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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7

        아버지, 못난 아들을 용서하십시오.

       

       

        **

       

       

        “뭐? 황제 폐하가 드러누웠다고?”

        “공녀님, 드러누운 게 아니라 앓아누우신 거예요….”

       

        로즈마리는 쩝 입맛을 다셨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다가 준비했던 계획이 틀어지게 생겼다. 침음을 삼킨 로즈마리는 현 상황을 점검했다.

       

        귀족 회의는 사흘간 열린다. 황제의 명이 있다면 더 연장할 수도 있겠지만, 할 일 많은 지방 호족들이 이런저런 핑계로 도망칠 게 뻔하다. 그러니 가능하면 3일 내로 목표를 완수해야 한다.

       

        “알았어. 일단 나가 봐.”

       

        시녀를 물린 로즈마리는 곧장 생각에 잠겼다.

       

        ‘이사장 새끼는 어떻게든 담가야 하는데.’

       

        에테르 언니와는 예전 관계를 회복했고, 버멜인가 캐러멜인가 하는 엘프는 행방이 묘연하다. 그런 상황에서 두 사람에게 신경을 쏟는다는 건 시간 낭비였다.

       

        따라서 로즈마리는 다음 목표를 이사장으로 정했다. 옛날부터 로베스피에르 이사장은 자기 신경을 슬슬 긁어대는 재주가 있었다. 언제 한 번 손을 봐줘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아이 씨, 되는 일이 없네.”

       

        황제를 이용하여 압박하려고 했던 계획이 물거품이 되게 생겼다. 이러면 앞으로의 계획도 죄다 틀어지고 만다.

       

        빠드득. 로즈마리는 이를 갈았다.

       

        “하는 수 없지 뭐.”

       

        황제가 없더라도 상황에 맞게 잘 헤쳐 나가면 그만이다. 이렇게 된 이상 로베스피에르와 사이가 안 좋은 귀족을 이용해 보자고 생각했다. 빠른 판단을 내린 로즈마리는 거울 앞에 서서 드레스 코디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덜컥.

       

        블랜튼 공작이 문을 열고 들어온 건 그때였다.

       

        “저 왔습니다.”

        “어, 마침 잘 왔어. 이거 어때?”

       

        로즈마리는 루비 장식이 달린 목걸이를 보여주며 물었다. 블랜튼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알아. 농담한 거야.”

       

        금화 수십 장짜리 목걸이가 방구석에 내던져진다. 로즈마리는 빗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블랜튼의 브리핑을 들었다.

       

        “아무래도 음독을 한 것 같습니다.”

       

        황제에 관한 이야기였다.

       

        “음독이라니. 누가?”

        “그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클리온 그놈 아니야?”

       

        합리적인 의심.

       

        “아무리 생각해도 그놈밖에 없는데.”

       

        몇 달 전부터 클리온은 블랜튼의 명령을 거역하기 시작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세뇌에서 풀린 모양이다.

       

        “그래도 연기하던 꼬락서니가 퍽 웃겨서 놔뒀는데.”

        “뭘 어떻게 하시려고요?”

        “일단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지.”

       

        안 그래도 바쁜 몸이다. 급하지 않은 부분을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었다.

       

        황자를 써먹을 수 있다면 대신 써먹는다. 중요한 건 목표의 완수다. 황제가 아니더라도 쓸만한 장기말이 있으면 그걸 사용하면 그만이었으니.

       

        “물론 마음 같아서는 이사장이랑 같이 죽여버리고 싶은데.”

        “그러면 안 된다는 거 아시잖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답답해 죽어!”

       

        가슴을 팡팡 쳐대며 울분을 토하는 로즈마리. 그 모습이 마치 장난감을 사 달라고 땡깡을 부리는 어린애와도 같았다.

       

        그러나 로즈마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곧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아직 때가 아니겠지.”

       

        로즈마리의 목표는 ‘잠입’이지, ‘말살’이 아니다. 말살을 했더라면 수도에 있는 인간 전부를 벌써 수십 번 죽이고도 남았다.

       

        “로드스톤이 틸레트로 들어오기 전까지 참아야 합니다.”

        “그래, 알고 있어.”

       

        로드스톤. 철로 된 모든 것들의 근원. 마왕님을 부활하는 데 꼭 필요한 보석이다. 

       

        얼마 전, 로즈마리는 제국 서부에 붉은 로드스톤이 있다는 걸 알아냈다. 또한 그 로드스톤이 틸레트 아카데미로 들어온다는 소식도 접했다. 

       

        ‘얻기 전까지는 숨죽여 지내야지.’

       

        백년지대계. 큰일은 백 년을 보고 하는 법이다.

       

        제국에 잠입한 게 백 년 전쯤이고, 유력 집안의 공녀로 신분을 바꾼 것이 10년 전이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마왕님 부활 계획에 한 발자국 가까워질 것이니, 그것을 위해서라면 이런 사소한 귀찮음은 감내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아직 언니가 제국에 있어.’

       

        큰 언니. 에테르는 연구가 끝날 때까지 제국에서 머무를 생각이다.

       

        큰 언니는 기본적으로 온화하다. 마왕군 시절에도 그랬다. 포로를 상대할 때조차 인간적으로 대하는 거의 유일한 최고참 간부였으니.

       

        그런 언니가 이성을 잃을 정도로 크게 화내는 경우가 딱 한 가지 있다.

       

        ‘연구 중에 건드리면 안 돼.’

       

        어지간한 뒤통수도 하하호호 넘어가는 언니가 피아식별 못하고 다 때려 부수는 일이 있다면, 그건 자신의 학업을 방해받았을 때다.

       

        “흣차.”

        “다 갈아입으셨습니까?”

        “진작 입었지.”

       

        빗질을 끝마친 로즈마리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고급 원단으로 만든 검은색 드레스에, 색상 반전을 주는 하얀 스타킹이 오늘 그녀의 선택이다. 

       

        “일단 황자 상태부터 봐야겠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2황자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방에서 나온 로즈마리는 손이 한가한 시녀 한 명을 붙잡고 말을 걸었다.

       

        “거기 너.”

        “네, 네!”

        “클리온 황자님이 어디 계시는지 알아?”

        “태, 태자께선 상전의 옆방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그래? 알았어.”

       

        회의까지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한시라도 빨리 황자를 옹립하고 연회를 주관해야 한다. 여기서 주도권을 잃어버리면 기회를 날려먹는 거다.

       

        ‘이 새끼 뭐 하는지 보자.’

       

        황태자의 방 앞. 로즈마리는 들어가기 전에 문 너머로 귀를 가져갔다.

       

        문 너머로 찌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황태자 전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내가 시끄럽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지! 썩 물러나지 못해!”

        “어제부터 술만 드시더니 이러십니까? 연회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하라고 해라! 왜 나한테 그러느냐!”

       

        로즈마리는 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저게 연기인지 아닌지는 상관없다. 그냥 더럽게 웃기다.

       

        “상전께서 영문 모를 병으로 앓아누우셨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회의하셔야 합니다!”

        “형이 있잖느냐! 그 새끼한테 하라고 해! 나는 가서 여자나 안으련다!”

       

        로즈마리는 입매를 비틀어가면서까지 끅끅거렸다. 이거 볼 만하다. 그래도 아비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는 지킬 줄 알았는데, 원판조차 저리 쓰레기일 줄이야.

       

        ‘아니, 오를레이앙이 저렇게 만든 건가?’

       

        그야 세뇌를 10년이나 당했으니 말이다. 은연중에 사람이 안 바뀌리라고 장담 못 한다.

       

        “태자 전하!”

       

        다급한 신하의 목소리. 로즈마리는 곧바로 거리를 벌렸다. 콰앙!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클리온이 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코를 찌르는 듯한 술 냄새. 로즈마리는 찰나의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응?”

       

        멍청한 감탄사를 내뱉으며 로즈마리를 쳐다보는 황태자. 그 시선이 심상치 않다. 알코올에 절여져 흐리멍덩해진 눈동자가 로즈마리의 빈약한 가슴골을 훑었다.

       

        “쯧. 패스.”

       

        로즈마리는 죽일 기세로 2황자를 노려보았다. 자신이 마수라는 걸 아는데도 불구하고 이러는 거라면 간덩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은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공녀님! 전하께서 아직 술이 덜 깨신 모양입니다!”

        “뭐 어쩌겠어요.”

       

        어차피 몇 개월 뒤면 산송장인데.

       

        연회 시작 전부터 고주망태가 된 황자를 보아하니 이번 연회의 주도권은 자신에게 있다. 이대로 로베스피에르 후작을 담그면 끝이다. 

       

        이사장을 정치적으로 몰아붙여 사퇴하게 만든다. 그리고 블랜튼 공작을 차기 이사장으로 임명하게 한다. 이러면 틸레트로 들어오는 로드스톤을 확실하게 마왕군 수중에 들일 수 있다.

       

        완벽한 계획에 입꼬리가 올라간다. 로즈마리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황자보다 먼저 연회장에 도착했다.

       

        때마침 궁중 집사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공녀님, 공녀님을 만나뵈고 싶다는 자가 황성에 찾아왔습니다!”

        “누구죠?”

       “저로선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좋은 시기에 귀찮게시리.

       

       귀족도 아니고, 초대장도 안 받은 불청객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돌려보내는 게 상책이다. 괜히 귀족 회의에 들어왔다가 일이라도 망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냥 돌려보내세요. 지금 바쁘니까.”

        “그, 그게…….”

        “뭐가 문제인데요?”

        “본래 그러려고 했는데 도저히 말을 들어먹질 않아서 말입니다.”

       

        한숨이 나온다. 하다못해 이런 사소한 것까지 자신이 도맡아 처리해야 하는 건가? 이래서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다.

       

        “경비는 뒀다가 뭐 하러 쓰나요?”

       

        그냥 경비도 아니고 황궁을 수호하는 궁중 경비병이다. 흔히 ‘올드가드’라는 이명으로 불리는 친위대가 결코 호락호락할 리가 없다. 어지간한 불청객이라면 손가락 까딱하는 것만으로도 제압해서 돌려보낼 수 있을 터인데.

       

        “그게, 무력으로 제지하려고 했으나….”

        “했으나?”

        “역으로 제압당하고 말았습니다…!”

       

        로즈마리의 입이 함지만 하게 벌어졌다. 이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싶었다. 로즈마리는 고기를 담던 그릇도 치워버리고는 서둘러 정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

       

        짧은 탄식.

       

       정예라고 불리는 올드가드 십수 명이 정문 앞에 단체로 기절해 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외상이 없는 걸로 보아하니 상대방이 힘 조절을 한 것이리라.

       

        전투에선 사살보다 생포가 더 어렵다. 올드가드를 상흔 없이 제압할 실력이면 보통내기가 아니겠지.

       

        삼엄한 경비를 자랑하는 황성인데도 불구하고 경비병이 제압당했다는 사실이 이제야 알려졌다. 경비병 전원이 힘도 못 써보고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뜻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커헉!”

       

        어디선가 경비 한 명이 날아와 바닥에 처박혔다. 주방에 굴러다니는 물걸레처럼 데굴데굴 구르다가 철퍼덕 엎어진 올드가드. 로즈마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경비병이 내던져진 방향을 응시했다.

       

        아스라한 어둠 저편으로 스태프를 든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말로 하면 될 것을 꼭 매를 벌어요.”

        “끄흐흑….”

        “엄살 존나 심하네. 가로 방향으로 휘둘러서 상처도 안 남을 텐데.”

       

        로즈마리는 재빨리 소녀의 그림자를 훑었다. 주변에서 담배 냄새는 안 난다. 이것이 마력을 이용한 전투는 없었음을 방증한다.

       

        그랬기에 확신이 들었다.

       

        “어, 언니가 여긴 왜…?”

        “엉, 동생.”

       

        에테르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스태프를 아공간으로 되돌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나 연구해야 하는데, 도와주는 교수님이 여기 계신 것 같아.”

       

        로즈마리는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정신없이 머리를 굴렸으나, 언니가 성에 발을 들여놓는 게 먼저였다.

       

        어, 어, 하고 있던 사이에 에테르가 궁중으로 들어왔다. 로즈마리로서는 그것을 막을 겨를이 없었다. 

       

        에테르는 쩝 입맛을 다시며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헌신짝이 된 올드가드 열댓 명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그나저나 이거, 학적부에 빨간 줄 생기려나?”

       

       로즈마리는 눈을 비비며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탄식을 내질렀다.

       

        아.

       

        집 가고 싶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아.

    집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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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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