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방에서 살기가 휘몰아친다. 더운 숨과, 더운 피와, 더운 체온과 함께.
-카각!!
눈앞, 곧게 내려 꽂히는 도끼를 칼등으로 미끄러트린다. 그대로 팔을 들어 휘둘러 쳤다. 스가악,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앞선 놈의 목이 깊게 베였다.
아가미가 생긴 것 같은 꼴로 피를 쏟아내던 놈은,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도 팔을 휘둘러 이반의 경로를 막아냈다.
그 직후, 다시 두꺼운 팔뚝이 내려 꽂힌다. 어지간한 사람의 허벅다리보다 굵은, 근육으로 가득 찬 것이.
끊어질 듯 긴장된 신경이 곧장 반응했다. 바람이 갈라지며 흩어지는 그 작은 공기의 외류까지 하나하나 인지할 수 있었다.
-카각! 카앙!
이 시점에서의 전투는 매 순간이 곡예나 다름없다. 한 번이라도 정타를 허용하는 순간부턴 전투 수행 능력이 극단적일 정도로 줄어들 테니까.
사람은 칼을 맞으면 죽는다. 근육이 파열되면 움직일 수 없고, 인대가 찢어지면 팔 하나 들어올리는 것조차 어렵다.
그리고 날붙이는 언제나, 그 어떤 순간에도 인간의 피륙보다 강인하다.
그러나.
-크루흡!!
-스걱.
장검이 다시 춤을 추기 시작한다. 특정 감각을 차단해 다른 감각을 증폭시키는 방식은 지금 사용하기 어렵다. 말 그대로, 모든 감각을 온전히 활용해야 했던 탓이다.
후각은 짐승의 체취를, 청각은 다가오는 병장기의 소음을, 촉각은 미풍의 와류를 더듬이처럼 되짚으며, 시각은 매순간 격변하는 전장을 관조하고 있다.
정보의 해일이 그의 머리를 파고들었다. 다대일의 전투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피로하다. 육체의 피로보다 정신 쪽이 더 견디기 어렵다. 그러나, 아직은.
-카앙! 카각!
도끼를 흘리고 몸을 빼내고, 다가오는 녀석의 팔뚝을 썰고, 다시 몸을 빼내고, 휘둘러 오는 전투망치의 궤적을 빗겨서 밟고.
“크륵?!”
그 위로 뛰어 놈의 어깨를 짚고 숭모 안쪽, 근육의 결을 따라 단검으로 두 번 찌른다. 동맥을 정확히 절개하고 몸을 빼낸다. 마무리하지 않더라도 놈은 이미 죽은 목숨이다.
그러니 다음. 그 다음 놈을 향해 몸을 던진다.
-카앙—!!
단검이 부러졌다. 괜찮다. 아직 두 자루 더 남았으니까.
-카득! 캉!
이가 갈린 장검, 집어 던져 한 녀석의 오금을 맞추고 곧장 쏘아지듯 달렸다. 허우적 거리는 놈의 자세가 느릿하게 보였다.
떨어지는 도끼를 쥐고 잠시 무게를 가늠해본다. 11kg. 인간이 다루기엔 무게중심이 엉망인 녀석이다. 사실상 쇳덩이나 다름없다.
딱 적당하군.
소를 도축할 때는 소 잡는 칼을 써야 하는 법이니까.
이반은 도끼를 들어 휘두르기 시작했다. 도끼는 검술과는 다른 원리로 움직여야 하니까. 이번엔 빗겨치고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후려치고 으스러트리는 방식으로.
길을 걷는다.
“후우…. 후우….”
앞으로.
협곡을 중심으로 앞으로. 놈들의 정면으로. 다가오는 놈들을 천천히 무너트리며 더욱 앞으로.
길을 뚫는다. 죽은 녀석, 곧 죽을 녀석, 치명상을 입은 녀석은 돌아보지 않고. 다시 앞으로.
적진 한 가운데에서 길을 개척하는 것이 척후의 임무라 할 수 있을 테니. 앞으로.
격렬한 활동으로 고갈되는 열량, 뜨겁게 달아오른 체열, 어느새 머리 위에서 서서히 기울어가는 태양, 그런 불필요한 정보들은 무시하고, 다시 앞으로.
근육이 젖산을 내뿜으며 호소하는 피로, 호흡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산소를 포집하고자 헐떡이는 고통, 한계까지 이어진 긴장감이 뇌리를 짓누르는 두통까지.
이런 쓸모없는 정보들 따윈 무시하고, 다시 앞으로.
놈들을 죽이고, 길을 만든다.
그것이 그의 역할이었으니까. 발걸음은 언제나 정면을 향해서.
“후욱… 후….”
에이나르가 했던 전투를 모방하고, 막시밀리앙이 보였던 무위를 따라하고, 질 베르가 취했던 자세를 흉내내며.
모자이크처럼 흩어진 지난 나날의 전훈을 이어 붙여서, 퍼즐을 맞추듯이 상황에 끼워 박아 넣어서.
앞으로.
*
“바르가달의 워밴드가 사라졌다고.”
“예, 각하.”
“어디서? 마지막으로 놈들을 확인한 지역이 어디었나?”
“베르토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첫날부터 쭉 그랬다는 소리가 아닌가! 제정신이냐? 이토록 중대한 일을 이제서야?!”
기욤은 투구를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시종장이 깊게 고개를 숙이며 물러섰다.
제 아무리 대단한 급전이라 한들 모든 상황이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하루이틀 정도의 오차가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나흘이다. 나흘째 베르토망을 제외한 모든 영지가 아직 굳건하다. 심지어는 저들끼리 대응을 하겠답시고 병사를 모으기까지 하고 있었다.
“놈들이 기꺼이 손을 잡을 만한 구심점이랄 것이 있을 수가 없는데.”
한낱 남작들이 사병을 동원하고, 심지어 협력해 군세를 키운다? 사전에 인가 받지 않은 군사 행동은 모두 역모로 취급 받아도 이상할 것 없는 일이다.
그런 리스크를 안고서 군사를 기꺼이 모아 지역 방어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에, 기욤은 뒷목을 잡고 덜덜 떨었다.
그와 다른 두 백작들이야, 실패한다면 어차피 역모로 잡혀들어갈 것을 각오한 뒤 시작한 계획이다. 허점이 있을 순 있어도, 대계 자체가 어그러질 가능성 따윈 없었다.
그럴만한 자신도, 그럴만한 상황도 갖추어졌다. 지금이 아니라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을 터.
그러나 저 치들은 무어란 말인가. 고작해야 땅이다 빌어먹는 시골 귀족. 귀족이란 이름을 붙이기에도 어려운 지방 호족 따위들이 무슨 큰 명예를 바라겠다고 역모죄의 위험을 감수해가며 손을 잡는단 말인가.
기욤은 이를 부드득, 갈며 소리쳤다.
“베르토망으로 향해라!”
파괴된 근방 영지들을 순회한 후 시기적절하게 마족들을 토벌할 계획은 이미 틀어졌다. 마족들이 베르토망에 갑자기 터를 잡고 주둔하는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본지 작전이란 시행과 동시에 무너지는 것인 바.
훌륭한 작전 지휘관은 그 상황에서도 다음 계획을 추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된다면, 역모를 빌미로 구슬리는 수 밖에.’
병력을 모아 준동한 것은 사실이고, 이를 통해 귀족원을 움직인다면 시골의 남작 따위들은 얼마든지 갈아 엎을 수 있으니.
그것을 빌미로 구슬린다면 저들이 무얼 할 수 있겠는가.
“아, 참. 얼마나 모였다 하던가?”
“보병으로 이천은 족히 모였고, 기병이 삼백 남짓에 기사가 스물은 넘는다 합니다.”
“그게 끝인가?”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는 근방 영지들 전체에 집결하려는 움직임 자체는 보였습니다만, 지금까지 모여든 병력은 그 정도로 사료됩니다.”
“허, 참.”
농사철에 그 정도 병력이라면 사실상 영지의 전력을 박박 긁어모은 수준인데, 그런 짓을 한두 개의 영지도 아니고, 직접적으로 전선에 닿아 있지도 않은 영지들에서까지 동원했다고?
이건 왕명이 있지 않고서야 어려운 일일텐데.
기욤은 의구심 속에 이를 갈며 말머리를 돌렸다. 그의 명령이 군영에 전달되고, 곧 군사들이 그의 뒤를 따라 행군을 시작했다.
*
“너, 이름.”
무쇠가 갈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명백히 사람의 말이었다.
놈들의 넓고 두꺼운 혓바닥과 구강 구조로 표현하기엔, 인간의 언어는 너무 섬세하고 복잡한 형태를 띄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타우르스는 언어를 사용할 줄 몰랐다. 적어도 그가 만난 녀석들은 저들만의 토착 언어로 대화를 나누곤 했으니까.
따라서 이반은 처음 들은 말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대신 도끼를 휘둘렀다.
-콰직!
살아서 헐떡이던 타우르스 하나가 다시 머리를 잃고 바닥을 굴렀다. 꿈틀거리던 녀석들을 기계적으로 도살하던 이반은, 다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너, 이름.”
사선 감지를 지니고 있던 녀석이다. 가장 강했고, 가장 까다로웠다. 그의 몸에 직접 날붙이를 박아 넣는 데에 성공하기까지 했던 녀석이었다.
정확히 파악하긴 어렵지만, 그 시절 기준으로도 그리 흔하게 보일 법한 녀석은 아니었다. 백부장의 수준은 넘어선, 어쩌면 ‘부관’급이었을지도 모를.
이반은 가슴에서부터 팔뚝까지 길게 그어진 상처에 힐링 포션을 쏟아내며 놈을 바라보았다.
“이름.”
사지가 조각난 채로 피를 쏟아내면서도, 놈은 웃으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붉게 물든 눈이 이글거리며 이반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놈의 입이 뻐끔거리며 다시 말을 뱉어낼 때, 이반은 도끼를 들고 그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이반 페트로비치 예레모프.”
“이반. 기억했다.”
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뒤집었다. 핏물이 엉겨붙은 누런 이빨이 보였다. 저 나름대로 웃고 있는 모습이다.
도끼날이 하늘 위로 치솟았다. 어느덧 떠오른 아침해를 가리우며 곧게.
그 그림자를 얼굴로 받아내며, 놈은 우물거리듯 말했다.
“내, 이름.”
“관심 없다.”
-콰직.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이 툭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후….”
이반은 바닥에 대충 주저 앉은 채 품을 뒤적였다. 마지막 남은 영양바가 핏물에 젖어 있었다. 썩 위생적인 상태는 아니었다만, 마족 살을 뜯어먹을 것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다.
타우르스의 고기는 더럽게 맛이 없으니까. 이반은 영양바를 대충 닦아내고 씹어 삼켰다.
지쳤다.
그래도.
“내가 열 배는 더 뛰어났다. 질 베르.”
협곡에서 여기 이 자리까지, 지금 이 숲은 나무보다 죽은 타우르스의 시체가 더 많을 테니까.
*
“늦진 않았겠지?”
“이보다 더 빠르게 준비할 수는 없었네.”
세르테는 이 며칠째 계속 초조하게 구는 노아르에게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지난 사흘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잠도 거의 잘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하게 끌어 모은 병력, 에타크리히 대공의 이름 아래에 협박하듯 모아온 영주들이다.
보급선은 고려할 수조차 없으니 전투 수행은 고작 며칠 가량이 전부. 그 이후엔 자연스럽게 해산하든, 탈영을 하든 사라질 군대다.
그러나 오히려 그 편이 다행이라 하겠다. 이 정도 규모의 군대가 오랜 시간 유지된다면 그건 정말 변명할 여지가 없는 모란 획책으로 보일 테니까.
“불! 불이 보입니다!!”
“이쪽 방향은… 관도랑 아예 상관 없는 길인데.”
“일단 가보세. 전투를 어디에서 했는지 알게 뭔가.”
“전군, 전투 준비!!”
저 숲 너머로 새까만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베르토망은 마족들에게 온전히 집어 삼켜졌으니, 한가한 화전민들이 밭을 일구고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닐 것이다.
따라서 저 불이라 하면 높은 확률로 마족의 것이다. 야영지 같은 것일 터였다.
그 사내가 정말로 이 숲에서 닷새를 묶어두었구나. 정말 그 홀로.
노아르 남작은 작게 감탄하며 군사를 이끌었다. 소작농들로 이루어진 병사들은 낡은 창을 쥐고 힘겹게 그들을 쫓아 따랐다.
“전투 흔적!”
“대단한 격전이었겠군…!”
한 시간쯤 걸었을 때 첫번째 시체가 보였다. 이미 부패가 시작된 타우르스의 시체였다. 심각할 정도로 훼손된 상태와, 사방에 물감처럼 흩어져 있는 핏자국. 그리고 터져나간 주변 나무들을 볼 때 전투의 엄중함을 예상할 수 있었다.
다섯 정도인가. 한 자리에서 잡았군.
타우르스를 상대로 말에 타지 않고서 다섯을 정면에서 상대했단 이야기다.
“길이 이어집니다!”
선봉에 앞선 기사가 소리쳤다. 이천여 명의 보병들이 힘겹게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무너진 숲 사이로 저벅저벅, 병사들은 겁에 질린 얼굴로 창을 꽉 부여잡았다.
죽은 마족의 시체와, 마족이 만들었음이 분명한 이 길을 보고 있노라면 공포를 느낄 수 밖에 없었다. 타우르스란 농민들에겐 악몽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으니.
깊은 숲이 오후의 태양 아래에서 어둑하게 빛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넓게 트인 길에도 불구하고 숲의 가로는 어둠에 휩싸여 있어서, 그 사이로 언제든 마족들이 뛰쳐나올 것만 같았다.
겁에 질린 농민들을 다독이며 한참을 더 간 끝에, 선봉은 시체를 발견했다고 소리쳤다.
“전투가 여기에서도….”
“흔적을 보자면 이건 추적하는 형태에 가까운데.”
“숲의 지형을 이용해서 조금씩 상대하며 시간을 벌어둔 것인가? 닷새 동안이나? 소름이 끼치는군.”
세르테는 침을 꿀꺽 삼키며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산산조각이 난 타우르스의 시신들이 널려 있었다.
선봉은 다시 시체를 발견했다며 목청을 높였다. 고작 10분가량 더 걸어온 끝이다.
다시 5분 후에도, 시체를 발견했다고 외쳤다. 그 전보다 더욱 거대한 전투흔적을 따라서.
다시, 다시, 다시.
이제 일행 중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선봉조차도 보고를 올리지 못했다.
“대체… 이게….”
그들은 숲에 있었다. 다만 나무가 아닌 것들로 이루어진 숲에.
어디에 눈을 돌리더라도 죽은 타우르스의 잔해물만 보이는 길에.
오후의 태양이 서쪽으로 기운다.
“한 사람이… 해낸 일이라…?”
길이 뚫려 있다. 좁고, 위태하고, 피비린내 나는 길이.
내장과 근육, 살점과 핏물, 무수히 많은 까마귀가 여기저기에 널려 쪼아 뜯어먹는 시체들의 길이.
타우르스의 시신으로 포장된 질척한 길의 끝에, 작은 모닥불 하나가 타들어가고 있었다.
“주여.”
세르테는 성호를 그으며 중얼거렸다. 저도 모르게 칼자루에 다가간 손에서 힘줄이 꿈틀거렸다.
“시산혈해….”
“그 정도를 자부할 수준은 되지 못하지.”
그건 에이나르의 별명이었으니까.
모닥불 앞에 앉아 있던 이반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