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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8

    제임스의 간단한 한마디가 떠올랐다.

    “손님의 안내를 부탁해.”

    그와 동시에 엄청난 격통과 함께 눈이 뜨이자, 짙은 크림 같은 연기로 가득한 하늘이 시야를 가득히 메우고 있었다.

    한때 잘 정돈돼 있었던 도시의 잿더미 속에 누워 있는 내 시선은 진홍색과 잿빛으로 칠해진 섬뜩한 하늘에 고정되어 있었다.

    하늘 위로는 연기가 뿜어져 나와 하늘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뱀처럼 하늘로 기어올랐고, 그 아래로는 세상을 파괴의 빛으로 붉게 물들이는 불길이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밤하늘보다 어둡게 물든 짙은 연기들은 지면을 태우는 불길의 빛을 받아, 불길한 붉은 색을 띠고 있었다.

    연기로 가득한 하늘에서는 가끔 위협적인 천둥소리가 마치 종말을 알리는 교향곡처럼 울려 퍼졌다.

    “하아. 하아.”

    점점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얕은 숨을 내쉴 때마다 내 폐를 가득 채운 핏물들이 그르륵거리며 끓는 것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쿨럭.

    내 입에서는 기침이 나올 때마다 폐를 가득 채운 핏물이 끊임없이 역류했다.

    그 흘러나온 핏물은 갈라지고 망가진 아스팔트 바닥에 흩뿌려져 내 마지막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죽음이 가까웠다.

    움직이지도 않아도 내 몸 구석구석이 고통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다친 곳보다 다치지 않은 곳을 찾는 게 빠를 정도였다.

    내가 망쳐버렸다.

    조금 더 주의를 기울였으면 탈출할 수 있었을 텐데….

    끝없는 자책을 하던 도중 갑자기 주변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힘겹게 소리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

    제임스의 손님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나 큰 충돌이었는데, 아직 움직일 수 있다니.

    불사조가 잿더미에서 부활하는 것처럼 제임스의 손님인 ‘예린’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다행이야.’

    안도의 물결이 마음속에 퍼져나갔다.

    약간의 부상은 있는 듯했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제임스가 맡긴 임무니까, 마지막까지 완수하고 싶었는데….

    안전한 곳까지 안내해야만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손끝부터 힘을 줘서 일어나고 싶었지만 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끝까지 안내하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할까요? 제임스.’

    입에서 나오지 않는 말로, 여기에 없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완수하지 못한 후회와 실패에 대한 사과가 핏물이 가득한 입 속에서 맴돌았다.

    눈은 이미 제대로 떠지지 않고 있었고, 입술은 그저 작게 달싹일 뿐인 상황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이형의 존재가 보였다.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일렁이는 회색과 노랗게 타는 듯한 불꽃을 보면서 정신을 잃었다.

    ***

    도시에 드리워진 어렴풋한 그림자, 거대한 돼지의 형상이 드리운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그 압도적인 크기에 깜짝 놀랐다.

    전에 봤던 돼지임이 분명한데도, 그 존재감이 남달랐다.

    정체불명의 죽은 육체를 사용하고 있을 때는 애완용 미니 돼지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강력한 존재감을 가진 오브젝트로 보였다.

    벌어진 입에서는 썩은 것 같은 악취를 풍기는 검붉은 용암이 질질 흐르고 있었고, 피부를 덮은 가죽에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거대한 돼지는 고개를 천천히 내려서, 내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지성이 느껴지지 않는 돼지의 난폭한 눈동자가 못 박힌 것처럼 강렬하게 나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 흐릿해지더니, 돼지의 형상이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실체와 비실체의 중간처럼 존재감이 흐릿한 것을 볼 때, 아직 제대로 자신을 현현시킬 수 없는 상태인 건가?

    저 돼지를 처리하려면, 예린이랑 같이 보러 갔던 그 소용돌이 쪽으로 걸음을 옮겨야겠지.

    뒤를 돌아보자, 예린이는 아픈 것도 잊고 내 더듬이를 우물우물하고 있다가 뭔가가 떠오른 것처럼 깜짝 놀라서 어딘가로 절뚝거리면서 다가갔다.

    예린이가 도착한 곳은 비서가 피를 잔뜩 흘리고 쓰러진 곳이었다.

    “사신아. 어떡하지?”

    예린이는 피투성이로 쓰러진 비서를 바라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비서는 지금 이곳이 병원이라도 살리기 힘들어 보이는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푸른 사신을 불러냈다.

    손바닥 위에 나타난 푸른 사신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다가, 비서가 있는 쪽으로 빗자루를 타고 날아갔다.

    예린이도 그렇고 푸른 사신도 그렇고, 지금 내 머리카락에 잔뜩 붙어있는 황금 사신들도 그렇고, 나만 보면 다들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였다.

    그렇게 아파 보이나?

    그냥 조금 건조한 진흙 인형처럼 변했을 뿐인데….

    <아프지 말아 주세요.>

    <아픈 곳, 모두 나아주세요.>

    <상처에 지지 말아 주세요.>

    푸른 사신은 심각한 상태의 비서를 보고는 눈을 꼭 감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문자열을 써 내려갔다.

    그 덕분인지 당장 죽을 것처럼 보였던 비서는 꽤 안정적인 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야겠지, 푸른 사신의 치료는 중상을 완치할 정도는 아니니까.

    나는 상태가 괜찮아진 비서를 황금 사신 몇 마리를 붙여서 세희 연구소 쪽으로 보냈다.

    이렇게 해두면 세희 연구소 쪽에서 병원으로 보내주겠지?

    예린이도 돌려보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돼지를 처리하려면 예린이가 필요해.

    지금도 장작이 너무 없어서 배고프고 어지러웠다.

    비서를 장거리 이동시켰더니 다시 현기증이 스멀스멀 찾아오고 있었다.

    장작이 더 필요해.

    힘들어서 그런지, 바닥에 주저앉은 예린이에게 다가가서 뺨에 묻은 핏자국을 혀로 할짝.

    “!”

    깜짝 놀란 예린이는 나를 돌아봤지만, 나는 모른 척 고개를 돌린 채 딴청을 피웠다.

    내 장난 덕분인지, 나를 뒤에서 껴안은 예린이에게서 더욱더 많은 장작이 몰려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미니 사신들에게 명령했다. 

    ‘자, 이제 흩어져서 사람들을 도와줘.’

    하지만 황금 사신들과 푸른 사신들은 고개를 격렬하게 도리도리하며 반대했다.

    ‘나는 이제 괜찮아.’

    이제 꽤 윤기를 되찾은 피부를 보여주며 거듭 괜찮다고 의지를 전하자, 미니 사신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절망의 감정으로 가득 찼던 도시는 점점 그 절망의 농도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미니 사신들이 물어다 주는 소량의 장작들과 예린이가 주는 대량의 장작.

    이 정도라면 돼지가 완전히 현현하기 전에 싸울 만큼의 장작은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뚜방뚜방.

    사신이의 손을 잡고 불의 커튼을 넘어서 계속 걸어 나갔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인지, 황금 사신 하나와 푸른 사신 하나도 내 양어깨에 하나씩 올라가 있었다.

    다행히 푸른 사신이의 치료로 통증이 사라져서, 사신이의 여정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아직도 옆구리에 이물감이 있긴 하지만, 아프지만 않으면 됐지, 뭐!

    타오르는 영체 방벽을 넘어가자, 오랫동안 방치된 도시의 폐허들이 우리들을 반겨주었다.

    끊임없이 나타나는 영체 오브젝트에게 빼앗긴 도시였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도시였지만, 아직도 타고 있는 불의 장벽과 붉게 물든 하늘이 충분히 폐허를 비춰주고 있었다.

    갈라진 도로에는 잡초들이 무성하게 돋아나 있었고, 문명의 흔적은 부스러져 있었다.

    특히 새롭게 생겨난 돼지들의 발자국이 가득했다.

    우리는 그 돼지의 흐름을 거슬러서 계속 올라갔다.

    나는 불길한 하늘의 흐름을 보고, 괜히 무서워져서 사신이의 손을 꼭 쥐면서 말했다.

    “사신아, 저기 하늘 좀 봐봐.”

    하늘 위에는 검게 흐르는 연기들이 어느 한 곳으로 모여들면서 똬리를 트는 뱀처럼 뭉치고 있었다.

    마치 하늘 위에 소용돌이가 생긴 것 같은 불길한 모양새였다.

    사신이는 무적이니까, 괜찮겠지?

    ***

    구덩이로 다가갈수록 억지로 늘어난 공간 때문에 어안 렌즈 속 같은 폐허를 계속 걸어 나갔다.

    공간 왜곡의 영향을 막기 위해서 미니 사신 정원을 주변에 계속 펼쳐두고 계속 걸어 나가자, 생각보다 금방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두운 숲속을 지나, 탁 트인 절벽 밑으로 거대한 구덩이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생각보다 구덩이는 장벽과 가까웠는데, 거리가 문제가 아니라 공간 왜곡이 문제였던 거겠지.

    헬리콥터 위에서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풍기는 거대한 대지의 소용돌이가 보였다.

    검게 뒤틀린 땅은 마치 어두운 생명체처럼 소용돌이치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심연의 구멍이 뚫려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자 속에서 거대한 돼지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연기 너머로 봤을 때보다 훨씬 압도적인 존재감을 흘리며, 지진을 일으키는 걸음을 천천히 내디뎠다.

    그 발걸음은 공간을 일그러트리는 발걸음이었다.

    그 걸음이 지면에 맞닿을 때마다, 대지는 소용돌이처럼 뒤틀려 버렸다.

    아귀를 뛰어넘는 존재감에 나는 긴장을 하며 파괴 조건을 확인했다.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파괴.>

    그리고 그 파괴 조건은 전혀 예상외였다.

    그 막대한 존재감으로 겨우 이 정도의 파괴 조건이라고?

    주변 공간을 뒤트는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검은 점액을 불사르는 불길을 뿜는 돼지의 파괴 조건이라기엔 너무 간단했다.

    갑자기 생긴 의문에 자세히 돼지를 살펴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희미하게 풍기는 악취.

    입에서 질질 흘리는 검은 용암.

    검은 액체를 불사르는 불꽃을 가지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던 걸까?

    이 돼지는 이미 검은 액체에 물들어 있는 상태로 보였다.

    그저 기분 나쁜 악취가 나는 액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대단한 액체였던 걸까?

    그러면 생각보다 간단하겠어.

    나는 죽어버린 육체를 다루면서 얻어낸 신기술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른손을 앞으로 뻗자, 오른손의 피부가 검게 물들었다.

    뀩.

    그리고 오른손의 주먹을 꾹 쥐자, 공간이 우그러들며 검은 구체를 만들어 냈다.

    죽어버린 육체가 사용했던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구체가 내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예린이가 나에게 보내주는 호의와 애호를 엮어서 만든 구체는 돼지의 전신을 짓이기는 데 성공할 것만 같아 보였다.

    ***

    사신이의 오른손이 검게 물들자, 허공이 우그러들면서 검은 구체를 만들어 냈다. 

    빛을 포함한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구체로 보였으니까, 블랙홀이라고 부르면 될까?

    ‘와, 사신이 역시 대단해.’

    사신이의 새로운 능력에 마음속으로 박수를 쳤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거대한 돼지는 검은 구체를 포함한 공간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것은 돼지에게도 힘든 일인지 신체의 반 이상이 갈려서 사라져 버렸지만, 공간을 물어서 격리하는 데 성공했다.

    거대한 돼지의 이빨 사이에 짓이겨진 공간은 소용돌이 모양으로 뒤틀리더니, 우리 쪽으로 총알처럼 날아오기 시작했다.

    소용돌이 모양으로 뒤틀린 채, 공간을 잡아 뜯으며 날아오는 검은 구체.

    그것을 보고 사신이는 다급하게 내 손을 놓고는 나를 양발로 차서 밀어내 버렸다.

    그리고 검은 구체가 땅 위로 길게 흔적을 남기며, 사신이가 있던 자리를 휩쓸며 지나갔다.

    “사신아!”

    설마 사신이가 죽어버린 걸까?

    사신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

    회색 사신이 사라져 버린 마시멜로 대지 위에 예린은 넋이 나간 것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그 육체를 대부분 잃어버렸던 돼지의 왕은 예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검게 물든 뼈부터 시작해서, 썩어버린 혈관이 천천히 엮이고, 그 위를 근육과 가죽이 덮어가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돼지에 맞서서, 황금 사신과 푸른 사신은 긴장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섰다.

    금방이라도 돼지가 달려들어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릴 것 같은 순간.

    돼지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지금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뚜방뚜방.

    자그마한 발걸음 소리.

    그 소리와 함께 마시멜로의 대지가 돼지를 향해 쭈욱 뻗어나갔다.

    자그마한 회색 사신의 발이 마시멜로 위를 혼자서 걷고 있었다.

    그 작은 발목부터 천천히, 천천히 말랑한 회색 사신이 다시 만들어지고 있었다.

    더듬이까지 모두 재생한 사신이는 사나운 표정으로 돼지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2024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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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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