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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5

        

         “흐응…. 귀염둥이는 그럼 방에서 자고 있고, 너만 응대하러 나온 거라고?”

         

         – 그렇습니다. 하실 말씀이나 처리가 필요한 업무가 있다면 제가 대신 도와드리겠습니다. –

         

         “……참 친절하기도 하지.”

         

         위아래로 머리를 끄덕이는 제로를 일견한 마리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흥분한 꼬마 도련님을 제지해야 하나? 여기서 더 눈에 띄는 행동을 하면 당장 에나마 보안팀에서 들이닥치는 건 아닐까? 반쯤 일어난 상태로 어정쩡하게 굳어 있던 그녀의 몸이 다시 의자에 풀썩하고 착석했다.

         

         대화라는 해결책이 막히고, 몸싸움을 통한 제지만이 남은 시점에서 마리나의 마음에는 해 줄 만큼 해줬다는… 무심한 체념만이 남았다.

         

         저게 얼마나 위험한 줄타기인지도 자각시켰고, 망할 게 뻔하다는 사실도 꼬집어주었다.

         

         확실하게 그은 선을 지키던 자신치고는 이정도면 진짜 많이 도와주려고 노력한 거라는 걸 저 미숙한 친구가 알까 싶었다.

         차라리 지금 침대에 있을 소녀가 이런 면에서는 훨씬 냉정해 보인만큼, 그 쪽이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면 해결이 편했겠지만….

         

         ‘……왠지, 귀염둥이가 이랬으면. 오히려 한몫 끼워 달라고 했을 것 같은데.’

         

         결국 행동하는 주체에 따라 대응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건 그런 거다.

         여러 우연이 겹쳐서 무사히 안쪽까지 들어오긴 했어도. 에나마 코퍼레이션의 주머니를 털어먹기엔, 켄 타케쿠라라는 기술자의 실력이 한참 모자라다고 스스로의 직감이 경고한 것.

         

         뭐, 이번 한정으로 보면 느낌대로 행동하다가 의뢰를 그르칠 뻔한 전적도 있고.

         본인은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그가 이 의뢰를 수주하게 만든 데에는 자신의 책임이 커서 괜히 더 참견하려고 했지만… 그것도 여기까지.

         

         마찬가지로 밖에서 대기중인 이쪽의 ‘백업 팀원’이 현명하게 대처해준다면 또 무사할 수도 있겠으나, 진정 안전을 지향한다면 터질 생각이 만만한 폭탄과는 거리를 두는 게 상책이다.

         

         – 미스 마리나. 특별한 용건이 없다면 아나스타샤님이 기상하시기 전에 작업을 진행하는 행위는 멈춰 주시겠습니까?

         

         “므, 뭐? 아니, 누가 보더라도 내가 아니라 저기 부끄럼쟁이부터 의심해야 하는 거 아니야?? 대놓고 랙에다가 와이어를 붙여 놨는데!?”

         

         그제서야 로그인하려다 거부된 시스템 메시지가 둥둥 떠있는 화면, 고조된 감정으로 인해 붉어진 얼굴 등. 이상을 쭉 확인한 제로가 섣부르게 씌웠던 누명을 벗겨주었다.

         

         – …실례. 아무래도 제 내부 평가상으로는 미스터 켄보단 미스 마리나 쪽이 더 신용 등급이 낮아서. –

         

         “허어……?”

         

         이거, 이거… 꽤 신뢰받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데리고 다니는 드로이드에조차 이런 미묘한 응접 매뉴얼을 담아 놓다니. 살짝 충격이다.

         

         어떻게 한 팀에 맹랑한 꼬맹이가 둘이나…! 물론 이 호위 로봇을 팔씨름으로 이길 자신이 없으니 당사자 앞에서는 절대 말하지 않겠지만!

         

         우선은 아나스타샤가 따로 대비한 게 있어 보이는 만큼 그녀에게 기대를 걸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말을 걸었는데.

         

         “저기, 제로라고 했었나?”

         

         – ……. –

         

         “……어라.”

         

         외형보다는 분명 온화하다고 여겨지던 분위기가 인사만으로 단번에 나락까지 떨어졌다.

         마치 예전에 본, 쌀국수를 크게 한 입 먹은 누군가와 비교될 정도로 기분이 안 좋아진 게 눈치 빠른 마리나에게 감지되었다.

         

         설마 자기가 말만 걸어도 NG(No Good; 불합격)? 그렇게 가혹하게 프로그래밍 해 놨나? 아니면 이름을 일부러 안 부른다는 태도에 삐져서 이런 경우의 수도 예상했나?

         쩨쩨한 건 둘째치고, 기싸움을 하기엔 시기가 좀 안 좋은데….

         

         – 제로라는 호칭은 오직 아샤님께만 허용된 애칭이므로, 굳이 저를 부르시고 싶다면 정식 명칭 쪽을 사용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그게 뭔데?”

         

         하지만 걱정은 무용. 짐작보다도 훠어어얼씬 사소한 이유였으니.

         테이블에 널브러진 마리나의 전신을 한 번 쫙, 당황한 표정을 꼼꼼하게 스캐너로 살펴본 그는 악의는 없었다 판단하고 당당하게 선언했다.

         

         – ‘깡통’ 입니다. –

         

         “어… 음….”

         “…….”

         

         과연 이거에는 냉정을 잃었던 켄조차 일시적인 뇌정지 상태에 빠졌다.

         

         그야 한 달이 넘도록 같은 지붕 아래에서 지내면서 본 적은 있다. 가끔 혼자서 뭔가에 열중하던 아나스타샤가 답답한 고민거리가 있으면 심리 상담이라도 하듯 로봇에게 털어놓다가, 이내 가벼운 손찌검을 곁들여 나무라는 행위를.

         

         한데 그걸 자랑스럽게 말하다니, 이 녀석…… 진짜 깡통이다.

         

         어디에서 개발했는지는 몰라도 상당히 개성적인 인격 모델이거나, 꽤나 자유분방한 학습 과정을 거친 게 분명하다.

         주인인 소녀는 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걸 풀어놓은 걸까?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는 익살스러운 경고 같은 건가.

         

         마리나가 스스로 불을 지핀 의심에 고뇌하거나 말거나, 주인의 걱정을 현실화한 문제아를 특정한 로봇의 관심은 이미 켄에게로 옮겨갔다.

         

         – 그래서, 이런 야심한 시각에 따로 업무를 진행하신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미스터 켄. –

         

         “…로봇한테 설명해 봤자 뭐해. 그 누나는 왜 이런 추가 인증 로직을 설치해서….”

         

         투덜거리는 작은 한탄과 함께 손가락이 바쁘게 자판 위를 움직인다.

         실로 어린애 같은 투정이다. 팀원들에게 폐를 끼칠 걸 알면서도, 자신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사실에 눈이 멀어 뒷일은 생각치도 못하고 그저 무작정 명령에 따르는 모습은 흡사 노예.

         

         자조하는 심정이나 그 수동적인 삶의 자세를 얼핏 엿본 제로는… 사실 별생각이 없었다.

         

         그것도 그럴 게, 무려 그는 예전 하베스트 플래닛에서 ‘집 지키기’ 명령을 방폐했던 이후로 처음으로 주어진 단독 행동-…숙소에서 몇 십 걸음 안 떨어진 서버실을 다른 공간으로 본다면- 임무를 훌륭히 완수하겠다는 결심으로 가득했으니까.

         

         – ……. –

         

         협조할 생각이 그다지 없어 보이는, 평소보다 까칠한 켄의 태도를 기계적으로 확인한 제로.

         

         아나스타샤 발렌타인이라는 기적의 체현자가 자신을 한 명의 오롯한 인격체로 대접해주는 것에 불만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문맥 그대로 0에 가까웠지.

         

         하지만 전투 이외의 분야에서 본인의 효용성이 지극히 떨어지는 것에 대한 고민은 나날이 깊어졌으니.

         

         그야 연구소 때처럼 하나의 폐쇄 네트워크를 점거한 것도 아니고, 현재 몸이 다중 연산 처리나 여러 업무를 병행하는데 적합하지 않은 탓도 크지만… 원인이 명확하고 해결책이 없는 문제라고 불편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일단, 이들의 정확한 전후사정이나 다툼의 내막을 모르더라도 가장 손쉽게 이 상황을 제압하는 건 무력.

         

         그냥 소년의 목덜미를 잡고 들어올리거나 가볍게 머리를 가격(…)하는 것만으로도 의식을 빼앗을 수 있을 정도로 신체 조건은 압도적으로 차이 났다.

         

         ……그렇지만 그 행동에 대한 결과로 소란을 감지한 외부자들이 들이닥치면, 결국 수면을 방해하지 말아 달라는 간단한 부탁도 지키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닌지?

         

         주어진 조건과 달성 과제 내에서 고민해봤지만 별 수 없었다.

         이런 경우에 쓰라고 자칭 ‘비전문가이지만 준수한 해결 능력을 보유한’ 그의 법률적 책임자가 친히 내려준 도구들을 적극적으로 쓸 수밖에.

         

         찰칵…! 쿵!

         

         “……?”

         

         시원찮은 대답만 늘어놓는 상대방에게 시위를 하듯, 등으로부터 뽑아낸 연결용 단자를 똑같은 서버에 꽂은 제로가 켄의 반대편에 주저앉았다.

         

         옆에서 구경이라도 하겠다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역시 주인에게 보여줄 데이터를 수집하기 위해?

         

         어느 쪽이던 크게 상관없었다. 임무는 자료를 최대한 많이 외부로 빼내는 것이니, 미리 조심스럽게 에나마 전산망에 틈을 만드는 게 어려웠지 이까짓 급조된 방화벽은 전혀 큰 문제가 아니었….

         

         [ 부트 시스템 오버라이드 실패, 5초 후 디버깅 스텝으로 되돌아갑니다. ]

         [ ……소스 코드 오토-로드 실패, 매뉴얼 오퍼레이션을 통해 시스템 안정화 작업을 수행해주시기 바랍니다. 이후에도 기술적인 오류가 지속될 경우…. ]

         

         “어!?”

         

         …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언제나 상상을 뛰어넘었다.

         

         가볍게 시도한 우회 접속은 순식간에 차단당했고.

         어떤 구조로 작동하는지 살펴보기 위해 펼쳐 놓았던 개발자 도구 콘솔은 어느새 자가 복제하는 악성 코드들로 뒤덮이고 있었다.

         

         이건… 마리나가 예전에 보여줬던 매크로 연타?

         아니, 그것과는 궤가 다르다. 그건 하다못해 수를 두고, 변화하는 추이를 살피고, 조각난 코드들을 이어 붙일 주체라도 있었지 이건….

         

         켄이 시선을 올려, 건너편에서 짙은 그림자를 만들고 있는 드로이드를 바라보았다.

         

         구세대 놀이 중에는 맹기(盲棋)라는 기예에 가까운 겨루기 오락이 있었다고 한다.

         

         사장된 언어를 굳이 풀어 쓰면… 일명 암흑 바둑. 임플란트라고는 이빨에다 박는 인공 치아밖에 없던 시절, 사람이 가장 의존하는 시력을 포기한 채로 오직 뇌를 이용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전황을 파악하고 벌어지는 싸움을 제어하는 고상한 낙樂.

         

         허나 거기서 그친 게 아니라. 상대는 프로토콜에 따라 행동하는 게 전부인 인공지능을 그림자로 내세웠다.

         게다가 드로이드의 안내를 믿는다면, 한술 더 떠서 미리 둘 수와 위치를 전부 미리 정한 채 자신은 수면을 취하는 와중에 겨루게 한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건 자신을 너무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냐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실제로 방금 전에는 서버에 발을 디뎌보지도 못하고 튕겨져 나갔다.

         

         진심이 아니었다고 핑계를 댈 수는 있겠지만 그런다고 수 싸움에서 밀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으니. …그게 가장 소름 끼치고 등골이 오싹했다.

         

         – 제가 강제력을 발휘하기 애매한 상황이니…. 적어도 미스터 켄이 질리실 때까지 놀아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불만이 있으시다면 이따가 아나스타샤님께 전해드리겠으니, 언제든지 부담 없이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

         

         “……하.”

         

         아무래도… 죽으러 가는 길마저. 자포자기한 상태로 걸을 수 있을 만큼 만만하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이기다.
    ……아샤는 자면서도 티배깅을 박는다? 이런 못된 애가 다 있나!

    은방울꽃 님의 20 캬옹 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지금 연재분이 많이 밀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진짜 쓰는 대로 업로드하고 있습니다. 너무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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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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