감사해요!”

     

    용사가 마차에서 통통 뛰어 내려와서는 월광궁을 여기저기 둘러본다.

     

    사람이 걸으라고 난 길을 따르지 않고 바로 이리저리 정원을 뛰어다닌다.

     

    막스보다 활기차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아셀라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쟤구나.”

     

    “그렇군요.”

     

    기어이 정원 구석에서 낮잠을 즐기던 막스까지 찾아낸 용사는 녀석을 한참이나 긁어주고 나서야 기사들을 따라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그리운 모습이구만.’

     

    용사, 리셰를 보니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녀는 미래에서도 늘 저렇게 높은 텐션이었다. 용사 파티가 지쳤을 때도 기운을 불어 넣어주던 사람이었다.

     

     

    우리 앞에 선 리셰가 코를 훌쩍이고는 멍하니 아셀라와 눈을 마주쳤다.

     

    “황녀님이십니다.”

     

    “아, 황녀님!”

     

    리셰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성큼성큼 아셀라에게 다가갔다.

    호위기사들이 저지하려 했으나 아셀라가 괜찮다는 표시로 손을 내밀었다.

     

    “들어본 적 있어요. 나라에서 제일 고귀하고 아름다우신 분이라죠.”

     

    리셰가 칭찬으로 대화를 트니 아셀라도 조금은 경계심을 누그러뜨린 모습이었다.

     

    “어머, 제대로 알고 있구나.”

     

    “그럼요. 황녀님을 직접 보니 진짜였다고 알게 됐어요. 세상에, 황녀님처럼 예쁜 분은 태어나서 처음 봤어요.”

     

    한 치의 거짓도 다른 의도도 없는 순수한 칭찬처럼 들려서 그랬을까. 조금 전과 다르게 아셀라는 썩 기분이 좋아진 모습이었다.

     

    “손을 보여보렴.”

     

    “아, 손이요.”

     

    리셰는 여태 양팔에 두꺼운 장갑을 끼고 있었다. 혼자 벗기 힘들었는지 끙끙대서 결국 내가 도와줬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리셰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신기한 듯 몇 번 눈을 깜빡이는 리셰.

     

    “어디.”

     

    아셀라가 리셰의 손을 확인했다.

     

    왼쪽 손등에 성흔처럼 새겨진 자국.

     

    용사의 징표였다.

     

    “마나를 불어넣어 봐.”

     

    “마나요? 음…”

     

    “눈을 감고 힘을 줘.”

     

    “으흐읍…”

     

    얇게 베인 상처에서 핏방울이 스며 나오듯, 징표가 미세하게 붉게 빛났다.

     

    틀림없는 진짜였다.

     

    아셀라는 리셰의 손을 놓고 고개를 까닥였다.

     

    “당분간은 이 궁에서 지내도록 해. 필요한 게 있으면 시종에게 말하렴.”

     

    “여기에서요? 우와아, 그래도 될까요. 엄청 좋아 보이는데. 그그, 황제인가? 그 분께는 안 혼나요?”

     

    리셰의 질문에 아셀라가 피식 웃었다.

     

    “이 궁은 내 거야. 내가 주인이니까 나한테 혼날 걱정만 하렴.”

     

    “황녀님이 주인… 대단해요.”

     

    “우선 네 손에 새겨진 이게 뭘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지?”

     

    “아, 대충은 들었어요. 에헷, 그래도 잘 이해는 안 돼서…”

     

    아셀라가 고개를 저었다. 갈 길이 멀어서 골치가 아픈 모양이다.

     

    “그와 관련된 설명과 이곳의 상황은 내 시녀장에게 설명을 들어. 그리고 건강 상태는 이쪽의 의사에게 검사받아.”

     

    “의사요?”

     

    내가 리셰의 앞으로 나서서 악수를 청했다.

     

    “의사 라스 고트베르크입니다. 앞으로 용사님의 신체 건강을 관리하게 됩니다.”

     

    리셰가 내 인사를 듣고는 내민 손을 양손으로 덥썩 잡으며 고개를 홱 들이밀었다.

     

    “고트베르크 의사 선생님! 저 저, 선생님을 알아요!”

     

    “저를요?”

     

    “그, 그럼요!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시는 훌륭한 분이잖아요. 얼마나 만나 뵙고 싶었는데요.”

     

    꽤 의외였다. 업적을 꽤 쌓긴 했어도 그런 촌구석까지 내 이름이 퍼졌을 줄이야.

     

    리셰가 잡은 내 손을 놓을 줄 모르고 더욱 수줍게 고개를 숙여왔다.

     

    “정말… 정말 보고 싶었어요.”

     

    앞으로 용사님의 진찰은 순조롭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아셀라를 돌아보니 악귀 같은 얼굴로 나와 리셰를 쏘아보고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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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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