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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6

     

    “이겼다! 오늘 싸움 끝!”

     

    리셰가 성검을 내려놓고는 팔을 쭉 뻗으며 스트레칭을 했다.

     

    그녀의 주변에선 쓰러진 와이번의 잔해가 수도 없이 뒹굴었다.

     

    “라르크, 수고했어! 오늘도 네 근육 든든하니 멋지더라. 네리아도 축복 고마워!”

     

    마계의 한복판에서 연이어 이어진 전투였다. 가장 고생한 건 용사인 그녀였지만 리셰는 지친 파티원들을 일일이 격려했다.

     

    “라스.”

     

    마지막에 나에게 찾아온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새하얀 이빨을 보이며 미소지었다.

     

    나는 대답할 힘도 없어 바닥에 주저앉은 채 허탈하게 숨만 내뱉었다.

     

    “자, 여기.”

     

    그녀가 허리 백에서 수통을 꺼내 내게 건넸다. 받아 마시니 상큼한 레몬 향이 났다.

     

    자기도 순식간에 들이키고는 눈을 찡그린다.

     

    “푸하, 기분 좋아. 열심히 일한 다음에 마시는 한 잔! 이때를 위해 산다니까.”

     

    “익숙한 향인데. 제국산 브랜디잖아.”

     

    만찬용 음료라 도수는 거의 없는 종류이긴 했다.

     

    “파티원들에게는 비밀이다?”

     

    “나 참, 대륙을 구할 용사님께서 그래도 돼?”

     

    “뭐 어때. 문제 생기면 네가 치유해주잖아.”

     

    “그건 그렇지. 더 있으면 줘 봐.”

     

    리셰와 한 모금씩 더 기분 좋게 들이켰다. 전투의 고됨을 잊는 데 조금 도움이 됐다.

     

    다들 지쳤기 때문에 더 이동하긴 힘들다고 판단하고 그 자리에서 야영했다.

     

    “여기 봐, 와이번의 둥지 생각보다 아늑해서 잘만 해.”

     

    길고양이처럼 나무 둥지에 몸을 구겨 넣는 리셰.

     

    다른 파티원은 지쳐서 금방 잠들었다. 나는 기습을 대비해 불침번을 섰다.

     

    “라스, 너는 마왕을 쓰러트리고 고향에 돌아가면 뭘 하고 싶어?”

     

    잠이 오지 않았는지 리셰가 내게 물었다.

     

    “글쎄다. 그런 생각은 해본 지도 오래되어서 모르겠네. 애초에 마왕을 쓰러트린다고 끝나지도 않고.”

     

    대륙이 어떻게 되어있을지는 그때그때 아셀라의 행동에 달렸으니까.

     

    “음… 기다리는 혼약자라든가 없어?”

     

    “하하, 혼약자라니. 지긋지긋한 단어야.”

     

    “그래?”

     

    “그럼 용사님은 세워둔 계획 있어?”

     

    “음… 생각해보니 나도 라스 너랑 비슷하네. 아무 계획 없었어.”

     

    잘못 물어봤다고 덧붙이고는 리셰가 혀를 빼물었다.

     

    “아, 그래도 고향으로는 안 돌아갈래. 우유 농장은 이제 싫어.”

     

    “아이러니하지. 농장에서 일하시던 용사님은 유당불내증이시라니.”

     

    “그래, 뭔지는 몰라도 그거! 우유만 먹으면 속이 으으… 아, 혹시 마족들도 우유를 못 먹지 않을까? 우유를 풀어서 공격하면 어때? 맛은 있으니까 분명 함정에 걸릴…”

     

    평소처럼 리셰와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며 밤을 보낸다.

     

    항상 마족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긴장 상황에서 일상을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시간이다.

     

    도중, 나는 야영지 한복판을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검을 발견했다.

     

    새하얗고 날렵한 도신.

     

    성검이다.

     

    “야야, 또 전투 끝나고 안 챙겼네. 그러다 진짜 잃어버린다.”

     

    “아, 깜빡했어. 내일 네가 챙겨줘.”

     

    “중요한 물건이잖아. 보면 종종 몸에서 떨어트리고 다니더라.”

     

    리셰는 눈을 일자로 감고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음… 뭐랄까, 별로 마음에 안 들어서.”

     

    “성검이?”

     

    “응. 기억은 잘 안 나는데 걔랑 싸우고 나면 기분이 되게 안 좋아.”

     

    그러고 보면 리셰는 성검과 공명해 싸울 때는 꼭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차분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으으. 생각했더니 또 구역질 나와… 라스, 나 배 쓰담쓰담 해줘.”

     

    “수건 덮어줄 테니 잠이나 자. 보온하고 수면을 취하는 게 소화에 더 좋아.”

     

    “그래? 알았어. 치유사님 말은 들어야지.”

     

    리셰는 싱글대며 손목을 고양이처럼 말았다.

     

    “라스는 오빠 같아. 다들 잘 모르지만, 파티원도 늘 챙겨주고. 마물이랑 싸울 때도 아는 것도 많고.”

     

    그거야 회귀하면서 지식이 쌓여서 그렇지.

     

    “어쩐지 친근한 기분도 들어.”

     

    “내가?”

     

    “응. 우리 파티원들 전부 그렇긴 한데… 음, 뭐라고 설명하지…”

     

    리셰는 조금씩 잠에 빠져들며 중얼거렸다.

     

    “…꿈에서도 자주 본 것 같이…”

     

     

     

    “선생님?”

     

    “어.”

     

    클로에의 얼굴이 보였다.

     

    “지금 조셨어요?”

     

    “명상하며 계획을 세웠어.”

     

    “오오… 역시 선생님이셔요.”

     

    “누가 봐도 졸았잖습니까.”

     

    타냐가 못 참고 한 마디 끼어들었다.

     

    확실히 잠깐 졸았다. 대기 시간이라 효율적으로 시간을 썼을 뿐이다.

     

    오랜만에 옛날, 용사파티에서 있었던 일이 보였던 것 같다.

     

     

    우리는 월광궁 1층의 집무실 하나를 쓰고 있었다.

     

    “체중, 신장, 마나 특성… 용사님의 기초적인 측정이 끝났어요. 수치는 더할 나위 없는 표준이네요.”

     

    클로에가 차트를 넘기며 내게 보고했다.

    오전부터 리셰의 건강검진이 이뤄지고 있었다. 우르르 몰려든 내 파벌의 의사진이 바쁘게 움직이던 참이었다.

     

    “치유력 감응도도 좋소. 용사님은 고위계 치유주문도 문제없이 받아들이실 게요.”

     

    팔켄하인의 보고였다. 이쪽 검사는 목휘궁의 알베리치 파벌 도움도 받았다.

     

    “저주에 노출된 흔적도 없이 깨끗합니다. 이렇게 건강한 분은 오랜만에 봅니다.”

     

    휴고도 의견을 냈다.

     

    “남은 건 선생님께서 진행하실 검사군요.”

     

    “엑스레이, MRI, 무엇보다 혈액검사 말이지. 종합검진이니 싹 해놓고 싶긴 해.”

     

    “문제는 용사님께서 의학을 받아들이실지 하는 점이겠군요.”

     

    “다른 건 몰라도 채혈은 거부감이 들 수 있으니 말이죠오.”

     

    휴고와 클로에의 우려는 일리가 있었다.

     

    최근 제도에서 내의원을 방문해본 사람이라면 채혈을 경험해볼 만도 하다.

     

    하지만 지방에서만 살아온 그녀는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상태다.

     

    “오히려 그래서 치유술도 잘 모를 수도 있지. 내가 먼저 얘기해 보겠어.”

     

    나는 리셰를 만나러 응접실로 향했다.

     

     

     

    ***

     

     

     

    “아, 의사 선생님!”

     

    엄숙한 분위기의 호위기사들 사이에서 혼자 신나 여기저기 구경하던 리셰가 나를 발견하고는 반가워하며 뛰어왔다.

     

    월광궁에서 제공한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아까보다는 행색이 나아 보였다.

     

    “검사 수고했어요. 지루했을 텐데 협조해준 덕에 금방 진행됐군요.”

     

    “선생님이 필요한 거라고 하셨으니까요. 그럼 전부 끝났나요?”

     

    “제게서 몇 가지만 더 받으면 됩니다. 뭐, 지금까지 결과는 아주 건강하다고 나와서 특별히 잡힐 건 없으리라고 생각하지만요.”

     

    “아, 정말요? 전부터 너는 바보같이 몸만 건강하다는 소리는 자주 들었는데… 헷.”

     

    리셰가 멋쩍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우선 진단부터.’

     

     

    ―――――――――――

    · 이름 : 리셰

    · 체력 : 42 / 42

    · 상태 : 매우 건강함

    · 부상 : 없음

    · 기분 : ■■■

    ―――――――――――

     

     

    ‘기분이 왜 표시 안 되지?’

     

    우선 넘기고 검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그럼 잠깐 이쪽에 와서 서 보죠. 촬영을 해서 병이 있나 살펴볼게요.”

     

    우선 거부감이 적은 CT와 MRI를 진행했다.

    리셰가 긴장한 채로 숨을 텁 멈췄기에 쉬어도 괜찮다고 해주었다.

     

    상태창에서 영상을 살펴본다.

     

    ‘특이사항은 전혀 없음.’

     

    용사로 선택받은 건 재능과는 다른 계열로 분류되는 모양이다.

     

    미래에서도 그녀가 대가를 지불한 기색은 없었다.

     

    뭐, 실제로 이렇게 건강하면 부상을 입었을 때 말고는 내가 딱히 나설 일은 없다.

     

    ‘혈액검사는 뭔가 잡을지도 몰라.’

     

    특정 콜레스테롤이나 비타민이 부족하다든지, 전염병에 대한 면역 상태라든지.

     

    진료를 맡은 이상 만전을 다하고 싶다.

     

    역시 채혈은 진행하고 싶다.

     

    나는 그녀와 테이블에 마주 앉으며 말했다.

     

    “건강 상태는 아주 좋습니다. 잠깐 몇 가지 질문해도 될까요, 용사님.”

     

    “리, 리셰라고 하거든요. 이름으로 부르세요! 제가 선생님보다 연하기도 하고요.”

     

    “아무리 그래도 대륙을 구하실 용사님인데 예의를 지켜야지요.”

     

    “아니에요. 저는 아직 무슨 얘기인지도 잘 모르겠고… 아, 반말도 쓰셔도 돼요!”

     

    묘하게 나에 대한 신뢰도가 높은 용사님이었다.

     

    “원래 저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하셨죠.”

     

    “아, 네네. 실은 몇 년 전부터 이야기를 들었어요. 도시에서 전염병을 고친 대단한 분이 계시다고요.”

     

    “시골치곤 정보가 빠르군요.”

     

    “그게… 그 전염병이 저희 동네에도 돌았거든요. 그래서 여기에도 그런 대단한 사람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생각하다가 이름을 기억했었어요.”

     

    “그랬군요. 유감입니다.”

     

    내 반응에 리셰가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 슬픈 이야기 아니에요! 그 다음에 병이 한 번 더 유행했는데, 세상에. 그때 의사회라는 곳에서 찾아왔지 뭐에요!”

     

    의사회의 활동이라면 작년의 이야기다.

     

    “그분이 고트베르크 선생님이 보내서 오셨다고 얘기하셨어요. 그때 성에 있던 사람들 다들 아파서 난리도 아니었는데 다들 열흘 만에 쌩쌩해졌거든요. 깜짝 놀랐어요!”

     

    자작령에 우리 파벌에서 인원이 나간 적이 있긴 했다.

     

    리셰의 고향이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엮이게 될 줄은 몰랐네.

     

    “에헷, 그때부터 엄청 궁금했었어요. 고트베르크 선생님은 어떤 분일까. 나도 선생님처럼 힘든 사람들을 도울 힘이 있으면 좋겠다, 상상했어요. 제 우상이랄까요.”

     

    리셰는 쑥스러워하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인지는 아무도 몰랐거든요. 엄청 나이 많은 괴팍한 노인이라고도 하고, 무시무시한 가면을 쓴다고도 하고.”

     

    “용사님께서 이름을 기억해주시다니,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인데요.”

     

    “아이참, 제가 뭐라고요. 음… 어째서인지 친숙한 이름처럼 들려서 꽂혔달까. 막 꿈에도 나오고 그랬어요. 얼굴은 몰라서 뿌옇게 보였지만.”

     

    “하하, 이제는 얼굴도 보이겠군요.”

     

    리셰가 혀를 빼물었다가 입술을 훑고는 배실배실 웃었다.

     

    “그러게요….”

     

    리셰는 순진한 구석이 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내게서 그렇게 큰 인상을 받을 구석은 그다지 없었던 듯한데, 우상화까지 하고 있었을 줄이야.

     

    워낙 가십거리도 없고 인구수도 적은 시골이라 특이한 소재로 느껴져서 내 이름에 꽂혔었나.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에 의하면 그녀의 고향엔 함께 놀 동년배도 없었다고 했다.

     

    ‘잘 됐어.’

     

    내 이름에 신뢰를 가지고 있다면 의학에 거부감도 덜할 테고, 채혈도 무리 없이 권할 수 있겠다 싶었다.

     

    “리셰, 하나 제안이 있는데요.”

     

    나는 조심스럽게 채혈 이야기를 꺼냈다.

     

    건강 상태를 세부적으로 파악할 수 있으니 큰 도움이 되리라는 점과, 흑마술에 사용될 일은 없으니 안심하라는 것.

     

    하지만 이야기를 들은 리셰는 겁에 질린 기색이었다.

     

    “피, 피를요….”

     

    “피에는 굉장히 많은 정보가 담겨있어요. 아주 사소한 것도 알 수 있죠. 이를테면.”

     

    나는 미리 알고 있던 정보를 하나 말했다.

     

    “특정 음식에 알러지가 있어 먹기 힘든 체질이라는 것도요. 땅콩이나 소고기, 복숭아, 우유 같은…”

     

    “아, 정말요? 제가 우유만 먹으면 막 속이 답답하거든요. 주변에 얘기해도 기분 탓이라고 막 그래서… 하필 저희 동네가 우유 농장이거든요.”

     

    “그런 체질일 수 있어요.”

     

    “알 수 있구나… 그, 그럼 해볼래요.”

     

    리셰가 관심을 보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 혹시 칼로 팔을 베거나 해야 하나요?”

     

    “그러진 않아요. 이 기구를 씁니다.”

     

    내가 주사기를 보여주니 리셰가 침을 꼴깍 삼켰다.

     

    음, 역시 칼보다 주사기가 무섭게 생겼나.

    친숙하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덜컥.

     

    그때 문이 열리고 또각또각 발소리가 들려왔다.

     

    품격 있게 흩날리는 황금빛 머리칼.

     

    아셀라였다.

     

    “어머, 내가 즐거울 때 방해했나 보구나.”

     

    아셀라는 내가 들고 있는 주사기를 보더니 악마 같은 웃음을 지었다.

     

    “그거 꽤 아프지.”

     

    “아, 아파요…?”

     

    리셰가 아셀라의 말에 더욱 겁을 먹고는 어깨를 움츠렸다.

     

    장난치기는.

     

    “어쩐 일이신지요, 황녀님.”

     

    아셀라가 왼손으로 서류를 하나 내려놓았다. 순간 그녀의 손이 내 왼손과 나란히 놓였다.

     

    ‘아셀라는 오른손잡이인데.’

     

    내 왼쪽에서 왼손을 사용한 모습은 누가 봐도 조금 부자연스러웠다.

     

    그러고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채 살짝 꼼지락댄다.

     

    한 가지 그림은 만들어졌다.

     

    나와 아셀라의 손에 나란히 꽂힌 약혼반지.

     

    리셰의 시선이 그곳에 향하는 걸 확인하고는 아셀라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이 서류는?”

     

    “밀정의 보고서야. 왕국군이 움직였어.”

     

    직접 찾아올 정도면 급한 내용이다. 나는 바로 내용을 확인했다.

     

    “성검을 발견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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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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