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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8

     

    바위산을 넘어온 우리는 수해 지대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

     

    “해가 지는군요.”

     

    “밤에 정글에 들어가면 길을 잃기 십상이죠. 황녀님, 어떻게 하시겠어요?”

     

    아셀라는 즉시 판단하고 명령을 내렸다.

     

    “캠프를 설치해. 여기에서 야영하겠어.”

     

    명령에 따라 기사들이 천막을 설치했다.

     

    남쪽 지방이다 보니 밤에도 기온이 거의 떨어지지 않았다. 모닥불 몇 개로 충분했다.

     

    이런 외지에서도 적의 경계나 취식, 야영 준비 어느 하나 체계적으로 해내는 모습을 보면 월광궁 기사단은 참 훈련이 잘 되어있지 싶다.

     

    이런 환경이지만 아셀라는 동행한 시녀장이 목욕과 잠자리를 준비해주고 있었다. 황족에게는 당연한 대우다.

     

    “의사 선생님!”

     

    나도 밤을 준비하며 모닥불 앞에 앉아 있는데 별안간 리셰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선생님은 황녀님과 함께 안 가셔요?”

     

    리셰가 털썩 내 옆에 앉았다.

     

    “주무시기 전에 진료는 합니다. 외부 활동에 따른 매뉴얼이 있거든요.”

     

    “멋지다. 주치의라고 하셨죠. 황녀님만 담당하는?”

     

    “맞아요. 제가 전담해서 건강을 관리해드리고 있습니다.”

     

    리셰가 짝, 손뼉을 쳤다.

     

    “부럽다, 황녀님은 든든하시겠어요. 저기, 그러면 선생님은 누가 도와주시나요?”

     

    “제 몸이야 제가 챙겨야죠.”

     

    “그래요? 아, 그럼 밤에는 제가 푹 주무시게 도와드릴까요? 저, 소들은 잘 재워요.”

     

    “갑자기요?”

     

    “아, 그게… 선생님은 워낙 귀티 나는 분이시니까, 이런 잠자리가 익숙하지 않으실까 해서요.”

     

    “하하.”

     

    “아, 좀 실례였나… 요?”

     

    리셰는 발상이 자유롭다고 할까, 재미있다.

     

    미래에서는 나도 수렁을 한참 구르고 만나서 더 친근하게 대하는 느낌이었는데. 여기에서는 나도 일단 귀족처럼 보이는지 거리감을 느끼나 보다.

     

    “참고로 삼고 싶은데, 숙면을 돕는 건 어떻게 합니까?”

     

    “음… 이렇게요.”

     

    리셰가 예고도 없이 슥 몸을 붙이고는 팔로 내 몸을 감쌌다. 손바닥을 펼쳐 내 등을 톡톡 두드리는 리셰.

     

    “잘한다, 잘한다.”

     

    그녀의 따뜻한 온기가 등을 통해 퍼진다.

     

    확실히 체온을 올리면 숙면을 취하는 데 도움이 된다. 자기 전 따뜻한 차를 마시거나 샤워를 해 근육을 이완하기를 추천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어때요?”

     

    “드르렁.”

     

    “아이, 장난치지 말고요.”

     

    “소들은 이러면 잠들어요?”

     

    “완전 잘 자요.”

     

    순수하게 눈망울을 빛내는 리셰.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맨바닥에서도 잘 자는 편이라.”

     

    “그래요? 으음, 너무 도움받기만 해서 뭐라도 할 게 없을까 했는데….”

     

    “중요한 역할은 나중에 부탁드리죠. 성검은 용사님만 뽑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했었죠. 아직도 왜 제가 용사인진 모르겠지만, 맡겨주세요. 선생님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게 노력해 볼게요!”

     

    리셰에게선 충만한 의욕이 느껴졌다.

     

    “라스.”

     

    그때 나를 부르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아셀라가 팔짱을 끼고 나와 리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 황녀님.”

     

    아셀라는 슬그머니 뜬 눈으로 리셰를 곁눈질하듯 바라보고는 턱을 치켜들었다.

     

    “잠자리가 준비됐어.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이니.”

     

    “잠자리요. 동침하시려고요?”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니.”

     

    아셀라는 허리를 숙이며 내 턱을 손끝으로 살짝 어루만졌다.

     

    “혼약자잖아.”

     

    “그래도 동침은 당분간 안 하시겠다고…”

     

    “오라면 와.”

     

    아셀라는 깔끔하게 할 말만 던지고는 몸을 틀어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명령은 따라야지.

     

    나는 리셰를 향해 가볍게 인사한 후 아셀라의 뒤를 따랐다.

     

     

     

    ***

     

     

     

    “후우.”

     

    천막 안으로 들어선 아셀라는 초조함에 혀를 찼다.

     

    용사, 리셰가 오고 나서 계획이 뒤틀려서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다.

     

    물론 계획은 라스에 관한 것이었다.

     

    ‘오늘도 이럴 생각 없었는데.’

     

    그에게 고백한 후, 아셀라는 적극적으로 여성스러운 매력을 라스에게 어필해왔다.

     

    이미지로 비유하자면 도도한 암표범처럼.

     

    혼약자라는 관계에 있지만 쉽게는 손에 넣을 수 없으면서, 무엇보다 가지고 싶어지는 그런 존재로 라스에게 보이고 싶었다.

     

    그런 방향성도 스스로 떠올린 건 아니었고 타냐의 조언 덕에 갖게 되었지만.

     

    애초에 제국의 황녀인 자신이 천박하게 먼저 남자를 유혹하다니, 태어나서 상상조차 해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그만큼 그가 갖고 싶으니 한 수 접고 들어가기로 했다.

     

    작전은 어느 정도 먹히고 있었다. 라스의 반응도 전보다 다채롭게 변하고 있었고.

     

    저 얄미운 용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라스와 용사가 친해지는 건 순식간이야.’

     

    아셀라는 이미 그 가능성을 알고 있었다.

     

    천리안으로 볼 때마다, 용사 파티에서의 두 사람은 어느 파티원보다 신뢰하는 동료로 보였다.

     

    아니, 단순한 동료 이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셀라는 남녀 사이에 친구 관계는 없다고 믿는 편이었다.

     

    지금은 서로 데면데면하게 존댓말을 쓰고 있지만 방심할 순 없다.

     

    황제의 명만 아니었어도 라스를 용사의 곁에서 떨어트려 놓을 생각이었거늘.

     

    “후우.”

     

    두 사람이 어깨동무를 하고 서로를 부축하는 모습이 생각나서 자꾸만 한숨이 나왔다.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초조해져서 마음이 급해진다.

     

    라스에게 연출하려던 도도한 모습과 거리감은 잊어버리게 된다.

     

    ‘…이래서야.’

     

    내가 바보같이 매달리는 것 같잖아.

     

    사람은 자신의 손에 쉽게 들어오는 건 원하지 않는 법이다.

     

    들어올 듯 말 듯, 손끝에 간신히 걸쳐 있어야 간절해진다.

     

    아셀라는 귀족을 다루면서 그 심리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이미 고백한 시점에서 아셀라는 라스에게 한 번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셀라는 라스에게 답변을 듣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가 제대로 된 고백을 자신에게 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황녀님.”

     

    상념에 젖어있던 탓일까. 아셀라는 천막에 다가오는 발소리도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

     

    심호흡을 하고 대답한다.

     

    “…들어와.”

     

    천을 걷고 라스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얼굴에는 조금 염려가 서려 있었다.

     

    “대령했습니다. 안의 소리는 밖으로 안 나가지요?”

     

    “방음 마법은 걸려있어. 왜?”

     

    “예정에 없던 말씀을 하셨기에, 혹시나 밖에 비밀로 해야 할 이야기가 있으신가 했어요. 가령 몸이 안 좋으셨다던가.”

     

    자신을 걱정하는 그의 태도에 아셀라의 질투가 사르르 녹았다.

     

    항상 주치의로서 충실한 태도는 참 뭐라고 할까.

     

    한결같아서 코웃음이 나왔다.

     

    동시에 그에게 용사에게 어떤 이성으로서의 감정도 없다고 확인했다.

     

    자신이 용사를 질투하고 있다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고 있다.

     

    현명하게 대처해야겠지. 평소의 황녀인 내 모습대로. 그녀가 눈꼬리를 흘렸다.

     

    “네 생각대로야. 비밀까지는 아니지만 밖에 알려져서 좋을 것도 없어서 그랬어. 산행에 지쳤는지 팔다리가 아팠거든.”

     

    “미처 파악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주군의 약점은 부대의 사기를 떨어트릴 염려가 있지요. 올바른 판단이셨습니다. 앉아 계시면 제가 한 번 확인하죠.”

     

    아셀라가 간이 침대에 풀썩 앉아 얇은 팔을 들었다. 라스가 그녀의 옆에 자연스럽게 앉아 그녀의 팔을 스트레칭하듯 누르며 뻗게 해주었다.

     

    “이러면 아프신지요.”

     

    “조금.”

     

    “안 쓰던 근육이 놀란 모양이네요. 파스를 붙이고 치유술을 조금 써보죠.”

     

    “음… 마사지도 해줄래?”

     

    의외의 단어에 라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마사지라니, 어디서 들으셨어요?”

     

    “내 귀가 없는 곳이 어디 있겠니. 다이어트용 시술이라고 해서 라우가가 종종 받고 간다며.”

     

    아셀라도 소문은 들었다.

    라우가는 내의원 월광궁 파벌에서 미모에 좋다 하면 온갖 시술이니 보조제에 돈을 펑펑 써주는 VIP였다.

     

    “그렇습니다. 다만 마사지 시술은 간호사들이 주로 합니다만.”

     

    “너도 할 줄은 알잖아.”

     

    아셀라가 나이트가운의 윗단추를 두 개 풀었다. 어깨와 등을 슬쩍 드러내고는 잠들기 직전의 맹수처럼 침대에 요염하게 엎드렸다.

     

    “어서.”

     

    “물론 필요하시다면 해드려야죠.”

     

    라스가 금방 따뜻한 물수건을 준비했다.

     

    아셀라의 등과 어깨를 부드럽게 닦으며 밤중에도 반짝이는 금빛 머리칼을 둘러 옆으로 가지런히 놓았다.

     

    순간 아셀라는 머리카락에도 촉감이 생긴 듯한 착각을 받았다.

     

    라스의 손길을 피부의 세포 하나하나, 몸의 전부가 예민하게 느껴버린다.

     

    ‘…나 참.’

     

    제국을 통치해야 할 내가 어쩌다 이런 비효율적인 감정에 빠져버려서.

     

    지금 이 순간도.

     

    …그의 얼굴을 마주 보면 참을 수 없게 될 것만 같아서.

     

    등을 맡긴 게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아셀라는 안도했다.

     

    “아프시면 말씀하세요.”

     

    라스의 악력이 수건 너머로 전해져온다.

     

    평소 책을 읽느라 뭉쳐있던 어깨와 등을 지압하며 기분 좋게 근육을 이완해준다.

     

    아프다고 거짓말했던 팔도 정성스레 일일이 풀어준다.

     

    아셀라는 잠들며 침이 나올 뻔한 걸 겨우 참으며 눈을 번쩍 떴다.

     

    ‘…아.’

     

    그의 손이 뒷목에 닿았을 때.

     

    “힉.”

     

    아셀라는 기묘하게도 귓가에 찌르르 울리는 이상한 감각에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이런, 아프셨나요. 부상은 없는데… 평소 책을 많이 보시니 디스크 초기 증상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나중에 상세 검사도 한 번 해봐야겠어요.”

     

    “…슬슬 잠이나 자자.”

     

    “예. 내일도 해가 뜨면 바로 움직여야 하니 주무시는 게 좋겠군요.”

     

    아셀라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넌 거기서 자.”

     

    “그러죠 뭐.”

     

    라스가 수건과 옷가지를 정리하고 아셀라에게 이불을 덮어줬다.

     

    그가 바닥에 자신의 이불을 깔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황녀님, 전부터 얘기하고 싶었는데요.”

     

    “뭘.”

     

    “귀가 귀여우세요.”

     

    아셀라가 베개로 자기 머리를 묻어버렸다.

     

     

     

    ***

     

     

     

    다음 날, 일찍 일어난 아셀라는 텐트를 나가 캠프를 둘러보았다.

     

    평소 철저하게 훈련시킨 덕에 월광궁은 우수했다. 불침번을 포함해 경계에는 빈틈이 없었고 시종들은 이미 기사들을 위한 식사를 조리했다.

     

    “아, 황녀님! 좋은 아침이에요!”

     

    그런데, 용사 리셰도 시종들 사이에 섞여 요리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아셀라는 기묘한 그림에 갸웃하며 그녀를 구경하러 다가갔다.

     

    리셰가 끓이는 스튜 냄비에서 좋은 향기가 올라와 그녀의 코를 자극했다.

     

    “네가 했니?”

     

    “네! 한 입 드셔보세요.”

     

    리셰가 시식용 그릇에 스튜를 조금 떠서 아셀라에게 넘겨주었다.

     

    그 스스럼없는 천진난만한 모습에 아셀라는 기가 찼다. 아무리 용사라지만 일국의 황녀를 상대로 너무 예의가 없지 않나.

     

    “왜 요리를 했어?”

     

    “네? 아, 아침부터 다들 바쁘게 고생하셔서요. 뭔가 도와드릴 일이 없을까 했어요.”

     

    높은 위치에 있는 자는 아랫사람을 부려야 하는 법이다. 그들을 나서서 도울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아셀라의 상식으로 리셰의 행동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어딘가 밉진 않네.’

     

    어쩌면 이게 그녀가 용사로 선택된 힘이고 라스와 친해진 이유일지도 모르겠다고 아셀라는 생각했다.

     

    아셀라가 그릇을 받아 입 끝을 가볍게 적셨다. 시녀장이 그녀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가벼운 콧방귀와 함께 아셀라가 감상을 냈다.

     

    “따뜻하네.”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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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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