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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8

        로즈마리가 어어, 하며 할 말을 골라내지 못하고 있던 사이. 나는 정문을 지나쳐 황궁 복도로 진입했다.

       

        궁에 들어오는 건 처음이었다. 황궁을 처음 본 감상은…. 그, 뭐라고 해야 하나. 한 마디로 병신 같았다.

       

        사방이 금싸라기였다. 가구, 골동품, 장식품에 액자. 하물며 벽지까지. 전부 황금으로 덧칠해 놓은 탓에 번쩍이지 않는 것이 없었다. 플레어 산란 실험을 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장소였다.

       

        “허어.”

       

        애꿏은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런 때조차도 연구 관련된 생각을 하다니. 나도 참 어지간하다.

       

        상념을 떨쳐버릴 필요가 있었다. 나는 머리를 비우고 황궁 복도를 천천히 거닐었다.

       

        “언니! 언니이!”

       

        가벼운 구둣발 소리. 로즈마리가 경비병 뒤처리를 끝낸 모양이다.

       

        날렵한 발걸음으로 헐레벌떡 뛰어온 로즈마리는 내 옆에서 속도를 맞춰 걸었다. 뾰로통해진 얼굴이 보인다.

       

        “근위병은 대체 왜 때려눕힌 거예요?”

        “아까 얘기했잖아.”

        “이럴 거면 절 부르시지 그랬어요.”

        “말했는데 안 들어먹었다고.”

       

        어떻게 된 게 황실 근위병씩이나 되면서 소통할 줄을 모른다. 로즈마리 지인이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는데도 업무상 들어가면 안 된다는 소리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더라. 심지어 먼저 무기를 꺼낸 것도 경비병이었다.

       

        “그래서 조금 손을 봐줬지.”

        “언니….”

       

        로즈마리의 눈동자가 실처럼 얇아진다. 그녀는 나를 못마땅한 기색으로 쳐다보며 픽픽 한숨 쉬었다.

       

        “뭐, 왜. 정당방위였어.”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일단 이쪽으로 와 주세요.”

       

        로즈마리의 안내를 받아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여자애 느낌이 물씬 풍겨오는 커다란 개인 침실이었다.

       

        “언니, 옷 좀 벗어봐요.”

       

        방구석 옷장을 뒤적거리던 로즈마리는 대뜸 그런 요청을 해 왔다.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뭐?”

        “옷 좀 벗어달라구요.”

        “뭐, 왜?”

        “교수님 찾아야 한다면서요.”

        “그런데 옷은 왜 벗어?”

        “그 꼬락서니로 연회장을 돌아다니실 거예요?”

       

        동생의 타박을 들은 내 고개가 아래를 향했다. 기장이 넓은 바지에, 펑퍼짐한 와이셔츠. 그 위로 적당한 바람막이 로브 하나만 걸친 채였다. 캐주얼한 복장. 까놓고 말해서 공대 대학원생이나 하고 돌아다닐 법한 룩이다.

       

        “확실히 좀 그렇네.”

        “황성이니까 웬만하면 격식 있는 복장으로 차려입자구요. 자, 여기요.”

       

        그러면서 로즈마리는 단벌로 된 옷 하나를 던졌다. 빠른 반사신경으로 옷을 잡아챈 나는 곧 경악하고 말았다.

       

        검은색 베이스에 하얀 프릴 장식이 달린 의복이었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치마 위로는 짧은 앞치마가 하나 더 붙어 있었으며, 뒷단 허리춤에는 커다란 리본 레이스 장식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모양새였다.

       

        이런 시발.

       

        “이거 뭐야.”

        “언니도 알잖아요. 메이드복.”

        “이딴 걸 나보고 입으라고?”

        “이 나라에 금안족 출신 귀족은 없어요. 언니가 고급진 드레스를 입고 돌아다니면 다들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거라구요.”

       

        아니, 틀린 말은 아닌데.

       

        “조금 더 괜찮은 복장은 없는 거야? 맨투맨이라든지.”

        “바스트라인이 살아나는 여름용 셔츠라면 있어요.”

        “좆까. 안 입을 거야.”

       

        나는 마른 한숨을 내쉬면서 하녀복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하이고야. 이럴 줄 알았으면 교수 연구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걸.

       

        아니, 아니지. 카이뤼삭 교수가 언제 돌아올 줄 알고 언제까지 연구실에서 기다려? 절대로 못 기다린다.

       

        “아 참, 시녀 행세를 하려면 머리띠도 써야 하거든요. 이거요.”

       

       로즈마리는 히죽히죽대며 메이드가 착용하는 머리띠를 내밀었다. 프릴에 꽃장식까지 달린 머리띠. 

       

        “너 나한테 쌓인 거 푸는 거지?”

        “네?”

       

        내 추문에 로즈마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치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입에서 앓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제가 언니한테 쌓일 게 뭐가 있어요?”

        “아무것도 아냐.”

       

        하다하다 평생 안 해본 코스프레를 다 해보네. 그래도 그렇게까지 노골적인 복장은 아니니 다행이다.

       

        입고 있던 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던지고 시녀복으로 갈아입었다. 수치심이 밀물처럼 몰려온다. 거울 따위 보고 싶지 않았다. 혹여 그랬다간 인격이 거세당할지도 모른다. 차라리 진짜 에테르와 대화할 수 있는 ‘내면의 거울’을 한 번 더 보고 말지.

       

        “와, 잘 어울려요!”

       

        로즈마리는 물개박수를 치며 꺄르륵거렸다. 

       

        “아무튼. 시녀 행세를 하고 돌아다니면 그 교수와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래, 신경 써줘서 고맙다.”

       

        나는 영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근위병에게 억까당한 것도 모자라 이런 옷까지 입어버리고 말이야. 오늘 재수 옴 붙었다. 집 가는 길에 설렁탕이라도 사서 돌아가야 하나? 아, 여긴 설렁탕이 없었지!

       

        “그러면 저는 일 봐야 해서 먼저 나가볼게요~”

        “…그래.”

       

        끼익, 쾅. 문 닫히는 소리를 틈타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질렀다.

       

        “허이고.”

       

        그래…. 로즈마리 말대로 좋게 생각하자. 편하게 1시간짜리 아르바이트라 생각하고 돌아다니면 괜찮을 거다.

       

        이런 수치심은 일순간이지만, 학업은 영원하다. 목표를 잊지 말자. 집으로 돌아가는 것만 보고 앞으로 나아가는 거다.

       

        무엇보다, 세상은 생각보다 나에게 별 관심이 없다. 지하철에서 뭐 본다고 신경 쓰는 사람이 있던가? 그거랑 같은 맥락이다. 물의를 일으킬 만한 행동이 아니라면 그럭저럭 넘어간다는 얘기다.

       

        오늘 연회도 마찬가지일 터. 열심히 서빙 풀코스를 해 봤자 귀족들 눈에는 ‘그냥 그런 애 있었지’ 하고 넘어갈 일이 될 것이다. 그러니 과도하게 남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는 없다.

       

        [흠, 글쎄요.]

       

        에이, 설마. 뭐 별다른 일 있겠어?

       

       

        **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뭔가요, 이 아이는? 너무 귀여워요!”

        “눈이 노랗군. 본인은 처음 보는 인종일세.”

        “황실에서 금안족 시종을 들였나 봅니다. 종족 자체가 미형이라고 들었었는데, 이건 상상 이상이군요.”

       

        나는 지금 귀족들에게 둘러싸였다. 사실상 포위당한 것이다.

       

        이게 다 내가 금안족이기 때문이다. 하이엘프보다도 희귀한 금안족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온 귀족의 관심을 끌고 있다. 아저씨, 귀부인, 심지어 배냇물 안 마른 애새끼들까지. 너나 할 것 없이 내 겉모습을 흥미로운 눈으로 보고 있다.

       

        이야. 동물원 펭귄이 된 기분이군.

       

        “아가씨, 한 잔 따라주게.”

        “나도 잔이 비었는데….”

        “메이드 언니! 주스 주세요!”

       

        수많은 귀족의 악수 요청. 퇴근길 지하철보다도 많은 인구밀도에 둘러싸여 숨이 턱 막힌다. 나는 옷소매를 가린 채 연신 기침을 해댔다. 예전부터 사람 많은 곳은 질색이었다.

       

        그래도 싫은 내색은 안 한다. 그것이 처세술이다. 나는 서글서글한 인상을 지으며 와인 셔틀을 자처했다.

       

        “듣던 대로 순하네요.”

        “이것 참, 폐하께서 남부럽지 않은 시종을 들이셨습니다.”

        “이런 아이는 시세가 얼마나 되나?”

       

        악의 없는 말들이 가슴을 후벼판다. 어째 목덜미가 뻣뻣해지는 느낌이다.

       

        안 되겠다. 로즈마리. 너 나중에 두고 보자.

       

        귀족들은 내게 끊임없이 질문을 건넸다. 여긴 어떻게 왔냐. 금안족은 뭐 하는 종족이냐. 마법을 쓸 수 없다는데 사실이냐. 도저히 말을 자연스럽게 끊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여기 한 명쯤은 있을 테니까.

       

        카이뤼삭 교수 말고도 알고 지내는 귀족은 많다. 헤를라인 선생님에, 로베스피에르 이사장과 살리에르 백작. 넓게 잡으면 아르가나 공작에 엘리예프 자작까지.

       

        분명 그들 중 한 사람이 날 알아보고 말할 틈을 주겠지. 그동안 편히 술이나 따라드리기로 했다. 그래. 이참에 여기 있는 사람들과도 친분을 만들어두자.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때였다.

       

        “아니, 이게 누구인가?”

       

        초엄하고 품위 있는 목소리.

       

       그 목소리에, 뒤쪽에 있던 사람들부터 순차적으로 빠진다. 목소리의 주인에게 길을 터 주고 있는 것이다.

       

        모세의 기적처럼 사람의 파도를 가르고 한 사람이 나타난다. 금색 머리카락에 진홍빛 눈동자. 날카로운 리젠트 컷 때문에 후덕하다는 첫인상은 못 받았다.

       

        근데 누구세요?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군.”

        “예?”

        “음? 백작이 여기 오라고 얘기해 준 것 아니더냐?”

       

        이게 무슨 소리지.

       

        대화의 핀트가 안 맞는 느낌이다. 남자도, 나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이 남자를 모른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날 보자마자 곧바로 아는 척을 하며 다가왔다.

       

        “어떤 백작님 말씀이신가요?”

       

        살리에르? 헤를라인? 아니면 다른 백작이려나?

       

        “헤를라인 백작 말이다. 네 선생이라고 들었는데.”

        “아, 네.”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건 영 좋지 못한 수였다.

       

        “헤를라인의 제자라고?”

        “헤를라인 백작이라면 지금 아카데미 정교수 아닌가?”

       

        귀족들이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미묘한 변화였지만 나는 그 차이를 잡아냈다. 

       

        저 눈은 귀여운 여자애를 바라보는 눈이 아니다. 다분히 정치적인 목적이 섞인 눈빛들이다. 어떤 귀족은 나를 아니꼽다는 눈동자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또 어떤 귀족은 신기하다는 듯 눈망울을 반짝거렸다.

       

        “공작님, 정말이십니까? 이 시녀가 틸레트 재학생이라는 게…….”

        “음? 아, 그렇지. 백작과 얘기를 나누고는 확답을 받았네.”

        “그런데 왜 궁중에서 메이드 일을 하고 있답니까?”

        “그걸 내가 어찌 아나?”

       

        나도 그게 궁금하다. 내가 왜 귀족들 앞에서 마음에도 없는 아양이나 떨고 있는 걸까.

       

        그런데 잠깐만. 작위가 공작이라고?

       

        제국에는 공작이 네 명밖에 없다. 불의 하스펠트, 물의 블랜튼, 땅의 토츠펠과 공의 아르가나. 이들을 뭉뚱그려 4대 공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공작의 눈동자 색은 서로 겹치지 않는다. 눈앞에 선 남자의 눈동자는 붉은색이다. 

       

        그렇다면 틀림없다. 나는 통상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채로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에테르가 아닌, ‘나’를 발화자로 둘 준비를 끝마친다. 혼탁하게 섞였던 의식이 성능 좋은 현미경처럼 두 자아를 정확히 식별해낸다.

       

        내가 물었다.

       

        “혹시 하스펠트 공작님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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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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