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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6

        메리가 헤를라인은 레드카펫 위를 걸으며 주변을 살폈다. 금, 금, 금. 사방이 금덩어리였다.

       

        “황성에 입궁하는 건 오랜만인가요?”

        “네. 3월 중순 이후로는 처음이에요.”

       

        어딜 둘러보나 똑같다. 낯선 얼굴, 낯선 풍경. 익숙하지 않은 공기를 들이마신 탓인지 속이 메스껍다. 재채기를 간신히 참은 메리가는 로베스피에르 후작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이 사람과 같이 온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혼자 왔더라면 보나 마나 다른 사람과 말 한마디 못 섞었을 것이다. 아니, 안 섞었을 것이다.

       

        “앗….”

       

        실크 드레스 끝자락이 발에 걸렸다.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메리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되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평민 출신이면 어떱니까? 황제 폐하께서 공인하신 엄연한 백작인데.”

        “…….”

        “그러니 어깨 펴고 떳떳하게 다니시죠.”

       

        멋대로 착각하고 계시다. 메리가는 후작이 들리지 않을 정도의 크기로 한숨을 연거푸 내쉬었다. 조금 전과는 결이 다른 탄식이었다.

       

        메리가는 시궁창에서 나고 자란 몸. 이런 호화로운 드레스보다는 거적때기와 더 친숙하다. 심지어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나서는 교복 살 돈이 없어 옷 한 벌을 가지고 꿰매 입어야 했다. 졸업 후에도 전쟁터에서 구르느라 군복만 입고 지냈다.

       

        자신은 아름다운 의복과 거리가 먼 존재다… 적어도 메리가는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도착했군요.”

       

        황성 본관. 4년에 한 번뿐인 귀족 회의가 열리는 곳이자, 온갖 연회와 무도회의 무대가 되기도 하는 장소.

       

        본관에 다다른 메리가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혀를 찼다.

       

        “회의보다 파티가 먼저인 모양이네요.”

       

        감탄이 나올 정도로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샹들리에. 상다리 휘어지도록 차려진 최고급 뷔페. 분위기 있는 클래식을 연주하고 있는 황실 음악사들까지. 황성 본관은 황홀경 그 자체였다.

       

        “아무래도 귀족과 귀족은 전부 오니 말입니다.”

        “민중은 굶어 죽고 있는데 너무 호화스러워요.”

        “쉿, 목소리.”

       

        메리가는 입을 꾹 닫았다. 

       

        조금 전 대화를 정통파 귀족이나 마수가 들었더라면 온갖 해코지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두 사람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자리를 옮겼다.

       

        두 사람은 여러 사람과 인사를 나눴다. 귀족들이 흔히 하는 의례다. 회장을 한 바퀴 돌며 메리가는 씁쓸하게 웃었다.

       

        “저 말고 평민 출신은 없는 것 같네요.”

        “흐음.”

       

        로베스피에르는 침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평민이 귀족이 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거나, 틸레트 아카데미를 졸업하거나.

       

        싸움터에서 누구나가 인정할 법한 공적을 세웠더라면 엄청난 마도사일 것이다. 그런 마도사라면 진작 틸레트를 졸업하고도 남았다. 결국 틸레트가 유일한 등용문인 것이다.

       

        평민이 아카데미에 입학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서글픈 일이었다. 메리가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때 로베스피에르가 입을 열었다.

       

        “평민 출신 귀족이라면…. 헤를라인 백작 말고도 한 분 더 계시겠군요.”

        “…누구 말씀이세요?”

        “당신이 도와준 학생 말입니다.”

       

        메리가는 후작이 누굴 말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아직 학생이잖아요.”

        “세상이 두 쪽 나지 않은 이상 졸업은 기정사실이지요. 이사장인 제가 보장합니다. 그 아이는 틀림없이 작위를 받을 거요.”

        “…….”

        “백작,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에테르. 자신이 도와준 금안족 아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에테르를 노예에서 해방해 주던 날, 메리가는 친구에게 큰 죄를 지었다. 에테르는 클라이스의 전속 노예였다. 친구의 재산을 멋대로 빼앗은 것이다.

       

        ‘그땐 왜 그랬을까….’

       

        금안족 소녀가 클라이스의 연구를 스쿱한 이후로 마음이 더 싱숭생숭해졌다. 결국 클라이스는 북방으로 떠났다. 그리고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도, 지금쯤 이 세상에 없겠지.

       

        사람은 후회하는 동물이다. 일이 다 지나고 나니까 고통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그래도 노예처럼 굴려지던 아이를 보고 가만 있을 수는 없었다. 어릴 적 자신이 떠올랐다. 클라이스는 자신에겐 친절했지만, 노예에게는 박한 사람이었다. 그때 조금 실망했는지도 모른다.

       

        “이쪽 코스요리는 입맛에 맞으십니까?”

        “…네. 그럭저럭.”

        “민초를 생각하거든 회의에서 이야기를 나눕시다. 모처럼 좋은 음식을 눈앞에 두었는데 얼굴 찌푸리고 있으면 쓰겠나요.”

       

        그래. 당장은 술로 근심을 털어버리자.

       

        “어….”

       

        그런 생각은 곧바로 사라졌다.

       

        귀부인 사이에서 와인잔을 맞대고 있는 남자가 보인다. 어디선가 많이 본 금발과 적안. 이마가 훤히 드러나도록 다듬은 머리에선 단정함과 굳셈이 느껴진다. 외모에서부터 ‘나 높은 분이오’ 하고 소리치고 있다.

       

        남자를 알아본 로베스피에르가 먼저 다가갔다.

       

        “아니, 이거 하스펠트 공작님 아니십니까?”

       

        레너윌 하스펠트.

       

        클라이스 하스펠트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다.

       

        “이거 후작 아닌가? 오랜만일세.”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이며 공작의 손을 맞잡는 후작. 두 사람의 든든한 악수가 한동안 이어졌다. 그동안 메리가는 고개를 숙이며 재빠르게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그쪽은…. 헤를라인 백작 아닌가.”

        “안녕하세요, 공작님. 그간 강녕하셨나요?”

        “크음.”

       

        레너윌 공작은 영문 모를 비음을 흘렸다.

       

        “솔직히 말해서, 그렇다고 보긴 힘들지.”

       

        움찔.

       

        메리가는 척수반사로 어깨를 떨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혹 따님의 일 때문이십니까?”

        “그렇네. 가주 자리를 물려주고 쉬려 했는데. 뜻대로 안 되는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괜찮네, 괜찮아. 북방에선 흔한 일이지.”

       

        두 사람이 대화하는 동안 메리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꺼내기가 무서웠다. 그것은 분명, 죽은 친구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리라.

       

        “그래도 아드님과 따님을 여럿 잃으셨잖습니까. 공작님께서 힘들어하실까 봐 늘 걱정이었습니다.”

        “걱정할 필요 없대도. 후계 문제는 알아서 다시 정하겠네. 물론, 그동안은 내가 가주 자리를 맡고 있어야겠지만….”

       

        후계 문제라니.

       

        메리가는 공작의 말에서 석연찮음을 느꼈다. 로베스피에르는 후계를 걱정해서 위로의 말을 건넨 것이 아닐 터인데.

       

        “그나저나 백작은 요새 뭐 하고 지내나?”

       

        상념에 빠져있던 메리가를 현실로 꺼낸 건 레너윌 본인이었다. 악수를 마친 레너윌이 지긋한 눈동자로 메리가를 바라봤다.

       

        “학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전히 말인가?”

        “네.”

        “전선에 복귀할 생각은 없고?”

        “…보다시피 이런 몸이라서요. 기대에 부응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메리가는 잃어버린 한쪽 눈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후학을 양성하고 내실을 다지는 것이 제 재능을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니, 자네를 나무라는 건 아니야. 오히려 좋은 자세일세.”

        “네, 감사합니다.”

       

        대화는 일단락됐다. 메리가는 공작이 들고 있는 빈 와인잔으로 시선을 옮겼다.

       

        “제가 와인 한 잔 채워드려도 괜찮을까요?”

        “음? 아, 부탁하지.”

       

        메리가는 익숙한 솜씨로 코르크 마개를 따고 포도주를 잔 안에 흘렸다. 검붉은 와인이 향긋한 소리를 내며 잔에 절반가량 채워졌다.

       

        하스펠트 공작의 와인잔에 와인을 따른 뒤, 자신도 시녀에게서 운두 높은 와인잔을 두 개 받아 따랐다. 하나는 같이 온 로베스피에르 후작에게 주고, 나머지 하나는 자신의 입가에 가져갔다.

       

        냄새를 맡아보니 생각보다 도수가 높은 술이다. 한 모금 홀짝이자 알딸딸한 느낌이 위장까지 떨어졌다가 식도를 거쳐 코끝까지 올라왔다. 벌써 취기가 오른 것이다.

       

        세 사람은 와인을 음미했다. 정확히는, 메리가를 제외한 두 사람만이 고급진 술을 제대로 즐기는 중이었다.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아.’

       

        와인을 따르는 순간부터… 아니, 처음 인사를 나눴을 때부터 하스펠트 공작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귀족이 된 지도 벌써 몇 년이다. 귀족의 화법은 어느 정도 익혀서 알고 있다.

       

        메리가는 와인을 음미한 레너윌이 다음에 어떤 주제로 말을 꺼낼지를 예측했다. 불행하게도 그 예측은 성공하고 말았다.

       

        “클라이스도 참 좋은 친구를 두었군.”

       

        살짝 비꼬는 어조. 미묘한 변화였지만 그것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처박힌다. 메리가의 시선이 파리하게 떨렸다.

       

        “학생 아끼는 선생이라. 그래, 그것도 좋겠지.”

       

        입을 꾹 닫은 채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방금 넘긴 와인이 역류할 것 같았다.

       

        -학생 하나 때문에 네가 내 딸을 죽였어.

       

        마치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변명할 생각은 없었다. 여지도 없었다. 차라리 대놓고 화내주면 좋을 것을, 남들 보는 앞이라고 처참하게 배려받고 있다.

       

        메리가는 최대한 표정을 관리했다. 교단에 설 때처럼, 학생들 앞에서 지도할 때처럼 차분하게. 

       

        “학생, 학생 하니까 생각나는 게 있군. 헤를라인 백작?”

        “…….”

        “백작이 지금 맡은 학생 중에 금안족 소녀가 한 명 있지 않나?”

       

        숨이 턱 멎는다. 이것까진 예상하지 못했다.

       

        “…예, 그렇습니다.”

        “내가 그 학생에게 관심이 있는데,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이곳에 불러올 수 있을까?”

       

        와인잔을 비운 메리가의 눈이 황망으로 뒤덮였다.

       

       

        **

       

       

        “뭐야.”

       

        오늘 연구하기로 했는데 교수님이 연구실에 안 계신다.

       

        “교수님들 단체로 어디 가셨어?”

        “귀족 회의에 가신 거 아니야?”

        “그런가?”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침음을 삼켰다.

       

        이거 안 되는데. 카이뤼삭 교수님한테 부탁해서 오늘 AFM 실험을 끝내기로 했는데….

       

        장비 주인이 부재중인 탓에 안 그래도 미뤄졌던 일정이 뒤로 더 밀려나게 생겼다. 이렇게 되면 로테가 교환학생 가기 전에 소형화 작업을 못 끝낸다. 어찌어찌 해내더라도 시간이 매우 빠듯할 것이다.

       

        그렇다면.

       

        “허어.”

       

        로즈마리에게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동생…. 집 터져도 동생은 살려줄게.”

       

        늦은 오후. 나는 딜레마를 떠안은 채 황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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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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